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6 화
샤론 에버콘이 데칸 상단의 건물 안으로 들어섰다. 그러자 그녀를 기다리고 있던 앤톤 데칸이 상단의 비밀 공간으로 안내했다.
“제가 보낸 자는 어디에 있나요?”
“그대의 명령이 있을 때까지 안전한 곳에 데려다 놨으니, 걱정할 것 없어. 아무도 그를 찾아내지 못할 거야.”
앤톤 데칸의 말에 샤론이 안심한 듯 고갤 끄덕였다.
“제임스는 왔나요?”
“사람을 보냈으니, 곧 도착하겠지. 비밀 사교 클럽으로 사람을 보냈는데, 만나지 못한 모양이더군.”
“이런 중요한 때 그런 곳에 가 있다니.”
샤론의 입가가 차갑게 비틀렸다.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긴 했지만, 피는 못 속인다고 에버콘 공작을 닮았던 것이다.
어린 소년을 취하는 것은 물론, 살인을 즐기는 것까지.
“그나저나 급히 해야 할 말이 뭐지?”
“안에 들어가서 할게요. 아주 중요한 얘기라서.”
평소와 달리 주위를 경계하기까지 하는 샤론을 보며, 앤톤 데칸이 고갤 끄덕였다. 그러곤 그녀와 함께 밀실 안으로 들어갔다.
“여긴 아무도 들어오지 못하는 곳이야. 이제 말해봐. 아니, 그전에 그자는 대체 누구지? 자세히 보니, 신관이었던 것 같던데.”
앤톤 데칸은 샤론이 보낸 사내의 목에 걸려 있던 목걸이를 떠올리며 말했다. 사실 그 사내를 보며 놀랐다. 샤론이 대신전에 정보원을 심어놓았다는 사실이.
“벌써 그것까지 알아내다니. 그것 아나요? 내 아들인 제임스보다, 당신을 더 믿는다는 사실을요.”
샤론이 손을 뻗어 앤톤 테칸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러자 앤톤 데칸이 샤론을 손을 꽉 잡더니, 뺨에서 떼어냈다.
미친 일인지 뻔히 알고 있었지만, 샤론의 손이 몸에 닿자 지독한 성적 갈증이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그리고 샤론이 지금 그걸 이용해 얼렁뚱땅 넘어가려 한다는 것도.
“샤론, 적당히 넘어갈 생각이라면 그만둬. 그대가 걱정되어서 이러는 거야. 대체 무슨 위험한 일을 꾸미는 건지 말해줘. 그래야 그대를 지킬 수 있을 테니까.”
샤론이 앤톤 데칸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를 처음 만났을 때도 그는 언제나 이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았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지? 내가 배신했었는데. 상처를 주었는데. 어떻게 변하지 않을 수 있지?’
샤론은 사람의 마음을 믿지 않았다. 언제든 이익에 의해 변할 수 있는 게 마음이란 것이었다.
깨어지기 쉬운 유리그릇.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앤톤 데칸을 보고 있노라면, 믿고 싶어졌다. 변하지 않는 마음이란 게 존재한다고.
아니,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흔들어대는 이 지독한 권력에 대한 갈증보다 더 원하는 게 있을지 궁금했다.
“당신은 내가 원망스럽지 않나요? 다시 만나긴 했지만, 내가 당신을 버린 건 사실이니까요. 어쩌면 다시 버릴 수 있을 것이란 생각은 해보지 않았나요?”
미소가 사라진 샤론의 얼굴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지금껏 앤톤에겐 자신의 본모습을 숨기기 위해 애썼다. 얼음장처럼 차가운 자신의 마음을.
하지만 앤톤의 눈동자를 보자, 꼭 확인해 봐야 할 것 같았다. 그의 마음의 깊이가 얼마나 되는지.
육체를 통해 쌓은 남녀 간의 정이란 게 얼마나 깊은 신뢰를 갖게 되는지도.
“슬프군. 그대는 아직도 날 욕망을 풀어내는 대상으로만 생각하다니 말이야.”
앤톤의 눈동자가 흐려졌다. 처음으로 그의 얼굴에 상처받은 약한 표정이 드러나자, 샤론은 주먹을 꼭 쥐었다.
“그럼 당신은 아닌가요? 나와 성적으로 상성이 맞아 내 곁에 있는 게 아니었나요?”
샤론의 서늘한 물음에 앤톤 데칸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마음대로 생각하라는 듯이.
“그러고 보면, 언제나 손해 보는 쪽은 나였지. 날 배신하고 에버콘 공작의 손을 잡을 때도 뒤도 돌아보지 않을 정도로 냉정했으니까.”
그런데 왜 또, 자신은 샤론을 받아들였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녀의 말대로 육체적인 상성 때문인 걸까? 그것 하나만으로 다시 그녀 곁에 남기로 한 걸까?
아니, 절대 그 이유만은 아니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자신의 야망을 위해 모든 것을 이용하는 이기적이고 잔인한 샤론 에버콘을 사랑하고 있었다.
‘사랑이란 것은 정말 잔인한 감정이군.’
하지만 앤톤 데칸은 차마 사랑하고 있다는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분명 샤론은 자신의 감정을 비웃으며, 또다시 짓밟으려 할 테니까.
“맞아요. 어쩌면 난 또다시 선택의 순간이 다시 온다면, 당신의 손을 놓을 수도 있죠.”
샤론이 턱을 치켜들곤 거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니 선택하라고. 마지막으로 자신을 떠날 기회를 주겠다고 말하고 있었다.
앤톤 데칸 역시 그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정말 끝까지 이기적인 여인이었다.
절대 자신이 그녀의 손을 놓지 못할 것이란 걸 알고 있을 테니까.
“연인보단, 한 편이 되자는 말처럼 들리는군.”
“그것도 좋죠. 배신하고 깨어지기 쉬운 감정보단, 더 강력한 끈이 되어줄 테니까요.”
샤론의 말에 앤톤 데칸이 그녀의 손을 놓았다. 심장이 미세한 바늘에 찔린 듯 아릿했다. 그녀의 한마디에 앤톤 데칸은 들뜨고 행복했던 마음이 사라졌다.
힘이 빠졌다. 영혼이 죽는다는 그 말이 어떤 것인지 알게 되었다. 그런데도 그는 그렇게라도 샤론의 곁에 있고 싶었다.
“그대의 결정에 따르도록 하지. 지금 내겐 그대 외에 중요한 건 없으니까.”
샤론이 손을 뻗어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곤 마음의 결정을 내린 듯 말했다.
“그럼 지금부터 우리는 한 배를 타는 걸로 하죠.”
“그 말은 육체적인 욕망과 이익만 좇고, 마음은 배제하자는 뜻인 거군.”
“맞아요. 그러니 표정 좀 풀고 여기 앉아요. 내가 지금부터 할 얘길 듣는다면, 귀가 솔깃할 테니까요.”
샤론은 그를 의자에 앉혔다. 그러곤 맞은편에 자릴 잡은 후, 의미심장한 표정으로 앤톤 데칸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 내가 보낸 그 정보원이 신관 같다고 했었죠? 맞아요. 그자는 내가 대신전에 심어놓은 정보원이에요.”
“대신관을 감시하기 위해서였던 모양이군.”
“정확히 말해서 대신관이 받은 신탁의 내용을 미리 알기 위해서라고 해두죠.”
“그럼 대신관이 신탁을 받은 모양이군. 그래서 황태자비는 누구지? 렌스터가의 영앤가? 아니면 테란의 공주?”
앤톤 데칸의 물음에 샤론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둘 다 틀렸어요. 신탁이 정한 황태자비는 바로, 키안 레녹스 공작이었어요.”
순간 앤톤 데칸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 신관이란 정보원에게 사기를 당해놓곤 그 사실을 모르고 있는 건가?
“죽여야겠군. 그대에게 거짓 정보를 판 신관을 말이야.”
앤톤 데칸이 당장에라도 그를 죽이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샤론 에버콘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저도 믿지 않았지만, 사실이에요. 하지만 더 놀라운 건, 테란의 공주가 이미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것이고요.”
테란의 공주라면, 헬로이즈를 말하는 모양이었다. 보랏빛 눈동자에 속을 알 수가 없던 그 여인.
“혹시 그대가 손잡으려는 이가 테란의 공주인 건 아니겠지?”
“왜 아니겠어요? 당신은 모르겠지만, 유스타나 제국의 귀족들은 절대로 구스타프 황실에 반기를 들지 못해요.”
“그게 무슨 말이지?”
“결국 렌스터 공작 역시 황태자의 편에 선다는 뜻이지 뭐겠어요. 그자는 욕심은 많지만, 두려움 역시 많은 자죠. 절대 반역 같은 건 꿈도 꾸지 못한다는 뜻이죠.”
하지만 테란의 공주는 달랐다. 처음엔 연약한 외모 때문에 그녀와 손을 잡을지 망설였다.
하지만 황실 사냥터에 렌스터 공작가의 독을 일부러 남쪽으로 향하게 풀어놓는 걸 보곤, 생각보다 자신과 비슷한 면이 많다는 사실을 알았다.
‘황태자의 마음을 확인하기 위해, 그런 위험한 짓까지 벌이다니.’
정말 무서운 여인이었다. 그리고 그 결과 테란의 공주 헬로이즈는 황태자의 약점이 릴리스 프로필리아, 아니, 키안 레녹스란 사실을 알아낸 것이다.
‘정말 믿을 수가 없어. 릴리스란 여인이 키안 레녹스였다니.’
샤론은 아직도 그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여인에게 관심조차 없는 세이란이 키안 레녹스 공작과 릴리스 프로필리아에게 양다리를 걸쳤다는 소문을 떠올리자 이해가 됐다.
“앤톤, 난 에버콘이 아니라 구스타프로 제국 역사에 기록될 생각이에요.”
“지금 그 말은…….”
앤톤 데칸의 눈이 경악으로 커졌다. 그 역시 샤론이 권력을 끝없이 갈망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었다.
황제의 배다른 이복누이. 황후가 아닌 황제의 정부에게서 태어났지만 황제는 그녀에게 구스타프란 성을 주었다.
그래서 그녀가 순수한 황실의 혈통을 끊임없이 갈망한다는 사실을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황제의 자릴 원할 것이라곤 전혀 예상하지 못했다.
“설마 황제 폐하의 독살에 배후가 그대인 건가?”
데칸이 물음에 샤론 에버콘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것을 통해 데칸은 모든 것을 알게 되었다.
“난 유스타나를 원해요. 순혈의 혈통을 이어받은 구스타프 황실. 그러기 위해선, 당신의 도움이 꼭 필요하고요. 해줄 수 있나요, 앤톤 데칸?”
**
“리치문트 공작은 어디에 있지?”
셀서스 궁으로 돌아오자마자 세이란은 시종장인 아이크에게 에드윈의 위치를 물었다.
“아직 사무실에 계십니다. 그리고 조금 전 헬로이즈 공주님께서 접견을 신청해 오셨습니다. 시간이 늦었으니, 만날 수 없다고 전해 드리겠습니다.”
“헬로이즈 공주가?”
세이란의 녹색 눈동자에 냉기가 어렸다. 얌전히 있어도 모자랄 판에 감히 자신에게 접견 신청을 하다니.
“아니, 그럴 필요 없다. 무슨 말을 하는지 직접 들어봐야겠다.”
세이란이 에드윈에게 가는 대신 접견실로 향했다.
접견실 앞에 도착한 세이란은 노크도 없이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날 보길 원했다고?”
세이란의 갑작스러운 등장에도 불구하고 헬로이즈는 차분한 모습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아무리 황태자 신분이었지만, 자신은 엄연히 테란의 공주였다. 하지만 그는 자신에게 갖춰야 할 기본적인 예의마저 던져 버린 모습이었다. 헬로이즈는 그의 무례한 행동으로 자신이 생각이 맞는다는 사실을 알았다.
‘예상대로 날 의심하고 있어.’
헬로이즈는 일부러 차갑게 굳어 있는 세이란에게 깍듯이 예를 갖췄다. 그러곤 환한 미소까지 지어 보였다.
“접견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태자 전하.”
세이란의 입가가 냉소로 비틀렸다. 자신의 무례한 행동에 보란 듯이 예를 갖추다니.
“마치 딴 사람 같군. 아니면, 지금까지 감추고 있던 본성을 이제 드러낸 건가?”
“어떤 모습을 말씀하시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혹시 전하께서 본 미래의 저를 말씀하시는 것이라면, 당연히 바뀌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전하의 선택으로 모든 것이 바뀌었으니까요.”
헬로이즈가 턱을 들곤 세이란을 원망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지금껏 감정을 숨겨왔지만, 더는 그럴 필요가 없었다.
“로렌스 루틴 공작이겠군. 그대에게 미래를 말해준 이가. 마지막 순간 알았지. 그자가 예언자의 별 아래 태어났다는 걸.”
“그렇습니다. 테란의 기사이자, 귀족인 그는 예언의 별 아래 태어난 고귀한 자였죠. 그런 그를 전하께서 죽이셨고요. 전하는 물론 유스타나 제국을 속인 거짓말투성이의 하찮은 여인을 위해서 말입니다.”
순간 세이란의 녹색 눈동자가 얼음처럼 차갑게 변했다.
“로렌스 루틴이란 자가 너에겐 아주 소중한 자였던 모양이군. 나에겐 한 주먹거리도 되지 않는 적국의 기사였을 뿐인데 말이야. 혹시, 연인이었나?”
세이란은 일부러 로렌스를 하찮은 존재라 말했다. 헬로이즈의 가면 같은 얼굴 아래, 본 얼굴을 보기 위해서였다.
그럼 그렇지. 헬로이즈의 입술이 분노로 떨리며 꾹 다물어지는 게 보였다.
“키안에 대해 다 알고 있는 것 같아서 말해주지. 네가 말한 거짓말투성이의 하찮은 여인을 위해, 난 그 누구도 죽일 수 있다. 키안 외엔 내겐 아무런 의미도 없거든. 그건, 너 역시 예외가 아니다. 미래에 네가 무엇이었든. 그건 이미 바뀌어 버렸으니까.”
경고였다. 다시 한 번 키안 레녹스를 깔보거나, 무례한 말을 한다면 지금 당장에라도 죽여 버리겠다는.
“혹시 그것 알고 계십니까? 전하께서 아끼시는 레녹스 공작이 전쟁터에서 스스로 죽으려 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황태자 전하는 안중에도 없었던 거죠. 가문의 명예 앞에선.”
헬로이즈는 세이란에게 상처를 주기 위해 손톱을 세웠다. 그를 가장 아프게 하는 건, 키안 레녹스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예언자의 별 아래서 태어났다던 너의 그 로렌스 루틴 공작이 그 말은 해주지 않았나 보군. 내가 완벽한 내 미래를 바꾸려고 결심한 이유가 바로, 키안 레녹스를 살리기 위해서라는 걸 말이다.”
헬로이즈가 눈을 가늘게 떴다.
“알고 계셨다는 뜻입니까?”
“당연히 알고 있었다. 키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세이란은 전쟁터에서 그녀의 목에 날아드는 적국 기사의 검에 무방비하게 서 있던 키안을 떠올렸다.
삶에 대한 집착이 전혀 없는 그녀의 텅 빈 하늘빛 눈동자가 그의 심장을 자꾸만 할퀴었다.
얼음처럼 차갑고 금강석처럼 단단하던 그의 심장에서 무수히 많은 피가 흘러내렸다.
그리고 결국, 그는 자신의 감정을 깨달았다.
“그런데도 살리셨다는 겁니까? 왜 그러셨습니까? 키안 레녹스만 죽었다면, 모두가 완벽하게 행복했을 텐데, 왜?”
헬로이즈의 말에 세이란이 쓰게 웃었다.
“모두가 완벽하게 행복했을 것이라고? 아니, 난 아니었다. 그리고 너 역시 아니었지.”
세이란은 분노로 일렁이는 헬로이즈의 보랏빛 눈동자를 보며, 차갑게 웃었다.
미래에서 본 헬로이즈의 모습은 헝겊 인형 같았다. 지금과는 달리 생명력이라곤 전혀 없는 그녀는 불행해 보였다.
“저에 대해 다 아는 것처럼 말하지 마십시오.”
“왜 그래야 하지? 황태자비였던 너를 가장 가까이에서 지켜본 이가 바로 나인데 말이야.”
황제의 독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