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9 화
알렌 사제가 자신이 들은 내용을 한꺼번에 뱉어냈다. 그러곤 샤론의 반응을 기다렸다.
“지금 황태자비가 레녹스 공작가의 사람이라고 했나요? 하지만 나는 레녹스 공작엔 여자아이가 태어나지 않는 걸로 알고 있는데요?”
샤론이 의구심 가득한 눈빛으로 알렌 사제를 쏘아보았다. 그러자 당황한 표정으로 서둘러 대답했다.
“저 역시 그 이유까진 알지 못하지만, 분명 도미니크 대신관께서 황태자 전하께 말씀드리는 걸 똑똑히 들었습니다. 신탁에서 정한 황태자비는 레녹스 공작가의 사람이라고. 그리고 전하께서도 알겠다고 대답하셨습니다.”
알렌 사제가 당황한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곤 손톱을 깨물며, 자신이 들었던 내용을 다시 한 번 곱씹었다.
“분명히 그랬습니다. 황태자비는 레녹스 공작이라고요.”
“의심하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대신관께서 받으신 신탁의 내용이 사실이라면, 레녹스 공작이 여자가 되어야 한다는 소린데. 말이 되지 않…….”
순간 샤론이 입을 다물었다. 그러곤 그녀의 눈동자가 경악으로 커지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설마?”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충분히 가능성은 있었다. 귀족들 사이에서 젊은 레녹스 공작의 외모가 레이디들보다 더 아름답다는 말이 소문으로 떠돌 정도였으니까.
‘키안 레녹스 공작이 여자라면,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겠어. 그전에 확인을 해봐야겠군.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
샤론이 품속에서 금화가 가득 든 주머니를 꺼내 알렌 사제에게 건넸다.
“대신전으로 돌아가는 대신, 이 돈을 가지고 데칸 상단으로 가는 게 좋겠군요. 제가 보냈다는 얘길 하면, 안전한 곳으로 안내해 줄 겁니다.”
“하지만 대신전에서 제가 없어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분명 의심을 하게 될 것입니다. 제 뒤를 쫓을 테고요.”
알렌 사제가 초조한 얼굴로 말했다. 샤론은 겁쟁이처럼 구는 사내를 보며 속으로 혀를 끌끌 찼다. 정보원으로 쓰기엔 간이 콩알만 했다.
“돌아가도 문책을 당하는 건 똑같을 겁니다. 지금은 미행을 따돌렸다고 해도, 곧 사제님께서 제 사람인 걸 알게 될 테니까요. 신전의 정보력은 상단을 뛰어넘는다고 들었거든요.”
샤론의 말에 알렌 사제가 고갤 끄덕였다. 설득력 있는 말이었다.
아니, 오히려 대신관에게 자신이 에버콘 공작부인의 정보원이었단 사실을 들키지 전에 먼저 몸을 숨길 기회가 온 것이 그에겐 행운인지도 몰랐다.
만약 그가 대신전을 배신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그 죗값은 감당할 수 없을 정도로 무시무시한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알렌 사제가 금화가 가득 든 주머니를 품속에 밀어 넣고는 떠날 채비를 했다.
“그 옷은 눈에 띄는군요. 제가 갈아입을 옷을 드릴 테니, 바꿔 입는 게 좋겠습니다.”
샤론이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설치된 줄을 당겼다. 그러자 집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이분께 입을 만한 옷을 드리도록 해. 그리고 마차도 빌려주고.”
“알겠습니다, 마님. 절 따라오십시오.”
집사의 말에 알렌 사제가 그의 뒤를 따랐다. 응접실을 나가기 전, 알렌 사제는 샤론 에버콘을 보았다. 그러곤 도미니크 대신관이 또 다른 신탁을 받은 것 같다는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저기 한 가지 더 드릴 말씀이…….”
“그건 나중에 듣겠습니다. 지금 외출을 하던 참이라.”
샤론의 말에 알렌 사제가 입을 다물었다. 뭐, 그녀의 말처럼 나중에 해도 될 것 같았다.
“그럼 나중에 뵙겠습니다.”
집사와 함께 알렌 사제가 나가자, 샤론 역시 외출을 위해 방으로 돌아갔다. 서둘러 코트를 챙겨 입은 샤론은 벽시계의 시간을 확인했다.
“약속 시간에 늦어버렸군.”
하지만 상관없을 것 같았다. 그녀가 알아낸 정보를 얘기한다면, 깜짝 놀랄 테니까.
“그나저나 놀라워. 유스타나 제국 깊숙이에 테란의 정보원이 숨이 있었다니. 그것도 몇 대에 걸쳐서 말이야.”
샤론은 바레나 거리에 있는 진을 만나기 위해 서둘러 저택을 나섰다.
**
키안이 서재의 벽을 누르자, 덜컹 소리와 함께 레녹스가의 비밀 통로의 문이 열렸다.
“헝님, 정말 가야 하는 겁미까?”
카이우스의 침울한 목소리에 키안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카이우스가 유모인 에리스의 손을 꼭 잡고 서 있었다.
“카이우스, 내가 말했었지? 당분간 키엘체를 떠나 있어야 한다고 말이야.”
“하지만 전하께서 저더러 헝님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헝님께서 떠나 계신 1년 동안 저, 검술 연습도 아주 열심히 했습미다. 그래서 힘도 아주 세졌고요. 그러니 곁에 있게 해주십시오.”
“알아. 네가 날 지킬 정도로 용감해졌다는 걸. 아까도 날 네 코트로 가려줬잖아. 네가 더 무서웠을 텐데도 말이야.”
키안의 말에 희망이 생긴 듯 카이우스가 에리스의 손을 놓고는 키안의 팔을 붙잡았다.
“그럼 옆에 있겠습니다. 헝님께 도움이 되고 싶습미다.”
“카이우스, 다음에 도와줘. 이건 내가 해결해야 할 일이거든. 너도 알고 있을 거야. 내가 실은 네 형이 아니라, 누이인 걸.”
키안의 말이 카이우스가 조심스럽게 고갤 끄덕였다. 자신의 형님이 사실은 여인이란 사실을 자연스럽게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것이 레녹스가 사람이란 지켜야 할 비밀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미다. 그것이 제국법을 어긴 중죄라는 것도요.”
순식간에 카이우스의 눈가가 붉어졌다. 울음을 터뜨리고 싶었지만 황태자인 세이란과과 약속했다.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을 지키기 위해선 강해지기로. 카이우스는 입술을 꾹 깨물어 눈물을 삼켰다.
“맞아. 그래서 바로 잡으려는 것이다. 그리고 그건, 어디까지나 나 혼자 해야 할 일이야.”
“하지만 헝님께서 벌을 받을지도 모릅미다.”
카이우스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키안은 무릎을 꿇어 카이우스와 시선을 마주했다.
“내가 누군지 잊은 것이냐? 난 황태자 전하께서 가장 아끼는 황실 기사단의 단장이다. 그런 날 아무도 함부로 하진 못해.”
키안이 평소와 달리 위엄 있게 말하자, 그제야 카이우스의 얼굴에 안도의 표정이 떠올랐다.
“잊고 있었습니다. 헝님께서 세이란 전하 다음으로 세다는 사실을요.”
“알았으니, 이제 에리스와 함께 떠나는 거다. 곧, 다시 만날 테니 걱정하지 말고.”
카이우스가 고갤 끄덕였다.
“이번엔 얼마나 걸리는지 말씀해 주십시오.”
“지난번보단 더 빠를 거야. 약속할게.”
키안이 손을 뻗어 카이우스의 뺨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어린 동생은 울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그런 카이우스를 보며, 키안의 심장이 따끔거렸다. 자신 역시 강해져야 했다.
‘변했어. 불과 1년 전까지만 해도 죽을 계획까지 세웠었는데. 지금은 죽을 각오로 싸울 생각이 들다니.’
아마 자신이 변한 이유는 세이란 때문인 듯했다.
“헝님께 드릴 게 있습미다.”
그때 카이우스가 익숙한 상자를 꺼내 키안에게 건넸다.
“에리스에게 주려던 게 아니었어?”
“에리스가 헝님이 머리카락을 길면, 머리핀이 필요할 것 같다고 말해주었습미다.”
상자를 받아 든 키안이 에리스를 올려다보았다.
“작은 도련님께서 1년 동안 돈을 모으셨습니다. 주인님께서 전쟁터에서 돌아오시면, 선물을 드리고 싶다고 하시면서요. 이리 줘보십시오. 제가 해드리겠습니다.”
에리스가 상자를 받아 들었다. 그러곤 백합이 새겨진 머리핀을 키안의 은빛 머리카락에 꽂아주었다.
“예쁩니다, 헝님.”
카이우스가 키안의 은빛 머리카락을 장식한 머리핀을 보며, 환하게 웃었다. 뜻밖의 선물에 가슴이 뭉클했다. 목에 뭔가가 걸린 것처럼 아렸다.
“고맙다, 카이우스. 잠깐만, 기다려. 그러고 보니 너에게 줄 것이 있다.”
키안이 자리에서 일어서더니, 액자가 걸려 있는 서재의 벽으로 걸어갔다. 손을 뻗어 액자를 치우자, 숨겨져 있던 금고가 모습을 드러냈다.
달칵 소리와 함께 금고가 열렸다. 키안은 금고 안에 넣어 상자를 조심스럽게 꺼냈다. 그러자 카이우스가 호기심을 드러내며 키안 곁으로 왔다.
“그게 뭡미까?”
“아버지께서 네가 태어나던 날, 대장장이에게 맡겨 만드신 검이다. 어쩌다 보니, 이제야 너에게 주게 되었다.”
키안이 상자를 들고 카이우스가 있는 곳으로 왔다.
“아버지께서요?”
“그래. 대장장이의 말이 가문의 보석을 박아 만들었다고 하더구나. 네가 직접 열어보렴.”
키안이 검이 들어 있는 상자를 카이우스 앞으로 내밀었다. 그러자 잔뜩 흥분한 표정의 카이우스가 묵직한 뚜껑을 열었다.
“어어, 안 됩니다.”
하지만 철로 된 뚜껑은 카이우스가 열기엔 역부족이었다. 키안이 상자를 책상 위에 내려놓은 후, 천천히 뚜껑을 열었다.
“세상에, 정말 이게 제 검입니까?”
카이우스가 아름다운 보석으로 장식된 은빛 검을 보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키안 역시 처음으로 검을 다 보았다.
‘잠깐, 이 검은……?’
그 순간 카이우스가 검을 들어 올렸다. 그러곤 검에 섬세하게 조각된 은빛 늑대의 눈을 장식한 황금빛 보석을 손으로 쓸었다.
“실망입니다. 아름답긴 하지만, 전 헝님처럼 멋진 검을 원했거든요. 이건 마치 레이디들을 위한 검처럼 약해 빠졌습니다.”
카이우스가 불만스러운 듯 입술을 내밀었다. 그러곤 멍하니 검을 내려다보고 있는 키안을 올려다보았다.
“헝님, 헝님! 왜 그러시는 겁미까? 우시는 겁미까?”
놀란 카이우스가 검을 상자에 내려놓고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손을 뻗어왔다. 그러곤 까치발을 한 후 키안의 눈가로 손을 뻗어왔다.
“아니야, 우는 게 아니라…….”
키안은 뒷말을 뱉어내지 못한 채, 입을 다물었다.
‘그럴 리 없어. 아버지께선 날 미워하셨어. 그런데…….’
믿을 수 없었다. 아버지인 레녹스 공작이 7년 전에 만든 검은 카이우스가 아니라, 자신을 위한 여성용 검이었다.
그 사실을 깨닫자, 키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한 번도 상상해 보지 못했다.
자신을 미워하는 아버지가, 원망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쏘아보던 아버지가 자신을 위해 검을 만들었다니. 그것도 여성용 검을.
황제의 독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