제 125 화
‘바보처럼 꿈이라고 생각하다니. 세이란에게 처음 안겼던 기억을 잊고 있었다니. 그가 나를 안고 속삭였던 말이 천 년 전 그가 했던 약속이었다는 사실을 이제야 기억해 내다니.’
키안은 자신이 모든 걸 기억해 내길 간절한 마음으로 기다렸을 세이란을 떠올리자, 가슴이 아팠다.
“키안, 키안!”
자신을 부르는 그의 목소리가 아프도록 간절하게 들려왔다.
눈을 뜨자, 세이란의 녹색 눈동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아아,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세이란이 자신의 손에 얼굴을 묻고는 연신 감사하다는 말을 반복했다.
“세이란 님…….”
“다행이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려 두려웠다. 또 내 품 안에서 너를 잃을 것 같아서.”
키안이 천천히 손을 뻗어 헝클어진 그의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얼마나 애가 탔는지 머리를 쥐어뜯은 모양이었다.
그녀의 손길에 세이란이 고갤 들었다.
“죄송합니다, 세이란 님. 제가 너무 둔해 이제야 기억이 났습니다.”
순간 그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보였다.
“생각해 낸 거야? 내가 널 처음으로 안았을 때 봉인해 놓았던 기억 말이야.”
“네.”
“그럼 알았겠군. 내가 너를 아주 오래 기다렸다는 것도.”
키안이 고갤 끄덕였다. 그러곤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너무 늦어 죄송합니다.”
“늦지 않았다. 사실 기억하지 못한다 해도 상관없었다. 내가 널 기억하고 있으니까. 그리고 널 더 사랑하면 되니까.”
낮게 울리는 그의 목소리에 키안의 심장이 뜨거웠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천 년이나 흘렀는데…….”
“아무리 시간이 흘러도 잊히지 않는 사람이 있으니까. 나에게 그 사람이 너다, 키안.”
키안이 천천히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곤 팔을 뻗어 그의 목을 꽉 끌어안았다.
“머린 괜찮아?”
세이란은 키안을 있는 힘껏 끌어안지도 못한 채, 그녀의 안색을 살폈다.
“아프지 않습니다. 지난번 사냥터에서부터 상처가 빨리 낫는 모양입니다.”
“그건 비밀의 방에서 나누어 마신 붉은 액체 때문이다.”
키안이 그의 목에 둘렀던 팔을 풀며, 의아한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붉은 액체라면, 전하께서 드셨던 그것 말씀이십니까?”
“맞아. 그건 네가 인간인 날 보호하기 위해 만든 것이었다. 전쟁터에 나가는 날 위해 만든 것이었지. 그것이 남아 있을 것이라곤 생각지도 못했는데. 놀랐다.”
“그렇게 된 것이었군요.”
키안은 아직도 믿기지 않았다. 자신이 대륙 최고의 마법사였다니. 하지만 지금은 맹수를 다룰 줄 아는 힘만 있을 뿐, 다른 특별한 힘은 갖고 있지 않았다.
“마법의 힘은 필요 없다. 대신 넌, 유스타나 제국에서 가장 뛰어난 기사니까.”
“아쉽지 않습니다. 오히려 다행이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다만, 제 가족이 저 때문에 죽었다는 사실이 안타까울 뿐입니다.”
키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자신이 마법사의 환생이었다니. 하지만 키안은 불안감을 떨쳐 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자신을 바라보던 헬로이즈의 표정이 심상치 않았었다. 분명 뭔가를 꾸미고 있는 눈치였다.
“헬로이즈 공주가 모든 걸 알고 있습니다.”
“알고 있다. 예언자의 별 아래 태어난 자, 내가 그자를 죽였거든. 알고 보니, 헬로이즈 공주가 그자를 마음에 담았던 모양이더군. 그가 죽고 난 후에야 그 사실을 깨달은 것 같지만.”
“예언자의 별 아래 태어난 자라고 하셨습니까?”
“그래. 테란과의 마지막 전투에서 내가 죽인 기사가 그 가문의 혈족이더군. 왜 그런 얼굴이지?”
세이란이 키안의 심각해 보이는 표정을 보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천 년 전, 제 쌍둥이 오라버니였던 마기코스가 바로 예언자의 별 아래 태어난 자였습니다.”
“그 말은 테란의 루틴 공작가가 마법사의 혈족이란 건가?”
“그런 모양입니다.”
“믿을 수가 없군. 천 년이 지난 후에 또다시 이런 운명으로 엮이다니.”
“세이란 님…….”
키안이 손을 뻗어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자 세이란이 걱정할 것 없다는 듯 그녀를 품에 안았다.
“걱정 마. 이번엔 아무 일 없을 거야. 네 쌍둥이 오빠는 이미 죽었다. 다시 운명이 반복될 리 없다.”
세이란의 말에 키안은 고갤 끄덕였다. 하지만 불안감이 사라지지 않았다.
“좀 쉬도록 해. 나는 가서 해야 할 일이 있다.”
세이란이 키안을 품에서 떼어낸 후 침대에 조심스럽게 눕혔다. 그러곤 이불을 목까지 끌어당겨 덮어주었다.
“방 밖에 기사단이 지키고 있다. 그러니 안심하고 자도록 해.”
세이란이 키안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러자 키안은 다시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세이란은 그녀가 잠이 들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을 나온 세이란은 황궁을 빠져나와 루시타니아 상단으로 향했다.
**
어둠이 내려앉자, 검술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키엘체로 온 용병들이 하나둘 술집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 소문 들었습니까? 황실 기사단의 단장이 여인이었답니다. 거기다 신탁이 정한 황태자 전하의 비라니. 정말 놀랍지 않습니까?”
“놀랍다 뿐이야? 나는 내 눈으로 직접 테란의 기사들을 묵사발로 만들어 버리는 모습을 보기까지 했다고. 내 목숨까지 구해주셨고. 그런데 나는 멍청하게도 단장님께서 여인이란 걸 모르고 있었다.”
“그거야 당연히 은빛 늑대시니까 그렇지. 전쟁터에 황태자 전하와 단장님만 나타나면 테란의 기사들이 벌벌 떨며 오줌을 지렸었잖아.”
“그랬었지, 그랬어.”
남자의 말에 주변에 있던 사내들이 공감한다는 듯 맞장구를 쳤다.
“그러고 보니 전설의 검은 사자와 은빛 늑대 커플이네요.”
“그렇지. 그리고 두 분 사이에 태어난 황자님은 천하무적이 되실 거야.”
여기저기서 맞장구를 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한꺼번에 쏟아졌다. 왁자지껄한 분위기 속에서 여러 이야기가 오갔고, 이내 용병들의 화제는 블랙으로 넘어갔다.
“그런데 정말 블랙이 검술 대회에 참가할까요? 소문엔 참가 신청서를 냈다고 하던데 말입니다.”
“당연히 참석하지 않겠어? 얼굴의 상처 때문에 가면을 써야 하는 블랙에겐 실력만으로 평가받을 수 있는 좋은 기회일 테니까. 무엇보다 검술 대회에서 우승한 자는 황태자 전하의 사람이 되는 것이니 그것보다 좋은 일은 없겠지.”
“그렇겠죠?”
“당연한 소리 그만하고 술이나 마시자고.”
술잔 부딪히는 소리와 함께 사내들은 검술 대회를 앞두고 팽팽하게 긴장된 분위기를 누그러뜨렸다.
그때 술집의 문이 열리더니 검은 옷을 입은 용병 하나가 안으로 들어왔다.
대부분의 용병들은 술을 마시며 얘길 하느라 술집 안으로 들어온 사내에게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지만, 안쪽 구석에 앉아 있던 후드를 깊게 눌러쓴 남자만이 사내에게 관심을 보였다.
술집으로 들어온 사내 역시 알아본 듯 재빨리 구석에 앉아 있던 남자에게 다가갔다. 맞은편 자리에 앉자마자, 주위를 살피더니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보낸 손님은 무사히 도착했다.”
그 말은 대신전에 안전하게 들어갔고, 그들의 계획대로 대신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게 되었다는 뜻이었다.
“다행입니다. 힘들 것이라 생각했는데 말입니다.”
“나 역시 의외였다. 하지만 순순히 받아들이더군. 사실, 그 역시 다른 속셈이 있었지만.”
“다른 속셈이라니, 그게 뭡니까?”
“전 대신관을 받아들이는 대신, 신탁을 알리더군. 너도 알 것이다. 황태자비에 대한 신탁에 대해서 말이다.”
“들어 알고 있습니다. 조금 전까지도 그 얘기들뿐이라. 하지만 놀랐습니다. 은빛 늑대가 여인이었다니. 거기다 신탁의 주인공이라.”
“나는 신탁의 내용보다, 그걸 귀족들과 제국민 앞에서 당당하게 밝힌 황태자의 행동에 놀랐다. 거기다 제국민들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 버리다니.”
“대신전에서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정신 나간 멍청한 놈이 은빛 늑대에게 돌을 던졌다. 그 일로 제국민들의 마음이 완전히 황태자와 은빛 늑대에게 돌아섰고. 잘생긴 기사가 아름다운 레이디를 구하는 장면을 연출했거든.”
이고르의 비유에 알버트는 모든 상황이 빠르게 머릿속에 그려졌다.
쳇, 정말 멍청한 자였다. 제국민이 보는 앞에서 신탁을 받은 황태자비에게 돌을 던지다니.
“그자는 황태자의 손에 죽겠군요.”
“그자뿐만 아니라, 사주한 주인 역시 죽겠지. 그나저나 함께 온 용병들은 어디에 있지?”
“기사단에서 준비해 준 막사에 있으니 걱정 마십시오. 눈에 띄는 행동은 하지 말라고 주의를 주었습니다, 이고르 님.”
그때까지 외투의 후드를 깊게 눌러쓰고 있던 사내가 후드를 벗었다.
그러자 테란의 용병 기사단의 실질적인 책임자인 알버트가 얼굴을 드러냈다.
“오는 길에 특별한 일은 없었겠지?”
이고르의 물음에 알버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사실 키엘체의 국경을 넘는 동안 눈여겨보던 사내가 있었다. 카일이라고 하는 자였다.
하지만 국경을 넘기 바로 직전, 카일이라 불리던 사내가 사라졌다.
처음에 자신의 예상이 맞다고 생각해 그를 추적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결과는 너무도 허무했다.
조사 결과 절벽 아래로 떨어진 흔적을 발견했던 것이다. 아마 급한 볼일을 해결하기 위해 숲으로 갔다가, 실족사한 모양이었다. 자신의 촉이 틀린 것이다.
“별일 없었습니다. 그리고 여기. 테란을 떠나올 때, 주신 서신입니다. 공주님께 전해주십시오.”
알버트가 품속에서 양피지로 된 두루마리를 꺼내 이고르에게 건넸다. 양피지를 묶은 끈엔 테란국을 상징하는 옥이 달려 있었다.
서둘러 양피지를 품속에 넣으며 이고르가 알버트를 바라보았다.
“다음번엔 나 대신, 다른 사람을 보내겠다.”
“다른 사람이라면?”
“진이란 여인이다. 루틴 공작가의 사람이니, 믿어도 될 것이다.”
“에브게니아의 혈족이군요. 혹시 진은 자신의 할머니가 살아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습니까?”
알버트의 물음에 이고르가 고갤 가로저었다.
“진에겐 알리지 않았다. 그러니 그대 역시 입을 다물도록 해.”
“알겠습니다. 저희 쪽에서 먼저 연락할 일이 있으면, 제 막사에 깃발을 달겠습니다.”
이고르가 고갤 끄덕인 후,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술집을 빠져나갔다.
알버트 역시 다시 후드를 깊게 눌러쓴 후, 테이블 위에 술값을 올려놓았다.
“어머, 벌써 가시는 겁니까? 술잔을 비우지도 않았는데 말입니다.”
갑작스럽게 들려온 여인의 목소리에 알버트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눈에 띄게 아름다운 얼굴의 여인이 서 있었다.
술집에서 일하는 여인인 듯 보였지만, 천박해 보이지 않았다.
‘이 술집의 주인인 건가?’
라고 생각한 순간, 여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다른 나라에서 오신 모양이군요. 절 모르시는 걸 보니 말입니다. 저는 이 술집의 주인이 아니라, 용병이랍니다. 아마 운이 좋다면 검술 대회에서 만날지도 모르겠군요. 제 소개를 하자면, 패트리샤라고 합니다.”
술집 주인이 아니라 용병이란 말에 알버트는 충격을 받은 표정으로 패트리샤를 바라보았다.
“여인이 용병이라니. 다치고 싶지 않다면, 그만두는 게 좋을 것이다.”
충격이 가시자, 알버트는 거만한 표정으로 패트리샤를 보며 말했다. 여인이 용병이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러자 주위에서 술을 마시고 있던 기사들의 시선이 호기심을 품고 하나둘 알버트와 패트리샤에게 향하기 시작했다.
“패트리샤, 널 무시하는 사내가 눈앞에 있는데도 가만두다니. 설마 저 사내에게 반한 건 아니지?”
“그 입 다물어, 알렉. 혀가 잘리고 싶지 않다면.”
패트리샤의 서늘한 눈빛에 알렉이라고 불린 사내가 알았다는 듯 손을 들어 보였다.
패트리샤는 자신보다 한 배 반이나 큰 알버트를 쏘아보며 말했다.
“대회장에서 만나면 알게 되겠죠. 계집아이처럼 눈물을 뚝뚝 흘리며 도망치는 사람이 누가 될지 말입니다.”
패트리샤의 비아냥거림에 알버트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 모습이 몹시도 험상궂었지만, 패트리샤는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입을 열었다.
“유스타나를 처음 방문한 타국인이라 친절을 베풀려고 했는데, 그러기엔 이미 내 기분이 상해 버렸네요. 그럼, 이만. 대회장에서 뵙겠습니다. 본선까지 올라온다면 말이지만.”
패트리샤가 멍한 표정으로 서 있는 알버트를 남겨두곤 술집을 나왔다. 패트리샤의 입가에 걸려 있던 미소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조금 전 그 남자가 만났던 자는 분명 테란국의 공주의 호위무사였어.”
패트리샤의 눈빛이 날카롭게 빛났다. 하지만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어떻게 저들이 진을 알고 있는 거지? 그리고 돌아가신 진의 할머니인 에브게니아도.”
처음엔 잘못 들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분명히 진이었다. 패트리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며칠 전 키안 레녹스 공작의 부탁으로 친구인 진을 눈여겨보기 시작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진의 행동에 수상쩍은 면이 자꾸 보이기 시작했다.
“제길, 대체 무슨 일을 꾸미는 거야, 진!”
패트리샤는 황태자인 세이란을 만나기 위해 루시타니아 상단으로 향했다. 하지만 진의 일로 마음이 무거웠다.
황제의 독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