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5 화
키안의 말에 세이란의 시선이 엘렌에게 향했다.
“생각보다 자주 황제궁을 비워둔 채 대신전에 오는 것 같군.”
“폐하의 건강이 걱정돼서 그러는 게 아니겠습니까?”
“하지만 무슨 일이 있더라도 폐하의 침실을 떠나지 말라고 명령했었다. 그런데도 내 명을 어긴 자를 믿어야 하는 것이냐?”
세이란의 목소리가 냉소적으로 들렸지만, 키안은 그것이 황제 폐하에 대한 걱정으로 이해했다.
그때 엘렌 역시 세이란의 시선을 느낀 듯 고갤 들었다.
“전하.”
엘렌이 재빨리 허릴 숙였다. 그러자 세이란은 불편한 심기를 숨기지 않았다.
“요즘 자주 황궁을 비우는군.”
“죄송합니다, 전하. 오늘은 필요한 물품을 가지러 대신전에 왔습니다. 폐하의 치유를 위해 매우 중요한 약재라, 남들에게 맡길 수가 없어 직접 와야 했습니다. 서둘러 돌아가겠습니다.”
엘렌의 차분한 대답에도 불구하고 세이란은 여전히 불만스러운 얼굴이었다. 침묵이 길어지자, 키안이 슬쩍 그의 팔을 건드렸다.
“전하.”
그제야 서늘하던 그의 눈빛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그만 가봐도 좋다.”
그 말과 함께 세이란은 신관을 따라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엘렌의 차분한 갈색 눈동자가 키안을 향했다.
“아닙니다.”
“릴리스, 어서 오지 않고 뭐해?”
세이란이 부르자, 키안은 엘렌에게 고갤 숙여 보이곤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키안은 엘렌을 스쳐 지나는 순간 그녀의 시선을 느꼈다. 미동도 없던 갈색 눈동자가 예리하게 빛났다. 순간, 뭐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키안은 마음에 담아두지 않았다.
“한눈팔지 말고, 곁에 있어.”
키안이 다가오자, 그가 불안한 듯 그녀의 손을 꼭 잡았다. 그 모습에 키안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길을 잃어버릴 정도로 어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한 번 와본 적도 있고요.”
“널 걱정하는 게 아니라, 날 걱정하는 것이다. 내가 널 잃어버릴까 봐.”
심장이 간질거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세이란은 그녀의 침묵에 눈썹을 치켜 올리며 물었다.
“왜? 싫은 것이냐?”
“아닙니다. 너무 기뻐서 말이 나오지 않은 것뿐입니다.”
그제야 세이란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여기서부터는 두 분만 가실 수 있습니다. 계단을 따라 계속 내려가시면, 대신관께서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신관이 인사를 하곤 서둘러 자릴 떴다. 키안은 세이란과 함께 계단을 내려갔다. 구불구불한 계단을 따라 한참을 내려간 후에야 두 사람은 걸음을 멈췄다.
“여기인 모양이다. 들어가자.”
세이란은 앞에 있는 문의 손잡이를 돌렸다. 그러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지하라고 생각했던 장소에 아름다운 숲이 펼쳐졌다.
“아, 여기였군요.”
“와본 적이 있어?”
“지난번 대신전에 왔을 때, 이곳에서 도미니크 대신관을 만났었습니다.”
“그랬군. 그나저나 어디에 있는 거지? 도미니크 대신관!”
세이란이 대신전 지하에 있는 숲으로 들어가며, 도미니크를 불렀다. 키안 역시 세이란을 따라 안으로 들어갔다.
그때도 신기하다고 생각했지만, 지금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대신전 지하에 있는 온천수가 인상적이었다. 그러고 보니 온천수 근처에 이젠 사라진 고대문자가 새겨져 있었던 게 생각이 났다.
‘그게 어디였더라?’
키안이 온천수 쪽으로 고갤 돌렸다. 그러다 멈칫하며, 걸음을 멈췄다.
“세이란 님!”
앞서 걷던 세이란이 키안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걸음을 멈추곤 돌아섰다.
“무슨 일이지?”
“저기!”
키안이 창백해진 얼굴로 온천수 쪽을 손으로 가리켰다. 이내 그의 시선 역시 그쪽으로 향했다.
“맙소사, 피다. 설마……?”
세이란이 수풀을 헤치고 온천수가 있는 곳으로 걸어 들어갔다.
“말도 안 돼. 이런 일이 대신전 안에서 일어나다니. 대체 누가…….”
세이란은 온천수 근처의 돌에 부딪혀 정신을 잃은 도미니크 대신관을 발견하곤 서둘러 그의 상태를 확인했다. 미약하긴 했지만, 아직 숨은 붙어 있었다.
“무슨 일입니까?”
어느새 뒤따라온 키안이 창백한 얼굴로 쓰러져 있는 대신관을 보곤 걸음을 멈췄다.
“죽진 않았다. 넌 여기에 있도록 해. 침입자를 찾아야겠다.”
자리에서 일어선 세이란이 주위를 살피며 침입자를 찾아 나가려 했다. 그러자 키안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어딜 가시려는 겁니까? 위험합니다. 적이 누군지 모른 상황에선 섣불리 움직여선 안 됩니다.”
무엇보다 이곳은 그 누구에게도 알려지지 않은 대신전의 비밀 공간이었다. 이곳에 침입해 대신관을 공격했다면, 분명 평범한 자는 아닐 것이다.
‘설마 대신전 신관들 중에 대신관의 적이 있는 걸까?’
하지만 타이밍이 너무도 절묘했다. 분명 자신과 황태자가 방문할 것을 미리 알고 있는 대신전의 누군가가 분명했다.
“얼마 가지 못했을 것이다. 머리에 흐르는 피가 굳지 않은 걸 보면.”
세이란이 키안의 손을 떼어내려 하자, 키안이 그의 팔을 다시 붙잡았다.
“적을 찾는 것보다, 대신관을 옮기는 게 먼저입니다.”
그가 눈살을 찌푸렸다. 대신관을 이렇게 만든 자를 찾아야 했지만, 키안의 말처럼 그를 살리는 게 먼저였다.
“쳇!”
세이란이 다시 허릴 구부려 정신을 잃고 쓰러져 있는 대신관을 두 팔로 들어 올렸다.
“꼭 살려야 해. 그래야 누가 공격한 것인지 알게 될 테니까. 그리고 이 상황에서 대신관이 죽게 된다면, 신탁의 주인공이 너란 사실을 증명해 내기 힘들다.”
그리고 그것보다 더 중요한 문제는 따로 있었다.
‘공개 재판에서 신탁의 내용을 공개할 계획이었는데…….’
하지만 이젠 불가능해졌다. 순간 세이란은 도미니크 대신관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얼마 전, 전 대신관님이 계신 곳을 찾았습니다. 말씀드리지 않은 이유는 곧 전하의 앞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도미니크 대신관은 전 대신관이 곧 모습을 드러낼 것이라고 했었다.
‘설마 전 대신관을 만난다는 게, 이런 이유에서였던 건가?’
오늘 이 사건으로 인해 유스타나의 대신관의 자리는 그가 깨어날 때까지 공석이었다.
아직 새로운 대신관에 대한 신탁도 받지 않은 상황이었기 때문에 다시 뽑을 수도 없었다.
따라서 방법은 하나였다. 전 대신관이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 그리고 전 대신관이 새로운 신탁을 받는 것.
“전하, 제가 나가는 다른 길을 알고 있습니다. 저를 따라오십시오.”
키안이 지난번 방문했을 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키안의 뒤를 따라가며, 세이란은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본 미래엔 대신관의 죽음은 없었다.
이것 역시 그의 선택으로 바뀐 미래가 분명했다. 순간 세이란의 녹색 눈동자가 칼날처럼 날카롭게 빛났다.
짐작이 가는 자는 있었다. 하지만 그자들이 어떻게 대신전에 들어와 대신관을 공격할 수 있었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설마 대신전에 그들의 첩자가 있는 건가?
그것밖엔 방법이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빨리 흔적도 없이 대신전을 빠져나갈 수도 없었다.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는군.”
키안은 의식을 잃은 채 세이란의 품에 안겨 있는 대신관을 보며, 참담한 얼굴을 했다.
“저도 궁금합니다. 왜 이런 일이 일어난 것인지 말입니다. 이쪽입니다.”
키안이 도미니크 대신관이 했던 것처럼 벽에 손을 가져다 댔다. 그러자 벽이라고 생각했던 곳이 문이 되어 열렸다.
좁은 통로를 따라 위로 올라가 마지막 문을 열자, 기도실에 있던 신관이 놀라 돌아보았다.
“전하, 무슨 일이십니까?”
당황한 신관이 세이란의 등장에 놀라 무릎을 꿇었다.
“당장 일어나 치료사를 불러와. 대신관이 누군가에게 공격을 받아 다쳤다.”
그제야 신관이 세이란의 품에 안겨 있는 사람이 도미니크 대신관이란 사실을 깨닫고 새파랗게 질린 얼굴을 했다.
“이 방에 눕히십시오.”
신관이 기도실 옆에 마련된 침실로 세이란을 안내했다. 신관을 따라가 대신관을 침대에 눕힌 후 세이란은 다시 손을 뻗어 맥을 짚었다.
그러곤 멍한 표정으로 서 있는 신관을 향해 무섭도록 단호한 목소리로 명령했다.
“아직 살아 있다. 최대한 빨리 치료사에게 보이도록 해. 그리고 무슨 일이 있어도 대신관을 살려라. 이건 명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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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로이즈는 이고르가 건넨 쪽지를 받아 들었다.
“뭐지?”
“조금 전 엘렌 님께서 보내오셨습니다.”
이고르의 말에 헬로이즈는 서둘러 쪽지를 펴 내용을 확인했다. 이내 헬로즈의 보랏빛 눈동자가 기쁨으로 반짝였다.
“계획이 성공한 모양이야. 전하께선 아직 돌아오지 않으셨고?”
“그렇습니다.”
“그럼 빨리 가서 접견실에서 황태자 전하를 기다려야겠군.”
“지금 말씀이십니까?”
“응. 가서 황태자 전하의 얼굴을 구경해야지. 분명 당혹스러워하고 있을 테니 말이야.”
“하지만 의심을 사지 않을까요?”
“어차피 의심은 피할 수가 없을 거야. 지금쯤이면 로렌스 루틴 공작에 대해 알아냈을 테니까.”
분명 자신이 개입되어 있다는 사실을 알았을 터였다. 하지만 자신을 돕고 있는 사람이 누군지는 절대 알 리 없었다.
그가 본 미래는 자신 역시 알고 있었다. 로렌스 루틴 공작이 수백 번, 수천 번 자신에게 말해주었으니까.
헬로이즈가 손에 있던 쪽지를 벽난로에 던져 넣었다.
그러자 화르륵 소릴 내며, 불길이 일더니 순식간에 쪽지가 재가 되어 사라졌다.
‘절대 당신은 알 수가 없을 테지. 이미 재가 되어 사라져 버렸으니까.’
“그럼, 가볼까?”
헬로이즈가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곤 방을 나와 언제나 그렇듯 황태자를 만나기 위해 접견실로 향했다.
황제의 독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