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2 화
샤론은 서둘러 헬로이즈 공주의 반응을 살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헬로이즈 공주는 차분한 표정이었다. 뭐지? 그 모습에 샤론은 미간을 찌푸렸다.
“놀랍지 않은 모양이군요.”
“놀랐습니다. 신탁이 정한 황태자비가 키안 레녹스 공작이란 사실이요.”
헬로이즈의 건조한 목소리에 샤론이 눈을 가늘게 떴다. 뭔가 이상했다.
“혹시 공주님께선 알고 계셨습니까? 신탁의 내용을 말입니다.”
“아닙니다. 저는 단지 키안 레녹스 공작이 여인이란 사실을 알고 있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정말 놀랍군요. 키안 레녹스를 황태자비로 신탁이 내려오다니.”
헬로이즈의 담담한 표정과는 달리 샤론 에버콘의 눈이 놀란 듯 커졌다. 대체 어떻게 키안 레녹스 공작이 여인이란 사실을 알게 되었는지 궁금한 모양이었다.
아마 샤론은 물론, 유스타나 제국의 그 누구도 키안 레녹스가 여인일 것이라곤 상상도 해보지 못했을 게 분명했다. 자신 역시 엘렌을 만나기 전까진 그랬으니까.
그런 샤론을 보며, 헬로이즈는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었다.
“이제 말씀해 주십시오. 공작부인께서 제게 원하시는 것이 무엇인지 말입니다.”
헬로이즈의 말에 샤론의 눈빛이 어느새 날카롭게 빛났다. 그러곤 열기가 담긴 목소리로 똑똑히 말했다.
“전 에버콘이란 성보다, 구스타프라 불리길 원합니다. 제 아들 역시도.”
**
카일은 용병으로 가장한 테란의 기사들 사이에 자릴 잡고 앉으며, 외투의 후드를 깊게 눌러썼다.
저녁으로 나누어준 딱딱한 빵과 육포를 질겅질겅 씹는 동안에도 그의 눈빛은 주위에 앉아 있는 기사들을 살폈다.
‘용병들 사이에 숨어든 테란의 기사들이라…… 그럼 술집에 떠돌던 소문이 맞는 모양이군,’
카일은 씹던 육포를 바닥에 뱉어냈다. 입안이 모래가 든 듯 까칠해 거칠고 질긴 육포가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았던 것이다.
투둑, 후두득.
그때 차가운 물방울이 얼굴 위로 떨어졌다. 쳇, 설상가상으로 비까지 내리고 있었다. 카일은 검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국경을 넘어 키엘체에 도착하기 전에 무리를 빠져나갈 방법을 찾아야 해.’
하지만 문제는 용병들 사이에 숨이 있는 기사들의 감시망을 벗어나기가 쉽지 않다는 점이었다.
“비가 더럽게도 내리는군. 빗물에 젖은 빵이라니, 쳇!”
카일의 바로 맞은편에 앉아 딱딱한 빵을 뜯던 사내가 눈살을 찌푸리며, 불만을 토로했다.
“이쪽으로 오시죠. 거기보단 한결 나을 겁니다.”
카일이 옆으로 살짝 자릴 옮기며, 툴툴거리는 사내에게 자릴 내주었다.
“이거, 고맙수다. 하마터면 비에 쫄딱 맞은 상태로 잠까지 잘 뻔했소.”
사내가 카일 옆으로 자릴 옮겨왔다. 그러곤 주머니에서 작은 병 하나를 꺼내더니, 주위를 살폈다.
“산속의 밤은 춥고도 길죠. 한 모금 마시면, 그나마 버틸 만할 거요. 내 이름은 알버트요.”
카일은 알버트라고 한 사내가 건넨 병이 술병임을 눈치챘다. 그 역시 용병 시절에 추위를 견디기 위해 술을 마셨던 경험이 있었다.
“고맙습니다. 제 이름은 카일입니다.”
카일이 술을 한 모금 마신 후 알버트에게 건넸다. 그러자 그 역시 술을 마신 후, 주머니 안으로 술병을 밀어 넣었다.
“이제야 좀 살 것 같네. 쳇, 금주가 말이 된다고 보슈? 고단한 하루를 마무리하기 위해선 술만 한 게 없는 데 말이요.”
아마 알버트란 사내는 테란의 용병 기사단의 지원 조건 중 하나였던, 금주를 해야 한다는 사실이 몹시 불만인 듯했다.
“설마 키엘체에 도착해서도 금주인 건 아닐 테죠?”
카일의 물음에 알버트가 쓰게 웃었다.
“왜 아니겠소? 얘길 들어보니, 테란에 돌아갈 때까지 입도 떼지 말라고 하더만.”
“네? 그런 규정이 있었습니까?”
카일이 멍한 눈빛으로 알버트를 보자, 그가 쯧쯧 혀를 찼다.
“이런이런, 돈에 혹해 지켜야 할 규정도 확인하지 않고 지원한 모양이네. 금주와 함께 침묵 역시 규정이었소. 죽고 싶지 않으면, 똑똑히 기억하는 게 좋을 거요.”
알버트가 선심이라도 쓰듯 알려주었다.
“알려줘서 고맙습니다. 큰 실수를 할 뻔했네요.”
사실 카일 역시 용병 지원서를 작성할 때, 규정의 내용을 모두 읽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런 곳에선 어수룩한 척하는 게 생활하기 편했다.
“특히 저기에 서 있는 자들 앞에선 입을 다물도록 하쇼. 혀가 잘릴지도 모르니까.”
알버트가 턱으로 숲의 한쪽에 쳐진 막사를 가리키며 말했다.
“누굴까요?”
“그야 난들 알겠소? 대충 보니, 노파더군. 그나저나 늙고 초라한 노파에게 왜 남장까지 시키는지 모르겠군. 젊은 여인이라면, 침 흘리는 사내놈들 때문이라고 하지만 말이요.”
알버트는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갤 가로저었다.
“뭐, 이유가 있지 않겠습니까? 남장까지 해서 뭔가를 숨길 이유가 말입니다.”
카일이 육포를 뜯으며 말했다. 그러자 알버트가 카일 쪽으로 고갤 숙이며,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설마 그 소문을 믿는 거요? 저 노파가 유스타나 제국의 전 대신관이었다는 개소리 말이요.”
“믿지 않으십니까?”
“당연히 안 믿지. 어딜 봐서 저 노파가 대신관이었겠소? 헛소리하는 미친 여자의 말일 뿐인 게지. 다 속고 있는 거요.”
알버트의 강경한 태도에 카일은 조심스럽게 그의 얼굴을 곁눈질했다. 말투며 행동에선 용병 생활을 오래한 듯 거칠었지만, 눈빛은 묘하게 차분했다.
“듣고 보니, 그런 것 같군요. 제 눈에도 그 노파는 미친 늙은이와 다를 바 없어 보였거든요.”
카일이 알버트에게 자신의 육포를 건네며 말했다.
“시장하신 것 같은데, 더 드십시오. 저는 술을 한 모금 했더니 졸음이 밀려오는군요.”
“고맙소.”
알버트가 카일에 건네 육포를 받아 들며 말했다. 카일은 바위에 몸을 기댄 채, 잠이라도 청하려는 듯 눈을 감았다. 알버트란 사내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카일은 미동도 하지 않았다.
‘이자 역시 테란의 기사야. 들키지 않으려면 앞으로 더 조심해야겠어.’
**
베로니카는 떨리는 손을 꼭 마주 잡은 채, 창문 앞에 서서 공작가 안으로 들어오는 마차들을 보고 있었다.
오늘은 렌스터 공작가에서 티 파티가 열리는 날이었다.
뭐, 캐서린 수도원으로 가기 전까지 친하게 지내는 레이디들을 초대해 종종 파티를 열곤 했기 때문에 크게 부담이 되진 않았다.
하지만 오늘은 좀 달랐다.
“시간이 다 되어가는데, 왜 오시지 않는 거지? 설마 공작님께서 오시지 않을 생각이신 건가?”
베로니카는 초조한 표정으로 손톱을 물어뜯었다. 왕실 사냥터에서 그렇게 헤어진 후 릴리스, 아니, 키안 레녹스 공작을 다시 보지 못했다.
“설마 내게 정체를 들킨 것 때문에 날 피한다거나, 미워하진 않으시겠지?”
문득 그런 생각이 들자, 베로니카의 어깨가 굳어졌다.
“아가씨, 베로니카 아가씨!”
젬마의 목소리에 베로니카가 문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러자 벌컥 하고 문이 열리더니, 젬마가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거야? 왜 그렇게 호들갑인데?”
베로니카의 날 선 지적에도 불구하고 젬마는 기가 죽기는커녕,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왔다.
“긴장할 필요 없다니까 그러시네. 아가씨 거울을 좀 보세요. 아가씨께서 얼마나 아름다우신지요. 장담컨대 사내라면, 아가씨께 절대 눈을 떼지 못하실 겁니다.”
사실 젬마의 말처럼 자신이 아름답다는 건 알고 있었다. 대부분 사내들 역시 자신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는 것 역시 사실이었다.
하지만 키안 레녹스 공작은 언제나 예외였다.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은 정중하고 예의 바를 뿐, 그 어떤 감정도 담기지 않았다. 그래서 더 안달이 나 미칠 것 같았다.
“내가 걱정하는 건 그게 아니야. 그날 사냥터에서 공작님께선 나 때문에 죽을 뻔하셨어. 어쩌면 나에게 질렸는지도 몰라. 거기다 내가 공작님의 비밀까지 알고 있으니…….”
키안이 티 파티에 나타나지 않자, 불안감과 함께 이것저것 마음에 걸리기 시작했다.
“아가씨, 잘 생각해 보세요. 그 말은 공작님께서 아가씨를 목숨 걸고 지켜주었다는 뜻이기도 하잖아요. 사내란 마음에 없으면, 절대 자신의 목숨을 거는 무모한 짓은 하지 않아요. 그러니 안심하세요.”
젬마의 말에 베로니카의 표정이 한결 누그러졌다.
“정말 그럴까?”
“그렇다니까요. 절 믿으세요. 어, 저기 아키텐 공작가의 마차예요.”
젬마가 고갤 유리창 쪽으로 쭉 내밀더니, 흥분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어디, 어디?”
베로니카 역시 유리창 쪽으로 고갤 돌렸다. 레이디로서 항상 우아하고 기품 있게 행동해야 했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마차가 현관 앞에 멈춰서자, 집사가 마차의 문을 열었다. 그러자 벨라 아키텐 공작부인과 릴리스 프로필리아가 모습을 드러냈다.
“정말 오셨어. 공작님께서…….”
“공작님이 아니라, 레이디 릴리스라고 하셔야죠. 실수로 공작님이라고 부르셨다간, 분명 원망을 사게 될 겁니다. 제 말 명심하세요.”
젬마의 말에 베로니카가 긴장한 표정으로 고갤 끄덕였다.
“걱정 마, 젬마. 그런 실수는 하지 않을 테니까. 너나 그런 표정 좀 짓지 마. 공작님께서 내가 너에게 비밀을 공유했다는 사실을 들키고 말겠어.”
“하지만 볼수록 신기한 걸요. 평소에도 예쁘다고 생각했지만, 누가 감히 상상이라도 했겠어요. 황태자 전하의 마음을 사로잡은 레이디 릴리스가 실은 여장한 레녹스 공작님이란 사실을요.”
베로니카 역시 젬마의 생각과 같았다. 황실 사냥터에서 돌아온 후에도 도저히 믿기지 않아 얼굴을 꼬집어보기까지 했었으니까.
“아가씨, 이제 내려가셔야 해요. 안주인이 늦으면, 예의가 아니잖아요.”
젬마의 말에 베로니카가 거울 앞에 섰다.
“내 모습 어때? 공작님께서 마음에 들어 하실까?”
젬마는 거울에 비친 베로니카를 보며, 눈을 빛냈다.
“마음에 들다 뿐이겠어요? 아마 홀딱 반해서 눈을 떼지 못할 거라니까요. 아, 이제야 생각났네요. 주인님께서도 손님을 초대하신 모양이더라구요.”
“아버지께서 손님을?”
“네. 공작님께서 한 시간 뒤에 서재로 차를 준비해 올려 보내라고 명령하시는 걸 들었거든요.”
“헤링턴 백작님과 스텐호프 백작님이시겠지. 신경 쓸 필요 없어.”
“하지만 주인님의 표정이 좀 심각해 보이셨어요. 뭔가 걱정거리가 있으신 눈치였거든요.”
“그래?”
“네. 시녀장님께서 그러시는데, 요즘 통 식사도 제대로 하지 않으신다고 하셨거든요.”
베로니카는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사실 아버지인 렌스터 공작은 무슨 걱정이 있는지 사냥터에서 돌아온 이후, 대부분의 시간을 서재에 틀어박혀 있었다. 젬마의 말처럼 걱정거리가 있는 게 분명했다.
“오늘 밤엔 아버지와 얘길 해봐야겠어. 알려줘서 고마워, 젬마.”
“뭘요. 그게 제 일인 걸요. 이제 내려가요. 늦겠어요.”
베로니카가 고갤 끄덕인 다음, 서둘러 방을 나왔다. 그러곤 티 파티가 열리는 티룸으로 향했다.
황제의 독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