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01 화
“헉- 헉!”
거친 숨을 내쉬며, 카일은 어둠 속으로 몸을 숨겼다. 그러곤 신중한 태도로 뒤따라오는 자가 없는지 확인했다.
다행히 인기척은 없었다. 하지만 안심할 수는 없었다. 최대한 빨리 테란국 대신전의 지하를 빠져나가야 했다.
‘대체 왜 이곳에 유스타나 제국의 신관 복장을 한 여인이 붙잡혀 있는 거지?’
카일을 조금 전 자신이 듣고 본 것들이 믿기지 않았다. 아니, 루시타니아 상단의 정보원이 알려준 술집에서 들었던 소문부터가 귀를 의심케 했다.
‘테란국의 기사를 용병으로 꾸며 유스타나 제국의 검술 대회에 참가하게 할 생각이었다니…….’
술에 취한 기사들이 떠들어대던 말을 처음엔 믿지 않았다. 하지만 술집의 창녀가 카일이 앉아 있는 탁자 위에 걸터앉더니, 검술 대회 신청을 해보지 않겠느냐고 물어왔다.
대회에 참가하는 것만으로 어마어마한 포상금이 주어질 것이라고.
거기다 검은 사자라 불리는 유스타나 제국의 황태자와 은빛 늑대인 레녹스 공작의 목을 가져온다면 평생 먹고 쓸 정도로 엄청난 돈을 받게 될 것이라고 했다.
카일은 자신을 테란국의 기사라고 착각해 주절주절 떠벌리는 창녀에게 금화 한 닢을 건넸다.
금화를 본 창녀의 눈동자가 휘둥그레지더니, 그의 손을 잡고 술집 밖으로 나갔다.
처음엔 창녀가 금화의 대가로 몸을 주려 한다고 생각하고 거절하려 했다. 하지만 창녀는 몸이 아니라, 금화 한 닢에 상응하는 정보를 주었다.
"대신전에 유스타나의 신관이 붙잡혀 왔다고 하더군요. 그 신관이 테란국이 이번 전쟁에선 승리할 것이란 신탁을 받았다고 했습니다."
처음엔 믿지 않았다.
유스타나와 테란의 전쟁이 끝난 게 불과 몇 달 전이었다. 그리고 지금 유스타나엔 승전을 축하하기 위한 테란국의 사신단까지 와 있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또다시 전쟁이라니.
“전쟁이 아니라, 암살계획인 건가? 그것도 황태자와 레녹스 공작 두 사람을 죽이기 위한?”
카일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만약 사실이라면, 황태자와 레녹스 공작이 위험했다.
아니, 술에 취해 지껄이는 기사들의 헛소리라고 할지라도 간과할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서 카일은 창녀와 헤어져 그 길로 테란국의 대신전의 지하로 숨어들었다. 사실 여부를 확인해야 했던 것이다.
창녀가 말한 대로, 지하 감옥에 유스타나의 신관 복장을 한 여인을 확인하고 나오는 길이었다.
“어쩌지? 당장 알려야 해.”
하지만 지금 상황에선 테란국을 빠져나갈 방법이 없었다. 유스타나 제국으로 통하는 모든 국경 지역엔 출입을 막기 위해 기사들이 지키고 있었다.
“방법을 생각해야 해. 테란국을 무사히 빠져나가 이 사실을 알릴 방법을.”
그러다 문득 카일은 테란국에서 유스타나 제국의 검술 대회에 참가할 용병을 모집하고 있다던 말을 떠올렸다.
“지금 상황에선 적군 안에 숨어들어 테란국을 빠져나가는 게 가장 안전해.”
카일은 대신전을 빠져나와 서둘러 술집으로 향했다. 용병기사단이 되기 위해 뭐가 필요한지 그 창녀에게 물어야 했다.
12장. 금기를 깨다.
“레녹스 공작, 여긴 어쩐 일이지?”
키안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자, 책장에 기대서서 유스타나 제국의 법전을 살피던 에드윈 리치문트가 고갤 들었다.
“제국법전이군요.”
키안의 시선이 재빨리 에드윈이 들고 있는 두꺼운 법전으로 향했다. 그러자 에드윈이 법전을 덮고는 한숨을 내쉬었다.
“법전을 처음부터 끝까지 훑었는데도 내가 원하는 답을 찾지 못했지 뭐야. 답답해 미칠 지경이다.”
“혹시 로체 거리에서 일어난 그 사건 때문입니까? 관습법을 어겼다던?”
“맞아. 하지만 기록된 관습법에도, 제국법전에도 왜 쌍둥이가 태어난 경우 한 아이를 수도원으로 보내지 않으면 처벌되는지에 대한 이유가 명백하게 명기되어 있지 않더군.”
에드윈의 말에 키안은 주먹을 꽉 쥐었다. 사실 자신 역시 궁금했다.
왜 제국법에선 쌍둥이가 태어난 것이 죄가 되는지. 특히 남녀 쌍둥이인 경우, 금기를 어긴 것에 해당돼 평생 수도원에 갇혀 지내야 하는지도 궁금했었다.
하지만 황실 도서관과 로열아카데미의 도서관, 그리고 황실의 비밀서고까지 뒤졌지만, 그것에 대한 정확한 기록을 찾을 수가 없었다.
“제 생각엔 유스타나 제국을 세우신 구스타프 1세와 연관이 있는 것 아닐까요? 제국법전이나 역사서에 기록되어 있지 않았다면요. 그것을 언급하는 것 자체가 금기란 뜻일 테니까요.”
“나 역시 그렇게 생각하던 참이었다. 그래서 밤새 도서관에서 구스타프 1세에 관한 책들을 모두 읽었지. 하지만 몇 가지 의문점만 늘어났을 뿐, 답을 발견하지 못했다.”
에드윈은 풀리지 않는 난제를 앞에 둔 학자처럼 잔뜩 굳은 표정이었다.
“공작님께선 이 사건을 어떻게 결론을 내릴 생각이십니까?”
키안의 질문에 에드윈이 미간이 찌푸려졌다. 무척이나 난처한 모양이었다.
“공개 재판이 열릴 것이다. 만약 저택의 하인들이 진술한 내용이 맞다면 말이야. 관습법의 금기를 어긴 사안은 황제 폐하의 주관 아래 대신관이 참석한 가운데 공개 재판이 열리는 게 기본이라. 어쩌면 그대도 재판의 증인으로 참석해야 할지도 모르겠군.”
에드윈의 말에 키안이 고갤 끄덕였다. 사실 짐작하고 있던 바였다. 지금껏 금기를 어긴 재판은 공개 재판이 원칙이었으니까.
“제 증언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말씀해 주십시오. 참석하겠습니다. 대신 아키텐 공작부인은 빼주십시오. 충격이 큰 데다, 공개 재판에 출석한다는 것 자체가 레이디에겐 스캔들이 될 수가 있으니까요.”
그제야 에드윈은 키안이 자신을 찾아온 이유를 짐작한 모양이었다.
‘아키텐 공작부인 때문에 날 찾아온 것이었군.’
사실, 이상했었다. 아무리 키안이 그 사건을 직접 목격했다지만, 이렇게 적극적으로 나서서 알아볼 특별한 이유가 없었던 것이다.
“내가 힘써보겠다, 레녹스 공작.”
“그럼 가보겠습니다, 곧 검술 대회가 있어서.”
에드윈에게 고갤 숙여 보이곤, 키안은 재빨리 사무실을 나왔다.
복도를 따라 걷는 동안 손끝이 떨리는 게 느껴졌다. 주먹을 꽉 쥐곤 불안감을 떨쳐 내기 위해 애썼다.
공개 재판이라…….
키안은 마음이 무거웠다. 어쩌면 자신의 비밀이 귀족들에게 알려진다면, 자신 역시 공개 재판대에 서야 할 처지였다.
“레녹스 공작님?”
그때 낮고 묵직한 목소리에 키안이 고갤 들었다. 그러자 건물 기둥 뒤에 서 있던 헬로이즈 공주의 호위기사인 이고르가 모습을 드러냈다.
키안은 본능적으로 미간을 찌푸렸다. 그가 자신을 찾을 이유는 단 한 가지였던 것이다.
“공주께서 날 보길 청하는 것이라면…….”
“레녹스 공작님께 이것을 전해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키안은 이고르가 건넨 편지를 받아 들었다.
“이걸 나에게?”
“그렇습니다. 그리고 곧 뵙길 희망한다고 하셨습니다.”
키안이 뭐라 대답하기도 전에 이고르가 고갤 숙여 예를 갖춘 후 빠르게 그곳을 빠져나가는 게 보였다.
키안은 그의 뒷모습을 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포기를 모르시는 공주님이시군. 황태자 전하의 허락 없인 만날 수 없다고 몇 번이나 거절했는데 말이야.”
키안은 이고르가 건넨 편지를 뜯어 내용을 확인했다. 편지를 읽어내리던 키안의 눈빛이 서늘하게 변하기 시작했다.
순간 키안의 손에 들린 편지가 힘껏 구겨졌다.
“대체 어떻게…….”
창백해진 얼굴로 키안은 다음 말을 삼켰다. 서둘러 구겨진 편지를 주머니 안으로 밀어 넣은 후, 자릴 떴다.
**
황제궁의 시녀인 엘렌이 별궁 안으로 들어섰다. 테란의 기사가 그녀의 앞을 막아서자, 엘렌은 들고 온 상자를 앞으로 내밀며 침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시녀장님을 대신해 최고급 허브를 가져왔습니다. 불면증에 좋은 허브이니, 공주님을 직접 뵙고 사용 방법을 설명드리고 싶습니다. 접견을 허락해 주십시오.”
별궁을 지키던 테란국의 기사가 재빨리 별궁 안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밖으로 나온 기사가 길을 내주었다.
“들어가 보십시오. 공주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기사의 말에 엘렌이 고갤 끄덕였다. 안으로 들어가기 전, 엘렌은 주위를 경계하듯 살폈다. 다행히 별궁 주변을 지나는 시녀와 시종이 없음을 확인하곤, 재빨리 안으로 들어갔다.
복도를 따라 별궁의 건물 안으로 들어간 엘렌은 곧바로 응접실로 향했다. 셀서스 궁에 들어온 지 벌써, 21년이었다. 이젠 황궁의 모든 길과 건물은 손바닥처럼 훤했다.
똑똑.
엘렌이 접견실의 문을 두드렸다. 당연히 들어오라는 대답이 들려올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예상과는 달리, 문이 열렸다. 마치 문 앞에서 문을 두드리길 기다린 듯 헬로이즈 공주가 바로 앞에 서 있었다.
“황제궁의 시녀인 엘렌입니다. 테란국의 공주님께 인사 올립니다.”
“불면증에 좋은 차를 가져왔다고? 어떻게 알았는지 모르겠군. 내가 불면증이 있는지 말이야.”
서늘한 목소리와는 달리, 헬로이즈가 뒤로 물러서며 엘렌이 접견실 안으로 들어올 수 있게 했다.
“테란과 유스타나의 기온이 달라, 혹시나 그러지 않을까 추측했습니다.”
“그래? 마치 테란의 기후에 대해 잘 아는 것처럼 말하는군.”
접견실 문을 닫은 헬로이즈는 엘렌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소파로 향했다.
“열두 살 때, 유스타나에 오기 전까지 테란에 살았습니다.”
엘렌의 대답에 헬로이즈가 눈을 가늘게 떴다.
“테란의 사람이었느냐?”
“그렇습니다, 헬로이즈 공주님.”
“믿을 수 없군. 테란의 사람이 황제궁에 있었다니 말이야. 그런데 왜 이제 와서 날 만나려 하는지 모르겠군.”
엘렌은 헬로이즈의 말투에 담긴 의문을 읽곤 침착하게 대답했다.
“저 역시 제가 공주님을 찾아 뵙지 않기를 바랐습니다.”
“그럼, 날 꼭 찾아와야 하는 이유가 있었다는 것이냐?”
헬로이즈의 보랏빛 눈동자가 날카로워졌다. 점점 더 이해할 수가 없었다. 분명 황제궁의 시녀라고 자신을 소개한 엘렌은 이고르와 만났던 정보원이 보낸 자가 분명했다.
그런데 그녀의 태도며 분위기가 묘하게 낯이 익었다.
“공주님의 정보원에게 루틴 공작의 편지를 건넨 이가 바로 저입니다.”
“뭐? 다시 한 번 말해주겠느냐? 네가 편지를 전했다고? 대체 어떻게? 아니, 넌 누구지?”
헬로이즈의 보랏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로렌스 루틴 공작이 마지막으로 편지를 보낸 이가, 눈앞의 이 여인이었다니. 도무지 어떤 상황인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열두 살, 제가 유스타나 제국에 오기 전까지 저는 루틴 공작가의 딸이었습니다.”
“루틴 공작가의 딸이라면, 네가 로렌스 루틴 공작의 누이란 것이냐? 하지만 내가 알기로 로렌스 공의 누이는…….”
“어린 나이에 미쳐, 죽었다고 되어 있을 겁니다. 하지만 전, 지금 이곳에 있습니다. 미치지도 않았고요.”
뭔가 숨겨진 사정이 있던 것만은 확실했다. 하지만 엘렌의 단호한 표정으로 보건대, 그 이유는 말해주지 않을 생각인 듯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만약 눈앞의 여인이 진짜로 로렌스 공의 누이라면, 자신의 편이었다.
“제가 공작가의 사람이었다는 증거는 제가 드린 로렌스의 마지막 편지면 충분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엘렌의 말에 헬로이즈가 고갤 끄덕였다.
“네가 누구든 상관없다. 로렌스 공이 너를 신뢰했다는 사실이 중요한 것이니까. 그럼, 말해줘. 내게 왜 마지막 편지를 전했는지.”
헬로이즈의 명령에 엘렌이 침착하게 말했다.
“공주님께서도 테란국의 대신관을 통해 모든 운명이 바뀌었다는 사실을 알고 계실 겁니다.”
“알고 있다. 로렌스 공이 죽고, 그자가 살았지. 그리고 그 선택을 한 자가 바로, 유스타나의 황태자인 것도.”
사실 항상 의문이었다. 완벽하게 결정된 미래를 버리고, 하찮은 기사를 선택하다니.
하지만 로렌스 루틴 공작의 마지막 편지를 받고 그 이유를 어렴풋이 깨달았다.
‘황실 기사단의 단장이며, 레녹스 공작가의 후계자인 키안이 여인이었다니.’
그제야 모든 것이 분명해졌다. 유스타나 제국의 황태자인 세이란은 키안 레녹스를 사랑하고 있었다.
그래서 완벽한 미래를 버리고, 위험한 선택을 한 것이다.
잔혹하고 냉혹한 줄 알았던 자가 자신의 여인에겐 한없이 순정적일 수 있다니.
그 사실에 헬로이즈는 놀랐다. 하지만 그녀에겐 행운이었다. 무적이나 다름없는 유스타나 제국의 황태자의 약점이 뭔지 알게 되었으니까.
“운명의 수레바퀴. 제가 이곳에 온 이유는 천 년 전 시작된 저주 때문입니다.”
헬로이즈는 긴장했다. 로렌스 루틴 공작이 남긴 편지에도 똑같은 글자가 새겨진 동전이 있었다.
“궁금하군. 그대의 이야기를 다 들은 후, 내가 뭘 해야 하는지 말이야.”
헬로이즈의 말에 엘렌의 눈동자가 안타까움으로 흔들렸다.
“선택을 하셔야 합니다. 그것이 공주님께 주어진 운명의 몫이니까요.”
황제의 독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