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독사과-122화 (122/139)

제 122 화

세이란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데칸 후작 옆자리가 비어 있는 것을 확인했다.

“왜 그러십니까, 전하? 안색이 좋지 못하십니다.”

“리치문트 공작, 당연히 있어야 할 사람이 없다면 무슨 일을 꾸미고 있는 것이겠지?”

세이란의 말에 에드윈의 시선이 앤톤 데칸 후작의 옆자리로 향했다.

“제임스 에버콘 공작 말씀이시군요. 그자라면, 분명 뭔가를 꾸미고 있을 테죠. 그것이 아니라면 황실 사냥터에서 벌였던 일을 수습 중일 겁니다. 오늘 아침, 컨스터블의 조사원을 공작가로 보냈었거든요.”

“아침부터 똥줄이 탔겠군.”

“그랬을 겁니다. 조사원의 말에 따르면 발톱에 가시가 박힌 곰처럼 몸부림쳤다고 했거든요.”

동시에 두 사람의 입가가 냉소로 비틀렸다. 제임스 에버콘이 이성을 잃고 화를 내는 모습이 상상됐다.

“헬로이즈 공주를 호위하는 이고르란 자도 조사하도록 해.”

“설마 테란의 공주가 연관되어 있는 겁니까?”

“연관된 것이 아니라, 더 위험한 짓을 꾸몄더군. 분명 유스타나에 테란의 첩자가 있을 것이다.”

“은밀히 조사하도록 지시하겠습니다.”

세이란이 다시 고갤 돌려 키안을 보았다. 자리에 앉아 있던 키안 역시 그의 시선을 느낀 듯 고갤 숙여 예를 갖췄다.

“전하, 레녹스 공작을 증인으로 부를까요?”

세이란은 잠시 망설였다. 마음 같아선 어떤 이유에서든 키안을 재판장에 세우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르위스 리셋이 그의 형인 리셋 백작이 살인을 저질렀다는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에 사건 현장을 처음으로 목격한 키안의 증언이 필요했다.

“부르도록 해. 대신 최대한 빨리 끝내는 게 좋겠다.”

“알겠습니다, 전하.”

에드윈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재판을 지켜보고 있던 제국민의 시선이 일제히 그에게 향했다.

“로체 거리의 모자 사건의 첫 목격자가 도착했으니, 그를 불러 확인하는 절차를 갖겠다. 사건의 최초 목격자인 키안 레녹스 공작은 앞으로 나와주겠나?”

키안은 자신의 이름이 불리자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곤 계단을 내려와 르위스 리셋 옆에 섰다.

그러자 르위스 리셋의 품에 안겨 있던 아이가 고갤 내밀어 키안을 올려다보았다.

아이는 이 상황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듯 키안을 향해 미소를 지어 보이기까지 했다.

욱신, 심장이 아렸다. 목이 따끔거리고, 가슴이 답답할 정도로.

키안은 애써 아이에게서 시선을 거둬들였다. 고갤 들자,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세이란과 눈이 마주쳤다.

‘걱정할 필요 없는데. 난, 괜찮은데…….’

키안은 짙어진 녹색 눈동자를 보며,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아마 다른 이들은 자신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가 너무 옅어 알 수 없을 테지만, 그는 알아볼 터였다.

키안의 예상대로 세이란의 입가가 부드러워졌다. 안심한 모양이었다.

“키안 레녹스 공작입니다.”

“레녹스 공작, 르위스 리셋이 로체거리의 사건에 대해 타살이란 주장을 내놓았다. 무엇보다 살인범이 형인 리셋 백작이라고 하더군. 만약 이것이 사실이라면 친족 살인이다. 그러니 목격자로서 그때 상황이 어떠했는지 증언해 주겠나?”

에드윈의 물음에 키안은 침착한 모습으로 그날, 자신이 본 것을 얘기하기 시작했다.

“바닥엔 스스로 목숨을 끊을 만한 단검이나, 무기는 없었습니다. 하지만 여인과 아이의 심장은 날카로운 것에 찔린 듯 피가 흐르고 있었습니다. 심장 쪽에서만 피가 흐르는 것으로 보아, 한 번의 공격으로 급소를 찌른 듯했습니다. 검을 다룰 줄 아는 자의 소행으로 보였습니다.”

“그 말은 자살이 아니라, 살인 사건 쪽에 무게를 두고 있다는 뜻이겠지?”

“제가 보기엔 그랬습니다. 그리고 컨스터블의 감독관과 조사원 역시 법무대신께 그렇게 보고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살인 사건이라고. 하지만 그자가 여기에 서 있는 르위스 리셋인지, 아니면 리셋 백작이 보낸 자인지는 알지 못합니다.”

키안의 대답이 끝나자, 세이란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증언이 끝났으니 레녹스 공작은 그만 자리로 돌아가도 좋다.”

키안이 세이란과 에드윈을 향해 고갤 숙였다. 키안이 자리로 돌아가는 순간,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뒤를 돌아보자, 대신전의 광장으로 제임스 에버콘 공작이 들어서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뒤엔 기사로 보이는 자들이 따르고 있었다.

“에버콘 공작, 지금 뭘 하는 거지? 공개 재판 중인 게 보이지 않나?”

세이란의 싸늘한 목소리가 대신전의 광장을 울렸다. 그러자 제임스 에버콘이 재빨리 허릴 숙였다.

“제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황태자 전하. 하지만 광장으로 오던 길에 아주 흥미로운 얘길 들어서 그냥 자리로 갈 수가 없어 그랬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세이란이 눈을 가늘게 뜨고 제임스 에버콘을 쏘아보다, 그가 고갤 들더니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그러곤 자신을 뒤따라 온 기사들을 향해 명령했다.

“뒤로 물러서라.”

그의 명령에 기사들이 옆으로 비켜섰다. 그러자 기사들의 뒤에 서 있던 여인이 모습을 드러냈다.

“저 여인은 누굽니까?”

“신관 복장을 하고 있군요. 대신전의 사람인 겁니까?”

노파를 본 귀족들의 웅성거림이 들려왔다. 세이란은 본능적으로 신관 복장을 한 여인이 전 대신관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누구냐, 에버콘 공작?”

“그게 이 여인의 말론, 자신이 유스타나 제국의 전 대신관이라고 했습니다.”

또다시 웅성거림이 커졌다.

유스타나 제국의 전 대신관이라니. 분명 전 대신관은 미쳐서 대신전을 떠났다고 했다. 그런데 23년 만에 다시 유스타나로 돌아오다니.

“그걸 어떻게 증명하지? 저 노파가 전 대신관이란 사실을 말이다.”

세이란의 물음에 제임스 에버콘의 눈빛이 번뜩였다.

“당연히 현 대신관인 도미니크를 불러 확인하면 될 일입니다. 그런데 대신관께선 보이지 않으시군요. 혹시 기도실에 계시는 겁니까?”

이미 도미니크 대신관이 공격을 받아 의식을 차리지 못하는 상황임을 알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런데도 뻔뻔하게 연기를 하다니.

세이란의 입가가 서늘하게 비틀렸다.

“이상하군. 타이밍이 너무도 절묘해. 사실 얼마 전 대신전에 침입자가 있었다. 그리고 그 사건으로 인해 유스타나 제국의 대신관이 공격을 받았다. 그런데 때마침 나타난 전 대신관이라니. 혹여 에버콘 공작가가 대신전에 침입한 자와 같은 편인 건가?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당당하게 전 대신관을 데려오다니, 이해가 되지 않아서 하는 말이다.”

아센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대신전에 침입자가 들어 대신관을 공격하다니. 이건 반역이나 다름없는 일입니다. 제게 명만 내려주십시오, 황태자 전하. 그와 연결된 자를 색출해 전하의 발아래 무릎을 꿇리겠습니다.”

아센 공작의 위엄 있는 목소리에 제임스 에버콘의 얼굴이 낭패란 듯 일그러졌다. 이런 반응일 것이라 예상하지 못한 듯했다.

“황태자 전하, 저는 아닙니다. 억울합니다. 다만 대신전으로 오는 길에 자신을 전 대신관이라고 칭한 여인을 만나 이곳까지 데려온 것뿐입니다. 이 여인에게 직접 물어보십시오. 저는 아무런 상관도 없습니다.”

재빨리 발을 빼며 도망칠 궁리를 하는 제임스 에버콘을 보자, 세이란의 눈빛이 맹수처럼 잔혹하게 빛났다.

“자신을 전 대신관이라고 주장하는 자는 앞으로 나오라.”

세이란의 명령에 신관 복장을 한 노파가 앞으로 나왔다.

“유스타나 제국의 황태자 전하를 뵙습니다.”

노파가 바닥에 무릎을 꿇어 예를 갖췄다.

“네가 전 대신관이란 사실을 증명해 줄 이가 여기엔 없다. 그런 상황에서 넌, 어떻게 네가 전 대신관이었다는 사실을 증명할 것인지 말해보라.”

노파가 고갤 들었다. 그러자 은빛 눈동자가 영롱한 빛을 띠며 반짝였다.

“23년 전 유스타나 제국에 세 개의 신탁이 내려졌습니다. 하나는 황태자 전하의 것이었고, 나머지 두 개는 아직 태어나지 않은 아이들에 대한 신탁이었습니다.”

노파의 말에 세이란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곤 계단을 내려와 전 대신관이라고 주장하는 노파가 서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그걸 알고 있다니. 유스타나 제국에선 황제 폐하께서만 알고 계시는 일인데 말이야. 네가 진짜 전 대신관인 것이냐?”

도미니크 대신관은 곧 전 대신관이 그의 앞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 했다. 하지만 이 초라한 노파가 전 대신관이라니.

“모두가 아는 황태자 전하의 신탁 외에 나머지 두 개의 신탁은 레녹스 공작가에 내려진 것이었습니다.”

노파의 말에 세이란은 물론 옆에 서 있던 키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엘렌에게 전해 들었던 신탁의 내용 역시 같은 것이었다.

“두 개의 신탁이 레녹스 공작가에 내려진 것이라니. 대체 어찌 된 것입니까? 일개 공작가에 신탁이 내려지다니 말입니다.”

제임스 에버콘이 놀란 듯 큰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귀족들 역시 웅성거리기 시작했다.

그때 에드윈 리치문트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에버콘 공작, 지금은 공개 재판이 진행 중이다. 재판과 상관없는 의견은 방해가 될 뿐이니, 재판관으로서 자리로 돌아가길 명한다.”

“하지만 이것 역시 재판만큼이나 중요한 문제입니다. 우리가 모르는 신탁이 두 개가 더 있었다니. 전 대신관이 나타난 마당에 당연히 들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임스 에버콘 역시 물러서지 않고 말했다. 이제야 헬로이즈 공주가 말했던 황태자와 레녹스 공작을 동시에 덫으로 밀어 넣는 방법이 뭔지 깨달은 것이다.

‘전 대신관이 받았던, 나머지 두 개의 신탁. 이것이 키안과 세이란의 약점인 거야.’

그런 확신이 들자, 제임스 에버콘은 귀족들이 모두 들을 수 있게 큰 소리로 말했다.

“말씀해 주십시오, 황태자 전하. 제국민 모두가 궁금해하는 내용입니다. 무엇보다 대신관까지 괴한에게 공격을 당해 뒤숭숭한 상황입니다. 만약 그 신탁의 내용이 연관이 있는 것이라면…….”

“그 입 다물라, 에버콘 공작. 그 신탁의 내용과 대신전에서 벌어진 사건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다는 건 그대가 더 잘 알 텐데?”

“그게 저는 상관없는 일입니다.”

“그 말은, 그대는 상관없지만 관련된 자는 알고 있다는 말처럼 들리는군.”

“그, 그게…….”

제임스 에버콘이 당황한 표정으로 말을 더듬었다.

“말씀드리겠습니다, 황태자 전하. 제가 전 대신관이란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신탁의 내용을 밝혀야 하는 상황이라면, 제국민이 보는 앞에서 말하겠습니다.”

노파의 은빛 눈동자가 세이란에게 향했다. 그리고 그에게 닿았던 시선이 어느새 키안에게 가 있었다.

그 모습에 세이란이 주먹을 꽉 쥐었다.

“아니, 말할 필요 없다.”

“그럼 절 인정하시는 겁니까? 유스타나의 전 대신관으로서 말입니다. 그리고 도미니크 대신관을 대신해 대신전의 대신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해도 되겠습니까?”

노파의 말에 세이란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어졌다.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감돌았다.

“황태자 전하, 전 괜찮습니다. 이미 결심을 굳혔으니까요. 그러니 모두 말하십시오.”

세이란의 시선이 키안에게 향했다. 그러곤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너 때문이 아니라, 나 때문에 참고 있는 것이다. 나 때문에.”

그 말과 함께 세이란의 시선이 노파에게 향했다.

“좋다. 그대가 전 대신관이란 증거도 없지만, 아니라는 증거도 없으니 받아들이겠다. 하지만 도미니크 대신관이 깨어나기 전까지다. 그가 깨어난다면, 그대가 거짓말쟁이인지 아니면 진실을 말했는지 알게 되겠지.”

세이란의 말에 노파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곤 세이란을 향해 예를 갖췄다.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태자 전하.”

“그대의 이름이 뭐였지? 내가 태어나기 전에 그만둔 터라, 그대의 이름을 알지 못한다.”

“죄송합니다, 황태자 전하. 제가 대신관이 된 이후 유스타나 제국의 황제 폐하께서 제 이름과 신분을 비밀에 붙이라 명하셨습니다. 얼굴 역시 항상 베일로 가리라 명하셨지만, 지금은 대신관이 아니라 베일을 벗었습니다. 이제 다시 대신관의 역할을 수행해야 하는 상황이니, 저의 이름은 말씀드릴 수 없겠습니다. 황제 폐하의 명이 있기 전에는.”

노파의 말에 날카롭게 빛나던 세이란의 녹색 눈동자가 조금 누그러졌다. 거짓이 아니었다.

자신 역시 전 대신관에게 내려진 함구령에 대해 알고 있었다.

“이제 마지막 관문을 제가 통과한 모양이군요.”

노파의 말에 세이란의 입가가 차갑게 비틀렸다.

“맞다. 하지만 아직 그댈 믿는 건 아니다.”

“알고 있습니다, 황태자 전하. 앞으로 절 에브게니아라고 부르시면 됩니다.”

“에브게니아, 고귀한 자란 이름에 걸맞게 행동하길 바란다.”

세이란이 에브게니아를 지나쳐 키안에게 다가갔다.

“레녹스 공작, 그댄 자리로 돌아가도 좋다. 공개 재판에서 그대의 역할은 끝났다.”

키안이 고갤 숙인 후,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때 에브게니아를 데리고 왔던 기사들 중 하나가 소매 속에서 단검을 꺼냈다.

그러곤 키안을 향해 재빨리 검을 날렸다. 키안이 재빨리 몸을 피했지만 사락, 소리와 함께 옷깃이 찢기는 소리가 들렸다.

“감히…….”

세이란이 키안을 향해 단검을 든 가사를 단숨에 제압했다.

“맙소사! 여인이었다니.”

황제의 독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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