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20 화
엘렌은 창문으로 다가가 커튼을 열었다. 그러자 밝은 햇살이 황제가 누워 있는 침대에까지 들어왔다.
창문을 열어 상쾌한 공기가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한 다음, 엘렌은 황제 윈슬러가 누워 있는 침대로 다시 돌아왔다.
“오늘 대신전의 광장에서 공개 재판이 열린다고 합니다. 아마, 황태자 전하께서도 참석하셨을 겁니다.”
마치 윈슬러가 깨어 있기라도 한 듯 엘렌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눈을 감고 있는 윈슬러에게선 그 어떤 대답도 없었다.
“그리고 어제 키안 레녹스 공작을 만났습니다. 황제 폐하께서 아끼시는 레녹스가의 아이를 말입니다.”
엘렌은 미지근한 물에 깨끗한 수건을 적힌 후 윈슬러의 손을 천천히 닦아주기 시작했다.
“제 행동에 화가 나셨을 테지만, 너무 노여워하지는 마십시오. 테란에서 온 그 아이에게도 똑같은 말을 해주었으니까요. 그러니 공평한 겁니다.”
공평이란 말을 하는 동안 엘렌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떠올랐다. 사실 공평하지 못했다.
테란의 헬로이즈 공주와 유스타나의 키안 레녹스의 삶은 판이하게 달랐다. 한쪽은 한 나라의 공주로서 너무도 행복하게 지냈고, 또 한 명은 자신을 저주받은 아이라고 생각하며 불행하게 지내왔다.
그런데 어떻게 공평할 수가 있다는 말인가.
하지만 두 사람을 모두 만나본 엘렌의 생각은 180도 달라져 있었다.
무엇 하나 모자랄 것 없이 사랑을 받고 행복하게 자란 헬로이즈보다, 자신의 모든 삶을 부정하며 지독한 죄책감과 책임감을 등에 업고 살아온 키안 레녹스가 훨씬 강하고 훌륭하게 자라 있었다.
“하지만 선택은 그들의 몫입니다. 황제 폐하께서도 이미 알고 계시지 않으셨습니까? 신탁을 받은 순간부터 우리가 어찌할 수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천 년 전 시작된 인연의 수레바퀴는 현생에 와서 또 다른 악연으로 얽혀 서로의 목에 검을 겨누게 되었다.
그때와 다른 것이 있다면, 이번 생에선 누가 누구의 목에 검을 찔러 넣을지 알 수가 없다는 사실이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바꾸어놓으신 겁니다. 그러니, 황제 폐하께선 원망하실 수 없습니다. 그 어떤 불행이 닥쳐와도, 이젠 그들이 견뎌야 할 몫이니까요.”
그 말과 함께 엘렌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곤 언제 그랬냐는 듯 윈슬러의 손을 마저 닦아낸 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곤 대신전에 가져온 허브로 만든 향초의 불을 켰다.
시간이 지나자, 황제의 침실은 짙은 허브 향으로 가득 찼다.
**
유스타나 제국의 황태자 세이란이 법무대신인 에드윈 리치문트 공작과 함께 대신전의 광장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공개 재판을 참관하기 위해 온 귀족들과 제국민이 일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유스타나 제국의 황태자 전하십니다.”
귀족 회의의 수장인 아센 공작이 황태자의 등장을 알리자, 기다렸다는 듯 허릴 숙여 예를 갖췄다.
“다들 앉아도 좋다.”
낮고 힘 있는 목소리가 광장을 울렸다. 귀족들은 물론 대신전의 광장에 모여 있던 제국민은 황태자인 세이란이 뿜어내는 카리스마에 숨을 삼켰다.
조각처럼 완벽한 외모와 서늘한 눈빛에서 느껴지는 위엄은 그가 구스타프 황실의 후계자임을 말해주었다.
세이란이 자리에 앉자, 아센 공작을 비롯한 귀족들이 착석했다. 그 뒤를 이어 제국민 역시 자리에 앉아 죄인이 모습을 드러내길 기다렸다.
“레녹스 공작은 아직인 모양이군.”
세이란이 대신전의 광장은 물론 도로까지 가득 메운 제국민을 보며 말했다.
“그런 모양입니다.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약속은 지키는 사람이니, 곧 도착할 겁니다.”
세이란은 눈살을 찌푸렸다. 에드윈은 자신이 걱정하는 게 키안이 재판 시간에 늦게 도착하는 것이라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차라리 몸이 아프단 핑계로 나타나지 않았으면 좋겠군.”
“네? 그게 무슨?”
그제야 에드윈이 의아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초조한 듯 앞을 응시하고 있는 그의 표정에서 진심으로 키안이 나타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전하께선 레녹스 공작이 공개 재판의 증인으로 나서는 게 싫으신 모양이야. 하지만 이렇게까지 싫어할 이유가 있는 건가?’
에드윈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 이유를 생각했지만, 특별이 떠오르는 게 없었다.
그때 말을 탄 황실 기사단의 드레이크가 모습을 드러냈다. 그러자 길을 가득 메우고 있던 제국민이 기사단을 위해 길을 내주었다.
바로 뒤에 철창으로 된 마차가 보이자, 여기저기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드디어 도착한 모양입니다. 이제 재판을 시작하는 게 좋겠군요, 법무대신.”
아센 공작의 말에 법무대신인 에드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죄인을 모두가 볼 수 있도록 광장의 중앙으로 데리고 오라.”
에드윈의 말이 떨어지자, 컨스터블 소속의 감독관이 마차에서 내리더니 철창문을 열고는 서둘러 죄인을 마차에서 끌어 내렸다.
아이를 안은 사내는 몇 번이나 발을 헛디뎌 휘청거렸지만, 감독관은 인정사정없이 그를 끌어당겼다.
“읏-”
사내가 신음을 삼키며, 품에 안은 아이를 떨어뜨리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게 보였다.
퍽! 그 순간 달걀이 날아와 사내의 어깨에 맞았다. 그것을 시작으로 토마토와 돌멩이가 날아들었다.
“흡-”
날아든 돌멩이가 또다시 사내의 이마에 맞고 떨어졌다.
뚝뚝, 붉은 피가 떨어지자 사내의 품에 안겨 있던 아이가 고갤 들었다.
“아빠, 괜차나? 아퍼?”
아이가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걱정스러운 표정을 했다. 그러곤 손을 뻗어 자신의 옷소매로 사내의 이마에 흐르는 피를 닦아주었다.
“하나도 아프지 않아. 그러니 넌, 걱정할 것 없어.”
사내가 고통을 삼키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이마에 흐르는 피의 양으로 보아 상처가 깊은 듯했다.
그 정도라면 의식이 멀어질 정도로 충격이 컸을 테지만, 사내는 아무렇지 않은 듯 아이에게 웃어 보였다.
“그만! 지금부터 돌이나 다른 뭔가를 던졌다간, 그에 상응하는 죗값을 받게 될 것입니다.”
감독관이 흥분한 군중을 쏘아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사실 오늘 아침 법무대신인 에드윈 리치문트 공작이 그렇게 명령했었다. 죄인이 재판을 받기 전 다치거나 죽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그래서 며칠 전처럼 누군가가 돌을 던져 상해를 입힌다면, 처벌하겠다는 말까지 했었다.
“어차피 죽을 자인데 돌을 던지면 안 되는 겁니까? 금기를 어긴 중죄인이니 당연히…….”
군중 속에 있던 한 사내가 비아냥거리며 말했다. 그러자 에드윈이 그 사내는 물론 제국민을 향해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직 재판이 시작되지도 않았다. 그대들은 공정한 재판장에서 살인을 저지를 셈인가? 유스타나 제국의 제국민으로서 긍지가 없나?”
제국민의 긍지란 말에 불만스러운 표정으로 서 있던 사내가 입을 다물었다.
“감독관, 어서 그를 이곳으로 데려오라.”
“네. 서둘러, 더 맞고 싶지 않다면.”
감독관이 사내의 걸음을 재촉했다. 어느새 계단을 다 오른 감독관과 사내는 광장의 중앙에 설치되어 있는 단 위로 올라갔다.
“지금부터 공개 재판을 시작한다. 너의 이름이 뭔지 말하라.”
에드윈의 질문에 사내가 천천히 고갤 들었다. 그러곤 지금까지 침묵을 지키고 있던 사내는 담담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제 이름은 르위스 리셋입니다. 리셋 백작가의 차남이기도 합니다.”
“귀족이었군.”
그 한마디로 지금까지 제임스 리셋이 입을 다물고 있었던 이유를 알게 되었다. 금기를 어긴 귀족은 그 가문까지 멸문이었다.
그러니 리셋 백작 가문을 위해 지금까지 침묵하며, 도망을 다녔던 모양이었다.
“르위스 리셋, 그대에게 묻겠다. 그대가 부인과 아들을 죽였나?”
에드윈의 물음에 르위스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부인과 아들이 죽었다는 말에 침통한 표정이었지만, 눈물을 흘리지 않았다.
마치 자신은 눈물을 흘릴 자격조차 없는 것처럼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제가 죽인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그 말은 모자가 자살을 했다는 건가?”
또다시 에드윈의 질문이 이어졌다. 그러자 르위스 리셋은 고갤 가로저으며 부정했다.
“아닙니다. 제 아내와 아들은 살해당했습니다.”
살해당했다는 말에 대신전에 모여 있던 사람들이 술렁이기 시작했다.
“아주 이상한 말을 하는군. 그대가 죽인 것도 아닌데, 살해를 당했다니. 대체 누가 그대의 아내와 아들을 죽였다는 거지?”
르위스 리셋의 눈동자가 슬픔으로 가득 찼다.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이는 모습에서 그 역시 그 사실을 믿고 싶지 않은 눈치였다.
“어서 말하라, 그대의 아내와 아이를 죽인 자를.”
거듭되는 재촉에 르위스 리셋이 마음을 굳힌 듯 고갤 들었다.
“제 아내와 아들을 죽인 사람은, 제 형님인 리셋 백작입니다.”
충격으로 인해 순식간에 대신전에 침묵이 찾아들었다. 흥분되었던 공기 역시 차갑게 식은 듯 서늘해졌다.
황제의 독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