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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독사과-102화 (102/139)

제 102 화

밤이 되자, 캐슬리스 후작가의 파티에 초대장을 받은 귀족들이 하나둘 저택으로 모여들기 시작했다.

황태자인 세이란이 파티에 참석한다는 소문이 퍼지면서, 한때 캐슬리스 후작가의 파티 초대장은 금화 열 개에 거래될 정도였다.

하지만 황태자가 참석하는 파티의 초대장을 돈을 받고 팔 귀족들은 한 명도 없었다. 그런 이유로 황태자인 세이란이 참석하는 파티의 초대장을 얻기 위해선 저택을 팔아도 못 구한다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초대장이 거금에 거래될 정도라니. 이게 다 황태자 전하의 효과겠지?”

벨라가 파티장 안을 가득 메운 귀족들을 보며, 키안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그런 모양이야.”

키안은 대답을 한 후, 천천히 파티장 안을 살폈다. 오늘은 어찌 된 일인지 파티에 참석한 레이디들이 더는 키안을 흘끗거리며 귓속말을 하지 않았다.

키안은 그들이 갑자기 태도가 바뀐 이유가 궁금했다.

“내 느낌만 그런 건가? 레이디들의 시선이 조금 달라진 것 같지 않아?”

키안의 물음에 벨라가 피식 웃었다.

“당연하지. 넌 레이디 베로니카를 구한 영웅이거든.”

“그게 무슨 말이야?”

“네가 위험에 처한 베로니카 렌스터를 구해줬잖아. 그 일로 베로니카가…….”

뭔가 더 말하려던 벨라가 말을 멈췄다. 키안이 파티장에 도착한 후부터 내내 지켜보던, 헤링턴 백작가의 영애인 플로라가 그들에게 다가왔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플로라 헤링턴은 베로니카 렌스터와 절친한 사이였다.

“저기, 저는 헤링턴 백작가의 플로라입니다. 레이디 베로니카께 들었습니다. 황실 사냥터에서 레이디 릴리스가 아니셨다면, 크게 다칠 뻔했다고.”

“아, 그건 당연히 해야 할 일이었습니다. 만약 다른 분이었다고 해도…….”

“아니요. 다른 레이디였다면, 절대 하지 못했을 겁니다. 누군가를 구한다는 건 굉장한 용기가 필요하다는 걸 알고 있거든요.”

플로라가 고갤 가로저으며 강하게 부인했다.

키안은 플로라의 칭찬에 어색하게 웃었다. 그러다 주위에 있던 귀부인들 역시 달라진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그렇게 생각해 주시다니 감사합니다, 레이디 플로라.”

“사실 오늘 파티에 레이디 베로니카께서 참석하지 못하셨습니다.”

그러고 보니, 언제나 무리 중 가운데에 있던 베로니카가 보이지 않았다.

“다치신 겁니까?”

“아니요, 레이디 릴리스 덕분에 다치신 곳은 없습니다. 다만 조금 충격이셨는지, 오늘 파티엔 참석하지 못하셨습니다. 그래서 제게 대신 고맙다는 말씀을 전해달라고 하셨습니다.”

“그랬군요. 다행입니다.”

키안이 안도하며, 고갤 끄덕였다. 사실 그녀를 구하던 날, 자신이 릴리스 프로필리아란 사실을 들켰다. 베로니카는 비밀을 지켜주겠다고 했지만, 파티에서 다시 만나게 된다면 다시 한 번 부탁할 생각이었다.

“저기, 그리고 레이디 릴리스와 아키텐 공작부인을 초대하고 싶다는 부탁을 했습니다. 혹시 시간이 되신다면, 사흘 후에 있을 렌스터 공작가의 티파티에 참석해 주시겠습니까?”

플로라의 제안에 키안이 난처한 얼굴을 했다. 티타임은 대부분 낮시간이었다. 하지만 낮시간엔 자신은 황실 기사단에 출근해야 했던 것이다.

“그게…….”

“당연히 참석해야죠. 초대장을 보내주세요, 레이디 플로라.”

거절하려던 키안을 대신해 벨라가 대답했다.

“그럼, 아키텐 공작가로 초대장을 보내겠습니다. 레이디 베로니카께서 기뻐하실 겁니다.”

그 말과 함께 플로라가 환하게 웃으며 자리로 돌아가기 위해 돌아섰다. 그러다 기쁜 마음에 너무 빨리 돌아서다,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다.

“어엇-”

“괜찮으십니까, 레이디 플로라?”

키안이 재빨리 플로라의 팔을 붙잡으며 물었다. 순간 플로라의 얼굴이 붉어졌다.

“어, 네. 괜찮습니다. 감사합니다, 레이디 릴리스.”

키안이 플로라의 팔을 놓아주었다. 하지만 플로라는 바로 자리로 돌아가는 대신, 얼굴을 붉히며 키안을 흘끗흘끗 바라보았다.

‘뭐지, 저 반응은?’

키안이 살짝 미간을 찌푸리며 플로라의 안색을 살피자, 그녀가 뺨을 붉히곤 재빨리 자릴 떴다.

설마, 알고 있는 건가? 어쩌면 레이디 베로니카가 절친인 플로라에게 말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벨라가 키안의 팔을 끌어당기며 구석으로 데리고 갔다. 그러곤 잔뜩 흥분한 표정으로 말했다.

“렌스터 공작가의 티파티에 초대받다니. 이젠 걱정할 필요 없겠어. 렌스터 영애가 널 초대했다는 건, 이젠 사교계에서도 널 무시하지 못하게 됐다는 뜻이기도 하거든.”

하지만 키안은 벨라처럼 좋아할 수만은 없었다.

“낮에 열리는 파티엔 참석할 수 없어. 너도 알잖아. 밤에만 시간을 낼 수 있다는 걸.”

“아, 그렇지. 하지만 전하께 부탁하면 가능하지 않을까? 이건 굉장히 중요한 기회야. 놓치면 안 된다고.”

세이란에게 부탁하면, 당연히 허락할 터였다. 하지만 문제는 그것이 아니었다.

“허락은 해주실 테지만, 내가 안 될 것 같아서 그래.”

저녁에 열리는 파티며, 무도회와는 달리 레이디들의 티파티는 담소를 나누며 친분을 쌓는 사교를 위한 자리였다.

만약 그곳에서 작은 말실수라도 한다면, 자신의 정체를 들키는 건 시간문제였다.

“네가 뭘 걱정하는지 알고 있어. 만약 내가 처음에 했던 말을 지금도 신경 쓰고 있다면, 그 말은 잊어. 내 판단 착오였어. 넌, 그 어떤 레이디보다 우아하고 완벽해. 흠잡을 곳 없이.”

“그건 네가…….”

그때 파티장 입구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움에 키안이 고갤 돌렸다.

세이란이 에드윈 리치문트와 함께 파티장 안으로 들어서고 있었다.

“황태자 전하!”

귀족들이 세이란을 발견하곤, 재빨리 허릴 숙여 예를 갖췄다. 키안 역시 예를 갖추기 위해 허릴 숙인 순간, 세이란과 눈이 마주쳤다.

그가 자신을 향해 거침없이 다가오는 게 느껴졌다. 왜냐하면, 자신과 세이란 사이에 서 있던 귀족들이 옆으로 물러서며, 길을 만들어줬던 것이다.

“여기에 있었군. 그댈 찾는데 시간이 많이 걸릴까 봐 걱정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찾다니. 운이 좋은 모양이야.”

이건 운이 좋은 게 아니라,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캐슬리스 후작가에서 파티가 열리는 곳은 그랜드 홀 한곳밖에 없었으니까.

“전하를 뵙습니다.”

흥분한 세이란과는 달리 키안은 침착한 모습으로 예를 갖췄다.

“그댄 날 만난 게 기쁘지 않는 모양이군.”

세이란이 키안의 침착한 태도를 보며, 말했다.

“기쁩니다. 전하를 뵙는 건 언제나.”

그제야 세이란의 녹색 눈동자가 짙어졌다. 그때 캐슬리스 후작이 세이란에게 다가왔다.

“황태자 전하, 누추한 곳에 걸음을 해주셔서 영광입니다.”

캐슬리스 후작의 인사에 세이란이 그를 향해 돌아섰다.

“캐슬리스 후작, 공을 많이 들인 모양이군. 홀이 굉장히 아름답군.”

“감사합니다, 황태자 전하.”

“그런데, 캐슬리스 후작? 내가 지금은 좀 급한 볼일이 있어서 그러는데, 혹시 내가 지금 바로 파티장을 떠나도 될까?”

세이란의 물음에 캐슬리스 후작을 비롯해 주위에 있던 귀족들이 놀란 얼굴을 했다. 파티장에 도착하자마자, 떠나겠다는 말을 하다니. 대부분 아무리 마음에 들지 않는 파티라도 30분 이상 머무는 게 예의였다.

“혹시 마음에 들지 않는 점이 있다면, 말씀해 주십시오. 바로 조치하겠습니다.”

캐슬리스 후작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해 있었다. 순식간에 식은땀이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걸로 보아, 당황한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다, 캐슬리스 후작. 사실 오늘 내가 급히 가볼 때가 있다. 하지만 함께 가야 할 레이디가 그대에게 허락을 받지 않으면 절대 함께 갈 것 같지 않아 이러는 것이다. 그녀는 나와 달리, 굉장히 정중하고 예의가 바른 사람이라서.”

어느새 세이란의 시선이 키안에게 향해 있었다. 그러자 그곳에 있던 모든 귀족이 세이란이 말한 사람이 릴리스 프로필리아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허락해 주겠나, 캐슬리스 후작?”

그제야 새파랗게 질려 있던 캐슬리스 후작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곤 그런 이유라면, 허락을 구할 필요도 없다는 듯 말했다.

“제 허락이라니, 당치도 않습니다. 하지만 사내란 여인의 말을 잘 듣는 편이 좋습니다. 아주 큰 기쁨이 뒤따르거든요.”

캐슬리스 후작이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는 캐슬리스 후작 부인을 돌아보며, 멋쩍은 듯 웃었다.

사실 캐슬리스 후작은 사교계에서 공처가로 유명했다. 귀족들 사이에서 공공연하게 애인을 두고 바람을 피우는 게 자랑거리처럼 되어 있었지만, 캐슬리스 후작은 결혼하기 전부터 부인인 제인에게 홀딱 빠져 있었다.

‘설마 전하께서 이걸 노리신 건가? 캐슬리스 후작의 환심을 사려는?’

만약 그런 계산이었다면, 성공한 듯했다. 언제나 모든 일에 무표정으로 일관하던 캐슬리스 후작의 얼굴에 미소가 떠올라 있었던 것이다.

“이해해 주니, 고맙군. 후작 부인에게 선물을 보내겠다. 오늘에 대한 보답으로.”

“감사합니다, 황태자 전하.”

세이란이 캐슬리스 후작에게 고갤 끄덕여 보인 후, 다시 키안 쪽으로 고갤 돌렸다. 그러곤 손을 내밀며 말했다.

“이제 나와 함께 나가는 걸 허락해 주겠나, 릴리스?”

이젠 귀족들 역시 세이란이 키안에게 목을 매는 게 놀랍지도 않은 모양이었다. 여전히 황태자의 새로운 면모에 놀라는 눈치긴 했다. 부러워도 했고. 하지만 대부분의 귀족들과 레이디들은 세이란을 다시 보기 시작했다.

인간미 없는, 냉혹하고 잔인한 황태자의 이미지에서 한 여인에게만 마음을 허락한 순정남으로 바뀐 것이다.

“뭐해, 릴리스? 어서 전하의 손을 붙잡지 않고.”

벨라가 옆구리를 꾹 찌르자, 키안이 그의 손을 잡았다.

“어딜 가시려는 건지 여쭤도 되겠습니까?”

“우선은 산책부터 하는 게 좋겠군. 캐슬리스 후작가는 정원이 아름답다고 소문이 나서.”

세이란의 칭찬에 캐슬리스 후작 부인이 수줍은 듯 웃었다. 사실 후작가의 정원은 모두 후작 부인인 제인의 솜씨였던 것이다.

세이란이 키안의 손을 잡고 파티장을 나왔다. 여전히 귀족들의 시선이 따라붙는 게 느껴졌다. 복도를 따라 걸으며, 키안이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자꾸 이러시면 귀족들이 흉볼 겁니다.”

“흉보는 게 아니라, 부러워할 것이다. 그리고 알게 되었을 테지. 내가 너에게 미쳐 있다는 걸 말이다.”

“혹시 귀족들에게 그걸 확인시키기 위해 벌이신 일이었습니까?”

키안의 질문에 세이란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돌아보았다. 그걸 몰라서 묻느냐는 표정이었다.

“아니. 오늘은 아니다. 아까 말했듯 급한 볼일이 있거든.”

그의 짙어진 녹색 눈동자에 욕망이 떠오른 걸 본 순간 키안의 귓불이 붉어졌다.

“말도 안 됩니다. 귀족들이 이렇게나 많은데…….”

“귀족들도 많지만, 이곳은 방도 아주 많다. 몰래 숨어든다고 해서, 알아차릴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이다.”

키안이 허락만 한다면 정말 당장에라도 캐슬리스 후작가의 방들 중 하나로 뛰어들 기세였다.

“저는 싫습니다. 귀족들에게 저희가 뭘 했는지 알리고 싶지 않습니다.”

키안이 고갤 가로저으며 대답하자, 세이란이 걸음을 멈췄다. 그러곤 의미심장한 얼굴로 키안을 보며 말했다.

“우리가 뭘 할 줄 알고 싫다는 건지 모르겠군. 너, 뭘 생각한 거지?”

“네?”

“설마 네가 널 이곳 후작가에서 안을 것이라 생각한 건 아니지? 난 그저 키스만 할 생각이었는데 말이야.”

순식간에 키안의 얼굴은 물론 목까지 새빨갛게 변했다.

‘이젠 음란하다 못해 마귀가 씐 모양이야. 여기서 대책 없이 사랑을 나눈다고 생각하다니.’

그때 세이란이 키안의 턱을 붙잡았다. 그러곤 뜨거운 숨을 내쉬며 속삭였다.

“그저 키스만 할 생각이었는데. 이건 네가 유혹한 것이다, 키안.”

“그게 무슨?”

세이란은 대답 대신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어딜 가시는 겁니까?”

그를 따라 계단을 오르며, 키안이 주위를 살폈다. 누군가 두 사람을 본다면 뭘 하려는 건지 뻔히 알 수 있을 것 같아서였다.

“넌 어딜 것 같은데?”

그 말과 함께 세이란이 가장 가까운 방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러곤 방문을 잠근 후 다짜고짜 키안을 벽으로 밀어붙였다.

“우선은 키스만이라도 해야겠다. 마음 같아선 지금 당장에라도 널 데리고 오두막에 가고 싶은 걸 그나마 참고 있는 것이다.”

그에게 붙잡힌 손이 뜨거웠다. 그리고 입술에 닿는 그의 숨결 역시도.

황제의 독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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