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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독사과-104화 (104/139)

제 104 화

황태자인 세이란이 키안의 손을 잡고 파티장을 나간 후, 벨라는 평소 친분이 있는 귀부인들과 담소를 나눴다. 이 시간까지 돌아오지 않는 걸로 보아, 산책하겠다던 두 사람은 벌써 파티장을 떠난 모양이었다.

‘그럼 나도 슬슬 돌아가 볼까?’

벨라 역시 이상하게도 파티에 흥미가 생기지 않았다. 지루함을 견디며, 자리를 지키고 있었던 이유는 예의 때문이었다.

“돌아가시려는 겁니까, 아키텐 공작부인?”

“요즘 자꾸 머리가 아파서, 파티에 남아 있는 게 힘이 드는군요.”

벨라는 손끝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글로리아 스펜서 자작 부인에게 말했다. 그러자 옆에 앉아 있던 하드윅 백작 부인이 입을 삐죽이며 말했다.

“공작부인께선 지루하시겠군요. 여기선 애인을 찾을 수가 없을 테니 말입니다.”

순간 벨라의 입가가 미묘하게 굳어졌다. 하드윅 백작 부인이 경박하고 아무 말이나 생각 없이 하는 성격이란 건 잘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건 너무 무례했다.

그때, 글로리아가 눈짓으로 파티장 벽에 시무룩한 표정으로 서 있는 레이디를 가리켰다. 하드윅 백작가의 영애였다.

잠깐, 그러고 보니 하드윅 백작 부인은 자신의 딸을 황태자비로 만들 욕심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벨라의 사촌인 릴리스가 황태자의 눈에 들자, 그것에 심술이 난 모양이었다.

“하드윅 백작 부인, 굉장히 불쾌하군요. 지금 백작 부인께선 미망인인 제가 애인을 찾기 위해 파티에 참석했다고 생각하시는 건가요?”

“그럼, 아니었나요? 저는 부인께서 그쪽으로 굉장히 관심이 많으신 줄 알았거든요.”

하드윅 백작 부인이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분명 자신이 진의 가게 위치를 물어본 것을 두고 하는 말인 듯했다.

“그때는 사정이…….”

“누구나 사정은 있다지요. 하지만 이번 사교 시즌에선 암내를 풍기는 일은 없었으면 합니다.”

이건 또, 무슨 말이지? 대체 내가 뭘 했다고 이러는 거지?

벨라가 눈을 가늘게 뜨곤 하드윅 백작 부인을 쏘아보았다. 그러자 하드윅 백작 부인이 입가를 비틀며 불만스럽다는 듯 말했다.

“공작부인과 리치문트 공작님이 함께 있는 모습을 누가 봤다고 해서 드리는 말입니다. 그러니…….”

“하드윅 백작 부인, 뭔가 단단히 오해하신 모양이군요. 제가 리치문트 공작님과 함께 있었던 건, 딱 한 번뿐입니다. 그것도 우연히 그 자리에 있다가 무시할 수가 없어서 예의상 몇 마디 나눈 게 다고요. 그러니 그런 터무니없는 걱정은 하지 않으셨으면 합니다. 저야 미망인이니 상관없지만, 유스타나 제국의 일등 신랑감이신 리치문트 공작님의 평판엔 오점이 되는 말이니까요.”

벨라의 날카로운 지적에 하드윅 백작 부인이 입술을 삐죽였다.

‘평소에도 얄밉다고 생각했는데, 오늘은 저 입을 꼬집어주고 싶군.’

벨라는 화가 치밀어 오르는 걸 가까스로 참았다. 이곳에서 그녀와 얼굴을 붉히고 싸웠다간, 창피당하는 쪽은 오히려 자신인 것이다.

“머리가 더 아프군요. 저는 이만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캐슬리스 후작 부인, 죄송하지만 저 먼저 저택으로 돌아가도 될까요?”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제인 캐슬리스가 동정심 가득한 표정으로 벨라를 바라보았다.

“당연히 돌아가셔도 된답니다. 그리고 아키텐 공작부인. 저는 그런 소문 따위 신경 쓰지 않으니, 마음에 두지 마세요. 소문을 좋아하는 질투심 많은 참새들이 하는 말이니까요.”

“저 역시 같은 생각입니다, 벨라.”

글로리아 스펜서 역시 하드윅 백작 부인을 마땅찮은 눈빛으로 쏘아보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캐슬리스 후작 부인. 그리고 글로리아.”

벨라가 하드윅 백작 부인에겐 눈길조차 주지 않고 돌아갈 채비를 했다.

“아키텐 공작부인, 잠시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제게 시간을 내주시겠습니까?”

갑작스럽게 들려온 남자의 목소리에 벨라를 포함한 귀부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소리가 나는 쪽으로 돌아갔다.

놀랍게도 그곳엔, 에드윈 리치문트 공작이 서 있었다. 벨라는 조금 전 하드윅 백작 부인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평소보다 더 차가운 얼굴로 에드윈을 보았다.

“제게 무슨 볼일이 있으신 건지 모르겠군요.”

“전하께서 제게 아키텐 공작부인을 저택까지 모셔다 드리라고 명하셨습니다.”

에드윈의 말에 귀부인들이 놀란 듯 서로를 마주 보았다.

“아닙니다, 공작님. 저는 혼자 돌아갈 수 있으니,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벨라의 거절에 에드윈은 물러서지 않고, 다시 한 번 청했다.

“황태자 전하의 명령이십니다. 제가 공작부인을 저택까지 모셔다 드릴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에드윈의 정중한 부탁에 옆에 있던 캐슬리스 후작 부인이 슬쩍 끼어들었다.

“아키텐 공작부인, 너무 매정하게 거절하시는군요. 청을 드리는 분이 민망하시겠어요. 그러지 말고 함께 가세요. 황태자 전하의 명령이라고 하시잖아요.”

사실 제인 캐슬리스와 글로리아 스펜서는 에드윈이 황태자의 명령 때문에 벨라를 바래다준다는 말을 믿지 않았다.

에드윈 리치문트 공작이 벨라 아키텐 공작부인을 바라보는 눈빛은 공적인 것이 아니라, 사적인 감정을 담고 있었던 것이다.

‘말도 안 돼. 소문이 잘못된 것이었어. 벨라 아키텐이 아니라, 에드윈 리치문트 공작이 홀딱 반해 쫓아다니는 것이었어.’

제인 캐슬리스는 의미심장한 얼굴로 하드윅 백작 부인을 보았다. 그녀 역시 에드윈이 벨라에게 관심이 더 많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 입을 벌린 채 두 사람을 바라보고 있었다.

“아닙니다. 타고 온 마차가…….”

“제가 타고 온 마차를 전하께서 타고 가버리셨습니다.”

뭐야? 이런 말도 안 되는 변명은?

벨라가 난처한 표정으로 에드윈을 쏘아보았다. 하지만 그녀의 서늘한 눈빛에도 불구하고 에드윈은 물러설 생각이 없는 듯 자릴 지키고 서 있었다.

“그러지 말고 태워주세요, 공작부인. 불쌍하시잖아요. 돌아갈 마차도 없다니 말입니다.”

벨라는 이 상황이 너무도 재미있다는 듯 웃고 있는 글로리아 스펜서를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죄송하지만, 다른 분께 부탁하시는 게 좋을 것 같군요.”

벨라가 최대한 예의 바르게 거절했다. 그러곤 자릴 뜨기 위해 한 발짝 발을 뗀 순간, 크고 강한 손이 그녀의 팔을 붙잡곤 돌려 세웠다.

벨라는 본능적으로 그의 손을 밀어내려 했지만, 생각 외로 그녀의 팔을 붙잡은 손의 힘이 셌다.

“무례하시군요, 리치문트 공작님.”

벨라의 차가운 목소리에도 에드윈의 눈빛엔 미동도 없었다. 그저 차분한 태도로 다시 한 번 말했다.

“안전하게 저택까지 모시라는 황태자 전하의 명령이 있으셨습니다.”

벨라는 더는 거절할 수 없었다. 귀족들의 시선이 점점 두 사람에게 쏠리기 시작한 것이다.

‘이러다 또 이상한 소문이 나겠어.’

벨라는 마지못해 고갤 끄덕였다. 하지만 여전히 에드윈을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은 서늘했다.

“어쩔 수 없겠군요. 황태자 전하께서 명령하셨다면, 따를 수밖에요.”

벨라는 에드윈과 함께 파티장을 나왔다. 하지만 복도를 따라 걷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게 화가 나셨습니까?”

에드윈의 물음에 벨라가 걸음을 멈췄다. 그러곤 굳은 얼굴로 말했다.

“리치문트 공작님,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것 같군요.”

벨라는 지난번 사냥 대회에서 키스한 후, 그의 태도가 미묘하게 변하고 있음을 깨닫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 역시도 마찬가지였다.

서로를 위해 뭔가 감정이 더 깊어지기 전에 확실히 선을 그어야 할 것 같았다.

늙은 남편을 복상사시킨 젊은 미망인이라는 추문이 붙은 자신과 앞길이 창창한 젊은 미혼의 공작이라니. 절대 어울리지 않는 관계였다.

“저에게 키스는 특별한 의미를 갖지 못한답니다. 무엇보다 그날의 키스는 사고였다고 생각합니다. 어쩌다 보니 일어난 사고요.”

“특별한 의미도 없는 그저 그런 사고라고 하셨습니까?”

“그렇습니다. 제겐 아무런 의미도 없는 것이었으니, 공작님께서도 그렇게 생각해 주셨으면 합니다.”

“마치 연애를 많이 해보신 것처럼 말씀하시는군요. 혹시 저 말고도, 이렇게 잔뜩 흔들어놓고 팽개쳐 버린 귀족들이 더 있으셨습니까?”

에드윈이 불쾌한 표정으로 벨라를 쏘아보았다.

“있다면 어쩌실 거죠?”

벨라 역시 물러서지 않고 마주 쏘아보았다. 사실은 없었다. 키스 역시 첫날밤에 죽은 남편에게 억지로 입술을 겹친 게 다였다.

“이제 아셨을 테니, 마차를 타고 함께 돌아가는 건 무리일 것 같군요. 죄송하지만, 다른 분께 부탁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벨라가 에드윈을 복도에 남겨둔 채,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잘한 선택이었다.

두 사람은 절대 이루어질 수 없는 관계였으니까. 하지만 이상하게 가슴이 답답했다. 묵직한 뭔가가 가슴을 꾹 눌러,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거짓말을 참, 못한다니까.”

에드윈은 멀어져 가는 벨라의 뒷모습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아마 그녀는 모르고 있을 테지만, 특별한 의미도 없다고 말하는 그녀의 눈빛이 울 것처럼 찌푸려져 있었다.

사실 에드윈은 하드윅 백작 부인이 했던 가시 돋친 말을 들었다. 그래서 일부러 벨라에게 함께 가길 청한 것이다.

하지만 자존심이 강한 벨라 아키텐은 자신에게 기대는 대신, 밀어내는 걸 선택했다.

“이러면 더 좋아져 버린다는 걸 모르는 모양이야.”

에드윈이 빠른 걸음으로 복도를 걸어가기 시작했다. 사실 그녀의 말처럼 사고라는 핑계를 대며, 여기서 멈춰야 했다.

하지만 도저히 그럴 수 없었다.

현관을 나간 에드윈이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그러자 막 마차에 오르려는 벨라를 붙잡을 수 있었다.

“함께 가겠습니다.”

놀란 벨라를 마차에 태운 후, 에드윈 역시 마차에 올랐다. 그러곤 마부에게 아키텐 공작저로 가라고 명령했다.

이내 마차의 문이 닫히자, 마부가 말을 몰기 시작했다. 흔들리는 마차 안에서 두 사람은 어색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침묵이 이어졌다. 에드윈은 자신을 외면한 채, 싸늘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벨라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자신이 허락도 없이 마차에 탄 것이 불쾌한 모양이었다.

“소용없습니다, 절 밀어내셔도.”

그제야 벨라가 고갤 돌려 에드윈을 보았다.

“유스타나 최고의 지성이라고 하더니, 그 말이 거짓이었던 모양이군요. 제가 한 말의 뜻도 분간해 내지 못하다니 말입니다.”

벨라가 비꼬자, 에드윈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건 제 심장은 물론, 머릿속까지 온통 붉은색이라서 그렇습니다. 바보처럼, 그대밖에 생각나지 않아서.”

벨라의 눈이 놀란 듯 동그랗게 커졌다.

“지금 그게 무슨……?”

“제가 벨라 아키텐 공작부인께 단단히 빠졌다는 말을 하는 겁니다.”

그가 손을 뻗어 벨라의 붉은 머리카락을 어루만졌다.

“불쾌하군요.”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네.”

벨라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그러자 에드윈이 진지한 표정으로 다시 한 번 물어왔다.

“정말 제가 불쾌하십니까? 만약 그렇다면, 저를 밀어내십시오.”

그 말과 함께 에드윈이 벨라 쪽으로 몸을 숙여왔다. 그러곤 한 손으로 그녀의 턱을 붙잡더니, 날카롭게 입술을 겹쳐 왔다.

“읏-”

성급한 열정에 입술이 부딪혀 아팠다. 입안에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지는 걸로 보아, 이에 입 안쪽 살이 찢긴 모양이었다. 에드윈이 재빨리 입술을 떼며 말했다.

“미안.”

그의 사과에 벨라가 그를 올려다보았다. 이상했다. 지금까지 그녀는 여인에게 사과하는 사내를 본 적이 없었다. 대부분의 사내들은 약한 여인에게 강압적인 태도를 취했다. 그녀의 아버지도, 그리고 그녀의 남편도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이 사낸 달랐다. 에드윈 리치문트 공작은 약하지도, 그렇다고 무능한 사내도 아니었다. 그는 유스타나 최고의 지성이라 일컬어지는 사람이었으니까.

그래서일까? 꽁꽁 닫아두었던 벨라의 마음속 빗장이 열리려 했다.

“이렇게 말랑하고, 질척거리는 남잔 또 처음이네요.”

“그대 한정이니, 걱정할 건 없습니다.”

벨라의 표정이 부드러워졌다. 그러자 그가 다시 키스를 해왔다. 이번엔 서로의 입술을 비비며 느릿느릿 입술을 핥았다. 그러곤 살짝 열린 입술 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그의 숨결이 순식간에 혀끝에 닿아 녹아내렸다.

“아아, 벨라.”

한숨과도 같은 그의 목소리가 그녀의 이름을 불렀다.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이제 더는 에드윈을 향한 감정을 외면할 수 없을 것 같았다.

황제의 독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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