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독사과-92화 (92/139)

제 92 화

11장. 그렇다고 했잖아.

달칵하고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키안은 자신이 또 꿈을 꾸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자신의 꿈은 언제나 굳게 닫혀 있던 옥탑의 문이 열리면서 시작되었다. 눈을 뜨고 싶지 않았다.

‘싫어. 바꾸고 싶어. 이젠 벗어나고 싶어.’

마음속의 외침과는 달리, 꿈은 언제나 똑같았다. 문이 열리고 침대에 웅크린 채 밤새 두려움에 떨던 자신은 햇빛을 따라 움직이는 해바라기처럼 이불 밖으로 고갤 내밀 터였다. 그러면 어김없이 자신과 똑같은 얼굴이 환하게 웃으면 손을 내밀었다.

그 미소는 언제나 어린 키안에겐 너무도 유혹적이었다. 마치 옥탑 꼭대기에 유일하게 나 있는 창문처럼, 자신에겐 단 하나밖에 없는 숨 쉴 구멍이기도 했다.

‘안 돼, 일어나지 마. 그 손을 잡으면 안 돼!’

꿈을 꾸는 동안 자신은 수백 번, 수천 번 그렇게 일곱 살의 자신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어김없이 자신은 웅크리고 있던 몸을 이불 밖으로 내밀곤 그의 손을 잡았다.

“이리 와, 같이 가자.”

오빠 키안의 다정한 목소리에 울컥 울음이 새어 나올 것 같았다.

몹시도 그리운 목소리였다. 이젠 꿈에서밖에 들을 수 없다는 사실이 너무도 안타까웠다.

사실 모든 사건이 일어나던 그날은 키안이 벌을 받게 된 지 한 달째 되는 날이었다. 벨라와 놀던 걸 들켜, 옥탑에 갇혔고 키안은 한 발자국도 밖으로 나올 수 없었다.

방에 갇혀 있는 동안, 어두운 방 안에서 아버지께서 주신 책을 줄줄 외워야 했다. 낯선 언어로 된 책은 일곱 살의 키안이 읽기엔 벅찰 정도로 어려웠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책의 모든 내용이 머릿속에 박혀 지워지지 않았다.

“햇빛이 좋아. 산책하자.”

“안 돼. 아버지께서 아시면 혼날 거야. 어서 돌아가.”

키안이 다시 이불 속에 얼굴을 묻고는 오빠가 돌아가길 기다렸다.

“키안, 내 어여쁜 동생.”

쌍둥이 오빠인 키안이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똑같은 이름을 공유한 쌍둥이 남매. 키안은 항상 다른 이름을 갖고 싶었다. 오직 자신만의 이름을. 하지만 그건 불가능했다. 자신은 오빠의 그림자였으니까.

“돌아가.”

그때 쌍둥이 오빠인 키안이 다시 이불을 들쳤다. 그러자 짙은 꽃 향이 확 끼쳐 들었다. 놀라 눈을 뜨자, 자신의 앞에 새하얀 꽃이 있었다.

“이게 뭐야?”

“숲에 한가득 피어 있었어. 그래서 너에게 주려고 꺾어 온 거야. 유모가 백합이래.”

키안이 손을 뻗어 조심스럽게 꽃을 받아 들었다. 흰색의 입은 부드러웠고, 향은 옥탑을 가득 채울 만큼 향기로웠다.

“같이 가볼래? 백합이 피어 있는 숲에 말이야.”

놀란 키안이 오빠를 올려다보았다. 그리고 재빨리 고갤 가로저었다. 부모님께선 절대 이 옥탑에선 나가면 안 된다고 했었다.

“괜찮아. 부모님께선 외출하셨거든. 지금쯤 황제 폐하를 알현하고 있을 거야.”

“그래도 안 돼. 난 오늘 외워야 할 책을 다 외우지 못했거든. 이 책에 있는 것을 다 외우지 못하면, 난 저주받은 아이가 될 거라고 했어.”

책은 벌써 외운 후였지만, 키안은 거짓말을 했다. 오빠가 자신 때문에 부모님께 야단을 맞는 건 싫었다. 그때 어깨에 작고 따뜻한 손이 와 닿았다.

“키안, 넌 저주받은 아이가 아니야. 나와 똑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데, 어떻게 네가 저주를 받았겠어. 넌 저주받은 게 아니라, 특별하다고 하셨어.”

내가 특별하다고? 한 번도 그런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나는 태어난 순간부터 저주받은 레녹스가의 아이였고, 오빠인 키안의 그림자였다. 그래서 자신은 열 살이 될 때까지 이 옥탑에 갇혀 있어야 했다.

“누가 그런 말을 했는데?”

떨리는 눈으로 고갤 들었다. 그러자 오빠인 키안이 고갤 숙이더니 귓가에 뭔가를 속삭이기 시작했다.

“뭐라고 다시 한 번만……?”

다시 한 번 듣기 위해 질문을 한 순간, 등이 불이 나는 것처럼 아팠다. 순식간에 등줄기에 식은땀에 흐르더니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 정도였다. 그와 동시에 키안은 꿈속에서 억지로 끌려 나왔다.

“헉- 하아, 으읏-”

번쩍 눈을 뜨자, 세이란의 녹색 눈동자가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키안, 정신이 들어?”

“꽃향기가…….”

꿈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분명 지금 콧속으로 스미는 향은 꽃향기였다.

“어젯밤 너와 함께 왔던 동굴로 널 데려왔다. 안전하게 널 치료할 수 있는 곳이 필요했거든.”

세이란은 막사로 키안을 데려가지 않은 이유를 설명했다. 그제야 키안은 자신이 있는 곳이 동굴이란 걸 깨달았다.

“하아, 꿈을 꾸었습니다. 꿈속에서도 지금처럼 꽃향기가 났고요.”

키안이 거친 숨을 내쉬며, 횡설수설했다.

“키안…….”

그가 자신의 이름을 불렀다. 그 목소리가 묻어 있는 애틋하고 다정한 감정에 울컥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았다.

“내가 널 다치게 만들었어. 내 옆에 있는데도……”

죄책감에 세이란의 녹색 눈동자가 흔들리는 게 보였다. 아니었다. 그의 잘못이 아니었다. 하지만 목이 메어 말이 나오지 않았다.

“키안!”

그의 목소리에 키안은 울컥하고 뜨거운 것이 목구멍을 타고 흘러넘쳤다. 그제야 정신을 잃기 전의 광경이 생생하게 떠올랐다.

그가 죽는 줄 알았다. 맹수인 호랑이가 그에게 달려들었을 때, 키안은 지독한 공포가 뭔지 깨달았다. 그리고 절대 그를 잃고 싶지 않았다. 자신의 목숨과 바꾸는 한이 있더라도, 절대로…….

그래서 모든 힘을 짜내, 레녹스 공작가의 힘을 사용했다. 사실 자신이 정신을 잃고 쓰러진 이유는 등을 파고들던 날카로운 통증 때문이 아니었다.

주술을 뱉어낸 순간 몸속에서 이는 불가사의한 힘 때문이었다. 지금도 그 힘이 느껴졌지만, 그 정체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심장이 멎는 줄 알았다. 네가 거기서 나타날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했거든.”

그의 목소리에 담긴 침통함에 키안이 손을 뻗어 그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러자 그가 자신의 손에 뺨을 비볐다.

“저도 전하께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그래서 가만있을 수가…….”

키안이 가까스로 입을 열었다. 자신의 손에 뺨을 비비던 그가 눈을 떴다. 그러곤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지금 내가 걱정이 돼, 무모하게 호랑이에게 달려들었다고 말하는 것이냐?”

키안이 고갤 끄덕이자, 세이란의 녹색 눈동자가 날카로워졌다.

“말했잖아! 절대 날 위해 네 목숨 같은 걸 걸지 말라고 말이야.”

자신 역시 기억하고 있었다. 그때는 테란국과 전쟁이 끝나고 그가 키엘체로 돌아가기 직전이었다.

그때의 세이란은 이상했다. 평소와는 달리 감정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자신을 하염없이 바라보았었다.

그때였던 것 같다, 그를 다른 눈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것은.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똑같은 상황이 온다고 해도, 제 선택은 같을 겁니다.”

“왜?”

세이란이 눈을 가늘게 뜨고 키안을 쏘아보았다.

“내가 황태자라서?”

그것도 이유 중 하나였다. 하지만 더 큰 이유는, 그가 죽는 게 무서웠다. 자신이 죽을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할 정도로 두려웠다.

“무서웠습니다.”

“대체 뭐가? 날 못 믿는 것이냐? 난 강하다.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구스타프 일족이 가진 힘은 훨씬 무시무시하다.”

세이란의 말에 키안이 고갤 가로저었다. 단 한 번도 그가 가진 능력과 힘을 의심한 적은 없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무서웠습니다. 전하를 잃을 것 같아서…….”

말끝을 흐리며, 키안이 고갤 숙였다. 자신도 혼란스러웠다. 가문보다, 자신의 목숨보다 더 지키고 싶은 존재가 생겨 버리다니.

키안이 몸을 일으켜, 바위에 몸을 기댔다. 다행히 등에선 아픔이 느껴지지 않았다. 생각보다 많이 다친 건 아닌 모양이었다.

“하아, 전하…….”

키안이 고갤 든 순간, 그가 손을 뻗어 키안의 옷을 거칠게 벗겨냈다. 툭, 투둑. 조금 힘을 준 것뿐이었지만, 여성용 셔츠의 단추가 바닥에 떨어졌다.

“전하!”

놀란 키안이 그의 손을 밀어내며, 두 팔로 몸을 가렸다. 다행히 안에 일부러 여러 겹 겹쳐 입은 셔츠로 가슴이 드러나진 않았다.

“키안…….”

그가 양손으로 키안의 어깨를 붙잡곤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그러곤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나도 지금까지 두려웠다, 널 잃게 될까 봐.”

낮게 울리는 그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그게 무슨?”

그가 고갤 숙이더니, 키안의 턱에 입을 맞췄다. 그러곤 사랑스럽다는 듯 입술을 맞대곤 강아지처럼 비벼왔다.

“흐음- 세이란 님.”

“너와 같다. 나도 네가 겁도 없이 검을 들고 나타난 순간, 무서웠다. 처음으로 등골이 오싹했다. 널 또 잃게 될까 봐.”

뺨에 닿는 그의 숨결이 뜨거웠다. 자신을 내려다보는 그의 녹색 눈동자 역시 열기로 깊이를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짙어져 있었다.

“이젠 무슨 일이 있더라도 널 놓을 수 없을 것 같다, 키안.”

미래를 바꾸겠다고 생각한 순간부터 그랬지만, 지금은 더더욱 그랬다.

만약 눈앞에 있는 이 여인을 갖지 못하게 막는 게 있다면, 그게 누구든 망설임도 없이 죽일 수도 있었다.

“세이란 님…….”

떨리는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심장이 터질 듯 뛰고 있었다. 말을 해야 할 것 같았다. 지금껏 망설이던 자신의 비밀을.

하지만 무엇부터 말해야 하지? 대체 어떤 것부터 말을 해야 그가 납득을…….

“알고 있다.”

“네?”

놀라 고갤 들자, 세이란이 고갤 숙여 키스를 해왔다. 살짝 벌어진 입술 새로 뜨거운 혀를 밀어 넣고는 나른하게 겹쳐 왔다.

“전하, 지금 무슨……. 흣-”

그를 밀어내며,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어야 했다. 대체 그 말의 의미가 뭐냐고.

하지만 그는 말 대신 농밀하게 혀를 얽어오며, 끝없이 속삭였다.

“널 원한다. 네가 누구든 상관없이, 널 원해왔다. 나는 이미, 그렇게 되어버렸다. 네가 아니면 안 되게 말이야. 너만 생각하면, 심장이 타버릴 것 같이 뜨거워 미칠 것 같다. 그러니, 키안. 네가 날 좀 봐줘야겠다.”

순식간에 키안의 몸이 뒤로 눕혀졌다. 입술을 겹친 채로 그가 몸 위로 올라오는 게 느껴졌다. 입 안을 핥고 혀끝으로 여린 점막을 쓸었다.

“하앗, 흐흣-”

키안의 턱이 나른하게 들리며, 갑작스러운 열기로 심장이 무섭게 뛰었다. 키스가 깊어질수록 아랫배에서 시작된 열기가 발끝까지 저릿하게 퍼졌다.

“키안!”

더운 습기를 품은 목소리가 귓불을 스쳤다. 순식간에 등줄기를 따라, 짙은 쾌락이 흘렀다. 그 나른함에 키안은 몸을 떨며 전율했다.

툭, 투둑.

또다시 셔츠의 단추가 바닥에 떨어졌다. 이번엔 여성용 속옷과 함께 살짝 위로 밀려 올라온 가슴골이 그대로 드러났다. 순간 키안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저, 전하…….”

키안의 하늘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입술을 깨무는 키안을 보며, 그가 그녀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대며 속삭였다.

“말했잖아. 걱정 말라고. 네가 누구든 상관없이 널 원한다고. 너 없인 안 된다고. 그러니 네가 나 좀 봐줘.”

수없이 말했었다. 그녀와 몸을 겹치고, 또 눈이 마주칠 때마다 자신의 마음을 고백했었다.

키안은 알아차리지 못했지만, 매 순간 자신은 그녀에게 진지했다.

“세이란 님…….”

흔들리던 키안의 눈동자가 놀란 듯 커졌다. 이제야 깨달은 모양이었다. 매 순간, 그가 했던 말들이 무엇을 뜻하는지를.

“이젠 가면은 필요 없겠어. 널 애써 모르는 척할 필요도 없고.”

믿을 수가 없었다. 잘 숨겨왔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안 거지? 키안의 하늘빛 눈동자에 수많은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사실 수천 번, 아니, 수만 번 상상했었다. 세이란이 자신의 모든 비밀을 알았을 때, 어떤 표정을 할 것인지. 당연히 배신당했다는 눈빛으로 자신을 싸늘하게 쏘아볼 것이라 생각했다.

인정사정없이 자신을 내칠 것이라 추측했다. 자신이 아는 황태자 세이란은 거짓말을 경멸했고, 얼음처럼 냉혹한 사람이었으니까.

“키안, 나는 너를 얻기 위해 모든 걸 포기할 수도 있다.”

그가 다시 그녀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애절하기까지 한 그의 눈빛을 보며, 키안을 입술을 깨물었다.

‘절대 이런 표정은 아니었어.’

미친 듯이 설레고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얼굴은 절대 아니었다. 감히, 생각도 할 수 없었다. 그가 자신을 용서해 줄 것이라고는.

“세이란…….”

“내가 그랬잖아. 너밖에 보이지 않는다.”

귓가에 속삭이는 그의 목소리가 심장을 건드렸다. 순간, 키안은 눈가가 뜨거워졌다. 목구멍에 자꾸만 뜨거운 것이 밀려 나와 깨문 입술을 바들바들 떨렸다.

“저는…….”

충격과 혼란스러운 감정을 추스르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미동도 없는 그의 녹색 눈동자에 자신의 얼굴이 비쳤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것 같은 표정이었다.

진정해야 했다. 여기서 울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심장이 타는 것처럼 뜨거워, 숨을 쉬는 것조차 힘들었다.

언제부터였지? 대체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하는 동안, 키안은 자신이 그에게 용서를 구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서둘러 그를 밀어내며, 그에게 무릎을 꿇기 위해 몸을 일으키려 하자, 그가 온몸으로 내리눌렀다.

“용서를…….”

“내가 말했잖아. 네 잘못이 아니라고.”

“하아-”

맥이 탁하고 풀렸다.

‘바보처럼 왜 깨닫지 못했었지?’

그 모든 말이 나를 용서한다는 것이었는데. 둔한 자신은 눈치도 없이 겁쟁이처럼 굴었다.

“제 잘못입니다.”

자신의 잘못이었다. 세이란은 아니라고 했지만, 자신이 태어난 것부터가 저주였다.

“만약 다른 이들이 그렇게 말하더라도, 난 상관없다. 난, 그렇게 결정했거든.”

그를 올려다보는 키안의 눈동자에 물기가 어렸다. 입술이 바르르 떨며, 말하는 것조차 힘이 들었다.

“어떻게 그럴 수 있습니까?”

어떻게 날 용서할 수 있는 거지? 자신을 속였는데……. 아니, 유스타나 제국을 속여왔는데, 어떻게 아무 일 아니라는 듯 받아들일 수 있는 거지?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를 잃는 것보다 그녀의 비밀을 받아들이는 게 더 쉬웠다.

그런 것뿐이었다.

“흐윽-”

꽉 다문 입술 새로 참고 참았던 흐느낌이 새어 나왔다. 그러자 그가 고갤 숙여와 입술을 겹쳐 왔다.

“울지 마.”

세이란은 그녀의 아픔을 함께 나누려는 듯 흐느낌이 새어 나오는 입술을 열고 깊숙이 혀를 얽었다.

황제의 독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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