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11 화
그의 입술이 눈가에 닿았다. 그러자 꾹꾹 눌러 참아, 흘러내리지 못한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세이란 님.”
키안이 그의 옷자락을 꽉 붙들었다. 그러곤 흐려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잊지 마라, 키안. 네가 없다면, 나 역시 없다.”
그 말과 함께 세이란이 그녀의 입술에 깊숙이 키스했다. 버석하게 말라 있던 입술이 그의 혀에 촉촉이 적셔졌다.
로체 거리에서 구경꾼이 던진 토마토를 맞은 사내를 보았을 때,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등줄기에 식은땀이 흐르고 지독한 공포가 그녀를 삼켰다.
하지만 지금, 그의 입술이 닿자 극심한 공포가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했다.
입술을 핥던 그의 혀가 떨어진 사이, 키안은 고갤 들어 가슴속에 묻고 있던 말을 어렵게 꺼냈다.
“저 역시 그 사내처럼, 금기를 어겼습니다.”
어쩌면 그 사내보다 더 큰 죄인이었다. 만약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자신 역시 그 사내처럼 돌팔매질을 당하고 제국민들의 공분을 살 게 분명했다.
그러니 그에게 자신의 손을 놓을 기회를 주어야 했다.
돌아설 명분을…….
하지만 키안의 예상과는 달리, 세이란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날 또 밀어내려는 것이라면, 포기해. 나는 공개 재판을 통해 모든 걸 바로잡을 생각이니까.”
설마, 천 년 동안 지켜온 관습법을 없애겠다는 건가? 하지만 그것이 과연 가능한 일일까?
유스타나 제국의 제국법보다 우선하는 것이 바로 금기였다. 황실조차도 바꿀 수 없는 것이라 여겨지는 관습법을 황태자인 세이란이 직접 바꾸겠다니.
이건 자신과는 상관없이 세이란에겐 모든 것을 잃을 수도 있는 선택이었다.
“저를 위한 것이라면, 그러지 마십시오. 이 일로 인해 전하께선 유스타나를 잃게 될지도 모릅니다.”
그가 얼마나 유스타나 제국과 제국민을 사랑하는지 알고 있었다.
바레나 거리에서 스스럼없이 웃고 어울리는 그를 보며 깨달았다. 그는 자신과 엮이지 않는다면, 제국 역사상 가장 완벽한 황제가 될 것이란 걸.
“잃을 수도 있겠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너를 포함해 그들 역시 제국민이다. 소수라고 해서 보호받지 못한다면 그건 나라가 아니다.”
무엇보다 출생은 선택이 아니었다. 자신이 원해서 죄를 지은 것도 아닌데, 그것으로 인해 그 귀족 사내는 자신의 부인과 아들을 잃었다. 또 자신과 딸의 목숨도 경각에 달려 있었다.
죄 없는 사람을 죽음의 나락으로 떨어뜨리는 법은 바뀌는 게 옳다.
“키안, 두려울 것이다. 오늘 그 광경을 본 후, 더더욱 그럴 거야.”
키안은 주먹을 꼭 쥐었다. 그의 말처럼 무서웠다. 각오는 했었다.
하지만 광신도처럼 순식간에 휩쓸려 사내에게 돌멩이를 던지던 군중을 보자, 본능적으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하지만 너 혼자 두지 않겠다. 만약 내가 너에게 날아오는 돌멩이를 다 막아줄 수 없다면, 함께 맞겠다. 그러니…… 키안, 내 곁에 있어.”
키안의 하늘빛 눈동자가 촉촉이 젖어들었다.
‘왜 이 사람은 이렇게까지 하는 걸까?’
자신을 바라보는 녹색 눈동자를 바라보며, 키안은 안타까움에 입술을 깨물었다.
“제가 뭐라고 저를 위해 왜 이렇게까지 하시는 겁니까?”
키안의 하늘빛 눈동자가 흔들리자, 세이란의 손이 그녀의 뺨을 감쌌다. 그러곤 어쩔 수 없다는 듯 말했다.
“말했잖아. 너를 사랑한다고. 너 없인 나조차도 없다고.”
그 말과 함께 세이란이 고갤 숙여왔다. 그의 입술이 닿자, 심장이 욱신거렸다. 뜨거운 뭔가가 자꾸만 심장을 할퀴었다.
그를 밀어내야 했다. 그를 위해서, 그의 손을 놓아야 했다.
“키안…….”
그녀의 입술 위로 뜨겁고 촉촉한 세이란의 입술이 나른하게 비벼졌다. 뜨거운 숨결이 섞이며, 순식간에 서로의 입술을 삼켰다.
“읏-”
키안은 그의 목덜미에 팔을 감으며 깨달았다. 이젠 다신 그를 놓을 수 없다는 것을. 그가 자신을 밀어낸다 해도, 그의 곁에 있고 싶었다.
사랑…… 하고 있었다. 그녀 역시, 세이란을.
“키안, 바라건대 스스로를 아껴라. 이건 널 사랑하는 내 명령이다.”
그 말과 함께 그의 팔이 키안의 허리를 휘감더니, 번쩍 안아 들었다. 그러곤 침실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몸이 침대에 눕혀졌고, 그 무게에 침대가 흔들렸다.
“으흣-”
나른한 신음과 함께 키안의 턱이 살짝 들린 순간, 그의 혀가 깊숙이 파고들었다. 아랫입술을 빨고 입 안쪽의 여린 살을 핥아 내리자, 키안은 몸을 떨었다.
“으음- 세이란……. 하읏!”
입안 깊숙이 들어온 혀가 키안의 혀를 휘감곤 힘껏 빨아 당겼다. 아릿한 아픔에 키안은 신음을 삼켰다. 하지만 동시에 야릇한 떨림이 온몸으로 퍼지기 시작했다.
“윽, 하아-”
세이란은 입술을 떼지 않은 상태로 키안이 입고 있는 셔츠를 잡아당겼다. 순식간에 셔츠가 벗겨지고, 바지가 벗겨졌다.
“느껴봐. 내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다.”
세이란이 키안의 손을 그의 가슴에 대었다. 그의 말처럼 그녀의 손 아래 그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너 때문이다. 내 심장이 뛰는 것은.”
세이란은 침대에 누워 잔뜩 흐트러져 있는 키안을 내려다보았다. 은빛 머리카락이 후광처럼 비추고 있었다. 그 아름다움에 세이란은 더는 참지 못하고 서둘러 옷을 벗어 바닥에 던졌다.
“윽-”
“하윽, 으응-”
다급한 열기를 채우려는 듯 순식간에 그의 남성이 밀지의 젖은 속살을 가르며 깊이 파고들었다.
단 한 번의 진입으로 내벽의 가장 깊숙한 곳까지 다다른 그는 거친 숨을 내쉬었다.
뜨겁게 젖은 속살이 그의 남성을 한 치의 틈도 없이 감싸고 있었다. 야릇하게 조여드는 감각에 세이란은 몸을 떨었다.
“키안, 대신관에게 신탁에 대해 들었다.”
입술을 깨물며 열기를 삼키던 키안이 눈을 떴다. 그러자 세이란의 커다란 손바닥이 그녀의 턱을 붙잡곤 입술을 열어 농밀하게 혀를 얽어왔다.
“흐음-”
키안이 본능적으로 허릴 비틀며 그의 남성을 힘껏 조였다.
“읏! 하아-”
세이란 역시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날카로운 쾌락을 견디기 위해 눈을 질끈 감았다.
“대신관께서 말씀하신 모양이군요. 신탁의 내용을.”
“왜 말하지 않은 거지? 사냥터에서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말할 기회는 많았는데 말이야.”
녹색 눈동자 속에 잔뜩 흐트러진 자신의 모습이 담겨 있었다.
“무서워서 그랬습니다.”
“네 비밀이 모두에게 알려질 것이 두려웠던 것이냐?”
“그것이 아닙니다. 전하에 대한 감정을 깨닫게 되어 그랬습니다.”
“나에 대한 감정?”
세이란의 녹색 눈동자가 기대감으로 반짝였다. 그 역시 이미 그녀의 감정을 알고 있을 테지만, 직접 입을 통해 확인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저에 욕심 때문이었습니다. 전하를 갖고 싶다는. 그래서 놓고 싶지 않다는 욕심.”
키안의 말에 세이란이 질끈 눈을 감았다 떴다.
“하아, 미치겠군. 넌 날 홀리는데 타고난 제주가 있는 게 분명해. 지금도 네가 너무 예뻐 미칠 것 같다.”
세이란이 농밀하게 혀를 얽어왔다. 그와 동시에 멈춰 있던 그의 남성이 진퇴를 거듭하기 시작했다.
지독한 격정에 두 사람의 몸이 하나처럼 얽혀 녹아내렸다. 키안은 그의 목에 팔을 감고는 쾌락의 파도에 몸을 맡겼다.
끊임없이 젖은 내벽을 꿰뚫고 들어오는 그의 열기에 키안의 몸이 바들바들 떨리기 시작했다. 짙은 열기에 키안의 입술 새로 야릇한 신음이 연신 새어 나왔다. 그의 입술이 달콤한 신음을 삼키려는 듯 키스해 왔다.
남녀의 젖은 숨소리가 방 안을 가득 채웠다. 간절한 마음을 확인한 두 사람의 몸짓은 평소보다 더 애틋했다. 그렇게 두 사람은 서로를 삼킨 채, 오롯이 서로를 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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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이 아주 재미있게 돌아가는군요.”
별궁의 시녀들에게 전해 들은 이야기를 곱씹으며, 헬로이즈 공주는 입가에 냉소를 지었다.
공개 재판이라니. 지금 셀서스 궁은 물론이고, 유스타나 제국은 부인과 아들을 죽인 사내의 이야기로 들썩이고 있었다.
“이런 걸 하늘이 돕는다고 하는 건가?”
생각지도 못했던 사건으로 인해 일이 저절로 풀리고 있었다. 재판 날짜에 맞춰 테란의 기사들이 키엘체에 도착한다면, 재미난 그림이 그려질 게 분명했다.
‘목격자로 재판장에 섰던 레녹스 공작이 사내와 똑같은 죄로 재판을 받는다면 황태자인 세이란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궁금하군.’
세이란의 반응을 상상하자 헬로이즈의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이고르가 급히 안으로 들어왔다.
“도착했습니다.”
“모시고 들어와. 아, 잠깐. 황태자 전하께선 어디에 계시는지 확인해 봤어?”
“자정이 조금 넘은 시간까지 법무대신인 리치문트 공작님과 함께 계셨습니다. 하지만 건물을 나온 직후, 황궁을 나가셨습니다.”
이고르의 대답에 헬로이즈 공주의 입가가 냉소로 비틀렸다.
“정말 믿을 수가 없군. 그 냉혹하고 까칠한 성격의 황태자가, 지친 몸을 이끌고 레녹스 공작에게 가다니. 이고르, 사람은 붙여놨겠지?”
“가장 실력 있고 믿을 만한 자를 붙여놓았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그럼, 손님들을 모셔오겠습니다.”
이고르가 방을 나가자, 헬로이즈는 허릴 곧게 폈다.
조금 전 테란에서 보내온 전갈이 그녀에게 전해졌다. 전갈의 내용은 닷새 전, 대신전에 잡혀 있던 여인이 유스타나 제국을 향해 용병기사단과 출발했다는 내용이었다.
모든 것이 계획대로 이루어지고 있었다.
“공개 재판에 맞춰 그 여인이 키엘체에 나타난다면 더 극적인 장면을 연출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귀족들은 물론 제국민이 모여 있는 공개 재판에서 황태자인 세이란을 가장 잔인한 방법으로 찌를 생각이었다.
그가 로렌스 루틴 공작의 심장에 검을 박아 넣고 숨통을 끊어놓았던 것처럼 자신 역시 그럴 생각이었다.
그의 약점인 키안 레녹스 공작을 통해서.
“헬로이즈 공주님, 처음으로 인사드립니다. 샤론 에버콘 공작부인입니다.”
우아하지만 힘 있는 여인의 목소리에 헬로이즈는 정신이 든 듯 고갤 들었다. 그러자 40대 중반의 아름다운 귀부인이 그녀를 바라보며 서 있었다. 그리고 그 옆엔 진이 있었다.
헬로이즈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곤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예를 갖췄다.
“테란의 헬로이즈입니다. 이쪽에 앉으십시오.”
샤론이 헬로이즈의 맞은편에 자릴 잡고 앉는 사이 진이 헬로이즈의 앞에 섰다. 그러곤 무릎을 꿇었다.
“에브게니아의 손녀, 진이 주인님을 뵙습니다.”
“이고르에게 네 얘긴 전해 들었다, 진. 에브게니아는 테란의 국왕이신 아버지에게 가장 충직한 신하였었다. 너도 그렇다고 믿어도 되겠느냐?”
헬로이즈의 말에 진이 품속에서 손바닥만 한 단검을 꺼내, 헬로이즈에게 건넸다.
단검의 손잡이엔 검을 든 검은 고양이가 새겨져 있었다.
그 문장은 예언자의 가문인 로렌스 루틴 공작가의 상징이었으며, 그 가신임을 증명하는 표식이었다.
“이 검은 네 것이다. 일어나도 좋다, 진.”
헬로이즈의 명령이 떨어지자, 진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두 사람을 지켜보고 있던 샤론이 말을 꺼냈다.
“오랜 인연의 회포는 다 푼 건 같으니, 우리도 본론으로 들어가는 게 좋겠군요. 사실 오늘 새벽 대신전에 심어놓은 정보원을 통해 아주 흥미로운 사실을 알게 되었거든요.”
샤론 에버콘이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그러자 헬로이즈 공주가 호기심을 드러내며 샤론을 보았다.
“무슨 내용인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에버콘 공작부인?”
“대신관이 드디어 황태자비의 신탁을 받았다고 하더군요. 아마 놀라실 겁니다. 황태자비가 누군지 아신다면 말입니다.”
“그게 누구죠?”
헬로이즈가 고갤 샤론 쪽으로 숙이며 물어왔다.
“키안 레녹스 공작이라고 하더군요.”
황제의 독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