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독사과-114화 (114/139)

제 114 화

“휴우-”

서재를 나온 사무엘은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그러자 자신이 얼마나 긴장했는지 알 수 있었다.

“손이 다 차가워졌어.”

사무엘은 땀이 흥건한 손바닥을 옷에 쓰윽 닦은 후, 복도를 걸어 현관으로 향했다. 하지만 처음 방문한 공작저는 복잡했다.

“대체 어디가 현관인지 모르겠군.”

순식간에 길을 잃고 헤매던 사무엘은 현관으로 나가는 길을 묻기 위해 하녀를 찾아 두리번거렸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건물 안엔 개미 새끼 한 마리 보이지 않았다.

“다들 어디 간 거지?”

사무엘 스텐호프는 렌스터 공작이 2층 서재 쪽으론 얼씬도 하지 말라는 명령을 내렸다는 사실을 모르는 채 고용인들을 찾아 걸음을 옮겼다.

그러다 복도 끝에서 사람의 인기척이 들리자, 서둘러 그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택을 방문했다가 길을 잃었습니다. 현관으로 나가는 길을…….”

사람들 발견했다는 기쁨에 사무엘은 누가 있는지 확인도 하기 전에 말부터 꺼냈다. 그러다 황급히 입을 다물었다.

사무엘의 급작스러운 등장에 레이디들이 그를 바라보고 서 있었던 것이다.

레이디들의 시선에 사무엘이 얼굴을 붉힌 채 고갤 숙였다. 그러자 베로니카가 한 발짝 다가서며 말을 건넸다.

“아버지의 손님이신 모양이군요. 현관을 찾는 것이라면, 잘 오셨네요. 여기가 현관입니다.”

“아, 네. 그런 것 같군요.”

사무엘은 난처한 기색을 감추며, 주위를 살폈다. 그러다 레이디들 중 유독 눈에 띄는 한 레이디를 발견하곤 홀린 듯 바라보았다.

“죄송하지만 혹시 전에 만난 적이…….”

키안은 자신에게 말을 걸어오는 사무엘 스텐호프를 보며, 주먹을 꼭 쥐었다.

‘설마 날 알아본 건 아닐 테지?’

키안은 애써 당혹스러움을 감추곤 최대한 담담한 표정으로 사무엘을 바라보았다.

“글쎄요. 기억이 잘 나지 않는군요.”

“아, 죄송합니다. 낯이 익은 것 같아서 저도 모르게 그만.”

사무엘이 서둘러 사과했다. 다행히 자신을 알아보진 못한 듯했다. 그때 벨라가 사무엘이 입고 있는 황실 기사단의 제복을 보곤 끼어들었다.

“그 제복 어디서 봤나 했더니, 황실 기사단의 제복이군요. 맞나요?”

“황실 기사단 소속 사무엘 스텐호프입니다.”

벨라가 아는 척을 하자, 사무엘이 기사다운 모습으로 자신을 소개했다. 그러자 레이디들이 그의 잘생긴 얼굴을 보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때 현관문이 열리고 렌스터 공작가의 집사가 안으로 들어왔다.

“오래 기다리게 해 죄송합니다. 마차가 준비되었습니다.”

“다 된 모양이군요. 그럼 나갈까요?”

베로니카를 선두로 레이디들이 밖으로 나갔다. 키안 역시 벨라와 함께 걸음을 옮기는 동안 자신을 쳐다보는 사무엘의 시선을 느꼈다.

“어머, 저기 황태자 전하 아니신가요?”

앞서 현관을 나갔던 플로라가 깜짝 놀란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요, 황태자 전하께서 왜 레이디들만 참석하는 티 파티에 오시겠어요?”

“저기 보세요. 정말 황태자 전하시라니까요.”

플로라가 자신의 말을 믿지 않자, 손으로 정원으로 들어서는 세이란을 가리켰다. 레이디들의 시선이 동시에 정원으로 행했고, 이내 세이란을 발견하곤 놀라 손으로 입을 가렸다.

“맙소사. 정말 황태자 전하세요.”

“전하께서 왜 오신 걸까요?”

그 질문에 레이디들의 시선이 동시에 키안에게 향했다.

“혹시 전하께서 오신다고 하셨나요, 레이디 릴리스?”

“아니요. 아무런 연락도 받지 못했습니다, 레이디 베로니카.”

레이디들이 서둘러 말에서 내리는 세이란을 향해 허릴 굽혔다.

하지만 그는 레이디들을 지나, 곧장 키안 앞에 멈춰 섰다.

“때마침 티 파티가 끝난 모양이군. 볼일이 있어 나왔다가 끝날 시간이 된 것 같아 데리러 왔다.”

세이란의 말에 레이디들은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이었다.

“저는 공작부인과 함께 돌아가면 됩니다.”

키안이 거절하자, 세이란이 실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내가 헛걸음을 한 모양이군. 나는 네가 기뻐할 거라 생각하며 왔는데, 좋아하기는커녕 방해꾼 취급을 하다니 말이야.”

“그런 게 아니라, 제가 전하의 시간을 빼앗은 것 같아서 그런 것뿐입니다. 바쁘신 것 아니셨습니까?”

키안이 난처한 얼굴로 세이란의 안색을 살폈다. 그러자 그가 스스럼없이 키안에게 손을 뻗어 얼굴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뒤로 넘겨주었다.

“당연히 바쁘지. 하지만 널 위해 언제든 시간을 낼 수 있으니, 걱정할 것 없다. 그런데, 내가 말했던가?”

“뭘 말씀이십니까?”

“오늘도 예쁘다는 말.”

나직이 속삭이는 그 한마디에 현관에 모여 있던 레이디들의 얼굴이 붉어졌다.

키안을 바라보는 세이란의 녹색 눈동자에 담긴 감정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던 것이다.

“장난이 심하십니다.”

키안 역시 무안함을 감추며, 레이디들의 시선을 피해 세이란에게 슬쩍 눈을 흘겼다. 그러자 그의 미소가 깊어지더니 키안 쪽으로 고갤 숙여왔다.

“헙!”

동시에 레이디들이 숨을 삼키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금방이라도 세이란이 릴리스에게 입을 맞출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난 빈말 같은 걸 하는 사람이 아니다, 릴리스 프로필리아.”

귓가에 울리는 그의 나직한 목소리에 키안의 얼굴이 붉어졌다.

“절 놀리시는 게 재미있으신 모양입니다.”

키안은 최대한 담담한 목소리로 말하기 위해 애썼다. 세이란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뭔가 말하려다, 레이디들 뒤에 서 있던 사무엘을 발견하곤 눈을 가늘게 떴다.

“넌, 사무엘 스텐호프군. 네가 왜 여기 있는 거지?”

사무엘이 재빨리 세이란에게 예를 갖췄다. 그러곤 긴장한 목소리로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형님이신 스텐호프 백작님을 만나 뵙기 위해 렌스터 공작가에 왔다가, 지금 돌아가던 길이었습니다.”

“그래? 그런데 왜 돌아가지 않고 여기에 서 있는 거지?”

“아, 그게 현관문을 찾지 못하고 헤매다 늦어졌습니다. 지금 바로 셀서스 궁으로 돌아가겠습니다.”

사무엘이 서둘러 대답하고, 곧바로 자릴 떴다.

세이란은 멀어져 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사무엘 스텐호프를 렌스터 공작가에서 만나다니. 그의 방문이 석연치 않았다.

그때 현관문이 열리고, 렌스터 공작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 뒤를 바짝 긴장한 헤링턴 백작과 알렉산더 스텐호프 백작이 따라 나왔다.

“전하, 렌스터 공작가를 방문해 주셔서 영광입니다.”

렌스터 공작의 등장에 세이란은 평소 서늘한 얼굴로 돌아가 있었다.

“렌스터 공작, 갑자기 오긴 했지만 그대를 보니 좋군. 헤링턴 백작과 스텐호프 백작도 함께 있었군.”

“전하를 뵙습니다.”

세이란의 차가운 시선에 두 사람이 서둘러 허릴 숙였다. 그러자 렌스터 공작이 끼어들며 말했다.

“의례적인 방문이었습니다. 전하, 잠시 서재에 드시겠습니까?”

그의 제안에 세이란이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었다.

“지금은 안 되겠다. 셀서스 궁으로 돌아가 봐야 하거든. 하지만 조만간 그대를 황궁으로 부르겠다. 천천히 차를 마시며 얘길 하는 것도 괜찮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세이란의 갑작스러운 초대에 렌스터 공작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전하.”

렌스터 공작이 허릴 숙였다. 그러자 세이란이 키안의 팔을 잡고는 말이 세워져 있는 곳으로 걸어갔다.

“아키텐 공작부인, 미안하지만 그대 혼자 돌아가야겠다.”

“알겠습니다, 전하.”

세이란이 먼저 키안을 말에 탄 후, 그 역시 뒤에 탔다. 고삐를 쥔 세이란이 현관에 서 있는 사람들을 향해 인사를 건넸다.

“그럼, 다들 조심해서 돌아가길 바란다. 이럇!”

부러운 눈빛으로 두 사람을 바라보던 레이디들은 서둘러 각자의 마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모두가 떠난 현관 앞에, 렌스터 공작은 생각에 잠긴 얼굴로 한참을 서 있었다.

그는 황태자가 마지막으로 남겼던 말을 곱씹었다.

“설마 릴리스를 핑계로 나에게 마지막 기회를 줄 요량으로 찾아오신 거였나?”

만약 그렇다면, 세이란은 그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무서운 자였다.

“젠장, 최대한 빨리 제임스 에버콘 공작을 만나 내 뜻을 전해야겠어.”

**

키안은 눈앞에 보이는 대신전 건물을 보며, 긴장했다. 예상대로 대신전 앞에 말을 멈춘 세이란이 먼저 내렸다. 그러곤 키안에게 손을 뻗었다.

“여긴 왜……?”

“걱정 말고 내려.”

여전히 망설이는 키안을 그가 그녀의 허릴 감싸 안더니, 말에서 내릴 수 있게 도왔다.

“묻고 싶은 게 많은 표정이군.”

“렌스터 공작가에 온 다른 이유가 있는 것입니까?”

“쳇, 넌 속일 수 없다니까. 내가 말해주지 않으면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않을 것 같아 말해주지. 맞다. 내가 렌스터 공작가를 방문한 이유는 널 데리러 가는 동시에 공작에게 기회를 주기 위해서다.”

“기회라면 무슨?”

“제임스 에버콘 공작과 손을 끊을 기회 말이다.”

만약 렌스터 공작이 자신의 의도를 파악하지 못한 채 그 기회를 날린다고 해도, 상관은 없었다.

황태자인 자신이 렌스터 공작가에 방문했다는 것 하나만으로 제임스 에버콘은 렌스터 공작이 자신과 모종의 거래를 했을 것이라 의심할 테니까. 두 사람 사이의 신뢰를 깨어놓기엔 충분했다.

“그렇겠군요. 제임스 에버콘 공작은 의심이 많은 성격이니까요.”

키안의 대답에 세이란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맞아. 제임스의 주위에 사람이 없는 이유가 바로 그것이지.”

그리고 또 하나. 제임스 에버콘은 가문이 주는 부와 명성에도 불구하고 친한 귀족 하나 없는 이유는 그가 가지고 있는 잔악한 취미 생활을 숨기기 위해서이기도 했다.

“그럼 대신전엔 왜 오신 겁니까?”

“대신관이 너와 나에게 할 말이 있다고 전갈을 보내왔다. 신탁의 마지막 내용을 말해주기 위해서일 테지.”

“신탁의 마지막 내용이라고요? 그런 게 있었습니까?”

“들어가 보면 알겠지. 우리에게 들려줄 이야기가 뭔지 말이다.”

세이란이 키안의 손을 잡았다. 그러곤 대신전의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대신관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대신전 계단 위에 서 있던 신관이 허릴 숙여 두 사람을 맞았다. 신관을 따라 대신전 안으로 들어간 키안은 긴장했다. 릴리스의 모습으로 대신관 앞에 서다니.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그러다 키안은 마주 오는 여인을 발견하곤 걸음을 멈췄다.

“왜?”

“황제궁의 엘렌입니다. 오늘도 기도를 드리러 대신전에 온 모양입니다.”

황제의 독사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