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9 화
“전하, 이쪽입니다.”
루시타니아 상단 안으로 들어가자, 기다리고 있었던 패트리샤가 세이란을 안으로 안내했다.
“테란국에게선 연락이 왔고?”
“조금 전 카일이 보낸 전서구가 도착했습니다. 여기.”
패트리샤가 서둘러 카일이 보내온 쪽지를 세이란에게 건넸다.
“내가 명했던 일은 알아냈나?”
“루칸 백작님께서 정보원을 풀어 찾고 계십니다. 아마 알아내셨을 겁니다.”
패트리샤의 말에 세이란이 고갤 끄덕였다. 그때 방문이 열리더니, 루칸 백작이 허릴 숙여 세이란을 맞았다.
“안으로 들어오십시오, 전하.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뭔가 알아낸 모양이군.”
세이란이 자릴 잡고 앉아, 루칸 백작이 수집한 정보를 털어놓길 기다렸다.
“테란국에서 전갈이 왔습니다.”
“이상하군. 정보원은 오지 못하고 전갈만 오다니.”
세이란의 지적에 루칸 백작 역시 고갤 끄덕였다.
“저 역시 그것을 걱정하고 있던 참이었습니다. 보내온 전갈엔 테란국은 반란이 일어난 것치곤 굉장히 조용하다고 했습니다. 하지만 국경 지역으로 가는 모든 통로는 철저히 감시되고 있는 모양입니다. 무엇보다 이 전갈은 전서구가 아니라, 북쪽의 겔런 상단의 사람이 전해주고 간 것이 마음에 걸립니다.”
“타국의 상단은 통행에 막힘이 없는데, 유독 유스타나인만 철저히 감시 중이란 뜻이군.”
아마 그 이유는 테란국의 공주인 헬로이즈가 유스타나 제국에 있기 때문인 듯했다. 하지만 세이란은 꼭 그것 때문만은 아닌 듯했다.
폭풍 전야처럼 고요한 테란국의 분위기가 마음에 걸렸다.
“헬로이즈 공주 때문인 듯합니다.”
루칸 백작 역시 세이란과 똑같은 생각을 한 모양이었다. 세이란이 자신 역시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며 고갤 끄덕이자, 뭔가 생각난 듯 입을 열었다.
“카일에게서 온 전갈의 내용은 확인해 보셨습니까?”
세이란은 조금 전 패트리샤에게 받아 든 쪽지를 펼쳐 내용을 확인했다.
쪽지에는 블랙 기사단만이 알 수 있는 암호가 빽빽이 적혀 있었다.
“테란국의 국왕이 대신전에 유폐된 모양이야. 하지만 그곳 역시 사람의 왕래가 전혀 없다고 쓰여 있군.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다고.”
세이란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국왕이 있는 곳에 사람의 왕래가 전혀 없다니.
“루칸 백작, 혹시 테란국의 대신전의 설계도를 구할 수 있을까?”
“대신전의 설계도라면 지하 통로까지 표시된 것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맞다.”
“당연히 가지고 있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루칸 백작이 서둘러 방을 나갔다. 그사이 패트리샤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어왔다.
“대신전의 설계도는 왜 필요하신 겁니까, 전하?”
“국왕은 그곳의 비밀 통로를 통해 빠져나갔을 것이다. 나는 국왕이 향한 곳이 어디인지 알고 싶어 설계도를 보려 한 것이다.”
“전하께선 첫째 공주를 피해 국왕이 도망을 쳤다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도망이라…… 과연 그것이 도망일까?
세이란은 차라리 자신의 추측이 틀리길 바랐다. 만약 자신의 예상대로 모든 게 흘러간다면, 다시 테란국과 전쟁을 치러야 할지도 몰랐다. 이번엔 꽤 치열한 전투가 될 것 같았다.
“차라리 도망이면 좋겠군.”
**
키안은 서재에 모여 있는 집사 가브리엘과 하녀장 페니, 그리고 유모인 에리스를 바라보았다. 그들 역시 갑작스러운 주인의 부름에 긴장한 표정이 역력했다.
“키엘체를 떠날 준비를 해야겠다. 최대한 빨리, 그리고 은밀하게.”
키안의 명령이 떨어지자, 세 사람의 얼굴은 창백해졌다.
“혹시…….”
“아니, 너희들이 걱정하는 그런 일은 없다. 하지만 내가 결정을 했거든.”
그 결정이란 건, 분명 레녹스 가문의 비밀을 세상 밖으로 드러내겠다는 뜻이었다.
“주인님, 위험해질 수도 있습니다.”
가브리엘이 주름진 눈가를 일그러뜨리며 걱정스러운 듯 말했다.
“알고 있다, 가브리엘. 하지만 해야 할 일이야. 나를 위해서도, 그리고 카이우스를 위해서도.”
사실은, 그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한 진실이 있었다.
1년 전 테란국과의 전쟁을 위해 키엘체를 떠나기 전, 결심했었다. 살아서는 다시 레녹스가로 돌아오지 않겠다고.
‘전쟁터에서 죽기로 결정했건만…….’
이루지 못했다. 전쟁터에서 죽음을 맞는 기사는 아주 많았다.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것 없는 곳이었으니까.
그래서 키안은 언제나 최전선에서 싸웠다. 죽음이 두렵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이 사라진다면, 레녹스 공작가는 물론, 카이우스 역시 평온할 수 있었다.
‘나, 하나만 없어진다면…….’
하지만 지금도 이상했다. 죽을 각오로 싸우니, 죽음이 비켜가더란 말은 진실이 아니었다. 죽을 각오로 싸우니 죽을 기회가 아주 많았다. 그런데도 이상할 정도로 테란국의 기사들의 검끝은 자신의 심장과 목을 수없이 비켜 지나갔다.
누군가의 보호라도 받는 것처럼, 자신의 등 뒤로 날아오는 창 역시 자신을 비켜 땅바닥에 꽂혔다.
결국 계획이 어그러지고, 결심과 달리 살아 레녹스 공작가로 돌아왔다.
그리고 지금, 키안은 자신의 계획이 실패한 것에 안도했다. 만약 그곳에서 죽었다면…….
“바로 잡아야 해. 그것이 옳다. 하지만 바로 잡는 동안에 혼란스러울 거야. 그래서 모든 일이 해결될 때까지 카이우스를 안전한 곳으로 보낼 계획이다.”
무엇보다 이 일은 자신의 일이다. 위험한 일이 생기더라도, 자신 혼자만 감당해야 맞았다.
“그런 표정 하지 마. 전하께서 알고 계시니, 당장 교수형을 당하진 않을 테니까.”
“전하께서요?”
유모인 에리스가 놀란 표정으로 키안을 바라보았다.
“그래. 그러니 내 명령대로 움직이도록 해. 그만 나가봐도 좋다.”
황태자인 세이란이 알고 있다는 말에 집사인 가브리엘은 물론, 페니와 에리스 모두 안심한 눈치였다.
“에리스, 넌 잠깐 남아. 할 얘기가 있다.”
가브리엘과 페니가 서재를 나가자, 에리스가 책상 앞으로 다가섰다.
“하문하십시오.”
“지난번에 어머니께서 돌아가시기 전에 바레나 거리에 갔었다고 했지?”
“그랬습니다. 아참, 제가 주인님께 마님에 대한 얘길 해드린 후 다락방에 남아 있는 마님의 짐을 찾아보았습니다. 그러다 낡은 수첩 안에서 이런 걸 발견했습니다. 혹시 도움이 되실까 해서 꺼내왔습니다.”
에리스가 오래된 편지 하나를 건넸다. 빛바랜 편지지를 펼치자, 빠르게 흘겨 쓴 글씨가 보였다.
바레나 거리, 이틀 후 10시.
그것이 다였다. 그러다 문득 편지지 끝에 손끝이 닿았을 때, 표면이 울퉁불퉁했다.
키안이 자리에서 일어나 벽난로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곤 타고 남은 숯을 들어 편지지의 끝을 조심스럽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그러자 편지지 위에 서서히 익숙한 문양이 모습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이게 뭡니까?”
에리스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키안을 보며 물었다.
“별것 아니다. 이 편지를 보낸 자가 그림을 그려 넣은 모양이야.”
키안은 숯을 내려놓고는 편지지를 재빨리 접어 주머니에 넣었다.
“에리스, 그만 들어가 쉬도록 해. 나도 그만 들어가야겠다.”
“네, 주인님.”
에리스가 서재를 나가자, 키안은 주머니에서 편지를 꺼내, 다시 한 번 확인했다.
“대체 이건 어떤 의미지? 왜 편지지에 유스타나 별의 상징이 찍혀 있는 거지?”
어머니의 편지를 든 손끝이 떨렸다. 그러다 편지지 뒷면에도 똑같은 감촉이 느껴지자, 숯으로 조심조심 문질렀다.
“이건 뭐지? 검을 든 고양이 문장이라니.”
키안은 다시 주머니 안에 편지를 접어 넣으며, 생각했다. 내일 아침 일찍, 마부를 불러 어머니께서 가셨던 곳이 어딘지 확인을 해야겠다고.
‘내 출생과 유스타나 별이 연관이 있는 게 분명해. 그런데 검을 든 고양이의 문장은 대체 뭘 의미하는 거지?’
키안은 자꾸만 밀려드는 불길한 예감을 뒤로하며, 방으로 향했다.
“자러 왔다.”
방문을 열고 들어간 순간, 문 앞에서 세이란이 서 있었다. 멍하니 서 있는 키안을 그가 팔을 붙잡아 방 안으로 끌어당겼다.
그제야, 그가 자신의 방에서 자고 가겠다고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이젠 습관이 되신 모양입니다, 전하.”
“맞아. 이제 혼자서는 잠도 오지 않아 큰일이다.”
그 말과 함께 세이란이 그리웠다는 듯 그녀를 꼭 끌어안았다. 이상했다. 셀서스 궁에서 헤어진 지 몇 시간밖에 지나지 않았는데, 이렇게 그리울 수 있다니.
“자고 가도 되는 거지?”
“자꾸 황궁을 비우시면 안 되는 것 아닙니까?”
키안이 그의 품에서 빠져나오며, 입고 있던 두꺼운 가운을 벗어 의자에 걸쳐 놓았다. 자신의 몸을 핥는 그의 시선이 느껴졌다.
다시 가운을 입고 싶었지만, 가운 안에 넣어두었던 편지를 그에게 보이지 않기 위해선 벗어야 했다.
“밤엔 황궁에 네가 없으니, 자꾸 비울 수밖에. 만약 네가 셀서스 궁에 들어온다면 얘긴 달라질 수 있다. 들어오겠느냐? 내 궁에?”
함께 살자는 말이었다. 밤낮으로 함께 있고 싶다는 말을 돌려 말하고 있었다. 키안은 그 말을 모르는 척했다.
“그럼 내일부터 제가 직접 황제궁의 보초를 서겠습니다.”
“쳇, 내가 원하는 것이 뭔지 다 알면서 그런 소릴 하다니.”
세이란 역시 외투와 겉옷을 벗어 의자 위에 올려놓았다. 그러곤 당연하다는 듯 침대에 앉아 부츠를 벗은 다음 먼저 자릴 잡고 누웠다.
“뭐해? 들어오지 않고.”
“전 허락한 적이 없습니다.”
“거절하지도 않았잖아. 그럼 된 것 아닌가?”
참 이상한 계산법이었다. 하지만 키안은 침대로 걸어가 그의 옆에 자릴 잡고는, 눕는 대신 침대 등받이에 기대앉았다. 그러자 그가 그녀의 허벅지를 베개 삼아 누웠다.
“역시 편해.”
“저는 불편합니다.”
베개에 눕길 권했지만, 세이란은 오히려 그녀의 다리 사이를 파고들 듯 고쳐 누웠다.
그러곤 손을 뻗어 키안의 뺨을 감싸곤 부드럽게 쓸어주었다.
“간지럽습니다.”
키안이 피하려 하자, 세이란이 손에 힘을 주며 키안의 얼굴을 아래 끌어당겼다. 그러곤 입술에 천천히 키스했다.
순식간에 키안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가 자고 가겠다고 했을 때부터, 심장이 뛰었다.
닿았던 입술이 떨어지자, 두 사람의 시선이 하나로 얽혀들었다.
다시 입술이 다가오자, 키안은 손을 뻗어 손끝으로 그의 입술을 막으며 말했다.
“언제부터 제가 여인이란 사실을 아셨는지 궁금합니다.”
생각해 보니, 그걸 묻지 못했었다.
“참 빨리도 물어보는군.”
세이란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언제였을까? 처음으로 키안 레녹스가 신경이 쓰였던 건?
아니, 그녀가 남자든 여자든 상관없다고 생각했던 시점을 떠올리는 게 더 빠를 듯했다.
“내가 처음으로 레녹스 공작가의 담을 넘었을 때였다.”
“제 부모님의 장례식날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그래. 카이우스를 끌어안고 울고 있는 너를 보자, 마음이 아팠거든. 그리고 잠든 널 내려다보며, 처음으로 입을 맞추고 싶다고 생각했다.”
키안이 설마 입을 맞췄느냐는 듯 보자, 세이란이 고갤 가로저었다.
“아쉽지만 하지 못했다. 대신, 두 번째로 이 방에 왔을 때 했지, 잠든 네 얼굴에.”
처음 듣는 말이었다.
“전혀 몰랐습니다.”
“그런 것 같았다. 만약 내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았다면, 그렇게 무방비한 얼굴로 날 네 옆에 재우지 못했을 테니까.”
뺨을 쓸던 그의 손이 그녀의 부드러운 머리카락 속으로 들어갔다. 그러곤 뒷목을 붙잡곤 키스할 수 있을 만큼 아래로 끌어내렸다. 순식간에 뜨거운 혀가 키안의 입술을 파고들어 왔다.
“흐흣-”
입술이 하나처럼 들러붙어 뜨겁게 녹아내렸다. 그의 혀가 입 안쪽을 쓸며 진득하게 입술을 빨았다. 그 야릇한 감각에 키안은 더운 숨을 삼키며, 눈을 질끈 감았다.
“키안, 오늘은 잠만 자진 않을 거다. 잠만 자느라, 미치는 줄 알았거든.”
황제의 독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