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9 화
카일은 막사를 빠져나오기 전, 잠들어 있는 테란의 용병들을 다시 한 번 확인했다.
국경을 넘느라 며칠 동안 높은 산맥을 지나와서인지 용병들은 곯아떨어져 업어 가도 모를 정도였다.
카일 역시 강행군에 지쳐 있었지만, 지금이 아니면 떠날 기회가 더는 없을 것 같았다.
‘내일이면 유스타나야. 키엘체까진 초원이고. 만약 도망칠 기회가 생긴다고 해도 얼마 가지 않아 붙잡힐 게 분명해. 몸을 숨길 만한 곳이 없을 테니까.’
발소리를 죽이며 막사를 나온 카일은 주위를 살폈다. 이미 어두워지기 전에 주변의 지리를 알아놓았기 때문에 어디로 가야 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휴우-”
천천히 심호흡한 카일은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러곤 테란의 용병들이 머물고 있는 야영지를 벗어나려는 순간, 인기척이 들려왔다. 놀란 카일이 재빨리 몸을 숙인 채, 주위를 살폈다.
‘설마, 들킨 건가?’
하지만 막사를 나올 때까지 자신을 감시하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테란의 용병 기사단에 합류한 후부터 자신의 곁에서 감시의 끈을 놓지 않던 알버트란 자 역시 어느 순간부터 경계심을 버린 듯했다.
바스락.
또다시 인기척이 느껴지자, 카일은 옆구리에 차고 있던 단검으로 손을 뻗었다. 최악의 순간, 적의 숨통을 끊어놓기 위해서였다.
잠시 후 덩치가 작은 사내가 걸어오더니, 바위에 걸터앉는 게 보였다.
‘저 사람은…….’
알버트란 자가 유스타나 제국의 전 대신관이라고 했던 바로 그 노파였다.
순간 카일은 망설였다. 사실 산맥을 넘는 동안 노파를 지키던 기사들에게서 아주 재미있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다.
‘헛소리가 분명해. 지금 유스타나 제국에 대신관이 있어. 그런데 어떻게 저 노파가 다시 대신관이 될 수가 있겠어.’
만약 현 대신관이 죽지 않는다면 절대 불가능한 일이었다.
대체 무슨 근거로 그런 말을 하는 것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확인해 봐야 할까? 저 노파를 붙잡아 추궁하면…….”
아니, 추궁해 진실을 듣는 것보다 노파를 데리고 가는 편이 더 빠를 듯했다.
“휴우-”
바위에 앉았던 노파가 막사로 돌아가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서는 게 보였다.
카일이 재빨리 몸을 일으킨 후, 한 손으로 노파를 붙잡고 남은 한 손으론 입을 막으려 했다.
“유스타나인이군요. 소리 지를 생각 없습니다. 기다렸습니다.”
놀란 카일이 노파의 입을 막는 대신 그녀를 노려보았다.
이미 그녀는 자신이 도망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차분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알고 계셨습니까?”
“전할 말이 있어서 기다렸습니다.”
그녀의 말 한마디에 카일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믿지 않았었다. 노파가 전 대신관이었다는 사실을. 하지만 달빛 아래 드러난 노파의 은회색 눈동자를 본 순간, 도미니크 대신관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서, 설마…….”
카일이 포박하듯 붙잡고 있던 노파의 팔을 놓았다. 그러자 고통으로 일그러져 있던 노파의 미간이 펴졌다.
그때 막사를 지키던 병사 하나가 노파를 찾는지 걸어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의 손에 횃불이 들려 있었다.
“서둘러야 합니다.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습니다.”
그 말과 함께 노파가 카일에게 종이 하나를 건넸다. 그러곤 감시병이 있는 곳으로 걸아가기 시작했다.
“왜 이렇게 늦은 겁니까? 혹시 딴짓은 하지 않았을 테죠?”
“내일이면 21년 만에 고향 땅에 발을 디디는 겁니다. 들떠 잠이 오지 않아서 잠시 앉아 있었던 것뿐입니다. 콜록콜록!”
노파가 기침하자, 횃불을 든 병사가 뭔가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곤 서둘러 막사로 걸어가는 게 보였다.
카일은 천천히 숨을 고른 후, 노파가 준 종이를 펼쳤다. 그러곤 달빛을 등불 삼아 그 안에 적힌 내용을 확인했다. 순간 종이를 쥔 카일의 손끝이 바르르 떨렸다.
“맙소사!”
카일은 누가 볼까 두려운 듯 주위를 살폈다. 그러곤 노파가 준 종이를 재빨리 입에 넣어 삼켰다.
중요한 내용일수록 증거를 남기지 말아야 한다고 주군인 세이란이 말했었다.
“서둘러야겠어. 늦기 전에 전하께 알려야 해.”
더는 인기척이 들리지 않자, 카일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곳을 빠져나왔다.
얼마나 갔을까? 좁은 길을 따라 한참을 내려가던 카일이 잠시 걸음을 멈추곤 바위에 앉아 숨을 골랐다.
그때였다.
뒤에서 인기척도 없이 그림자가 어른거리더니, 순식간에 지독한 고통에 눈앞에 캄캄해졌다.
“헉-”
카일은 손을 뻗어 뒤통수를 만졌다. 아픔과 함께 끈끈하고 뜨거운 액체가 만져졌다.
‘젠장, 뒤를 밟는 자가 있었다니.’
카일은 정신을 차리려 안간힘을 썼지만, 의식은 점점 멀어져 갔다.
그의 몸이 힘없이 바닥에 푹 쓰러졌다. 그리고 눈을 감기 전, 마지막으로 낯익은 사내의 얼굴이 보였다.
“너는…….”
그 말과 함께 카일은 정신을 잃었다.
**
날이 밝자마자, 키엘체의 제국민이 하나둘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공개 재판이 열리는 날이었다. 그래서인지 재판을 지켜보기 위해 나온 구경꾼들의 얼굴엔 흥분과 함께 날 선 긴장감이 서려 있었다.
얼마 전, 관습법을 어긴 사내가 컨스터블 소속의 감독관에 의해 붙잡혀 왔었다. 그것을 지켜보던 제국민 중 누군가가 토마토를 던졌고, 그것이 도화선이 되어 선량하던 사람들은 성난 군중으로 바뀌었다.
잔혹한 폭력과 멸시가 쏟아졌고, 결국 사내의 얼굴에 날아든 돌이 생살을 찢고 붉은 피가 흘러내리자 군중이 뒤로 물러섰다.
평범한 제국민이 분위기에 휩쓸려 내재되어 있던 폭력성을 드러냈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듯했다.
그래서인지 셀서스 궁에서부터 대신전으로 가는 길목에 서서 죄인이 나오길 기다리는 제국민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어렸다.
“저기 나온다.”
셀서스 궁의 문이 열리자, 말을 탄 황실 기사단의 기사들이 보였다. 그리고 그 뒤로 공개 재판을 받게 될 사내가 아이를 품에 꼭 끌어안고는 모습을 드러냈다.
컨스터블 소속의 감독관으로 보이는 자가 사내를 철창으로 만들어진 마차에 태웠다.
그러곤 마차를 끄는 마부석에 자릴 잡고 앉더니 맨 앞에 서 있는 기사를 향해 고갤 끄덕였다. 준비가 다 되었다는 신호인 듯했다.
덜컹 소리와 함께 마차 바퀴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죄인을 태운 마차가 구경꾼 사이를 지나가자, 모두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품에 안긴 아이가 쌍둥이 중 딸이군요.”
구경꾼의 목소리에 철창에 갇혀 있던 사내의 눈동자가 날카롭게 번뜩이더니, 보호하려는 듯 아이를 품으로 바짝 끌어안았다.
“쯧쯧, 미쳤군, 미쳤어. 계집아이 하나 버리는 게 뭐가 대수라고. 멍청하게 살려두니 이 사단이 났지.”
“다 저 딸년 때문이군요. 부모는 물론, 오빠까지 죽이다니.”
고갤 숙이고 있던 아이가 조심스럽게 얼굴을 들었다. 그러곤 자신을 쏘아보는 사람들을 바라보았다.
“저 얼굴 좀 봐요. 불길하게 생기지 않았나요?”
“불행을 몰고 오는 저주받은 아이라고 하더군요. 소문에 저 아이가 태어났기 때문에 가족에게 불행이 닥쳤다고 하더군요.”
“어이, 기사 양반. 재판까지 받을 것 없이 우리에게 저 사내와 아이를 내주는 게 어떻겠소?”
“맞다. 저런 자에겐 교수형도 아깝지, 아까워.”
악의에 찬 비난과 조롱에 아이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이가 두려운 듯 아버지를 불렀다. 사내는 그제야 자신의 옷 속에서 아이가 얼굴을 내밀었다는 사실을 깨닫곤, 겉옷으로 아이의 눈을 가렸다. 그러곤 아이의 귓가에 뭔가를 속삭이는 게 보였다.
갑자기 웅성거리며 욕설을 뱉어내던 구경꾼들이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사내가 아이에게 자장가를 불러주고 있었다.
유스타나 제국의 아이라면 한 번쯤은 당연히 부모에게 들었을 노래였다.
그 익숙한 멜로디가 서툴지만 애정이 가득 담긴 목소리로 불렸다. 그 소리에 거친 욕설을 뱉어내던 자들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곤 아이의 귓가에 노랠 불러주는 사내의 얼굴을 처음으로 자세히 바라보았다.
언제 죽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남자의 눈동자는 한없이 자애로웠고, 아이에 대한 애정으로 가득 차 있었다.
“뭐야? 평범하게 생겼잖아?”
“그렇군요. 중죄인이라 악마라도 닮은 줄 알았더니. 흠흠!”
거리를 가득 메운 이들 역시 누군가의 부모였고, 또 누군가의 자식이었다. 사내가 아이를 바라보는 그 눈빛과 그 표정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고 있었다.
“쳇! 쇼하는 거지. 속지들 마쇼. 저 선량한 얼굴에 말이요.”
누군가 거짓이라고 말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아이를 달래는 사내의 눈빛을 본 후, 구경꾼들은 동조하는 대신 입을 다물었다.
“휴우-”
말을 타고 천천히 거리를 달리던 사무엘 스텐호프는 잠잠해진 분위기에 안도했다.
처음 그들이 모습을 드러냈을 때는 사내와 아이를 바라보는 군중의 눈빛이 검이라도 된 듯 살기를 띠고 있었다. 하지만 조금 전의 모습으로 분위기가 변한 것이다.
“속도를 낸다.”
뒤이어 나타난 황실 기사단의 드레이크가 기사단을 향해 명령했다.
그렇게 황실 기사단을 선두로 죄인을 태운 마차가 대신전을 향해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
“꼭 레녹스 공작이 이 재판의 증인으로 나와야 하는 건가? 그대가 재판장인데, 손을 써서 빼줘도 될 것 같은데 말이야.”
황태자인 세이란의 불만 어린 투정에 에드윈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지금 두 사람은 대신전의 접견실에 앉아 공개 재판이 시작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저도 그게 가능하다면, 그러고 싶습니다. 하지만 본인이 참석하겠다고 하는 마당에 안 된다고 할 수는 없는 노릇이라……. 알지 않습니까? 레녹스 공작이 의외로 고집이 세다는 걸 말입니다.”
세이란이 눈살을 찌푸렸다. 에드윈이나 키안이나 꽉 막혔다고 생각할 정도로 고지식한 데다, 남의 말은 듣지 않고 고집대로 하는 성격이란 사실을 잊고 있었다.
“그런데, 대신관께선 늦으시군요. 사람을 보내야 할 것 같습니다.”
“오늘 재판에 대신관은 참석하지 못할 것이다.”
“참석하지 못하신다니, 무슨 일이 있는 겁니까?”
“며칠 전 대신전에 침입자가 있었고, 그로 인해 대신관이 공격을 받았다. 내가 발견하고 응급조치를 취하긴 했지만, 아직 깨어나지 못한 상태다. 이건 귀족들에게 비밀이다.”
에드윈이 대신관이 깨어나지 못한 채 누워 있다는 말을 듣는 순간, 독에 중독되어 의식을 찾지 못하는 황제가 떠올랐다.
“설마 대신관을 공격한 자들이 황제 폐하께 독을 먹인 자들과 같은 자들인 겁니까?”
에드윈이 목소리를 낮췄다. 하지만 그의 목소리에선 긴장이 서려 있었다.
“그럴지도 모르지. 하지만 대신전에 그들의 첩자가 있었던 건 분명하니, 그들 역시 대신관의 상태를 알고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들의 손에 유스타나 제국의 전 대신관이 붙잡혀 있을지도 몰랐다.
“그나저나 레녹스 공작이 늦는군요. 곧 공개 재판이 시작될 텐데 말입니다.”
에드윈이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10분 후면 공개 재판이 시작될 시간이었다.
“이제 재판이 열리는 대신전의 광장으로 나가셔야 할 시간입니다.”
세이란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곤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에드윈 리치문트 공작, 공개 재판이 시작되면 그대가 할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재판을 끝내는 것이다.”
“걱정 마십시오. 어떤 결과가 나오든 그럴 생각입니다.”
세이란이 고갤 끄덕인 후 방을 나갔다. 에드윈은 그의 뒤를 따르며, 숨을 골랐다.
드디어 공개 재판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황제의 독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