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8 화
키안이 눈살을 찌푸리며, 상황을 파악하려 했다. 그때 구경꾼으로 보이는 자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지난번에 죽은 여자와 아이의 남편이라는군요. 그런데 저기 안고 있는 여자아이, 그때 그 남자아이와 비슷한 또래 같지 않나요?”
“세상에 그럼 그 소문이 맞는 모양이네요.”
“소문이라니, 대체 뭔데요?”
“그게……. 저 부부 사이에 남녀 쌍둥이가 태어났다는군요. 지금까지 여자아이를 비밀 방에 숨겨놓고 몰래 키워왔는데, 그 집 하인에게 들켜서 이런 사단이 난 모양이더라고요.”
“남녀 쌍둥이가 태어났다고요? 그건 제국법을 어긴 중죄잖아요?”
옆에 있던 구경꾼의 목소리가 놀란 듯 한톤 높아졌다.
“쯧쯧쯧, 그런 짓을 벌이다니. 그럼 남편이 부인과 아이를 죽인 걸까요?”
“그거야 재판에서 판결나지 않겠어요? 소문엔 곧 공개 재판이 열린다고 하던데.”
구경꾼의 말에 키안은 마른침을 삼켰다. 조금 전 들은 말을 종합해 보자면, 감독관에 의해 잡혀온 사내가 바로 바레나 거리에서 자신이 목격한 살인 사건의 남편인 모양이었다.
“죽어라!”
그때 구경꾼 중 한 남자가 들고 있던 토마토를 사내에게 던졌다. 퍽 소리와 함께 붉은 토마토가 으깨지며, 사내의 가슴에서 짓이겨졌다. 마치 그 모습이 피처럼 보였다.
“중죄인 주제에 뻔뻔하게 고갤 들고 나타나다니. 죽어라!”
술에 취한 듯 혀가 꼬인 듯 뱉어내는 남자의 급작스러운 행동과 말에 거리가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리고 남자의 선동으로 거리의 분위기가 순식간에 변하기 시작했다. 너 나 할 것 없이 감독관에게 잡혀, 끌려가는 사내를 향해 욕설을 퍼붓기 시작했다. 그중 어떤 이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돌멩이를 던지기도 했다.
퍽, 퍽. 둔탁한 소리와 함께 사내의 얼굴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사내는 품속에 안겨 있는 딸을 보호하려는 듯 날아오는 돌멩이를 피하지도 않았다.
“형님, 보지 마세요. 제발 보지 마세요.”
갑작스럽게 작은 손이 키안의 눈을 가렸다. 그제야 키안은 자신이 어떤 표정으로 사내와 아이를 바라보고 있었는지 깨달았다.
분명 어린 카이우스가 자신의 눈을 가릴 정도로 절망적인 표정일 터였다.
‘가장 잘 숨겼어야 할 감정을 카이우스에게 보이다니.’
갑자기 벌어진 충격적인 장면에 키안은 카이우스와 함께 있다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감정을 추슬러야 했다. 어린 동생이 불안해하지 않게.
“카이우스.”
키안이 자신의 눈을 가린 카이우스의 손을 꼭 잡았다.
“헝님.”
작은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키안은 자신의 눈에서 카이우스의 손을 떼어내며, 환하게 웃었다. 그러자 걱정으로 찌푸려져 있던 하늘빛 눈동자가 커졌다. 조금 안심이 된 모양이었다.
“카이우스, 걱정할 것 없다. 너무 안타까워 바라보았던 것뿐이야.”
키안이 카이우스에게 시선을 맞추기 위해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러자 이번엔 카이우스가 자신이 입고 있던 외투의 자락을 들어 키안이 아무것도 볼 수 없게 가려주었다.
“헝님과 아무 상관도 없는 일입니다. 그러니 얼른 돌아가요. 제발, 집으로 돌아가요.”
카이우스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자신의 시야를 가리기 위해 외투 자락을 들고 있는 작은 손 역시,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새하얗게 변해 있었다.
‘아하, 이런……. 실패했군.’
키안은 뜨거운 것이 목구멍에 걸린 듯 아렸다. 지금껏 카이우스를 아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어린 동생은 자신 앞에서만 아이인 척했을 뿐, 이미 자신을 지킬 정도로 커 있었다.
“이제 다 컸네. 날 보호할 줄도 알고. 하지만 카이우스, 난 괜찮아. 걱정하지 않아도 돼.”
키안이 카이우스의 작은 몸을 꼭 끌어안았다. 따뜻했다. 그제야 키안은 긴장으로 인해 자신의 몸이 싸늘하게 식어 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두 사람 여기서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지?”
익숙한 목소리에 키안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전하께서 여긴 어떻게?”
“너야말로 왜 이곳에 있는 거지?”
“어, 그게. 카이우스와 오랜만에 외출을 했습니다. 그동안 너무 소홀한 것 같아서요.”
그제야 날카롭게 치켜 올라갔던 그의 눈썹이 내려왔다. 그러곤 안도의 한숨을 내쉬며,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이리 와. 내가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게 마차가 있는 곳까지 데려다주겠다.”
세이란이 키안의 뒤에 서 있는 카이우스를 품에 안았다.
“내려주십시오, 전하. 혼자 걸어갈 수 있을 만큼, 저도 다 컸습미다.”
카이우스가 세이란의 품에서 내려오려 했다.
“나도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은 널 어린아이라고 생각해서가 아니라, 최대한 빨리 이곳을 빠져나가기 위해서 이러는 것이다. 그러니 거절하지 마.”
세이란의 말에 카이우스가 키안을 돌아보며 고갤 끄덕였다. 세이란이 카이우스를 안은 채, 키안에게 다가섰다. 그러곤 남은 한 손으로 키안의 손을 꼭 잡았다.
“괜찮아?”
“아무렇지 않습니다.”
키안을 바라보는 녹색 눈동자가 수많은 감정을 담고 짙어졌다. 하고 싶은 말은 아주 많지만, 품에 안겨 있는 카이우스 때문에 말을 아끼는 모습이었다.
“아무렇지 않긴? 얼굴이 창백해졌는데.”
세이란이 키안을 자신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사실 어린 카이우스가 외투로 그녀가 아무것도 볼 수 없게 가리는 모습을 보며,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었다.
“잠을 자지 못해서 그런 것뿐입니다. 자꾸만 괴롭히는 누구 때문에요.”
키안이 일부러 농담했다. 하지만 세이란의 미간은 여전히 찌푸려져 있었다.
“정말 괜찮습니다.”
키안이 다시 한 번 말하자, 세이란이 표정을 풀었다.
“더 괴롭혀야겠군. 아무 데도 돌아다니지 못하게.”
세이란의 농담에 키안의 얼굴이 붉어졌다.
“이제 서둘러야겠다. 사람들이 더 많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세이란은 두 사람을 데리고 가게를 나왔다. 그러곤 구경꾼들 사이를 헤치고 재빨리 거리를 벗어났다.
“마차는 어디에 있지?”
“이곳에서 두 블록 떨어진 곳에 있습니다.”
빠르게 걸어 세 사람은 레녹스 공작가의 마차가 세워진 곳에 도착했다. 세이란이 마차의 문을 열고 카이우스를 의자에 앉혔다. 그러곤 뒤에 서 있는 키안을 돌아보며 말했다.
“나는 바로 황궁으로 돌아가야 한다.”
저택까지 데려다주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상황이 짜증이 나는 모양이었다.
“여기까지 데려다주신 것만으로도 충분히 도움이 되었습니다. 어서, 가보십시오. 리치문트 공작님께서 기다리고 계실 겁니다.”
키안이 애써 밝은 척 미소를 지어 보였다.
“억지로 웃을 필요 없다. 내가 그랬잖아. 내 앞에선 그럴 필요 없다고.”
“저는 정말 괜찮습니다. 전하가 오셨으니까요.”
진심이었다. 만약 그 상황에서 세이란이 나타나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곳을 빠져나왔을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세이란이 왜 황궁이 아닌 이곳에 있었는지에 생각이 미쳤다.
“그런데 전하께선 어딜 다녀오시던 길이셨습니까?”
“대신전에서 도미니크 대신관을 만났다.”
대신관이란 말에 키안이 고갤 들었다. 그러자 세이란의 녹색 눈동자가 그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설마……. 대신관이 신탁에 대해 얘길 한 건가?’
하지만 키안은 세이란의 태도와 표정만으로 그가 신탁에 대해 들었는지 여부를 알 수가 없었다.
“가서 기다려.”
그 말은 오늘 저녁, 자신을 방문하겠다는 뜻이었다. 기뻤다. 하지만 조금 전 붙잡혀 온 사내로 인해 정신없이 바빠질 게 분명했다.
“무리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키안!”
세이란이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감쌌다. 입술만 달싹이며 말을 삼키는 그를 보며, 키안은 그가 어떤 마음인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었다.
“저는 괜찮습니다. 그러니 걱정 마십시오.”
“오늘 밤에 가겠다.”
더는 거절을 허락하지 않겠다는 듯 단호하게 말했다. 키안은 그제야 감췄던, 속마음을 고스란히 드러냈다.
“늦더라도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하아, 미치겠군.”
그 순간 세이란이 고갤 숙여왔다. 순식간에 그의 입술에 키안의 입술에 닿았다.마부는 물론 카이우스 역시 자신이 키안에게 키스를 하는 모습을 볼 게 터였지만,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 당장 키안에게 키스하지 않으면, 자신의 눈앞에서 사라져 버릴 것만 같았다.
“자, 잠깐만……. 누가 보기라도……. 읍!”
뜨겁고 말캉한 혀가 순식간에 입술을 파고들더니, 농밀하게 혀를 얽어왔다. 순식간에 뜨거운 열기가 두 사람을 휩쓸었다.
잠시 후 언제 그랬냐는 듯 세이란이 입술을 뗐다. 그러곤 얼굴을 붉힌 채 고갤 숙인 키안을 마차에 앉혔다.
“카이우스, 지금부터 네 형님을 부탁한다. 조금 전처럼 넌 네가 사랑하는 사람을 지켜야 해. 그러기 위해선, 강해져야 한다는 걸 잊지 마. 내 말 무슨 뜻인지 알겠지?”
세이란의 물음에 카이우스가 고갤 끄덕였다. 평소라면 세이란에게 질투를 드러내며, 키안에게 어리광을 부렸을 테지만 카이우스의 얼굴엔 단호함이 배어 있었다.
“저도 알고 있습니다. 레녹스 가문은 제가 지키겠습니다.”
“그래. 너를 믿겠다, 카이우스 레녹스.”
대견하다는 듯 세이란은 카이우스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그건, 일종에 인정이었고, 황태자에게 받은 인정은, 나중에 성년이 된 후 그를 기사로 받아들이겠다는 뜻이기도 했다.
“난 이제 가봐야 한다.”
세이란이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마부에게 출발할 것을 명령했다. 이내 두 사람을 태운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이란은 멀어져 가는 마차를 보며, 다시 한 번 주먹을 꼭 쥐었다. 그의 눈빛 역시 흔들림 없이 단호했다.
며칠 후면, 로체 거리의 살인 사건에 대한 공개 재판이 열릴 터였다. 세이란은 공개 재판을 통해, 관습법에서 엄금하는 금기를 없앨 생각이었다.
마차가 보이지 않자, 그 역시 서둘러 황궁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마님, 대신전의 신관께서 마님을 급히 뵙길 청하고 있습니다. 어찌할까요?”
외출 준비를 하던 샤론 에버콘이 미간을 찌푸리며 하녀를 돌아보았다.
“대신전에서 신관이 왔다고? 어서 들이도록 해.”
“알겠습니다, 마님.”
“아니, 잠깐 기다려. 내가 직접 가봐야겠다. 대신 넌, 집 안에 있는 모든 하인을 별관으로 보내도록 해. 내 허락 없인 아무도 나오지 못하게 하고.”
“네? 아, 네. 그렇게 명하겠습니다.”
하녀가 눈치 빠르게 방을 나가자, 샤론 역시 방을 나왔다.
대신전에 심어둔 신관이 들킬지도 모르는 위험을 무릅쓰고 직접 공작저로 찾아오다니.
다른 사람에게 말할 수 없는 엄청난 비밀을 전해 들은 게 분명했다.
복도를 지나는 동안 샤론은 입가에 서늘한 미소가 어렸다.
‘드디어 시작된 모양이야.’
얼마 전 익명으로 보내온 편지를 받은 후부터, 곧 이런 날이 오지 않을까 생각은 했었다.
하지만 막상 눈앞에 닥친다고 생각하자, 흥분으로 심장이 무섭게 뛰었다.
서둘러 응접실 문을 열고 들어간 샤론은 초조한 얼굴로 의자에 앉아 있는 신관에게 다가갔다.
“알렌 사제님, 이렇게 직접 절 찾아오실 줄을 몰랐습니다. 미행은 없었겠지요?”
샤론의 차분한 태도에 오히려 알렌 사제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그녀의 눈치를 보며, 자리에서 일어선 알렌 사제가 허릴 숙였다.
“죄송합니다, 연락도 없이 찾아와서. 하지만 너무도 급박한 일이라, 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좋습니다. 사안이 중대하다니. 그럼 말씀해 보십시오.”
샤론이 의자에 앉자, 알렌 사제 역시 엉거주춤 의자에 앉았다.
“오늘 새벽에 황태자 전하께서 대신전에 오셨습니다.”
“황제 폐하의 쾌유를 위한 기도를 드리러 간 모양이군요.”
샤론은 일부러 별일 아니라는 듯 말했다. 하지만 머릿속은 태연한 표정과는 달리 빠르게 회전 중이었다.
‘황태자가 대신전을 찾다니. 도미니크 대신관이 신탁을 받은 건가?’
신탁이 아니라면, 황태자가 대신전을 찾을 이유가 없었다.
“그것이 아니라, 대신관을 만나셨습니다. 하지만 대신관께선 아침까지 기도실에 계셨고요. 그러니까 제 말은 황태자 전하께서 그렇게 오랜 시간 기다려 대신관을 만나셨다는 게 놀랍기도 하고, 믿기지 않아서. 아니, 아니 그게 아니라 제가 들은 말이 사실인지 아닌지도 모르겠군. 그러니까 제 말은…….”
당황한 듯 횡설수설하는 알렌 사제를 보며, 샤론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의 태도로 보건대, 정말 넋이라도 나간 모습이었다.
“진정하고, 차분하게 말하는 게 좋겠군요. 지금은 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군요.”
샤론의 질책에 알렌 사제가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그러니까 제가 드리고 싶은 말씀은 대신관께서 황태자비에 대한 신탁을 받으셨다는 겁니다. 그리고 그 상대가 바로, 레녹스 공작가의 사람이란 사실입니다.”
황제의 독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