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4 화
헬로이즈는 마차에 오르기 전, 제임스 에버콘 쪽으로 고갤 돌렸다. 데칸 후작과 함께 서 있던 제임스 역시 헬로이즈의 시선을 느낀 듯 고갤 끄덕여 보였다.
“이고르, 출발해.”
“알겠습니다.”
이고르가 마차 문을 닫은 후, 마부석에 올랐다. 이내 헬로이즈를 태운 마차가 출발했다.
멀어져 가는 마차를 보며, 제임스 에버콘이 참고 있던 한숨을 내쉬었다.
“묘하게 차갑단 말이야. 저만 그렇게 느끼는 겁니까?”
제임스가 옆에 서 있는 앤톤 데칸 쪽으로 고갤 돌렸다.
“결과가 마음에 들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쪽에서 그린 그림은 이런 것이 아니었을 테니까요.”
“쳇, 그럴 거면 자기가 하던지. 아센 공작 앞에선 한 마디도 하지 못한 주제에.”
제임스는 눈살을 찌푸리며 불만을 토로했다. 아이처럼 툴툴거리는 제임스 에버콘을 보며, 앤톤 데칸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한심했다. 이런 자를 믿고 따라야 한다는 것이.
“공작께서도 냉정해져야 할 때입니다. 같은 배를 타고 있지만, 헬로이즈 공주는 적국의 사람입니다. 언제 태도를 바꿀지 모르니 경계를 늦춰서는 안 될 것이라 생각합니다.”
앤톤 데칸의 충고에 제임스가 고갤 끄덕였다.
“역시 상인이라 그런지 사람 보는 눈이 예리하군요. 어머니께서 신뢰하시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상인이란 말에 앤톤 데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지금은 데칸 상단을 경영하고 있지만, 사실 데칸 후작가는 황후를 배출한 가문이었다.
개국 공신 가문인 에버콘 공작가와 비교했을 때, 혈통적으로 뒤떨어지는 가문이 아니었다.
제임스 에버콘이 자신의 가문을 상인 가문이라 치부하며 무시하는 이유는 자신이 샤론 에버콘의 애인이란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인 듯했다.
‘마더 콤플렉스까지 있었군.’
앤톤 데칸의 기분을 아는지 모르는지 제임스는 한숨을 내쉬며 오늘 재판장에서 있었던 얘길 꺼냈다.
“쳇, 계획대로라면 레녹스를 감옥에 처넣을 기회였는데. 아쉽게 되었습니다.”
“아마 그런 일을 없을 겁니다. 이미 신탁을 통해 황태자비로 지목을 받은 상황이니, 귀족들은 물론 제국민들 역시 레녹스 공작, 아니, 레이디 키안을 받아들일 겁니다.”
“쳇! 신탁이라니.”
제임스 에버콘은 키안 레녹스를 감옥에 처넣지 못한 게 못내 아쉬운 모양이었다.
“하지만 세이란이 피를 흘리며 쓰러진 키안 레녹스를 안고 대신전을 빠져나갔을 땐 통쾌하긴 하더군요. 꽁지에 불이 붙은 것처럼 보였거든요.”
제임스가 기분 좋은 듯 웃기 시작했다. 사실 재판장에서 키안을 감옥에 넣지 못해 아쉬워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재판이 끝나고, 군중 속에 몸을 숨기고 있던 자신의 부하가 레녹스에게 돌을 던진 것이다.
“그 일로 전하께선 화가 많이 나신 것 같더군요. 황실 모독이라니. 아마 그자는 교수형에 처해질 겁니다. 황태자비가 되실 분을 공격했으니, 반역죄를 물을 수도 있겠군요.”
“바, 반역죄라니. 그게 어떻게 반역죄가 된다는 말입니까? 죄인에게 돌을 던진 것뿐인데.”
제임스 에버콘이 말도 안 된다는 듯 소릴 질렀다. 그 모습에 앤톤 데칸이 미간을 찌푸렸다.
“혹시 에버콘 공작께서 시키신 일인 겁니까?”
“전 아닙니다. 만약 그렇다고 해도, 잡아떼면 될 일입니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제임스가 서둘러 자릴 뜨자, 앤톤 데칸이 한숨을 내쉬었다.
“정말 어리석다니까. 스스로 공격당할 빌미를 제공하다니. 아니면, 황태자가 어떤 사람인지 정말 모르는 건가?”
만약 그렇다면, 제임스는 곧 황태자의 손에 죽을 게 뻔했다.
‘황태자가 신탁까지 거론하며 지키려 하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런 여인을 직접적으로 건드리다니. 절대 그냥 넘어가지 않을 거야.’
앤톤 데칸은 피를 흘리며 쓰러진 키안 레녹스 공작을 바라보던 세이란의 눈동자를 떠올렸다.
깊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미동도 없는 녹색 눈동자가 한순간이었지만 붉은빛을 띠며 번뜩이는 걸 똑똑히 보았다.
‘맹수의 날것 그대로의 살기. 그것이었어.’
앤톤 데칸은 몸을 떨었다. 하지만 문제는 세이란만이 아니었다. 그는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제국민이 얼마나 황태자인 세이란 구스타프와 황실 기사단의 단장인 키안 레녹스를 아끼고 신뢰하는지를.
앤톤 데칸은 마차에 오르며, 미간을 찌푸렸다. 이내 마차는 샤론 에버콘이 기다리고 있는 저택으로 향했지만, 그의 찌푸려진 미간은 펴질 줄을 몰랐다.
**
심장이 타는 듯 뜨거웠다.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지독한 아픔이었다. 하지만 살을 찢는 아픔보다 마음이 더 아렸다.
‘이건 죄책감이야. 그리고 떨쳐 버릴 수 없는 애증.’
그렇다는 건, 또다시 꿈인 건가? 하지만 이건 그녀가 항상 꾸는 꿈과는 달랐다.
지금 자신의 심장엔 단검이 꽂혀 있고 붉은 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상했다. 대신전에서 자신은 돌멩이에 머릴 맞았다. 심장에 검이 찔린 것이 아니라.
그리고…….
“머리카락이 길어졌어.”
목덜미를 살짝 덮는 길이가 아니라, 구불구불한 은빛 머리카락이 어깨를 덮고 있었다. 달빛처럼 아름다운 은빛 머리카락이었다.
‘나는 지금 누구지?’
키안은 눈을 들어 주위를 살폈다. 극심한 고통에 정신을 잃을 것 같았지만, 키안은 이곳이 황실 사냥터의 구스타프 1세의 비밀의 방임을 알 수 있었다.
“루멘(빛)과 아니마(영혼)을 관장하는 내 아름다운 여동생. 예언의 아이인 네가 우리 일족을 배신하다니. 하찮은 인간 때문에.”
비통함이 묻어 있는 남자의 목소리에 키안의 시선이 천천히 움직였다.
자신과 똑같은 은빛 머리카락에 보랏빛 눈동자를 한 남자가 수많은 감정을 담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빠?”
본능적으로 그 사내가 자신의 쌍둥이 오빠임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자신의 심장에 검을 찔러 넣은 사람 역시 그라는 것도.
“날 원망하지 마. 모든 건 네가 자초한 일이다.”
“왜……?”
라고 물어보려던 키안은 입을 다물었다. 자신은 그런 걸 물어볼 자격이 없었다.
“왜라니. 다 너 때문이다. 대륙의 지배자인 가장 고귀한 일족이 인간에게 마음을 빼앗겼으니까. 그건 배신이다, 프로피티아(예언의 아이), 너에게 모든 희망을 건 일족에 대한.”
“내가 프로피타아라고?”
“이젠 네 이름도 잊은 것이냐? 그 인간 사내 때문에? 모두 죽일 것이다. 제국의 지배자인 너와 내 이름을 걸고, 인간들을 남김없이 죽일 것이다.”
원망 섞인 목소리에 키안은 그제야 자신이 누군지 깨달았다.
천 년 전 대륙의 주인이었다던 두 명의 마법사. 그리고 그중 한 명이 바로, 예언의 아이인 프로피티아 자신이었다.
그리고 내 심장을 찌른 사람은 쌍둥이 오빠인 마법사 마기코스였다.
‘내가 배신한 내 쌍둥이 오빠. 이제야 알겠어. 내가 왜 천 년이나 후에도 다시 쌍둥이로 태어났는지. 왜 유스타나 제국은 남녀 쌍둥이를 금기시했는지도.’
두려웠던 모양이었다. 인간보다 강력한 힘을 지닌 마법사에 의해 죽게 될 것이란 사실에.
‘나 때문이었어, 이 모든 것이.’
키안은 전생의 마지막 순간을 보고서야 모든 걸 알게 되었다.
“일족을 배신한 나를 처형하기 위해 내 쌍둥이 오빠를 보내오다니. 정말 잔혹한 운명이군요.”
그래서 이번 생에선 나 때문에 오빠가 죽은 걸까? 인연이 수레바퀴라는 게 이런 것이었나?
만약 그렇다면 빚진 마음이 조금은 사라질 것 같았다.
“내가 하겠다고 했다. 널 다른 이의 손에 죽게 할 수 없었거든. 일족의 긍지인 널. 그리고 너를 내 아내로 맞고 싶을 만큼 사랑하는 나를 위해.”
날 사랑한다고? 쌍둥이인 나를, 친혈족인 나를……?
“그런 얼굴 하지 마. 네가 이런 날 경멸하고 있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 프로피티아. 하지만 내 세상에선 네가 전부다. 강력한 힘을 유지하기 위한 일족의 생존 방법이기도 하니까.”
이제 선명하게 기억이 났다. 자신이 일족을 배신한 이유는 일족의 생존 방식을 거부하고 인간 사내를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나는 오빠가 죄책감을 느끼지 않길 바라. 미안해하고 있어. 오빠를 그곳에 혼자 남겨두고, 나만 도망쳐 나와서.”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설마 널 죽이려는 날 동정하는 거야?”
“아니. 내가 이기적인 거야. 어쩌면 천 년쯤 후에 오빠가 날 위해 죽을 수도 있으니까.”
내 말에 오빠의 눈살이 찌푸려졌다. 당연히 이해할 수 없는 말일 터였다.
“네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지만, 날 미워해도 좋다. 난 일족에게 네가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 말할 생각이니까.”
그 말과 함께 눈앞에 서 있던 오빠의 모습이 사라졌다. 그리고 다음 순간, 누군가 비밀의 방 안으로 들어왔다.
“붉은 눈동자…….”
“프로피티아!”
순식간에 세이란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붉은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보였다.
“세이…….”
키안은 입을 다물었다. 세이란과 같은 모습이지만, 그는 구스타프 1세였다. 유스타나 제국을 세운 황제이자, 유일하게 결혼하지 않은 미혼의 황제. 하지만 키안에게 그는 세이란이었다.
“제발, 안 돼.”
바닥으로 주저앉으려는 자신을 끌어안고 절규하는 세이란을 보자 심장이 끊이질 듯 아팠다.
“프로피티아, 날 두고 죽지 마. 너는 마법사잖아. 절대 죽지 않는 불사의 몸이라고 했잖아. 그러니, 이러지 마. 날 혼자 남겨놓지 마.”
그의 붉은 눈동자가 절망을 흐려져 있었다. 눈물이 뺨을 타고 흐르는 게 보였다.
처음 보았다. 그가 약한 모습을 드러내며 눈물을 흘리는 것은. 언제나 강하고 지독할 정도로 냉정한 그였기에 그 어떤 것도 그에게 상처가 될 것이라 생각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런 강한 사내도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자신 때문에.
“울지 말아요. 울지…….”
키안 역시 슬픔으로 인해 목이 꽉 조여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내 이기심 때문이다. 모든 것이 다…….”
아니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말이 되어 나오지 못했다.
“약속하겠다. 다음 생에 널 다시 만나게 된다면, 내가 널 위해 모든 걸 버리겠다고. 내 붉은 눈동자와 뜨겁게 뛰는 심장을 걸고 맹세한다, 프로피티아. 오직 널 위해 살겠다고.”
키안의 눈에서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검에 찔린 자신을 품에 안고 오열하며 약속을 하는 그를 보며, 키안은 심장이 찢기는 것 같았다.
그리고 이제야 기억이 났다. 천 년 전, 그가 했던 약속이.
그리고 그 약속을 지켰다는 사실 역시 깨달았다.
"널 원해서다. 구스타프 황실의 피를 가진 자는, 자신의 하나뿐인 여인을 만나게 되었을 때 눈동자 색깔이 변하거든."
황제의 독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