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독사과-118화 (118/139)

제 118 화

13장. 인연의 수레바퀴

“드디어 끝이군. 아레오, 지금까지 검술 대회에 참가를 지원한 자가 얼마나 되지?”

마지막 지원자가 돌아가자, 드레이크는 책상에 앉아 지원자의 이름을 기록하고 있는 아레오를 보며 물었다.

“걱정입니다. 참가자가 이렇게 많아서야……. 본전 진출자를 가려내기 위해선 예선전을 따로 치러야 할 정돕니다.”

“그래야지. 최종 열 명만 선발한 후 토너먼트 형식으로 대회를 치를 생각이거든.”

“그럼 대회가 시작되기 전에 예선전을 치러야 할 것 같습니다. 인원이 많아서 예선전을 치르는데도 며칠은 걸릴 테니까요.”

아레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어딜 가려고?”

“늑대 훈련 시간이 다 되었거든요.”

“아, 단장님께서 전쟁터에서 데려온 그 은빛 늑대?”

“네. 단장님께서 그 늑대 이름을 은빛안개라 지으셨습니다. 정말 귀엽지 않습니까?”

“은빛안개라니, 암컷인 모양이군.”

드레이크의 말에 아레오가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드레이크의 관점에선 용맹스러운 이름을 붙이지 않아 암컷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제가 확인해 보았는데, 수컷이었습니다.”

“뭐? 수컷인데 그런 여리여리한 이름을 지었다고.”

드레이크가 놀란 듯 눈썹을 치켜뜨자, 아레오가 고갤 가로저으며 말했다.

“편견이란 걸 아시잖습니까? 우리 단장님만 봐도요. 이름이나 외모는 아무런 상관도 없다는 것을요.”

아레오의 지적에 드레이크가 수긍하듯 고갤 끄덕였다.

“그렇지. 내가 또 바보 같은 말을 했군.”

드레이크가 멋쩍은 듯 머릴 긁적였다. 그러자 사무실 안으로 사무엘 스텐호프가 걸어오는 게 보였다.

“무슨 일 있나, 스텐호프?”

어두운 안색을 살피며, 드레이크가 물었다.

“그 소문 들으셨습니까? 내일 공개 재판이 열린다는 것 말입니다.”

“알고 있다. 검술 대회로 키엘체가 용병으로 넘쳐나기 시작하는 판국에 공개 재판까지 열리다니. 모였다 하면, 다들 그 공개 재판 얘기뿐인 것 같더군. 그나저나 재판은 대신전에서 열린다지?”

“첫 번째 재판이니 그럴 겁니다. 만약 판결이 내려지지 않는다면, 재판장에서 다시 열린다고 알고 있습니다.”

두 사람의 얘길 듣고 있던 아레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끼어들었다.

“사실 전 좀 무섭습니다. 붙잡혀 온 사내와 아이에게 성난 군중이 돌을 던졌다고 들었거든요. 머리가 깨졌다고 했습니다. 만약 대신전까지 가는 동안 똑같이 돌이라도 던진다면, 판결이 나기도 전에 사내는 물론, 아이 역시 죽을 수도 있을 테니까요.”

전혀 불가능한 얘기가 아닌 듯, 아레오의 얘길 듣고 있던 사무엘이 미간을 찌푸리며 말했다.

“사실 저는 단장님이 더 걱정입니다.”

그 말과 동시에 드레이크와 아레오의 표정 역시 어두워졌다.

“하필 그 사건을 목격하셔서는. 혹시 황태자 전하께 말씀드리면 목격자 증언을 하지 않아도 되는 것 아닐까요? 그 정도 힘은 써주실 수 있을 것 같은데 말입니다.”

“단장님 성격에 그런 걸 부탁하실 분이 아니란 걸 알고 있잖아.”

드레이크가 씨알도 먹히지 않는 소리 하지 말라는 얼굴을 했다.

“하지만 위험한 걸요. 자칫 잘못했다가 구경꾼이 던진 돌멩이나 달걀에 단장님께서 맞기라도 하시면 큰일이지 않습니까.”

아레오가 볼멘소리를 했다.

“누가 감히 단장님께 그런 걸 던진다는 거야? 실수라도 절대 그런 일은 없을 테니 걱정 마. 그리고 내일 공개 재판에 기사단 중 몇 명이 따라가기로 했다.”

“제가 가겠습니다, 드레이크 경.”

사무엘이 재빨리 지원했다.

“좋다. 사무엘 스텐호프, 정신 똑바로 차리고 단장님을 호위하도록 해. 내 말 무슨 말인지 알았겠지?”

드레이크의 말에 사무엘의 눈동자가 결의로 빛났다.

“걱정 마십시오. 머리카락 한 올 다치시지 않고, 기사단으로 복귀할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

키안은 황제궁의 시녀인 엘렌의 갑작스러운 방문에 놀라는 중이었다. 응접실에 앉아 차를 마시는 동안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고 있었지만, 엘렌 역시 자신이 의아하게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레녹스 공작님, 연락도 없이 찾아와 죄송합니다.”

“놀라긴 했지만, 이렇게 마주 앉아 있으니 낯설지 않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렇습니까? 하지만 공작님께선 기억하지 못하실 겁니다.”

엘렌의 말속에 담긴 뜻을 헤아리며, 키안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그러곤 차분한 얼굴로 차를 마시고 있는 엘렌을 응시했다.

‘잠깐, 지금 그 말은 전에 레녹스 공작가를 방문한 적이 있다는 뜻인 건가?’

키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시녀 복장이 아니라, 귀부인들처럼 평범한 드레스 차림이라서 그런지 엘렌의 모습이 지금까지완 다른 느낌이었다.

“전에 레녹스 저택을 방문한 적이 있으십니까?”

“네. 딱 한 번 있었습니다.”

“혹시 어머니의 친구 분이십니까?”

그러고 보니 엘렌의 나이가 어머니와 비슷하다는 것에 생각이 미쳤다.

“친구는 아닙니다. 하지만 오래전부터 인연이 있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친구가 아니라면, 사교계의 파티에서 자주 마주쳤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저 스친 인연이 다인데, 왜 레녹스가를 방문한 걸까? 자신이 알기론 어머니께선 함부로 누군가를 집으로 들이지 않았었다.

그건 쌍둥이가 레녹스 가문에 태어났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그렇습니까? 하지만 저는 기억이 없군요. 언제 방문하셨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생각해 보면, 자신은 대부분의 시간을 레녹스가의 옥탑에 갇혀 살았다. 그래서 부모님에 대해서 아는 게 거의 없었다. 또한 저택의 방문객에 대해서도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아마 모르실 겁니다, 공작님께서 태어나기 전이라.”

“그렇군요. 그럼 오늘 저를 찾아온 이유를 물어도 되겠습니까?”

그때 응접실 밖에서 날카로운 발톱이 문을 긁는 소리가 들려왔다.

“밖에서 뭔가 소리가 들리는군요.”

“아,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제가 기르는 늑대거든요.”

“아, 은빛 늑대 말이군요. 셀서스 궁에서 본 적이 있습니다. 저는 신경 쓰지 마시고, 안에 들여보내 주십시오. 저렇게 내버려 뒀다간, 문이 긁혀 엉망이 될 겁니다.”

엘렌의 말에 키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곤 응접실 문을 열어 은빛안개가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했다.

안으로 들어온 은빛안개는 털을 바짝 세운 후,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며 엘렌에게 경계심을 드러냈다.

“제가 대신 사과하겠습니다. 원래 이 녀석은 낯선 이들에게 경계하는 편이라.”

키안이 은빛안개의 머리에 손을 올려놓으며 진정시켰다. 그러자 이를 드러내던 은빛안개가 키안의 옆에 자릴 잡고 앉았다.

하지만 황금빛 눈동자는 여전히 엘렌을 경계하듯 날카롭게 쏘아보고 있었다.

‘대체 이 녀석이 왜 이러는 거지?’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키안은 은빛안개의 모습이 낯설었다.

“주인을 지키기 위해선 당연히 그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좋은 눈빛입니다. 주인을 닮았군요.”

엘렌은 크게 신경 쓰지 않는 눈치였다. 아니, 오히려 은빛안개의 태도를 은근히 칭찬하는 모습이었다.

“이해해 주니 고맙군요, 엘렌.”

“이제 제가 온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레녹스 공작님.”

엘렌이 자릴 고쳐 앉으며, 키안을 응시했다. 그러자 그녀를 둘러싸고 있던 공기가 순식간에 변하기 시작했다.

‘뭐지, 이 느낌은? 엘렌이란 사람이 이렇게 존재감이 강했었나?’

너무도 다른 모습에 키안은 본능적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지금부터 제가 해드릴 이야기는, 살아계셨다면 당연히 공작님의 아버님이신 전 레녹스 공작께서 하셨을 겁니다. 공작님께서 성년이 되셨던 그날 말입니다.”

키안이 눈을 가늘게 뜨고 엘렌을 응시했다. 어머니와 친구도 아니라고 했다. 저택을 방문한 것 역시 딱 한 번이고.

‘그런데 왜 이런 것까지 알고 있는 거지? 마치 후견인이라도 되는 것처럼 말이야.’

키안이 이 상황이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얼굴로 엘렌을 보았다.

“여기서 왜 아버님의 얘기가 나오는 건지 모르겠군요.”

키안의 서늘한 목소리에 엘렌이 당연하다는 얼굴을 했다. 황궁의 시녀라고만 알고 있는 자신이 갑자기 방문해 이런 밑도 끝도 없는 말을 한다면 의심 없이 믿을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마차 사고가 있기 전 공작부인을 만난 사람이 바로 저입니다.”

“그럼 어머니께 편지를 보낸 이도 엘렌 당신인가요?”

“그렇습니다.”

키안이 앞에 놓여 있는 찻잔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비어 있음을 확인하곤 내려놓았다.

그러자 그녀의 긴장을 눈치챈 듯, 은빛안개가 붉은 혀로 그녀의 손을 건드렸다.

마치, 자기가 지켜줄 테니 긴장하지 말라는 듯이.

엘렌이 찻주전자를 들어 키안의 잔에 뜨거운 차를 가득 따라주었다.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찻잔을 바라보던 키안이 단호한 눈빛으로 고갤 들었다.

“이제 얘기해 주세요. 부모님께서 살아계셨다면 해주었을 그 얘기가 뭔지를.”

키안의 하늘빛 눈동자를 물끄러미 응시하던 엘렌이 차분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레녹스 공작 부처의 마차 사고는 우연이 아니었습니다. 이미, 공작 부처께선 자신들의 죽음을 알고 계셨습니다.”

“그게 무슨…….”

키안은 입을 다물었다. 묻고 싶은 게 아주 많았다. 하지만 지금은 엘렌의 말을 들어야 할 때였다.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군요. 이미 죽게 될 것이란 걸 알면서도 그런 선택을 했는지 말입니다.”

“그건 공작님께서 태어나기 전에 내려진 신탁 때문이었습니다.”

“지금, 저에 대한 신탁이 내려졌다는 뜻인가요?”

“신탁은 하나가 아니었습니다. 모두 세 개의 신탁이었고, 그중 하나가 바로 레녹스 공작님의 것이었습니다.”

“이 사실을 부모님께서도 알고 계셨다는 것이군요.”

“황제 폐하께서도 알고 계셨습니다. 그리고 신탁을 받은 전 대신관 역시도.”

전 대신관이라면, 미치광이가 되어 더는 대신관으로서의 역할을 하지 못한 채 사라져 버렸다는 여인을 말하는 듯했다.

“황제 폐하께서도 알고 계셨군요. 제가 쌍둥이에, 여인이란 사실을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공작님을 살리기로 결정하신 분도 황제 폐하셨습니다.”

“황제 폐하셨다고요? 왜죠? 저는 저주받은 레녹스가의 쌍둥이인데 말입니다.”

“레녹스가의 저주받은 아이라고 생각하신 모양이군요. 지금껏 자신을 말입니다.”

엘렌이 안타까운 눈빛으로 키안을 응시했다.

“동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동정하는 게 아닙니다. 그저 씁쓸할 뿐. 공작님은 저주받은 아이가 아니라, 선택받은 분입니다. 고귀하고 또, 고귀한 운명을 가진 분이십니다.”

“내가 선택을 받았다고요? 제국의 관습법을 어긴 제가 말입니까?”

키안은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엘렌을 응시했다. 그러자 그녀는 단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지금부터 제가 할 이야기는 아주 깁니다. 또한, 다 듣고 난 후의 선택은 레녹스 공작님의 몫이고요.”

키안이 천천히 고갤 끄덕였다. 그러자 엘렌의 목소리가 응접실 안의 고요를 깨며 울리기 시작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엘렌이 돌아간 후에도 키안은 응접실에 앉은 채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사실 그녀의 시선이 창밖으로 향해 있긴 했지만, 하늘빛 눈동자엔 그 어떤 것도 담기지 않았다.

“말도 안 돼. 대체 왜 이런 일이…….”

키안은 눈을 질끈 감으며, 엘렌이 했던 말이 거짓이길 간절히 바랐다.

그러자 문득 황실 사냥터에서 꾸었던 꿈을 떠올렸다. 그땐 별생각 없이 지나쳤지만, 바뀐 꿈에서 오빠인 키안이 엘렌과 똑같은 말을 했었다.

자신은 저주받은 것이 아니라 선택받은 것이라고. 고귀한 운명을 부여받은 사람이라고.

키안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서둘러 응접실을 나가려던 키안은 발에 뭔가에 걸려 넘어질 뻔했다.

놀라 내려다보니, 은빛안개였다.

“아, 너였구나.”

발을 밟은 게 미안해 키안이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살에 늑대의 은빛 털이 후광처럼 반짝였다.

“하아, 어쩌지? 어떡해야 하지?”

키안이 얼굴을 은빛 늑대의 보드라운 털에 묻었다.

“믿기지 않아. 나에게 거짓말을 하는 거야. 부모님의 사고 역시 사고가 아니었다니. 그런 게 어디 있어. 죽을 줄 알면서 피하지 않는 사람이 대체 어디 있다는 거야! 거짓말이야. 거짓말…….”

키안은 고갤 들어 엘렌이 테이블 위에 남기고 간 손수건을 쏘아보았다. 자리에서 일어선 키안은 손수건을 집어 들곤 아래쪽 귀퉁이에 새겨진 문장을 확인했다.

‘유스타나의 별.’

키안이 주먹을 쥐자, 손수건이 구겨지며 문장 역시 짓이겨졌다.

“그러고 보니, 엘렌의 정체를 묻지 않았어. 대체 어떻게 이 모든 걸 알고 있는 거지? 대체 어떻게?”

설마 엘렌이 황제 폐하의 연인이기 때문에 알게 된 걸까? 하지만 그 정도로 엘렌이란 인물이 폐하껜 중요한 인물이었던 건가? 신탁의 내용까지 공유할 정도로?

키안은 문득 의문이 들었다. 키안이 손을 펴 손수건의 무늬를 다시 한 번 확인했다.

“유스타나의 별이라. 난 이 상징이 찍혀 있는 상자와 장소를 알고 있어.”

키안은 서둘러 자신의 방으로 향했다. 그러곤 세이란과 함께 황실 사냥터의 구스타프 1세의 비밀의 방에서 발견했던 상자를 꺼냈다.

외투를 걸친 후, 서둘러 방을 나왔다. 내일 공개 재판이 열리기 전까지 꼭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마구간으로 향한 키안은 말에 오른 후, 황실 사냥터로 향했다.

황제의 독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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