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독사과-110화 (110/139)

제 110 화

“헝님!”

카이우스가 다시 한 번 키안을 불렀다. 키안은 감정을 숨긴 채, 담담한 눈빛으로 카이우스를 내려다보았다.

“카이우스, 이 검은 주인이 따로 있는 모양이다. 네 검은 내가 다른 검으로 만들어주겠다.”

키안의 말에 카이우스가 고갤 끄덕였다.

“전 헝님처럼 크고 멋진 검이 좋습미다. 기사의 검 말입미다.”

“그래, 약속할게. 기사의 검으로 선물해 주겠다.”

키안이 고갤 들자,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에리스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녀 역시 자신과 똑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에리스, 난 한 번도…….”

“알고 있습니다, 주인님. 주인님께서 태어나던 때부터 줄곧 곁에 있었는걸요.”

말하지 않아도 알고 있었다. 키안이 충격을 받았다는 걸. 혼란스럽다는 것도.

“내가 뭘 놓친 걸까?”

“아무것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만약 놓쳤다고 해도, 다시 되찾을 테니까요. 전, 주인님을 믿습니다.”

에리스의 말에 키안이 고갤 끄덕였다.

“주인님, 이제 가야 할 시각입니다.”

에리스가 안타까운 눈빛으로 말했다. 해가 뜨기 전에 키엘체를 빠져나가기 위해선, 지금 떠나야 했다.

“그래, 가야지. 에리스, 카이우스를……. 내 동생을 잘 부탁한다.”

“걱정 마십시오. 주인님처럼 생각하며, 모시겠습니다. 그리고 곧, 다시 뵙겠습니다, 주인님.”

키안은 에리스에게 고갤 끄덕여 보인 후, 카이우스를 다시 한 번 꼭 끌어안았다.

“카이우스, 건강해야 한다.”

“헝님께서 절 데리러 올 때까지 에리스와 함께 있겠습미다.”

키안은 어렵게 카이우스를 품에서 떼어냈다. 카이우스의 작은 손을 에리스에게 넘겨준 후, 키안은 다시 붙잡지 않기 위해 주먹을 꼭 쥐었다.

“서둘러. 통로 입구에 마차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키안의 말에 에리스가 카이우스의 손을 잡고 비밀 통로 안으로 들어갔다.

키안은 두 사람이 멀어져 가는 발자국 소릴 들으며,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더는 발자국 소리가 들리지 않았다. 비밀 통로를 밝히던 빛도 사라졌다.

어두운 통로를 바라보던 키안이 손등으로 뺨을 쓸었다. 그러다 자신이 울고 있음을 깨달았다. 입술 안쪽을 깨물어 멈추려 해도 뜨거운 눈물이 쉴 새 없이 흘러내렸다.

심장이 아파 죽을 것 같았다. 누군가 목을 조르는 듯 숨이 제대로 쉬어지지 않았다.

“아버지…….”

그 순간, 무릎이 꺾였다. 다리에 힘이 빠진 것도 있었지만, 자신이 알고 있던 것들이 모두 진실이 아니었다는 사실에 놀라 무너져 내렸다는 말이 맞았다.

자신을 미워한다고 생각했던 아버지가 그녀를 위해 검을 만들었다. 그것도 레녹스 가문의 가보인 보석을 박아서.

‘내 등을 검으로 베던, 아버지의 서늘한 눈빛이 거짓이었던가? 내가 잘못 본 것이었나?’

혼란스러웠다. 만약 자신이 지금까지 뭔가 잘못 알아왔거나, 모르는 게 있었다면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 바로 잡아야 했다.

“어쩌면 이 검으로 하나는 증명할 수 있을지도 몰라.”

키안은 단호한 표정으로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곤 책상으로 걸어가 상자 안에 들어 있는 검을 집어 들었다.

‘찾아야 해. 내가 불행한 아이가 아니라는 증거를……. 그리고 아버지께서……. 차마 말하지 못한 마음을.’

검에 새겨진 은빛 늑대는 레녹스가의 상징이었다. 그리고 늑대의 눈에 박힌 금빛 보석과 붉은빛 보석은 레녹스 가문 대대로 전해져 오는 가보였다.

로베르트의 대장간에서 이 검에 대한 존재를 알았을 때, 당연히 레녹스가의 새로운 후계자인 카이우스를 위해 만든 검일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대체 아버지께선 어떤 마음으로 이 검을 만들라고 지시한 걸까? 대체 왜……?

“이건…….”

빠르게 검을 살피던 키안의 하늘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이끌리듯 손끝이 검의 손잡이를 더듬었다. 차가운 감촉과 함께 검의 손잡이에 선명하게 새겨진 이니셜이 손에 느껴졌다.

R. 레녹스.

그녀의 쌍둥이 오빠인 키안이 백합을 꺾어 온 그날, 그녀에게 지어준 이름이었다. 릴리스.

**

공개 재판밖에 없는 건가?

세이란은 여전히 딸아이를 품에 안고 있는 사내를 내려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전하, 저들을 어떻게 할까요?”

“우선 감옥에 넣어야겠지. 재판이 시작되기 전까지 말이야.”

에드윈 역시 그렇게 해야 한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문제는 사내가 품에 안겨 있는 딸아이를 절대 놓으려 하지 않는다는 데 있었다. 그렇다고 해서, 어린아이를 캄캄한 지하 감옥에 넣을 수도 없는 일이었다.

“우선 탑에 가두도록 해. 아이가 지하 감옥에 있는 건 좋지 못하니까.”

마치 에드윈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말했다. 그제야 찌푸려져 있던 에드윈이 표정이 풀렸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전하.”

“그나저나 걱정이군. 공개 재판에서도 저렇게 묵비권을 행사한다면, 저 부녀에겐 불리하게 작용할 텐데 말이야.”

“입을 열게 해야죠. 자신을 변호할 수 있게요. 아니, 딸아이를 변호할 수 있게 말입니다.”

하지만 에드윈은 회의적인 얼굴이었다. 감독관에게 붙잡혀 로체 거리를 지나오는 동안 군중은 이미 그를 중죄인으로 낙인을 찍은 상황이었다. 그가 어떤 말을 하든, 모든 게 불리했다.

“아이가 먹을 만한 음식과 깨끗한 옷을 가져다주도록 해. 난 그만 가봐야겠다.”

세이란은 방을 나오기 전 아이를 안고 있는 사내를 보았다. 군중이 던진 돌멩이에 맞아 사내의 얼굴은 피로 얼룩져 있었다. 옷 역시 계란과 피가 엉겨 붙어 엉망이었다.

“금기를 어긴다는 게, 이렇게까지 군중을 흥분시키다니 놀랐군.”

세이란이 혼잣말을 하듯 낮게 읊조린 후, 방을 나왔다.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벌써, 자정이 훌쩍 넘은 시간이었다.

“기다리겠어.”

세이란은 자신의 궁으로 가는 대신, 황궁을 빠져나왔다. 어둠 속을 달려 레녹스 공작가로 향했다.

**

키안은 불도 켜지 않은 방에 앉아 있었다. 새끼 늑대가 그녀의 앞을 계속해서 오가며, 낑낑거렸다. 몇 시간째 미동도 하지 않는 그녀가 걱정되는 모양이었다.

“난 괜찮아. 그러니 불안해하지 않아도 된다. 그냥, 움직일 힘이 없어서 앉아 있는 것뿐이야.”

키안의 목소리에 새끼 늑대가 고갤 번쩍 들더니, 그녀의 다리에 얼굴을 비볐다.

카이우스를 보낸 후, 어깨를 축 늘어뜨린 채 방으로 돌아온 후 새끼 늑대는 마치 그녀의 기분에 공감한 듯 곁에서 떨어지려 하지 않았다.

“휴우, 괜찮대도.”

결국 키안은 고갤 들었다. 그러곤 손을 뻗어 새끼 늑대의 목덜미를 쓸어주었다. 그러자 붉은 혀로 그녀의 손을 핥기 시작했다.

강아지처럼 애교를 피우는 늑대를 보며, 굳어 있던 키안의 입가가 부드러워졌다.

“알아, 네가 곁에 있다는 걸. 그러니 힘을 낼 거야.”

그때 새끼 늑대의 귀가 쫑긋하고 세워졌다. 그러곤 인기척을 느낀 듯 키안의 옷을 물고 창문 쪽으로 끌어당겼다. 키안은 본능적으로 세이란이 왔음을 느낄 수 있었다.

자리에서 일어선 키안이 창가로 가는 대신, 서둘러 욕실로 향했다. 그에게 울었던 사실을 들키고 싶지 않았다.

“키안.”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가 들린 것과 동시에 그가 키안을 등 뒤에서 꼭 끌어안았다.

따뜻한 온기가 몸에 닿자, 그제야 키안은 자신이 셔츠 하나만 입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키안이 아무런 대답이 없자, 세이란이 초조한 기색을 드러냈다.

“혹시 너무 늦게 와 화가 난 건 아니지? 좀 더 빨리 오고 싶었는데, 일이 길어져서. 오는 내내, 초조했다.”

키안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는 안타까운 듯 속삭였다. 자신에게 오기 위해 급히 서둘렀는지, 숨결이 거칠었다.

“오지 않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올 것이라고 약속했었잖아.”

“그렇죠. 하지만 더 급하고 중한 일이 생기면 못 올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습니다.”

“나에게 너보다 더 중요한 일은 없다, 키안.”

그의 목소리에 담긴 불쾌함에 키안이 그의 팔을 풀곤, 뒤돌아보았다. 그러자 그의 녹색 눈동자가 오롯이 그녀를 담고 있었다.

“아직도 불안한 것이냐?”

세이란의 물음에 키안이 고갤 가로저었다.

“아닙니다. 사실은 세이란 님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염치없게도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아무리 바쁘고 중요한 일이 있더라도, 자신에게 와주길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오늘은 전하께서 꼭 와주시길 바랐습니다.”

“키안.”

세이란이 그녀를 힘껏 끌어안았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낮에 있었던 일 말고, 다른 일이 말이다.”

확신하듯 말하는 세이란의 목소리에 키안은 희미하게 웃었다.

“아니라고 거짓말을 하고 싶은데, 전하껜 할 수도 없습니다. 저에 대해 너무 잘 알고 계셔서요. 그래서 지금 좀, 밉습니다.”

“하고 싶으면, 해도 돼. 내가 작정하고 속아주겠다.”

그가 팔에 힘을 주더니, 더 힘껏 자신을 끌어안았다. 작정하고 속아주겠다니. 키안은 그의 마음이 읽혀져, 가슴이 뜨거웠다.

“그럼 염치없지만 하겠습니다. 지금부터 제가 하는 얘기는 모두 거짓입니다. 그러니 속아주십시오.”

키안이 그의 품에 안긴 채, 한 번도 밖으로 꺼내지 못했던 얘길 하기 시작했다.

“제 등에 난 검상은 아버지께서 낸 것입니다. 일곱 살이던 제 등을 날카로운 검으로 베셨습니다.”

목소리가 떨리지 않아 다행이었다.

“그래. 굉장히 끔찍한 거짓말이군.”

“그리고 저는 그때까지 그림자였습니다.”

쌍둥이 오빠인 키안 레녹스의 그림자. 이름도 없는,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 그림자가 바로, 자신이었다.

“태어난 순간부터 레녹스가의 저주받은 아이였고, 태어나선 안 되는 존재였습니다.”

“그것 역시 거짓말이다.”

세이란의 목소리가 분노로 떨리는 게 느껴졌다. 자신의 거짓말에 이렇게 분노하는 그를 보자, 키안은 피식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자신은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는데, 그가 더 분노하다니. 왠지 가슴이 먹먹해졌다.

“저는 쌍둥이로 태어났습니다. 그것을 숨겨온 것도 모자라, 오빠가 죽은 후 여인의 몸으로 오빠 행세를 해왔습니다.”

“그래, 그것 역시 거짓이다.”

“저는 아버지께서 절 미워하신다고 생각했습니다. 제가 아버지와 한 약속을 어기고 탑을 나간 날, 오빠가 죽었습니다. 저 때문이었습니다. 모두를 불행하게 만든 건. 저는 그 떠돌이 점성술사의 말처럼 저주받은 아이였습니다. 그 누구에게도 축복받지 못하는.”

자신을 저주받은 아이라고 하는데도, 마치 다른 사람의 일처럼 담담하게 말하는 키안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거짓말이란 전제하에 자신의 상처를 얘기하는 것 역시 그의 신경을 거슬리게 했다.

“거짓이다, 키안 레녹스. 내가 널 축복한다. 네가 태어난 사실에 감사하고, 네가 살아 있다는 사실에 미칠 듯이 기뻐한다.”

키안을 끌어안고 있던 그의 팔이 풀렸다. 그가 그녀의 턱을 들어 올리더니, 눈을 응시한 채 힘주어 말했다.

“네 말처럼 지금까지 얘기했던 건, 모두 거짓이다. 그리고 내가 하는 이야기가 진실이니 똑똑히 마음에 새기도록 해.”

키안은 목이 꽉 메어, 대답할 수가 없었다.

“나는 널 살리고 싶었다. 내 모든 걸 걸고라도.”

“전하?”

“나에게 너는, 내 전부다. 모든 걸 버리고라도 얻고 싶은 단 하나. 그것이 바로 너였다, 키안 레녹스.”

그의 나직한 고백에 키안의 하늘빛 눈동자가 흐려졌다.

“그러니 조금 전 네가 했던 말은 모두 거짓이다. 내가 모든 사람을 대신해 널 축복한다. 널 내 목숨처럼 아낀다. 나 자신보다, 널 사랑한다.”

그가 그녀의 뺨에 얼굴을 비볐다. 사랑스러워 미치겠다는 듯 뺨과 얼굴에 무수히 많은 입맞춤을 했다.

“널 사랑한다, 키안 레녹스.”

황제의 독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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