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독사과-123화 (123/139)

제 123 화

제임스 에버콘이 키안의 찢어진 앞섶을 보며 말했다. 이미 알고 있었던 듯 그의 입가엔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설마, 이것까지가 계획이었던 건가?’

세이란은 키안을 공격한 자를 일으켜 세워, 옆에 서 있던 드레이크에게 넘겼다. 드레이크가 서둘러 남자를 끌고 가자, 세이란은 입고 있던 외투를 벗어 키안의 어깨에 걸쳐 찢어진 옷을 가렸다.

“제임스 에버콘, 이럴 작정이었던 모양이군.”

“이럴 작정이라니. 오해입니다, 황태자 전하. 저는 저자가 레녹스 공작을 공격하지 않았다면, 알지 못했을 겁니다. 키안 레녹스 공작이 여인이란 사실을 말입니다. 그러니 드레이크 경이 붙잡아 간 자를 추궁해 보시면 알게 되실 겁니다. 저와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또다시 웅성거림이 커졌다.

제길! 세이란은 욕설을 뱉어내며, 수군거리는 귀족들을 비롯해 제국민들을 쭉 훑어보았다.

“황태자 전하, 에버콘 공작의 말이 무엇인지 말씀해 주십시오. 레녹스 공작이 여인이었다니. 사실입니까?”

앤톤 데칸이 일부러 목소리를 높여 말했다. 죽이 척척 맞는 모습이었다.

데칸의 질문에 대신전의 광장에 날 선 침묵이 흘렀다. 숨소리는 물론 침을 삼키는 소리마저도 들릴 정도로 고요했다.

“제 눈으로 직접 보았습니다. 키안 레녹스의 가슴에 붕대가…….”

“그 입 다물어, 제임스 에버콘. 여기서 한 마디만 더한다면, 네 입은 물론, 네 눈을 뽑아주겠다.”

낮게 울리는 음산한 목소리에 제임스가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그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앉아 있던 아센 공작이 일어섰다.

“전하, 신 아센입니다. 저는 에버콘 공작을 통해서가 아니라, 당사자인 레녹스 공작을 통해 진실을 듣고 싶습니다.”

세이란의 시선이 키안에게 향했다. 자신의 코트를 걸치고 서 있는 모습이 안타까워 미칠 것 같았다.

마음 같아선 이 일을 꾸민 제임스 에버콘은 물론, 헬로이즈 공주의 목에 검을 꽂아 넣고 싶었다.

그때 옆에 서 있던 키안이 입을 열었다.

“어찌하실 생각입니까?”

“어쩌긴? 진실을 듣고 싶다고 했으니, 진실을 말해야지. 걱정할 것 없다. 어차피 내 계획은 처음부터 이것이었거든.”

“계획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키안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세이란을 보자, 그가 걱정할 것 없다는 듯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모두 예상했던 일이다. 저자가 널 공격할 것이란 건 예외였지만.”

키안의 찢어진 옷을 보며, 세이란이 미간을 찌푸렸다.

“다치진 않았고?”

“재빨리 피해 상처가 나지 않았습니다.”

세이란이 고갤 끄덕여 보였다. 그러곤 손을 뻗어 키안의 손을 붙잡더니, 자신의 옆에 서게 했다.

“난 이 순간을 기다렸다. 아주아주 설레는 마음으로. 그러니 도망치지 않겠다는 약속을 지켜라, 키안.”

그 말과 함께 세이란은 귀족들과 제국민을 바라보며 위엄 있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도미니크 대신관이 신탁을 받았다. 당연히 황태자비에 대한 신탁이었다. 나는 오늘 대신관과 함께 이곳에서 신탁의 내용을 전하려 했다. 하지만 대신관은 괴한에게 공격을 당했지. 아마 대신관을 공격한 무리는 신탁의 내용이 알려지는 걸 원치 않았던 모양이다.”

“지금 대신관께서 신탁을 받으셨다고 하셨습니까, 전하?”

“그렇습니다, 아센 공작.”

“말씀해 주십시오. 신탁이 정한 황태자비가 누구신지 말입니다.”

아센 공작은 물론, 귀족들 역시 긴장한 표정으로 세이란을 바라보았다. 신탁이 정한 황태자비가 누군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키안 레녹스다. 내 옆에 있는 키안이 대신관이 신탁을 통해 받은 유스타나 제국의 황태자비다.”

“하지만 레녹스 공작은 남…….”

“조금 전 에버콘 공작이 여인이라고 했던 걸 듣지 못했던 겁니까? 그러니 충분히 가능한 일입니다.”

“하지만 지금까지 유스타나를 속이고 여인의 몸으로 작위까지 물려받은 자입니다. 죄인입니다.”

“말을 삼가세요. 신탁이 정한 황태자비이십니다.”

아센 공작이 서늘한 목소리로 속닥거리는 귀족들을 향해 경고했다.

그러자 귀족들이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신탁이 정한 황태자비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건, 황실은 물론 대신전을 모독하는 행위였다.

헬로이즈는 신탁이란 말에 한 마디도 하지 못하는 유스타나의 귀족들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곤 광장 중앙에 서 있는 세이란을 쏘아보았다.

‘이 자리에서 신탁을 거론하다니. 정말 머리 하나는 좋다니까. 키안 레녹스의 비밀을 공개하는 동시에 황태자비라고 공표해 버리다니 말이야.’

하지만 이대로 두고 볼 수는 없었다. 헬로이즈가 자리에서 일어서자, 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그녀에게 향했다.

“테란인이 끼어들어선 안 되는 줄 알지만, 집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는 것 같습니다.”

헬로이즈의 말에 세이란의 입가에 서늘한 냉소가 떠올랐다.

“그게 뭐지, 테란의 공주?”

세이란은 일부러 헬로이즈의 이름 대신 테란을 입에 담았다. 그녀의 말처럼 테란인은 유스타나의 일에 끼어들지 말라는 경고가 담겨 있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현 대신관이 침입자의 공격을 받아 의식불명인 상태라고 말입니다. 그 의미는 신탁의 내용을 황태자 전하 외엔 진실이라고 증명할 사람이 없다는 뜻, 맞습니까?”

“맞다. 지금 상황에선 나 외엔 내 말이 진실인지 확인할 자는 없지. 대신관이 깨어나기 전까지 말이다.”

그 말과 함께 세이란은 전 대신관으로 인정한 에브게니아를 바라보았다. 사실 전 대신관 역시 도미니크 대신관이 깨어날 때까지 확인할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세이란은 에브게니아를 전 대신관으로 인정했다. 그러니 한마디로, 신탁의 내용 역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설마, 그래서 전 대신관을 인정했던 건가? 이런 결과가 나올 것을 예상하고?’

만약 그렇다면, 정말 무서운 자였다. 헬로이즈는 주먹을 꼭 쥐고 서 있자, 옆에 있던 아센 공작이 입을 열었다.

“테란의 공주께선 자리에 앉아주시길 청합니다. 이건 어디까지나 유스타나 제국의 일이니, 앞으로 그 어떤 이유에서든 의견을 내놓는 건 받아들이지 않겠습니다.”

아센 공작은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며, 헬로이즈 공주의 의견을 묵살했다.

“황태자 전하, 유스타나 제국은 구스타프 황실과 대신전의 말을 전적으로 믿고 따라왔습니다. 대신관께서 받으셨다는 신탁 역시 믿습니다. 이제 황태자비가 결정이 되었으니, 국혼 준비를 서두르도록 하겠습니다.”

아센 공작의 말에 귀족들은 서로 눈치를 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하지만 제임스 에버콘이 그냥 넘어갈 수 없다는 듯 이의를 제기했다.

“말도 안 됩니다. 신탁의 내용은 맞을지 모르지만, 키안 레녹스 공작은 유스타나 제국을 속인 죄인입니다. 그 죗값은 당연히…….”

“받겠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키안?”

세이란이 고갤 돌려 키안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그의 손을 놓고 앞으로 한 발짝 나와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신탁의 내용과 상관없이 레녹스 공작가가 저지른 벌은 달게 받을 생각입니다. 그전에 먼저, 용서를 구하고 싶습니다.”

키안이 제국민을 향해 허릴 숙였다.

“키안, 그럴 필요 없다. 당장 고갤 들어.”

세이란이 손을 뻗어 키안을 일으켜 세우려 했다. 그러자 키안이 진지한 태도로 그를 설득했다.

“제 몫입니다, 전하. 이건 제가 해야 할, 감당해야 할 몫입니다. 제 죗값을 다 치른 후, 전하께 가겠습니다. 그러니 염치없는 부탁이지만, 기다려 주십시오.”

키안의 하늘빛 눈동자와 마주치자, 세이란은 자신이 그녀를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쳇! 약속은 지켜.”

그 말과 함께 세이란이 키안의 손을 놓아주었다. 키안은 다시 제국민을 향해 고갤 숙였다.

이걸로 죗값이 다 면해지는 건 아니었다. 대부분의 죄인처럼 그녀 역시 재판을 받고, 그에 상응하는 죗값을 치를 생각이었다.

그때 작고 따뜻한 뭔가가 키안의 손을 건드렸다. 놀라 눈을 들자, 르위스 리셋의 품에 안겨 있던 여자아이가 손을 뻗어 키안의 손을 꼭 잡고 있었다.

“언니가 울 것 가타서…….”

키안이 고갤 들고는 아이를 바라보았다. 아마 자신의 얼굴은 가면을 쓴 듯 무표정할 게 분명했다.

그런데 아이는 가면 아래 숨겨져 있던 자신의 감정을 읽은 모양이었다.

“고맙다. 하지만 난 울지 않아. 그러니 너도 울지 마. 넌, 아무런 죄도 짓지 않았으니까.”

키안이 고갤 들다, 르위스 리셋과 눈이 마주쳤다. 그의 눈동자에 수많은 감정이 어렸다 사라지는 게 보였다.

“아무도 그런 말을 해주지 않더군요. 저희가 원한 건, 그 한마디였는데 말입니다.”

그때 감독관이 르위스 리셋의 팔을 붙잡았다. 그러곤 세이란의 눈치를 보며, 낮은 목소리로 경고를 했다.

“그 입 다물어. 지금은 재판 중이다. 너에게 말할 기회가 주어질 때까지, 입도 벙긋하지 마.”

르위스 리셋가 고갤 숙였다. 그러곤 어깨를 움츠리며 딸아이를 자신의 품 안으로 넣어 숨겼다.

“오늘 공개 재판은 이것으로 끝낸다. 다음 재판은 법정에서 이루어질 것이다.”

세이란의 선언에 팽팽하게 긴장되어 있던 분위기가 조금씩 누그러지기 시작했다.

감독관이 르위스 리셋의 팔을 붙잡고 다시 감옥으로 가기 위해 걸음을 옮기는 것이 보였다.

“잠깐만 기다려. 바닥에 이걸 떨어뜨렸…….”

키안이 바닥에 떨어져 있는 아이의 신발을 발견하곤 무릎을 꿇었다. 그러곤 신발을 주워 르위스 리셋에게 다가갔다.

그때였다. 키안은 아이를 향해 날아오는 돌멩이를 발견하곤, 본능적으로 아이를 보호하기 위해 몸을 날렸다.

키안은 지독한 고통에 눈을 질끈 감았다. 참으려 했지만, 입 밖으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윽-”

키안의 시선이 돌멩이가 날아온 쪽으로 향했다. 그러자 구경꾼들 사이에 숨어 있던 한 사내와 눈이 마주쳤다.

‘날 향해 던진 거야.’

자신을 바라보는 악의적인 눈빛을 통해 그 사내가 노린 사람이 바로 자신임을 알 수 있었다.

뜨거운 액체가 뺨을 타고 흘러내리는 게 느껴졌다.

“키안!”

세이란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는 괜찮습…….”

“괜찮긴 뭐가 괜찮다는 거야? 피가 이렇게 나는데.”

세이란의 성난 눈빛이 구경꾼 쪽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순간 주먹만 한 돌멩이가 날아오는 게 보였다.

“전하, 위험…….”

키안은 재빨리 몸으로 세이란을 막아섰다. 퍽! 소리와 함께 다시 뒤통수에 날카로운 고통이 밀려들었다.

고통을 삼키며 눈을 질끈 감자, 세이란이 그녀를 끌어안는 게 느껴졌다.

“키안! 키안!”

퍽, 퍽, 퍽! 멀어져 가는 의식 저편으로 뭔가 부딪히는 소리가 계속해서 들려왔다.

‘정말 바보라니까. 막아주지 못하면, 함께 맞겠다더니. 이러지 않아도 되는데……. 이러면 내가 너무…….’

너무 미안했다. 키안은 온몸에서 힘이 빠져나가는 것을 느끼며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하지만 무겁게 내려앉은 눈꺼풀은 열릴 줄을 몰랐다. 그렇게 키안은 검은 바닥 아래로 침몰했다.

“당장 멈춰. 멈추지 않으면, 용서하지 않겠다.”

키안이 정신을 잃는 걸 지켜본 세이란의 눈동자가 붉은빛을 뿜어내며 번뜩였다.

살기를 품은 붉은 눈동자가 사내에게 향하자, 그 날카로운 눈빛에 겁을 먹은 사내가 도망치려는 듯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어엇!”

다리에 힘이 풀린 듯 옆에 서 있던 사람들의 다리에 걸려 넘어진 사내가 네발로 바닥을 기어 군중 사이로 숨어들려 했다.

하지만 모든 광경을 지켜본 제국민들이 그가 도망치지 못하도록 막아서며 말했다.

“황태자께 돌을 던진 자다.”

“감히 전하께 돌을 던지다니. 용서할 수 없다.”

사람들이 바닥에 넘어진 사내를 싸늘한 눈빛으로 죽일 듯이 쏘아보았다.

“나는, 전하가 아니라 저 사내에게 돌을…….”

“거짓말 마. 내가 두 눈으로 똑똑히 보았다. 레녹스 공작에게 돌을 던지는 것을.”

“나도 보았다. 황태자 전하의 몸에 달걀을 던진 것도.”

여기저기서 사내의 말에 반박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그러자 사내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리더니, 벌벌 떨기 시작했다.

‘왜 다른 거지? 분명 레녹스 공작 역시 자신들을 속인 죄인인데, 왜 그에게 이렇게 관대한 거지?’

사내는 르위스 리셋 때와는 달리 레녹스 공작과 세이란을 감싸고도는 제국민들을 바라보았다.

“왜……?”

사내의 왜라는 의문 속에 담긴 뜻을 제국민들 역시 알아차린 듯했다. 그러곤 그걸 몰라서 묻느냐는 얼굴로 누군가 대답을 했다.

“왜라니? 레녹스 공작은 우리에게 머릴 숙여 진심으로 사과를 했다.”

“난 전쟁터에서 목숨을 걸고 싸운 은빛 늑대를 존경해 왔다.”

“그런데 그런 분이 여인이었다면, 말 다한 거지. 너라면 여인의 몸으로 전쟁터에서 우리를 위해 목숨을 걸 수 있겠어? 어림도 없지.”

사내를 향해 쏟아지는 질책이었지만, 그건 키안 레녹스에 대한 깊은 신뢰와 애정이었다.

제국민에게 키안은 그들을 속인 죄인이 아니라, 자신들을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황실 기사단의 단장이었다.

그때 세이란이 정신을 잃은 키안을 품에 안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곤 사내에게 한 발짝 다가서더니, 냉기가 뚝뚝 떨어지는 목소리로 말했다.

“신탁이 정한 황태자비에게 돌을 던져 상처를 내다니. 그 대가는 황실을 모독한 죄로 치르게 될 것이다.”

황제의 독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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