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7 화
세이란은 대신전의 접견실에 앉아 도미니크 대신관을 기다렸다. 하지만 접견실의 벽시계가 오전 10시를 가리키고 있었지만, 대신관은 모습을 드러내지 않고 있었다.
“대신관은 아직도 기도실에 있는 모양이군.”
세이란이 앞에 놓인 탁자를 손끝으로 톡톡 치며 말하자, 접견실 앞에 서 있던 신관이 바짝 긴장한 표정으로 고갤 숙였다.
“그게 아직…….”
말꼬리를 흐리는 신관의 태도에 짜증이 밀려왔다. 세이란은 화를 내는 대신,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차가 식었군.”
“아, 네. 차를 다시 내오겠습니다.”
신관은 자릴 피할 기회라고 생각했는지, 재빨리 대답했다.
“가는 김에 기도가 언제 끝나는지도 알아보도록 해.”
“알겠습니다, 전하.”
신관이 서둘러 모습을 감추자, 세이란이 미간을 찌푸리며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렇게 오랫동안 기도실에서 나오지 않다니. 설마 신탁이라도 받은 건가?”
만약 그렇다면 시간이 걸리더라도, 도미니크 대신관을 기다려야 했다.
“오래 기다리시게 해서 죄송합니다, 황태자 전하.”
때마침 도미니크 대신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접견실 안으로 들어서는 그의 얼굴은 창백했다. 그래서인지 대신관의 은백색 눈동자가 더욱 도드라져 보였다.
“무작정 찾아온 내 잘못이다. 지쳐 보이는군. 여기 앉는 게 좋겠다.”
“감사합니다, 전하.”
도미니크 대신관이 자릴 잡고 앉았다. 세이란 역시 자리에 앉으며, 대접견실 앞에 서 있는 신관을 향해 명령했다.
“대신관께도 차를 따라 드려라.”
“네, 전하.”
신관이 서둘러 대신관의 찻잔에 뜨거운 차를 가득 따라주었다.
“고맙군요, 알렌 사제. 황태자 전하와 나눌 이야기가 있습니다. 모두 자릴 물려주시겠습니까?”
“그렇게 하겠습니다, 대신관님.”
알렌 사제라고 불린 신관이 접견실을 나가며, 문을 닫아주었다. 그러자 접견실 안에 세이란과 도미니크 대신관만이 남게 되었다.
“나에게 긴히 할 얘기가 있는 모양이군.”
세이란이 대신관을 바라보았다. 대신관은 입이 타는지 찻잔을 들어 올렸다. 서둘러 차를 한 모금 마신 대신관의 표정이 차분해졌다.
“전하께 해드릴, 아주 긴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대가 나에게 해줄 그 긴 이야기라는 것이 혹시 구스타프 1세와 관련 있는 것이라면, 해줄 필요 없다.”
순간 도미니크 대신관의 손에 들려 있던 찻잔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읏-”
뜨거운 찻물에 손을 적시자, 놀란 대신관이 재빨리 찻잔을 탁자 위에 놓았다.
“죄송합니다.”
허둥지둥 옆에 놓여 있던 마른 수건으로 탁자 위를 닦았다. 세이란은 그런 도미니크 대신관을 보며, 자신의 짐작이 맞는 모양이었다.
“그대는 어떻게 알았지? 제국의 역사와 함께 된 악연을 말이다.”
찻물을 닦던 도미니크 대신관이 고갤 들었다. 그러곤 조금 전과는 달리 차분해진 모습으로 대답했다.
“신전에 기록된 역사를 통해 알았습니다. 그리고 얼마 전 신탁을 받았습니다.”
“신탁이라면, 황태자비에 관한 것이겠군.”
마치 모든 걸 다 알고 있다는 듯 말하는 세이란을 보며, 도미니크 대신관은 어쩌면 자신이 본 신탁의 내용 역시 모두 알고 있는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렇습니다. 그리고 또 다른 신탁이 있었습니다. 그건 황태자 전하와 관련된 신탁이었습니다.”
도미니크 대신관이 허릴 세우고 세이란을 응시했다. 어느새 미동도 없던 은백색의 눈동자에 그늘이 져 있었다.
“구스타프 황실에 닥쳐올 죽음에 관한 신탁인 모양이군.”
“전하.”
도미니크 대신관이 의자에서 일어나 바닥에 무릎을 꿇었다.
“그런 신탁을 받았다고 해서, 그대의 잘못이 아니다. 그러니 일어나 자리에 앉도록 하라.”
세이란의 명령에 대신관이 바닥에서 일어나 다시 의자에 앉았다.
“도미니크 대신관, 그건 내 선택이었고, 내 선택에 대한 결과일 뿐이다. 그러니 그대는 그대의 본분을 다하면 된다.”
세이란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름없이 침착했다. 사실 이미 짐작하던 바였다.
그에게 주어진 완벽한 미래를 버리고, 키안을 살리고자 마음먹었을 때부터 그 대가가 자신의 목숨이 될 것이란 사실을.
하지만 만약에 다시 선택의 순간이 온다고 해도, 절대 그 선택을 바꿀 생각은 없었다.
후회는 없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그는 자신의 완벽한 미래보다 더 충만한 기쁨을 맛보았다.
죽음이 그의 목전에 당도해 있다고 해도, 두렵지 않았다.
“신탁의 내용을 듣기 전에 그대에게 묻고 싶은 게 있다. 혹시 그대는 전 대신관의 행방을 알고 있나?”
“얼마 전, 전 대신관님이 계신 곳을 찾았습니다.”
“왜 말하지 않았지?”
“말씀드리지 않은 이유는 곧 전하의 앞에 모습을 드러낼 것이기 때문입니다.”
도미니크 대신관의 말에 세이란이 고갤 끄덕였다.
“그럼 곧 보게 되겠군. 이제 말하라. 듣겠다.”
세이란의 명령이 떨어진 순간, 도미니크 대신관이 고갤 들었다.
“제가 본 신탁의 내용을 모두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받은 신탁은 두 가지입니다.”
도미니크 대신관은 흔들림 없는 녹색 눈동자를 마주 보며, 자신이 아는 모든 내용을 차분한 목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
로체 거리에 도착하자마자, 카이우스가 향한 곳은 바로 레이디들의 액세서리를 파는 가게 앞이었다.
“카이우스, 정말 이런 곳에 와보고 싶었던 거야?”
“꼭 사고 싶었던 게 있습니다.”
사고 싶었던 것이라고? 소년들이 좋아하는 장난감 가게라 아니라, 이런 곳에서?
키안은 흥분해 있는 카이우스의 머리 위로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사실 외출을 위해 마차에 탔을 때, 카이우스의 바지 주머니가 불룩했다. 유모인 에리스에게 슬쩍 물어보니, 동전이라고 대답했다.
“1년 동안 모으신 용돈이십니다. 오늘은 그 용돈을 쓰실 모양입니다.”
에리스의 대답에 키안은 당연히 카이우스가 장난감을 살 것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액세서리 가게라니.
“정말 이 가게가 맞는 거지?”
키안이 다시 한 번 묻자, 카이우스가 고개까지 주억거리며 대답했다.
“어서 들어가요, 헝님.”
키안이 가게 문을 열어주자, 카이우스가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곤 다짜고짜 주머니에서 동전을 꺼내 카운터 위에 올려놓기 시작했다.
“돈은 가져왔습미다. 이 가게에서 가장 예쁜 머리핀을 주십시오.”
카운터 뒤에 서 있던 여주인이 뒤따라 들어오는 키안을 흘끗 보았다. 그러곤 카이우스를 향해 상냥하게 물어왔다.
“도련님께서 선물하시려는 모양이군요. 혹시 아름답고 젊은 레이디이십니까?”
여주인의 물음에 카이우스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러곤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머뭇거리더니, 키안의 눈치를 보며 고갤 끄덕였다.
“유스타나에서 가장 아름답습니다. 하지만 이건 비밀입니다.”
카이우스가 누가 들을세라 작게 속삭이자, 여주인의 눈빛이 반짝였다. 귀여운 모양이었다.
“그 비밀, 꼭 지키겠습니다. 여기 있는 것들 중에서 골라보세요.”
여주인이 카이우스 앞에 수공예로 만든 액세서리를 하나씩 꺼내놓기 시작했다.
한눈에 봐도 카이우스가 내놓은 돈보다 훨씬 비싼 것들임을 알 수 있었다.
“헝님, 이리 와보십시오. 에리스는 머리핀이 좋다고 했는데, 이건 어떠십미까?”
그제야 키안은 카이우스가 유모인 에리스에게 선물하려 한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글쎄다, 난 이런 쪽엔 관심이 없어서.”
키안이 어색하게 웃으며, 카이우스 옆에 쭈그리고 앉았다. 에리스에게 선물하려는 기특함에 도와주고 싶었다. 그러다 백합이 조각된 머리핀을 보곤, 무의식적으로 손을 뻗었다.
“저는 이걸로 하겠습니다.”
카이우스가 키안이 집은 머리핀을 가리키며 말했다.
“잠깐, 카이우스. 좀 더 신중하게 고르도록 해. 에리스가 이걸 좋아하지 않을지도 모르잖아.”
키안의 말에 카이우스가 고갤 가로저었다.
“분명 좋아할 겁미다.”
“예쁘게 포장해 드리겠습니다. 사실 이 머리핀은 유스타나의 레이디들 사이에서 가장 인기 있는 제품입니다. 마음에 드실 것이라, 장담합니다.”
여주인이 작은 상자를 꺼내며, 카이우스가 고른 백합 머리핀을 포장하기 시작했다.
“여기, 다 되었습니다.”
여주인이 카이우스에게 상자를 건넸다. 예쁘게 포장된 상자를 받아 든 카이우스의 얼굴이 기쁨으로 빛나고 있었다.
“그렇게 좋으냐?”
“네. 무지무지 기쁩니다.”
“그럼 필요한 물건을 다 산 것 같으니, 로체 거리에 생긴 초콜릿 가게에 데려가 주지.”
“초콜릿이요? 지난번에 헝님께서 사오셨던 그것 말이십미까?”
“맞다. 그 초콜릿.”
카이우스가 환하게 웃으며 서둘러 가게를 나갔다. 초콜릿을 맛볼 생각을 하자, 벌써부터 흥분한 모양이었다. 키안은 가게를 나가기 전에 금화 한 닢을 카운터 위에 놓았다.
“부족한 금액입니다.”
“감사합니다, 레녹스 공작님. 하지만 나머지 차액은 제가 작은 도련님께 드리는 선물입니다.”
여주인이 얼굴을 붉히며, 금화를 다시 키안의 손에 놓아주었다.
“하지만…….”
“어서 가보세요. 도련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여주인이 유리 문 앞에 서 있는 카이우스를 가리키며 말했다. 하는 수 없이 키안은 금화를 다시 주머니에 넣었다.
“다음에 또 들러주십시오. 그걸로 충분합니다.”
여주인에게 다시 들르겠다는 약속을 한 후, 키안은 가게를 나왔다. 그러곤 카이우스와 함께 한 블록 떨어져 있는 초콜릿 가게로 향했다.
“세상에! 전 이거랑, 이거랑. 그리고 이것도 먹고 싶습니다.”
초콜릿 가게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카이우스는 아이다운 식탐을 드러냈다.
“초콜릿과 우유를 섞어 만든 음료가 있다고 들었는데. 맛볼 수 있을까?”
“바로 준비해 드리겠습니다. 2층 테라스에 테이블을 몇 개 가져다 두었습니다. 그곳에서 기다리시면, 제가 음료와 초콜릿을 가져다 드리겠습니다.”
주인의 말에 키안과 카이우스는 계단을 통해 2층 테라스로 향했다.
“헝님, 여기서 거리가 한눈에 내려다보입니다. 어서 와보세요.”
카이우스가 테라스에 놓여 있는 의자에 앉으며 키안에게 손짓을 했다. 키안이 의자에 앉으며, 거리를 내려다보았다. 정말 거리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여기 음료와 초콜릿을 가져왔습니다.”
점원이 탁자 위에 뜨거운 우유에 초콜릿을 녹인 음료를 내려놓았다.
“그리고 주문하신 초콜릿은 여기 상자에 다 넣었습니다.”
“고맙다.”
점원이 1층으로 내려가자, 키안이 음료가 담긴 컵을 카이우스 앞에 내려놓았다.
“뜨거우니 천천히 마시도록 해. 초콜릿은 집에 가서 먹는 게 좋겠다.”
“네, 헝님. 저는 이게 어떤 맛일지 너무 궁금합니다.”
카이우스가 잔에 입을 가져다 댔다. 그러곤 호로록 소릴 내며, 달콤한 음료를 마셨다. 다행히 음료는 뜨겁지 않은 모양이었다.
“혀가 녹는 것처럼 맛있습니다.”
카이우스가 컵에서 입을 떼자, 입가에 초콜릿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았다.
“천천히 마셔. 내 것도 줄 테니까.”
키안이 손수건을 꺼내, 카이우스의 입을 닦아주었다.
“아닙니다. 어서 헝님도 마셔보십시오. 진짜진짜 맛있습니다. 둘이 먹다가 하나 죽어도 모를 맛이라니까요.”
“쿡쿡, 그런 말은 또 누구에게 배운 것이냐?”
“헤헤, 집사가 하는 말을 들었슴미다. 요리사가 만들어준 파이를 먹은 다음에요.”
“레니가 만든 파이가 맛있긴 하지.”
그러고 보니 집사인 가브리엘과 요리사 레니가 서로를 바라보는 눈빛이 애틋했던 게 떠올랐다.
“하지만 전 이것이 더 맛있슴미다. 어서, 헝님도 드셔보셔요.”
카이우스가 꿀꺽꿀꺽 음료를 삼키며 말했다. 달콤한 초콜릿 향이 나는 걸로 보아 맛있을 것 같았다.
키안이 컵을 들어 살짝 맛을 봤다.
“맛있어.”
“제 말이 맞죠? 이거 진짜 맛있다니까요.”
카이우스가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 아주 달아서 기분이 좋아지는 맛이야. 하지만…….”
“하지만 뭔데요?”
카이우스가 아쉬운 눈빛으로 자신의 컵을 바라보는 게 보였다. 자세히 보니 이미 카이우스의 컵은 바닥이 드러나 있었다.
“전하께서는 싫어하실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세이란 전하께선 단 음식은 질색하시거든. 자, 더 마시도록 해.”
키안이 자신의 컵에 들어 있는 음료를 카이우스의 컵에 따라주었다. 그러자 두 손으로 컵을 받쳐 들더니, 입가에 잔뜩 묻히고 초콜릿 우유를 마셨다.
“그러고 보면 형님께선 항상 세이란이 전하를 생각하시는 것 같습니다.”
카이우스의 지적에 키안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아무 뜻 없이 하는 말일 테지만, 키안은 민망함을 감추며 카이우스의 입 주위를 닦아주며 말했다.
“또 얼굴에 묻었잖아.”
카이우스가 새하얀 이를 드러내며 웃었다.
“항상 오늘만 같았으면 좋겠습니다. 헝님이랑 이렇게 외출도 하고, 맛있는 것도 먹고.”
순간 키안은 후회했다. 좀 더 자주 외출을 할 걸 하고.
“그렇게 좋으냐? 그럼 앞으로 종종 함께 시간을 보내야겠구나.”
키안의 말에 카이우스가 함박웃음을 지었다.
“음, 오늘은 대신전까지만 가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다음엔 대장간에 데려가 주십시오.”
대장간이란 말에 키안은 카이우스의 생일에 건네주려던 검이 떠올랐다.
‘떠나기 전에 줘야겠어.’
“헝님? 저기 사람들이 아주 많습미다. 무슨 일이 있는 것 같습미다.”
카이우스의 말에 키안이 고갤 들어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순식간에 모여든 구경꾼들 사이로 어린 여자아이를 품에 안은 사내가 보였다.
“그러게 무슨 일일까?”
황제의 독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