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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독사과-121화 (121/139)

제 121 화

구스타프 1세의 비밀의 방에서 발견했던 상자를 들고 황실 사냥터에 갔던 키안은 서둘러 키엘체로 돌아왔다.

엘렌에게 전해 들었던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다시 구스타프 1세의 비밀의 방에 갔지만,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내가 천 년 전 대륙을 지배하던 마법사의 혈족이었다니.’

어느새 대신전의 마구간에 도착한 키안은 말에서 내렸다. 그러곤 손을 펴 자신의 손바닥을 내려다보았다. 오랫동안 검을 잡아 손바닥에 굳은살이 있었다. 거친 기사의 손이었다. 마법사가 아니라.

"천 년 전에도 그대는 대륙을 지배할 예언의 아이였고, 지금 역시 신탁에서 정한 유스타나 제국의 주인이십니다."

엘렌은 자신이 신탁에 의해 선택받은 고귀한 존재라고 했다. 오빠인 키안 레녹스의 그림자라고 생각했던 자신이.

“믿을 수 없어. 내 오빠가 나의 그림자였다니. 내 힘을 정화하고 인연의 수레바퀴를 끊어낼 때까지 날 대신할 존재일 뿐이었다니.”

키안은 목이 꽉 조여 침을 삼킬 수조차 없었다.

‘전 대신관이 받았다던 세 개의 신탁 중 하나는 황태자 전하실 거야. 그리고 나머지 두 개는 분명 레녹스 공작가의 쌍둥이인 오빠와 나일 테고.’

짐작은 갔지만, 확인할 방법은 없었다. 신탁을 받았다던 전 대신관은 없었고, 황제 폐하께서 의식을 찾지 못하고 있으니…….

키안은 품속에 있는 상자를 손으로 꾸욱 눌렀다. 아직 이 상자의 비밀을 풀지 못했다.

아마 키안은 이 상자에 천 년 전에 시작되었다는 인연의 수레바퀴에 대한 답이 있을 것이라 확신했다.

“대체 이제 와서 왜? 왜 다시 시작된 거지? 그 천 년 전에 시작되었다는 인연이 왜……?”

“당연히 그대가 배신자이기 때문이죠.”

뒤에서 들려온 헬로이즈의 목소리에 키안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나무 그늘 아래 서 있던 헬로이즈와 눈이 마주쳤다.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답해 드리는 겁니다. 의문을 품고 있는 것 같아서.”

“공주님께선 그 답을 알고 있다는 것입니까?”

“당연히 알고 있습니다. 테란에도 대신관은 있으니까.”

사실 헬로이즈가 천 년 전의 일에 대해 알게 된 건, 대신관을 통해서가 아니었다.

예언의 별 아래 태어난 혈족, 루틴 공작가. 그 공작가의 후계자인 로렌스와 그의 누이 엘렌을 통해서였다.

하지만 그 얘긴 키안에게 해줄 필요는 없을 듯했다.

“천 년 전 그때, 그대가 그대의 일족을 배신하지 않았다면 이 대륙은 유스타나 제국이 아니라, 마법사의 나라가 되었을 겁니다. 무엇보다 그대처럼 남녀 쌍둥이가 태어났다고 해서 죽는 일은 더더욱 없었을 테고요.”

헬로이즈의 입가가 냉소로 비틀렸다.

“유스타나의 관습법의 금기 역시 나 때문이란 건가요?”

키안의 말에 헬로이즈는 답답하다는 얼굴을 했다.

“아직도 떠오르지 않은 모양이군요. 그대가 천 년 전 누굴 죽였는지 말입니다.”

“내가 배신자라는 건 알겠습니다. 하지만 나는 사람을 죽이진 않았습니다.”

“아니요. 이번에도 똑같이 죽이려 했습니다. 황태자 전하의 방해로 실패했지만.”

헬로이즈의 말에 키안의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나였던 건가요? 내가 죽인 사람이라는 게.”

“그렇습니다. 똑같은 선택을 하려 했던 거죠.”

키안은 순간 다리에 힘이 빠지는 것 같아 옆에 있는 기둥을 꽉 붙잡았다. 천 년 전에도 똑같은 선택을 했다니…….

“이번에도 성공하길 바랐습니다. 그랬다면 모든 것이 다 제자리를 찾았을 테니까요.”

원망 섞인 목소리가 날카로운 검이 되어 키안의 심장을 찔렀다. 마치 지금이라도 당장 이곳에서 스스로 죽음을 선택하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대 때문에 그대의 일족은 몰살당했습니다. 구스타프 1세의 검에 의해서. 그런데도 그런 자를 사랑하다니. 당신은 정말 이기적인 사람입니다. 절대 용서받지 못할 일족의 배신자기도 하고요.”

“그래서 죽인 겁니까? 제 오빠와 제 부모님을 말입니다.”

“그건 그대의 부모님 선택이었습니다. 그대가 살아 있는 걸 감추려 했거든요. 우릴 속인 거죠. 차라리 그대를 내놓았다면 그대의 오빠도, 부모님도 죽지 않았을 텐데 말입니다.”

헬로이즈의 말에 키안이 주먹을 꽉 쥐었다. 사실 천 년 전의 일을 들었을 때, 키안의 마음엔 아무런 동요도 일지 않았다.

하지만 테란이 한갓 천 년 전의 일 때문에 자신의 오빠와 부모님을 죽였다고 생각하자, 분노가 심장을 관통했다.

“참 재미있군요. 제게 용서를 구해할 자가, 날 원망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다니.”

키안의 서늘한 목소리에 헬로이즈가 한 발짝 앞으로 나왔다. 그러자 나무 그늘에 가려졌던 헬로이즈의 보랏빛 눈동자가 햇살 아래 그대로 드러났다.

“그게 무슨 말이지?”

“내가 테란을 없애 버리겠다는 뜻이다. 너를 비롯해 내 가족을 죽인 테란을.”

“넌 죄책감도 없는 건가? 네가 배신한 일족과 또…… 네 오라버니에 대해서 말이다.”

“기억나지 않는다. 내가 그 누군가의 환생인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내게 중요한 건 테란이 내 가족을 죽인 자들이란 거지. 내가 검을 들어야 할 상대가 바로 너란 것이다, 헬로이즈.”

키안은 하늘빛 눈동자가 서늘해졌다. 순간 헬로이즈는 그 날카로움에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어리석었다고 생각한다. 천 년 전 나의 선택이. 그리고 또다시 그런 선택을 하려 했던 내가. 이번엔 도망치지 않아. 그 결과가 가장 참혹한 것이라고 해도 나는 내 가족을 위해 테란을 없앨 것이다.”

키안의 서늘한 눈빛에 헬로이즈는 주먹을 꼭 쥐었다.

처음 보는 눈빛이었다. 아직 전생의 기억은 물론, 힘 역시 각성하지 못한 듯했다. 어쩌면 영원히 그 힘을 되찾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그녀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강한 힘에 헬로이즈는 두려움을 느꼈다.

‘내가 잘못 건드린 걸까? 어쩌면 내가 경계하고 두려워해야 할 상대는 황태자인 세이란이 아니라, 키안 레녹스인지도 몰라.’

헬로이즈는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단장님, 이제 도착하셨군요.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팽팽하게 날 선 긴장감 사이로, 사무엘 스텐호프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헬로이즈를 노려보던 키안은 천천히 감정을 수면 아래로 갈무리한 후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스텐호프, 어떻게 알고 왔지?”

“전하께서 단장님을 보신 모양입니다. 드레이크 경에게 모셔오라 명령하셨는데, 재판장 안이 초긴장 상태라 자릴 뜰 수가 없어 제가 대신 왔습니다.”

키안이 옆에 서 있는 헬로이즈를 돌아보며 다시 말을 이었다.

“전하께서 날 보셨다고?”

“네, 저도 그 많은 인파 속에서 어떻게 단장님을 보셨는지 놀랐습니다. 사실 저 역시도 계속 입구 쪽을 주시하고 있었는데, 보지 못했었거든요. 저를 따라오십시오. 대신전의 광장으로 들어가는 모든 곳이 이미 제국민으로 가득 차 있습니다. 드레이크 경께서 대신전을 통해 안전하게 들어갈 수 있는 길을 알려주셨습니다.”

키안 역시 대신전으로 오는 동안 거리를 가득 채우고 있는 제국민을 보아, 알고 있었다.

“저기 단장님, 혹시 테란의 공주님도 함께 모시고 가야 하는 겁니까?”

사무엘 스텐호프가 뒤에 서 있는 헬로이즈를 보며 슬쩍 물어왔다. 그러자 키안은 차가운 표정으로 말했다.

“그럴 필요 없다. 아무 도움 없이 날 찾아왔듯, 혼자서 알아서 돌아갈 것이다. 그나저나 공개 재판의 분위기는 어떻지? 지난번처럼 사고가 있었던 건 아니고?”

키안이 뭘 묻는지 바로 알아챈 사무엘에 서둘러 보고를 했다.

“대신전의 광장으로 들어서기 전에 구경꾼 중 누군가가 돌멩이를 던져 사내의 머리에 상처가 나긴 했습니다. 하지만 법무대신이신 리치문트 공작님의 조치로 금방 잠잠해졌습니다.”

“그래? 다행이군. 소동이 일 것이라 생각했는데 말이야.”

“공작님께서 재판장에서 죄인이라는 결론을 내기도 전에 죽게 된다면, 상해를 입힌 모든 자를 살인죄로 기소하겠다고 하셨거든요.”

“그럼 그 남자는 죄를 인정했고?”

“그게 매우 충격적이었습니다. 공개 재판을 받게 된 자는 르위스 리셋으로 리셋 백작가의 차남이었더군요.”

“리셋 백작가라고? 그렇다면, 르위스 리셋이란 자의 아내와 아들을 죽인 자는 그의 형님인 리셋 백작이겠군.”

키안의 말에 사무엘이 놀란 표정을 했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사실 그것 때문에 대신전은 충격 그 자체였습니다. 가문의 명예를 위해 친동생의 가족을 살해하다니. 아, 이쪽입니다. 조금만 더 가면 대신전의 광장으로 통하는 문이 나올 겁니다.”

잠시 후 두 사람은 광장으로 나가는 문 앞에 도착했다.

“데리러 와줘서 고맙다, 스텐호프. 네가 그 순간 나타나지 않았다면 아주 난처한 일이 일어날 뻔했었다.”

“테란의 공주님과 무슨 일 있으셨던 겁니까?”

사무엘 스텐호프가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사실 자신이 다가가기 전 두 사람 사이에 감돌던 냉기에 발을 멈춰야 했던 것이다.

“인내심이 바닥 날 뻔했지.”

아마 그랬다면, 단검으로 그녀의 목을 겨눴을지도 몰랐다. 키안은 사무엘 스텐호프에게 미소를 지어 보인 후, 그를 지나쳐 공개 재판이 열리는 대신전의 광장으로 나가는 문손잡이를 붙잡았다.

그러다 잠시 걸음을 멈추곤 그를 돌아보았다. 그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었다.

“스텐호프, 귀족들 중 가문의 명예를 위해 가족을 희생시켜도 상관없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아주 많다. 하지만 반대로 가족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는 이들도 있지. 다행인 건, 우리가 그중 후자란 사실이다. 행운인 거지.”

평소와 달리 묵직한 감정을 담고 울리는 키안의 목소리에 사무엘이 고갤 들었다.

“단장님, 괜찮으신 거죠?”

“당연히 괜찮다. 그저 네가 충격을 받은 것 같아 말해주고 싶었다. 쫄지 말라고. 그리고 부탁 하나 하자면, 드레이크 경을 도와주도록 해. 앞으로 네 도움이 필요할 것이다.”

그 말과 함께 키안은 공개 재판이 열리고 있는 대신전의 광장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사무엘은 키안의 뒷모습을 보며, 멍하니 서 있었다.

‘마치 작별 인사처럼 느껴지는 건 내 착각일 거야.’

햇살을 받으며 걸어가는 키안이 마치 사라져 버릴 것 같다는 생각에 사무엘이 키안을 불렀다.

“단장님, 잠깐만…….”

하지만 이미 키안은 그의 말이 들리지 않을 정도로 멀리 간 후였다.

**

“전하, 레녹스 공작입니다.”

“알고 있다. 이미 보았거든. 표정은 괜찮군.”

세이란의 시선은 어느새 아센 공작과 얘길 나누고 있는 키안에게 향해 있었다.

아센 공작과 얘길 나누고 있는 키안의 모습은 평소처럼 차분해 보였다.

정중한 미소와 여유 있는 표정까지. 평소의 키안이 맞았다.

‘다행이야. 하지만 평소와 같아서 더 불안해. 또 참고 있는 것일 테니까.’

그리고 그 순간, 키안의 시선이 테란의 헬로이즈 공주에게 향하는 것이 보였다. 서로를 쏘아보는 눈빛이 눈에 띄게 날카로웠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까지 헬로이즈 공주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었어. 설마 키안을 만나러 간 것이었나?’

세이란은 미간을 찌푸렸다. 공개 재판 도중 갑자기 헬로이즈가 자리를 비우자, 그는 당연히 제임스 에버콘 공작을 만나러 갔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에버콘이 아니라 키안이었다니. 그럼 제임스 에버콘은 어디에 있는 거지?’

황제의 독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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