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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독사과-106화 (106/139)

제 106 화

“여기 있을 줄 알았다니까. 아직도 용병 경매에 나가는 거야? 그만둔 것 아니었어?”

진의 목소리에 검술 훈련을 하던 패트리샤가 뒤를 돌아보았다.

“너야말로 이 시간에 웬일이야? 밤새 일을 했을 텐데, 자야 하는 것 아냐?”

진이 나뭇가지에 걸려 있는 타월을 집어 패트리샤에게 건넸다. 그러곤 묘한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당분간 문을 닫을 생각이야.”

타월을 받아 든 패트리샤가 이마에 맺힌 땀을 닦아내며 진을 보았다. 말하는 투며, 표정으로 보건대 농담 같지 않았다.

“혹시 장사가 잘 안 돼?”

패트리샤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자 진이 손사래를 치며 재빨리 부정했다.

“아니야. 반대로 문턱이 닳을 정도로 잘돼서 문제지. 내가 파는 물건들이 귀부인들 사이에선 인기 제품들이거든. 특히 내가 만든 묘약은 웃돈을 주고 구입하려 한다고.”

진이 아예 나무 그루터기에 자릴 잡고 앉았다. 그러곤 팔을 쭉 펴며 기지개를 켰다.

“이곳은 언제 와도 편한 것 같아.”

“맞아.”

두 사람이 있는 이곳 숲은 어렸을 때부터 함께 놀던 놀이터였다.

패트리샤가 용병이 되기로 결심한 것도, 그리고 진이 할머니에게 물려받은 예지력을 숨기며 살기로 결심한 것도 바로 이곳이었다. 두 사람에겐 중요한 장소였다.

“장사가 그렇게 잘되는데, 왜 당분간 문을 닫으려는 건데? 다른 계획이 있는 거야?”

패트리샤가 진 옆에 앉으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계획은 당연히 없지. 곧 검술 대회가 열린다잖아. 그래서 당분간 가게는 접고, 검술 대회에 참가한 멋진 기사를 꼬셔볼까 하고. 그러니 내 도움이 필요하면 언제든 말해. 도와줄 테니까.”

진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그러자 패트리샤가 어이없다는 얼굴을 했다.

“지금 사내를 꼬셔보겠다고 문을 닫겠다는 거야? 그러다 단골이 떨어져 나가면 어쩌려고?”

“웃기지? 하지만 난 아주 진지해. 스무 살이 훨씬 넘고서도 결혼도 못한 나는.”

“난 네가 결혼에 관심이 있는 줄 전혀 몰랐어. 그럼 뜨네기 용병을 꼬시는 대신, 바레나 거리에 너 좋다고 따라다니는 사내들 중에 골라보는 건 어때?”

패트리샤가 진지하게 조언을 했다. 그러자 진이 거만하게 웃으며 고갤 가로저었다.

“내가 좀 인기가 많긴 하지. 하지만 내 소원은 이 바레나 거리를 벗어나는 거야.”

패트리샤가 진을 보았다. 그녀는 언제나 그렇듯 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진은 어렸을 때부터 종종 그런 말을 했었다. 마치 언제든 바레나 거릴 훌쩍 떠날 것처럼.

하지만 오늘은 평소와 조금 다른 느낌이었다. 정말 어디론가 떠날 것만 같았다.

“그럼, 날 돕는 건 어때? 내가 종자가 필요하거든. 사실 넌 종자가 될 만큼 어리지도 않고, 여자지만 네가 한다고만 하면 써줄 의향이 있는데 말이야. 어때, 할래?”

“패트리샤, 너 설마 검술 대회에 나가려는 거야?”

진이 놀란 얼굴로 패트리샤를 보았다.

“응, 나갈 생각이야. 검술 대회의 규정엔 여인은 안 된다는 말은 없으니까.”

“하지만 위험하지 않겠어? 용병들은 거칠고 험악하잖아. 그러다 다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나가지 마, 패트리샤. 지금도 충분히 괜찮잖아. 황태자 전하의 일을 돕고 있으니 말이야.”

진의 말처럼 지금 하는 일에 불만은 없었다. 아니, 처음으로 자신이 하는 일에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심장이 뛰고, 매 순간이 즐거웠다.

“불만은 없어. 하지만 검술 대회에 참석에 내 능력을 시험해 보고 싶어. 사실 몸이 근질근질하기도 하고.”

그리고 검술 대회에 참가하는 것 역시 자신의 의지였다. 사실 황태자인 세이란은 패트리샤가 대회에 참가하는 걸 원치 않았다.

용병들 사이에선 패트리샤가 이미 황태자의 사람이란 걸 모르는 이가 없었다. 마음만 먹으며, 대회를 핑계로 공격할 수도 있었다.

“패트리샤, 나는 네가 참가하지 않았으면 좋겠어.”

진의 얼굴이 눈에 띄게 어두워져 있었다. 그러자 패트리샤가 농담조로 말했다.

“대회에 참가하는 멋진 기사를 꼬실 계획이라면서? 너도 내가 대회에 참석해 용병들과 친해지면, 더 좋은 것 아냐?”

진은 겉으로 따라 웃었지만, 마음 편히 웃을 수 없었다. 그렇다고 패트리샤에게 용병대회에 참가하지 말라고 적극적으로 말릴 수도 없었다. 유난스럽게 행동하면, 눈치가 빠른 패트리샤가 뭔가 이상한 낌새를 눈치챌 수 있었다.

“그렇긴 하지. 대신 내가 널 위해 묘약을 만들어줄게. 아마, 그 약을 먹으면 분명 대회에 참석한 용병들을 한 방에 날려 버릴 수 있을 거야.”

“사실 필요는 없지만, 네 성의를 생각해서 받을게.”

패트리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곤 바닥에 내려놓았던 검을 챙겨 들었다.

“이제 가봐야 해.”

“어딜 가는데? 또 전하께서 시키신 일을 하러 가는 거야?”

진이 호기심을 드러내며, 따라 일어섰다. 그러자 패트리샤가 진을 돌아보며 말했다.

“전엔 내가 하는 일에 관심도 없더니, 요즘은 적극적이네. 설마 너도 블랙에 들어오고 싶은 건 아니지?”

“아니, 전혀. 내가 관심 있는 건, 전하의 아름다움 외모야. 내 평생에 그렇게 잘생기고 멋진 분은 처음 보았거든. 만약 너랑 함께 있으면 멀리서라도 머리카락 한 올쯤 볼 수 있을까 해서 묻는 것이고.”

진이 눈을 빛내며 말했다. 그러자 패트리샤가 혀를 끌끌 차며, 고갤 가로저었다.

“정신 차려. 전하껜 이미 마음에 둔 레이디가 계시니까.”

“정말? 혹시 테란의 공주님이셔?”

진의 질문에 패트리샤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진 역시 사교계에 떠도는 소문을 들은 모양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테란의 공주를 들먹이다니, 조금 의아했다.

‘설마 영매의 힘을 갖고 있는 진이 뭔가를 본 건가?’

패트리샤는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너 요즘도 뭐가 보여?”

패트리샤의 질문에 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아니, 안 보이게 된 지 몇 년 됐어. 사실 할머니에 비하면, 처음부터 보잘것없는 능력이었잖아.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게 이상하지.”

“그래. 유스타나에서 살기 위해선 없는 게 나은 능력이니까. 절대 들키지 마.”

패트리샤는 진이 자신의 당부에 고갤 끄덕이자 서둘러 자릴 떴다.

진은 멀어져 가는 패트리샤의 뒷모습을 보며, 어두운 표정을 했다.

“패트리샤가 검술 대회에 참석하다니……. 어쩌지? 배탈이라도 나게 만들어야 하는 걸까?”

진은 자신의 유일한 친구인 패트리샤가 다치지 않기를 바랐다. 그러기 위해선 패트리샤가 검술 대회에 참가하지 못할 그럴듯한 이유를 찾아야 할 것 같았다.

“패트리샤, 미안하지만 네 꿈은 이뤄줄 수 없을 것 같아. 나중에 내게 감사할 거야. 꿈 대신 목숨을 살렸으니까.”

**

닫혀 있던 서재 문이 열리더니, 잔뜩 흥분한 표정의 카이우스가 안으로 뛰어들어 왔다.

“유모 말이 사실이었네요. 황궁에 가셨던 헝님께서 일찍 돌아오셨다고 했거든요. 그럼 오늘은 황궁에 가지 않아도 되는 겁미까?”

외투를 벗던 키안이 카이우스를 돌아보았다. 붉게 상기된 뺨과 반짝이는 눈동자가 기대감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래. 너와 시간을 보낼 생각이다, 카이우스. 하고 싶은 게 있으면 말해. 들어줄 테니까.”

자신을 꼭 닮은 하늘빛 눈동자가 기쁨으로 반짝이는 게 보였다.

“약속하셨습니다!”

“그렇다니까. 그러니 말해봐. 뭘 하고 싶은지 말이야.”

키안의 질문에 카이우스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바로 대답했다.

“전부터 로체 거리에 가보고 싶었습니다.”

“그게 다야? 다른 건 없고?”

“없습미다. 사실 사고 싶은 게 있습미다. 아, 그리고 오는 길에 대신전에도 들렀으면 합미다. 황제 폐하의 쾌유를 위한 기도를 드리고 싶었거든요.”

대신전이란 말에 키안의 입가가 미묘하게 굳어졌다.

“기특하네. 황제 폐하를 위해 기도할 생각을 다하고.”

키안의 칭찬에 카이우스가 기쁜 듯 웃었다. 그 모습을 보자, 도저히 대신전에 가는 건 다음으로 미루자는 말은 할 수가 없었다.

“레녹스 공작가는 황제 폐하를 모시는 가문이니, 저 역시 그래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 너는 레녹스 공작가의 사람이다.”

“헤헤, 에리스에게 가장 멋진 옷을 입혀달라고 할 생각입니다. 헝님과 처음으로 하는 외출이니까요.”

카이우스가 외출 준비를 위해 방을 나갈 때까지, 키안은 미소를 유지하기 위해 애썼다. 문이 닫히자, 키안은 힘없이 의자에 주저앉았다.

“하아, 벌써부터 이렇게 힘이 빠져선 안 되는데.”

눈을 질끈 감고는 키안이 참고 있던 숨을 내쉬었다. 다리가 후들거리고 있음을 의자에 앉고 나서야 느낄 수 있었다.

‘헬로이즈 공주가 알고 있었어.’

키안은 자신이 예언자의 별 아래 태어난 기사라고 했을 때, 흔들리던 헬로이즈의 보랏빛 눈동자를 똑똑히 보았다.

‘분명 그 기사와 관련이 있어. 세이란 전하와도.’

이제 헬로이즈는 가장 효과적으로 자신의 비밀을 폭로할 상대를 찾을 게 분명했다. 그렇게 되면, 제국의 모든 이가 알게 될 터였다.

‘그전에 내 입으로 말을 해야 해.’

키안은 주먹을 꼭 쥐곤 눈을 떴다. 그러자 흔들리던 감정들이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평소와 다름없는 모습으로 되돌아와 있었다.

똑똑!

“주인님, 에리스입니다.”

“들어와.”

이내 문이 열리고 유모인 에리스가 들어왔다.

“외출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무슨 일 있으신 겁니까? 갑자기 걱정이 돼서.”

에리스가 키안의 안색을 살피며 넌지시 물어왔다.

“에리스, 그렇지 않아도 널 부를 생각이었다. 이제 시간이 된 것 같아. 외출에서 돌아오면, 바로 떠날 수 있게 채비를 하도록 해.”

“오늘 말입니까?”

“더 머뭇거렸다간 때를 놓칠 것 같아서.”

순간 에리스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하지만 언제 그랬냐는 듯 고갤 끄덕이며, 자신만 믿으라는 듯 대답했다.

“알겠습니다, 주인님. 대신 카이우스 님껜 주인님께서 직접 말씀해 주십시오.”

“그럴 생각이다. 그래서 일찍 돌아온 것이고.”

헬로이즈 공주를 만난 후, 기사단으로 가던 키안은 발걸음을 돌려 레녹스가로 돌아왔다. 카이우스와 자신에게 남아 있는 시간이 얼마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럼 전 주인님께서 돌아오실 때까지 모든 준비를 끝마치고 있겠습니다.”

사실 키안이 말을 꺼낸 그날부터 언제든 떠날 수 있게 만반의 준비를 해놓은 상태였다.

하지만 막상 그날이 되니, 가슴이 먹먹했다. 두려워서가 아니라, 레녹스 공작가에 홀로 남아 모든 걸 감당해야 할 키안이 너무도 안쓰러워서였다.

서재를 나가려던 에리스가 걸음을 멈췄다. 그러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말을 내뱉었다.

“주인님, 이제야 말씀드립니다. 저는 주인님께서 태어나던 날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제가 지금껏 보아온 아기씨 중에서 주인님만큼 사랑스럽고 예쁜 아기씬 없었거든요. 자랑스러웠고, 또 안타까웠습니다.”

“에리스…….”

알고 있었다. 에리스가 옥탑에 갇혀 있는 자신 때문에 얼마나 마음 아파했는지. 천둥 번개가 치는 날엔 어둠 속에 혼자 떨고 있는 키안을 위해 어김없이 옥탑으로 찾아와 새벽까지 꼭 끌어안아 주던 사람 역시 에리스였다.

“하지만 지금은 자랑스럽습니다. 아마 돌아가신 전 주인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실 겁니다.”

과연 그랬을까? 키안은 에리스의 말엔 동의할 수 없었다. 하지만 아니라고 부정하진 않았다. 대신 키안은 에리스의 손을 꼭 붙잡았다.

“에리스, 항상 너에겐 신세만 지는 것 같아. 하지만 이번에도 부탁할게. 내가 카이우스를 맡길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은 너밖에 없거든.”

에리스의 입가가 바들바들 떨리는 게 보였다. 금방이라도 울음이 새어 나오려는 걸 억지로 참는 눈치였다.

“걱정 마십시오, 주인님. 주인님을 대하듯 그렇게 모시겠습니다.”

“고맙다, 에리스.”

에리스가 서재를 나가자, 키안 역시 벗어놓았던 외투를 다시 입었다. 어쩌면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는 외출이었다. 최대한 즐겁고 행복한 기억을 카이우스에게 남겨주고 싶었다. 키안은 다시 한 번 마음을 다잡은 후, 서재를 나왔다.

황제의 독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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