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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독사과-117화 (117/139)

제 117 화

헬로이즈의 입매가 바들바들 떨렸다. 그녀 역시 로렌스에게 들어 알고 있었다.

"헬로이즈 공주님, 공주님께선 유스타나 제국의 황후가 되실 겁니다. 공주님께서 낳으신 아이들이 유스타나의 주인이 될 것이며, 모든 이가 공주님과 황태자 전하의 발아래 무릎을 꿇게 될 것입니다. 마침내 천 년 전 이루지 못한 꿈이 이뤄지는 것입니다."

하지만 예언된 미래는 바뀌었다. 샤론 에버콘 공작부인을 통해 유스타나 제국의 대신관이 받았다는 신탁의 내용에 대해 전해 들었다.

분명 샤론 에버콘은 신탁이 정한 황태자비는 자신이 아닌, 키안 레녹스라고 했다.

“황태자비가 되지 못한 게 아쉬운 건 아닐 테지? 그대 역시 이제 자신의 마음을 깨달았을 테니까.”

세이란의 말이 날카로운 바늘이 되어 헬로이즈의 심장을 찔렀다.

그의 말처럼 로렌스 루틴 공작의 죽음을 접하고서야 깨달았다. 그를 마음에 담고 있었음을.

유스타나 제국의 황후가 되는 것보다 더 원하는 일이었다는 걸.

“마치 제게 큰 선물이라도 한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그럼, 아닌가?”

“당연히 아닙니다.”

이런 고통이 세상에 존재한다는 사실을 알고 싶지 않았다. 살아 있지만, 매 순간 죽어가는 이 지독한 상실이 자신의 감정이 아니길 바랐다.

하루에 몇 번이나 꾹꾹 눌러 삼켜야 하는 아픔이 전혀 무뎌지지 않아, 화가 치밀었다.

그의 몫이었다. 황태자인 세이란이 평생을 거쳐 느꼈어야 할 그의 감정이었다. 자신의 것이 아니라.

“그대를 동정하지 않는다. 내가 키안 레녹스를 살리는 선택을 했듯, 그것 역시 그대의 선택이었으니까. 그대 역시 운명을 바꿀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세이란은 단호한 목소리로 헬로이즈에게 자신의 선택에 책임을 지라 말하고 있었다.

순간 헬로이즈가 주먹을 꽉 쥐었다.

“책임이라… 참 쉽군요. 그럼 전하께서도 책임을 지셔야 할 것입니다. 전하께서 바꾼 미래에 대한 대가를 말입니다.”

두 사람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혔다. 세이란은 헬로이즈의 보랏빛 눈동자를 바라보며, 씁쓸하게 웃었다.

바뀌지 않았다면 자신의 아내가 되었을지도 모르는 여인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아이러니하게도 서로에게 검을 겨누는 적이 되어 있었다.

“걱정할 것 없다. 처음부터 각오는 되어 있었으니까. 난 내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이건, 로렌스 루틴 공작에게도 똑같이 한 말이다.”

**

키안은 얼굴에 쓴 가면을 고쳐 썼다. 자신이 또다시 파튬의 가면무도회에 오게 될 것이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었다.

하지만 패트리샤를 만날 방법은 이것밖에 없었던 것이다.

“휴우-”

키안은 천천히 숨을 고른 후, 술에 취한 귀족들 사이를 지나쳐 패트리샤를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가면을 쓴 귀족들 사이에서 패트리샤를 찾는 건 쉽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보다 가면무도회에 참석한 귀족들이 더 많아진 것 같았다.

“엇, 죄송합니다.”

귀족들 사이를 지나쳐 앞으로 걸어가던 키안은 벽에 기대 서 있던 사내의 발을 밟고는 놀라 뒤로 물러섰다.

“아닙니다. 통로에 서 있었던 제 잘못입니다.”

사내의 목소리에 키안은 긴장했다.

‘잠깐, 이 목소리는…….’

키안은 고갤 들어 가면 아래 드러난 턱 선과 눈을 동시에 살폈다.

그였다, 사무엘 스텐호프.

순간 키안은 눈살을 찌푸렸다. 분명 사무엘이 파튬의 가면무도회에 참석하는 이유는 용병 블랙이 경매에 참석하는지 여부를 알기 위해서라고 했었다.

그렇다는 건 오늘도 블랙에 대한 정보를 얻기 위해 온 모양이었다.

“친절하시네요. 그럼.”

키안이 정중하게 예를 갖춘 후 패트리샤를 찾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잠깐만, 혹시 지난번에 절 보신 기억이 없으십니까?”

사무엘 스텐호프가 키안의 팔을 살짝 붙잡곤 다급하게 말을 걸어왔다.

“글쎄요. 기억이 없군요. 죄송하지만 놓아주시겠어요? 찾는 사람이 있어서.”

키안은 모르는 척 잡아뗐다. 사실 이곳에 참석하는 이가 모두 가면을 쓰고 있었기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다면 사무엘 스텐호프에게까지도 자신의 정체를 들켰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저 역시 사람을 찾고 있습니다. 제가 도움을 드릴 테니, 도와주시겠습니까?”

“지금 서로 돕자는 건가요? 하지만 그럴 필요 없을 것 같군요. 제가 찾는 사람이 저기에 있어서.”

키안은 사무엘의 손을 밀어냈다. 그러자 가면 너머 그의 눈동자가 아쉬운 듯 흔들렸다.

“오해는 하지 말아주셨으면 합니다. 레이디께서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건 사실이지만, 표범무늬 가면을 쓴 남자처럼 해를 끼치려는 게 아니었습니다.”

표범무늬 가면이란 말에 키안의 하늘빛 눈동자가 다시 사무엘을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감사 인사를 전하지 않았었네요. 그날은 도와주셔서 고마웠습니다.”

“아닙니다. 저는 옆에 있었을 뿐, 그 사내를 제압하신 분은 레이디셨습니다. 멋진 광경에 저는 얼이 빠져 있었거든요.”

가면 아래 보이는 사무엘의 눈동자가 진지했다.

“오해는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찾고 있던 사람을 발견했다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럼, 이만.”

키안은 사무엘에게 고갤 끄덕여 인사를 한 다음, 서둘러 패트리샤가 있는 곳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패트리샤 역시 자신을 발견한 듯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이곳까지 어쩐 일이십니까?”

“패트리샤를 만나려면, 이곳으로 와야 한다는 말이 떠올라서 찾아왔어.”

키안의 말에 패트리샤가 말없이 그녀를 바라보았다. 세이란을 통해서가 아니라, 키안 혼자 찾아온 게 마음에 걸리는 모양이었다.

“개인적인 일이다. 만약 힘들다면, 거절해도 상관없다. 하지만 나는 네 도움이 필요하다.”

키안이 그녀의 생각을 읽은 것처럼 말하자, 패트리샤가 고갤 끄덕였다.

“절 따라오십시오. 여긴 사람들이 많습니다.”

패트리샤가 앞서 걸어가자, 키안은 안도하며 재빨리 그녀의 뒤를 따라갔다.

어둡고 좁은 통로를 지나 안으로 들어갈수록 파튬을 가득 메우고 있던 왁자지껄한 소음에서 점점 멀어졌다.

“안으로 들어가십시오.”

키안이 먼저 안으로 들어가자, 패트리샤는 문을 닫기 전 주위를 살폈다. 아무도 없음을 확인한 후에야 문을 닫고 키안을 향해 돌아섰다.

“시간이 별로 없습니다.”

“걱정할 것 없다. 오래 걸리진 않을 테니까.”

키안이 품속에 넣어두었던 낡은 편지 하나를 꺼냈다. 그러곤 패트리샤에게 건넸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 누군가에게 받은 편지다.”

“그걸 왜 저에게 주시는 겁니까?”

“그 편지를 준 자가 바레나 거리에서 사는 자라고 하더군. 그래서 어쩌면 너는 알지 않을까 생각했다.”

패트리샤가 천천히 낡은 봉투 안에서 편지를 꺼냈다. 내용을 확인하던 그녀의 눈이 편지지 끝에 있는 문장에 닿았다.

“네가 확인할 것은 편지지 뒤에 있는 그림이다.”

키안의 말대로 편지지를 뒤집어 그림을 확인한 순간 패트리샤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아주 짧은 순간이긴 했지만 분명 알고 있는 눈빛이었다.

“혹시 본 적이 있는 문장인가?”

키안의 물음에 패트리샤가 재빨리 편지지를 접어 봉투 안에 넣었다.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 걱정이군. 나는 너라면 알 것이라고 생각했거든.”

사실 편지지 뒷면에 또렷이 찍혀 있는 검을 든 고양이의 문장은 진이란 여인이 운영하는 가게의 상징과 똑같은 것이었다.

그 사실을 확인하기 위해 진의 가게를 찾아갔다가, 우연히 패트리샤와 함께 있는 모습을 본 것이다.

‘내게 거짓말을 하고 있어.’

뭔가 불순한 의도가 있는 건 아닌 듯했다. 하지만 자신이 이유도 말하지 않고 사람을 찾는다고 하자 경계하는 듯했다.

“제가 알아보겠습니다. 그런데 찾는 이유가 무엇인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패트리샤의 조심스러운 태도로 보건대, 그녀의 예상대로 진이 위험한 일에 휘말리는 걸 원치 않는 모양이었다.

“돌아가신 어머니께서 마지막으로 남기신 편지다. 딱히 이유는 없어. 그저 알고 싶은 것뿐이야. 만약 어머니 친구라면, 가끔 들러 차라도 마시며 어머니에 대한 얘길 듣고 싶은 욕심이기도 하고.”

“아, 그렇군요. 제가 최대한 빨리 알아보겠습니다.”

키안의 대답에 패트리샤는 안심한 듯 고갤 끄덕였다. 사실 패트리샤는 눈앞의 여인이 진의 가게를 방문한 적이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 그림을 들고 자신에게 내밀며, 찾아달라고 하다니.

‘혹시, 밤이라 너무 어두워서 이 문장을 보지 못했던 걸까?’

만약 그런 것이라면 충분히 납득이 됐다.

“사례는…….”

“괜찮습니다. 황태자 전하께서 명령하셨습니다. 아가씨를 도우라고.”

“전하께서 그런 말을 하셨어?”

엄밀히 말해 입을 통해 명령하진 않았다. 하지만 황태자인 세이란은 눈앞의 레이디를 바라보는 눈빛과 행동으로 말하고 있었다.

그가 유일하게 마음에 담은 여인이라고.

“저희에게 황태자 전하는 주군이십니다. 주군의 연인 역시 마찬가지고요.”

“아…….”

순간 키안의 얼굴이 붉어졌다. 다행인 건 가면을 쓰고 있어서, 패트리샤가 눈치채지 못했다는 사실이었다.

“조사가 끝난 후 어디로 연락을 하면 되겠습니까?”

패트리샤의 말에 키안이 잠시 망설였다. 자신을 주군의 연인으로 받아들인다는 건, 절대적으로 신뢰한다는 뜻이었다.

그런 자에게 거짓말을 할 수가 없었다. 신분을 밝히는 게 위험한 일일지라도.

“날 찾아오면 된다.”

그 말과 함께 쓰고 있던 가면을 벗었다. 그리고 황금빛 가발을 벗자, 아름다운 은빛 머리카락이 모습을 드러냈다.

예상대로 패트리샤의 눈동자가 놀란 듯 커졌다.

“레녹…….”

패트리샤가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이곳은 파튬의 밀실이었지만, 본능적으로 이 사실을 숨겨야 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러곤 얼굴에서 놀란 표정을 감추곤 고갤 숙였다.

“곧 연락드리겠습니다.”

황제의 독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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