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5 화
캐슬리스 후작가에서 뜨거운 정사를 나눈 직후, 두 사람은 서둘러 레녹스 저택으로 향했다.
키안의 방에 도착하자마자, 두 사람은 욕실로 들어가 정사로 인해 흘린 땀을 씻어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좁은 욕조 안에서 서로의 몸이 부딪히고 시선이 얽히자 참지 못하고 또다시 서로를 안았다.
단단히 일어선 남성이 밀부의 여린 살을 꿰뚫듯 안으로 파고들었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몸짓이 열정적으로 바뀌었다.
첨벙, 첨벙.
격렬한 행위에 욕조의 물이 흘러넘쳤지만, 두 사람은 신경 쓸 여력조차 없었다. 단단하게 쌓아 올렸던 둑이 무너지듯, 두 사람을 덮친 욕망은 무서울 정도로 서로를 탐하게 만들었다.
진득하게 몸을 섞은 후 키안은 세이란의 품에 안겨 침실로 옮겨졌다. 푹신한 침대에 눕자, 졸음이 몰려들었다. 키안은 잠이 잔뜩 묻어 있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제 됐습니다. 전하께서도 그만 옆에 누우세요.”
젖은 머리카락을 정성스럽게 말려주는 그의 손길에 키안의 눈꺼풀이 저절로 내려앉았다.
“잠들 때까지 옆에 있겠다.”
세이란의 말에 키안이 무겁게 내려앉은 눈꺼풀을 밀어 올렸다.
“가시려는 겁니까?”
“그런 표정으로 유혹하지 마. 내가 여기서 자게 된다면, 또다시 널 안게 될 거야. 그러면 넌, 잠은 잘 수 없을 것이다. 그래도 날, 잡을 테냐?”
키안이 믿을 수 없다는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지친 자신과는 달리 그의 몸에선 힘이 넘치고 있었다. 특히 조금 전 욕실에서 나오면서 바지만 대충 걸친 상태였지만, 이미 그의 다리 사이가 눈에 띌 정도로 부풀어 있었다.
“겁먹을 필요 없다. 안타깝게도 곧 가봐야 할 곳이 있다.”
“이렇게 늦은 시각에 말입니까?”
“패트리샤는 본 적이 있지? 루시타니아 상단에서 만나기로 했다, 루칸 백작과 함께.”
순간 키안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도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다. 자신이 패트리샤를 질투했었다는 걸.
“사실 항상 궁금했습니다. 저들과 어떤 인연으로 만나셨는지 말입니다.”
“블랙으로 활동하던 중에 만났던 용병들이었다.”
블랙으로 활동하면서 만났다고? 그렇다면…….
“패트리샤도 용병으로 시합에 나왔다는 겁니까?”
순간 키안의 눈에서 졸음이 달아났다. 그러자 세이란이 다시 잠을 자라는 듯 그녀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주며 말했다. 다시 기분 좋은 나른함에 졸음이 몰려왔다.
“실력이 굉장했지. 힘 좋은 기사들도 꼼짝 못 했으니까.”
“멋지네요. 여인의 몸으로 용병이라니.”
“너처럼 멋지지는 않지. 넌 여인의 몸으로 황실 기사단의 단장이 되었으니까.”
황실 기사단의 단장은 아무리 신분이 높다고 가질 수 있는 직책이 아니었다. 오직 실력 하나로 이뤄낸 자리였다.
세이란은 키안이 그 자리에 오르기까지 죽을힘을 다해왔다는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패트리샤 외에도 블랙으로 활동하시면서 알게 된 이가 또 있습니까?”
“있다. 때가 되면 모두 소개해 주겠다.”
“저도 만나보고 싶습니다.”
키안이 푹신한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그러다 문득 뭔가 떠올랐는지 한숨을 내쉬었다.
“그나저나 황궁에 이상한 소문이 도는 건 알고 계십니까? 전하께서 지금 양다리를 걸치고 있다고 다들 수군거리는 모양입니다.”
“양다리? 내가?”
“네. 레녹스 공작과 릴리스 프로필리아에게 동시에 작업을 건다나 뭐라나. 지금 전하께선 희대의 바람둥이가 될 위기에 처하셨다는 것만 알아두십시오.”
아마 그 소문은 셀서스 궁에서 자신이 키안에게 키스를 하는 걸 본 시녀들이 만들어낸 모양이었다.
“소문 따위 신경 쓰지 않은 지 한참이나 되었다. 어차피 사실도 아니고.”
세이란이 은근한 눈빛으로 키안을 내려다보며, 그녀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너도 알다시피 난 오직 한 사람에게만 목매는 사내라.”
얼굴은 물론 온몸에 열이 나는 듯 더워졌다. 이런 민망한 말을 입에 침도 바르지 않고 쉽게 하다니. 키안은 세이란의 변화가 낯설었다. 키안이 붉어진 얼굴을 베개에 묻으며 말했다.
“이제 가보셔도 됩니다. 졸립니다.”
“그래, 푹 자도록 해.”
그가 이불을 끌어다 키안의 목까지 덮어주었다. 그러자 순식간에 키안은 깊은 잠 속으로 빠져들었다.
세이란은 한동안 잠든 키안을 내려다보았다. 약속 시간이 훨씬 지나 있었다. 하지만 쉽게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때 문밖에서 낑낑거리는 동물 소리가 들려왔다. 몸을 일으킨 세이란이 셔츠를 입으며 문을 열었다. 그러자 은빛 늑대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네 주인을 지키러 온 모양이군.”
문을 닫자, 은빛 늑대가 세이란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한 듯 키안이 잠든 침대 아래쪽에 자릴 잡았다.
그 모습에 세이란이 은빛 늑대를 향해 다가갔다. 그러곤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곧, 모든 게 시작될 것이다, 천 년 전처럼. 그러니 넌, 그때처럼 네 주인을 지키면 된다.”
은빛 늑대를 바라보는 세이란의 눈빛이 어느새 붉어져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전하.”
세이란이 루시타니아 상단 안으로 들어가자, 그를 기다리고 있던 패트리샤가 심각한 표정으로 그를 맞았다.
“카일에게서 연락이 온 모양이군.”
“그것이 아니라, 테란국으로 통하는 모든 길이 막혔다는 전갈을 받았습니다.”
패트리샤의 말에 세이란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럼 카일 역시도 테란에 발이 묶였겠군.”
“어떻게 할 생각이십니까? 은밀히 블랙 기사단을 테란으로 보낼까요?”
패트리샤의 말에 세이란이 고갤 가로저었다.
“아니, 소용없을 거야. 카일이 빠져나오지 못했다는 건 들어가지도 못한다는 뜻일 테니까. 알베르트 루칸 백작은 안에 있나?”
“안에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세이란이 패트리샤에게 고갤 끄덕인 다음, 서둘러 방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알베르트 루칸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테란의 국경이 닫히기 직전, 뜻밖의 소식이 와 전하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뜻밖의 소식? 그게 뭐지?”
세이란이 의자에 앉자, 알베르트 루칸 역시 맞은편에 자릴 잡고 앉았다. 그러곤 잔뜩 상기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사실 제가 얼마 전부터 은밀히 찾던 노파가 있었습니다. 몇 해 전 사막에서 만났던 노파인데, 점술가인지 예언 비슷한 말을 몇 마디 지껄였습니다. 처음엔 미쳤다고 생각해 신경도 쓰지 않았습니다. 잊고 있었고요. 하지만 전하께서 절 찾아와 렌스터 공작가의 독에 대해 의뢰하신 날 다시 그 노파가 떠올랐습니다. 그 노파가 그랬었거든요. 유스타나 제국에 위험이 닥칠 것이라고.”
“그래서 그 노파를 찾았나?”
“네, 찾았습니다. 테란에서 보내온 정보원의 마지막 내용이 바로, 그 노파의 행방이었습니다.”
알베르트 루칸의 말에 세이란이 눈을 가늘게 떴다.
“지금 그 노파가 테란에 있었다는 건가?”
“그렇습니다. 그것도 테란국의 대신전 지하 감옥에 갇혀 있는 모양입니다.”
대신전의 지하 감옥에 있다니. 대체 그 노파의 정체가 뭐기에 테란의 대신전에 갇히게 되었는지 궁금했다.
“정보원이 보내온 전갈에 따르면, 그 노파가 바로 유스타나 제국의 전 대신관이었던 모양입니다.”
“유스타나의 대신관이었다고? 믿을 수 없군.”
세이란이 눈을 가늘게 뜨곤 알베르트 루칸을 응시했다. 믿을 수 없었다. 자신 역시 현 대신관에게 신전의 정보망을 통해 전 대신관의 행방에 대해 알아보라고 했었다.
하지만 전 대신관의 행방을 찾지 못한 듯 도미니크 대신관에겐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저 역시 믿을 수 없지만, 감옥에 갇혀 있는 전 대신관이라는 노파가 예언한 모양입니다. 유스타나 제국이 또다시 위험해질 것이라는 예언을 말입니다.”
알베르트 루칸이 세이란의 표정을 살폈다. 자신의 말이 그의 기분을 상하게 했을까 걱정이 되어서였다. 하지만 다행히 세이란은 그 예언에 대해 신경 쓰지 않은 눈치였다.
“테란에 있었군. 사실 나 역시 전 대신관의 행방을 찾고 있었던 참이다. 그런데 그대에게 소식을 듣게 될 줄은 몰랐군.”
“전하께서도 찾고 계셨습니까?”
“전 대신관에게 확인해야 할 것이 있었다. 하지만 테란의 대신전에 붙잡혀 있다니, 이제 불가능해졌군.”
세이란이 한숨을 내쉬자, 알베르트 루칸이 서둘러 말했다.
“제가 방법을 찾아보겠습니다. 대신전의 감옥에서 전 대신관을 빼올 방법을 말입니다.”
알베르트 루칸의 제안에 세이란이 고갤 가로저었다.
“아니, 그럴 필요 없다. 루칸 백작, 나는 이 길로 대신전에 가봐야겠다. 어쩌면 그들을 통해서라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르거든.”
세이란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알베르트 루칸 역시 따라 일어섰다.
“대신전까지 제가 모시겠습니다.”
“그럴 필요 없다, 루칸 백작. 그대는 해야 할 일이 있다.”
“명령만 내리십시오, 전하.”
“곧 키엘체로 검술 대회를 위해 각지에서 용병들이 모여들 것이다. 그대가 해줄 일은 용병들의 동태를 파악하는 일이다. 그중 테란에서 온 용병들을 말이다. 패트리샤가 그대를 도울 것이다.”
“알겠습니다, 전하.”
세이란은 알베르트 루칸 백작과 패트리샤를 남겨둔 채, 방을 나왔다.
그러곤 서둘러 대신전으로 향했다.
“이상해. 아무리 루시타니아 상단의 정보력이 최고라 할지라도, 신전의 정보력을 능가할 수 없는 법인데.”
하지만 루시타니아 상단이 알아낸 정보를 신전에선 알아내지 못했다.
‘설마, 도미니크 대신관이 날 속인 건가?’
순간 세이란의 녹색 눈동자가 싸늘해졌다.
“곧 알게 되겠지, 도미니크 대신관이 뭘 숨기고 있는지를.”
**
“이 시각에 절 찾아올 줄은 몰랐습니다, 레녹스 공작님.”
헬로이즈 공주는 일부러 벽에 걸려 있는 벽시계의 시간을 확인했다.
새벽 6시.
황실 기사단의 단장인 키안이 셀서스 궁에 출근할 시각이었다. 그녀의 입가에 떠오른 미소로 보건대, 이고르를 통해 키안에게 편지를 건네게 했을 때부터, 키안이 이 시각에 방문할 것이란 걸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절 기다리신 모양이군요, 헬로이즈 공주님.”
“추측해 보았을 뿐입니다. 하지만 제 생각이 정확히 맞아떨어져, 저도 놀라는 중이랍니다. 차를 드릴까요?”
하지만 이내 키안의 차가운 표정을 보곤,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덧붙였다.
“표정을 보아하니, 저와 차를 마실 기분은 아니신 것 같군요.”
“왜 저에게 그런 편지를 보내셨는지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순간 헬로이즈의 보랏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글쎄요. 저 역시 그 이유를 모르겠답니다. 제가 왜 레녹스 공작님께 기회를 드리는지 말입니다.”
기회라는 말에 키안의 얼굴이 굳어졌다.
“협박이란 말을 꽤 창의적으로 하시는군요. 하지만 제가 그 기회를 원치 않는다면 얘긴 달라지겠군요.”
키안이 냉정한 눈빛으로 헬로이즈를 응시하며, 단호한 태도로 말했다.
“이미 각오는 되어 있습니다.”
“그 말은 황태자 전하께서도 그대의 비밀을 알고 있다는 뜻이군요. 그래서 그렇게 자신만만할 수 있는 것이고요.”
헬로이즈의 입가가 냉소로 비틀렸다. 그녀의 눈빛 속엔 남자 하나 잘 만나 모든 걸 해결하려 한다는 비난이 담겨 있었다.
“황태자 전하께서 알고 계신 것과 상관없이 전, 제국법을 어긴 죄인입니다. 여인의 몸으로 레녹스 공작가의 상속자가 되었으니까요. 그 죗값은 달게 받을 생각입니다.”
헬로이즈의 보랏빛 눈동자가 날카롭게 응시했다. 키안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아내려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미동도 없는 하늘빛 눈동자를 보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럼 황태자 전하를 찾아가는 건 그만둬야겠군요. 사실 전하께서 그대의 비밀을 알았을 때, 어떤 반응을 보이실지 굉장히 궁금했거든요. 그런데 이미 알고 계시다니, 김이 빠진다고나 할까요?”
아니, 알고 있는 것에 그치지 않고, 키안 레녹스를 릴리스 프로필리아로 만들어 황태자비까지 만들려 하다니.
‘황태자인 세이란의 약점은 키안 레녹스 공작이었어.’
그가 자신의 모든 것을 걸고 운명을 바꾼 이유가 키안 레녹스 때문이었다. 저 하찮은 여인 때문에…….
그의 선택으로 인해, 자신은 소중한 것을 잃었다. 헬로이즈는 울컥 치밀어 오르는 분노에 주먹을 꽉 쥐었다.
“공주님께선 어떻게 알게 되셨습니까? 제가 여인이란 사실을 말입니다.”
키안의 질문에 헬로이즈의 보랏빛 눈동자가 싸늘해졌다.
“당신 때문에 알았습니다, 레녹스 공작.”
지금까지 냉정하던 헬로이즈의 표정이 순식간에 무너졌다. 그러곤 원망 어린 눈빛으로 감정을 일시에 쏟아냈다.
“전쟁터에서 죽었어야 할 그대가 죽지 않아, 다른 이가 죽었거든요. 그 대가로 알게 된 비밀입니다. 아주 값비싼 대가였죠.”
다음 순간, 헬로이즈는 자신이 감정적으로 행동했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 서둘러 표정을 갈무리했다.
“당신은 그 전쟁터에서 죽었어야 했습니다. 처음부터 죽기로 결심하고 전쟁터에 갔던 것 아니었나요? 그런데 왜 살아 돌아온 건가요? 전쟁이 끝나고, 은빛 늑대의 숲에 갔을 때도 키엘체로 돌아가기 전 목숨을 끊을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해서 간 것이 아니었나요?”
헬로이즈의 말에 키안은 얼어붙은 듯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그러자 헬로이즈는 다 알고 있다는 듯 말했다.
“여인의 몸으로 레녹스 공작 작위를 물려받은 죗값을 치르고 동생에게 정당한 공작가의 작위를 물려주기로 결심했으면, 끝까지 행했어야 했습니다. 그대만 죽었다면, 모든 게 평안했을 텐데. 엉망이 되어버렸군요.”
헬로이즈는 마치 모든 것이 키안이 죽지 않은 게 잘못이라고 말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보다 키안이 놀란 건, 헬로이즈가 어떻게 자신의 계획을 알게 되었느냐였다.
‘어떻게 알았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사실이었는데. 오직 나 혼자 마음속으로만 먹었던 결심을 어떻게 타국의 공주인 헬로이즈가 알고 있는 거지?’
키안이 혼란스러운 감정을 숨긴 채, 최대한 담담한 표정으로 말했다.
“공주님의 말씀대로입니다. 제 모든 계획은 실패였습니다. 지금도 그 이유를 알지 못하죠.”
순간 헬로이즈의 입가가 냉소로 비틀었다.
“그대는 아직도 모르고 있군요. 그대의 계획은 성공할 것이었습니다. 누군가 강제로 운명을 비틀지 않았다면 말입니다. 한 번도 의문을 품지 않았나요? 그대가 죽음과 맞닿을 때마다 누군가 보호하고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그거야 운이 좋다고만…….”
사실 1년 내내 의문을 품지 않은 건 아니었다. 매번 죽음 직전의 순간에 그녀는 살아났다. 은빛 늑대의 숲에서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목욕하려 했던 건 핑계였다. 키안은 자신이 가져간 단검으로 목숨을 끊을 심산이었다. 하지만 죽기 위해 갔던 그곳에서 버려진 새끼 늑대를 발견했다. 그 모습이 자신 같아서, 어린 늑대를 살리기로 마음을 바꿨다.
“운이라니. 참 편한 성격이군요, 레녹스 공작은. 이젠 그 누군가가 불쌍하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헬로이즈의 지적에 키안은 눈을 가늘게 뜨고 그녀를 응시했다.
분명 헬로이즈는 누군가가 강제로 운명을 비틀었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뭔가 이상했다. 자신을 대하는 태도며 분위기가 바뀐 것은 물론, 그녀는 마치 모든 걸 알고 있는 듯 말하고 있었다.
‘설마 전쟁터에서 내가 모르는 어떤 일이 일어났던 건가? 나만 모르는 어떤 일이…….’
그저 우연히 내가 여인이란 걸 알게 된 게 아니었다. 헬로이즈는 누군가의 죽음의 대가로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누군가의 죽음이라……. 분명, 이번 전쟁에서 죽은 테란의 기사 중 한 명일 터였다. 그리고 그 기사는 헬로이즈 공주에게 굉장히 중요한 사람인 듯했다. 그제야 언뜻언뜻 보였던 헬로이즈이 표정이 이해가 갔다.
‘사랑하는 사람이었던 거야. 그리고 공주가 말한, 운명을 강제로 비틀었다는 사람은 황태자 전하가 분명해.’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사실 전쟁이 끝난 후, 세이란의 태도가 확연히 변했다. 그리고 그는 그녀에 대한 모든 비밀을 알고 있었다.
마치 헬로이즈 공주처럼 모든 걸 다 알고 있는 것 같았다, 미래를 보기라도 한 듯이.
“예언의 별 아래 태어난 자.”
키안은 마지막 전투에서 세이란이 테란의 기사를 죽이고 난 후 했던 말을 되뇌었다.
“지금 뭐라고 했죠, 레녹스 공작?”
무의식중에 흘러나온 말에 헬로이즈 공주가 예민한 반응을 보였다.
‘그렇게 된 것이군. 마지막 전투에서 죽은 기사가 바로…….’
키안은 날 선 보랏빛 눈동자를 응시하며, 차분하게 대답했다.
“별 뜻 없는 말이었습니다. 공주님께서 마치 모든 걸 알고 계신 듯 말하셔서, 예언자의 별 아래 태어난 건 아닐까 생각한 겁니다.”
키안의 대답에 헬로이즈 공주가 비난하듯 말했다.
“대신관이 그러더군요. 죽어야 할 자가 살았다고. 바로, 레녹스 공작 그대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는 걸 유스타나에 와서야 알았습니다.”
헬로이즈는 키안의 심장을 손톱으로 후벼 파듯 말했다.
“그랬군요.”
자신의 날 선 비난해도 불구하고 한 치의 흔들림도 없는 키안을 보며, 헬로이즈는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헬로이즈는 저 무표정한 얼굴이 처참하게 무너져 내리는 꼴을 보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은 불가능했다.
“레녹스 공작, 그만 가보셔도 됩니다. 하지만 잊지 마세요. 제가 가진 비밀은 황태자 전하가 아니더라도, 언제 어느 때든 그대의 목줄을 죌 수 있다는 사실을 말입니다.”
한마디로 키안의 비밀을 유용하게 쓸 방법을 찾겠다는 뜻이었다. 아마 그 대상은 제임스 에버콘 공작이 될 게 뻔했다.
“제 죗값은 황태자 전하와 상관없이 모두 치를 생각입니다.”
“그래야겠죠. 황제 폐하는 물론, 유스타나 제국을 속였으니.”
헬로이즈는 로렌스 루틴 공작의 죽음에 대한 죗값 역시도 황태자와 레녹스 공작에게 톡톡히 받아낼 생각이었다.
접견실을 나가려는 키안의 등 뒤로 헬로이즈가 악의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레녹스 공작, 그대는 레녹스가의 저주받은 아이일 뿐이란 걸 기억하세요. 곁에 있는 모두를 죽게 만든다는 사실 역시.”
황제의 독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