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독사과-91화 (91/139)

제 91 화

“헉, 헉- 하아-”

거친 숨을 내쉬며 키안은 손등으로 흘러내린 땀을 닦아냈다. 어느새 숲엔 밤이 찾아들려는 듯 어두워지고 있었다. 밤이 되면 야행성 동물인 호랑이에겐 유리해지지만, 반면 자신과 세이란은 더 위험했다.

‘더 어두워지기 전에 끝내야 해.’

툭, 투둑.

그때 키안의 얼굴 위로 빗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전하, 비가 내리기 시작했습니다.”

키안이 초조한 얼굴로 세이란을 돌아보았다. 그러자 그가 손을 뻗어 키안의 뺨에 떨어진 빗물을 닦아내며 말했다.

“네가 걱정이다. 숲은 밤이 되면 춥고 위험해지거든.”

지금 날 걱정하는 건가? 키안은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미쳐 날뛰는 호랑이가 두 사람을 뒤쫓고 있는데, 밤이 되어 추울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니.

“지하 동굴은 아직 멀었습니까? 빗방울이 더 거세지기 전에 끝내야 합니다.”

키안이 애써 그의 시선을 외면하며 주위를 둘러보는 척했다. 하지만 얼굴에 닿아 있는 뜨거운 시선에 뺨이 불이 나는 것 같았다.

그가 픽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렸다. 키안은 속마음을 들킨 것 같아 얼굴이 뜨거워졌다.

“다 왔다. 바로, 여기다.”

세이란이 재빨리 말에서 내렸다. 키안 역시 따라 내리려 하자, 세이란이 손을 들어 저지했다.

“미끼는 나다. 대신 넌 저기 바위 위에서 활을 들고 날 엄호해.”

말도 안 된다. 검 하나로 호랑이를 상대하려 하다니. 아무리 세이란이라도 해도 무모할 정도로 위험한 일이었다.

“혼자는 불가능합니다. 저도 함께…….”

키안이 말에서 내리려 하자, 세이란이 손을 뻗어 저지하며 말했다.

“키안 레녹스, 냉정하게 생각해. 여기에 둘이 있다간, 둘이 함께 호랑이 밥이 될 것이다. 하지만 네가 저 바위 위에서 화살을 쏘아 치명상을 입힌다면, 이야기는 달라지지.”

세이란의 말에 키안은 냉정하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여전히 망설여졌다. 그가 위험에 빠질까 봐 겁이 났다.

“키안, 난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강한 존재다.”

망설이는 키안의 손을 그가 꽉 붙잡았다. 이상했다. 그의 손이 닿자, 불안으로 떨리던 심장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던 것이다. 신기한 일이었다.

“기사단이 도착할 때까지 기다리는 게 좋지 않겠습니까?”

“숲이 어두워지고 있다. 거기다 비까지 내리고 있고. 어디까지 왔는지 알지도 못하는 기사단을 마냥 기다릴 순 없다.”

그의 말이 맞았다. 미쳐 날뛰는 맹수가 바로 지척에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더 머뭇거렸다간 더 큰 불상사가 일어날 수 있었다. 냉정하게 최대한 빨리 결정을 내려야 했다.

“알겠습니다. 전하의 명령대로, 바위 뒤에 있겠습니다. 대신 조심하셔야 합니다.”

키안의 당부에 세이란의 입가에 거만한 미소가 떠올랐다.

“걱정 마. 널 두고 죽지는 않을 테니까.”

모든 걸 버리고, 자신이 바꾼 미래였다. 단 한 사람, 키안을 얻기 위해서. 그 결과로 인해 안정되고 평화롭던 그의 미래가 바뀌었지만, 상관없었다.

테란국의 기사의 경고처럼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앞으로도 그건 마찬가지였다.

“고갤 잠깐만 숙여봐, 릴리스”

세이란이 키안의 손을 아래로 잡아당겼다. 그 힘이 키안이 몸을 숙여오자, 그가 입술에 키스를 해왔다. 빗물과 함께 그의 혀가 입안으로 들어와 집요하게 헤집곤 빠져나갔다.

“읏-”

짧지만 뜨겁고 농밀한 키스였다. 두 사람의 키스엔 위험한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게 짙은 열기가 담겨 있었다. 입술을 뗀, 그가 뒤로 물러서며 단검을 꺼내 들었다.

“어서 가.”

키안 역시 정신을 바짝 차렸다. 바로 지척에 맹수인 호랑이가 있었다. 서둘러 바위 뒤로 간 키안은 말에서 내려, 어깨에 메고 있던 활과 화살을 꺼내 들었다. 그러곤 언제든 쏠 준비를 맞췄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입안이 바짝 말랐지만, 키안은 냉정하게 앞을 주시했다. 자신의 작은 실수로 세이란이 죽을 수도 있었다.

“목이다, 릴리스. 목을 겨냥해.”

그 순간 황금빛 눈동자의 맹수가 모습을 드러냈다. 거친 숨을 내쉬며 세이란을 향해 어슬렁어슬렁 다가오는 호랑이의 모습은 굉장히 위협적이었다.

숨이 저절로 멈춰졌다. 살육의 본능만이 남아 있는 맹수의 날것 그대로의 눈동자에 키안의 손이 얼어붙었다. 활과 화살을 든 손끝이 떨리고 있었다.

“떨 것 없다, 릴리스! 날 믿어.”

어떻게 안 걸까? 세이란은 자신의 동요를 읽은 듯 큰소리로 외쳤다. 키안의 그의 목소리에 담긴 힘에 다시 냉정을 되찾았다.

키안의 눈매가 서늘해졌다. 최고의 기사답게 한 치의 흔들림 없이 그의 명령대로 맹수의 목에 화살을 겨냥했다. 그 순간 어슬렁거리며 기회를 엿보던 맹수가 세이란을 향해 달려들기 시작했다.

“지금이다, 공격해.”

쌩하고 날카로운 화살이 공기를 찢을 듯 맹수의 목에 날아가 박혔다. 크헉, 크르릉!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맹수는 지독한 고통에 몸부림을 치고 있었지만, 여전히 건재했다. 그 순간 세이란이 검을 들고 호랑이를 향해 달려드는 게 보였다.

순식간에 내리기 시작한 빗물로 인해 눈을 뜰 수가 없었다. 키안이 재빨리 손등으로 빗물을 닦아낸 후, 재빨리 화살을 꺼내 활시위를 당겼다.

쌩하고 날아간 화살은 이번엔 호랑이의 옆구리에 맞았다.

“제길!”

하지만 치명상은 아니었다. 키안은 다시 활시위를 당겼다. 하지만 이번엔 쏘지 못한 채 몇 번을 망설였다. 세이란과 호랑이가 한데 엉켜 바닥을 뒹굴고 있어, 호랑이를 맞추는 건 무리였다.

“활로는 안 돼. 전하를 도와야 해.”

키안이 활과 화살을 버리곤 단검을 빼 들었다. 위험했다. 그를 도와야 했다. 그 순간 맹수의 날카로운 이가 세이란을 향해 인정사정없이 박혀들었다.

그 순간 키안은 미친 듯이 맹수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이성보다, 몸이 먼저 그를 돕기 위해 움직였다.

**

“헉, 헉!”

키안의 첫 번째 화살이 호랑의 목을 관통했다. 하지만 화살 하나론 호랑이의 명줄을 끊어놓기란 역부족인 모양이었다. 그는 여전히 날 센 기세로 자신을 날카로운 발톱으로 찢어발기려는 맹수의 발을 검으로 베었다.

크릉, 크르릉!

맹수가 뒤로 물러서며, 그의 어깨를 찢어놓았다. 욱신거리는 아픔이 느껴졌지만, 세이란은 신경 쓸 시간이 없었다.

다시 검을 쥔 그는 공격할 준비를 했다. 자신을 쏘아보는 맹수의 금빛 눈동자는 이미 초점이 없었다. 고양잇과 동물이라면 응당 있어야 할 검은 동공이 풀려, 호랑이의 눈동자는 온통 금색이었다.

‘맹수의 본능만 남아 있는 상태야. 지하 동굴에 가두는 것보단, 숨통을 끊어놔야겠어.’

그 순간, 공기를 찢으며 키안의 두 번째 화살이 날아와 맹수의 옆구리에 박혔다. 고통스러운 듯 몸을 뒤틀며 몸부림을 치던 호랑이가 지독한 살기를 뿜어내며, 세이란에게 달려들었다. 죽기 직전, 발악한다는 말이 맞는 듯했다.

“헉!”

거친 숨소리와 세이란이 강한 힘에 밀려 바닥에 넘어졌다. 맹수가 날카로운 발톱을 드러내며 그를 깔아뭉개기 직전, 세이란이 몸을 굴려 피했다. 그러곤 등 뒤에서 호랑이를 올라타, 목에 검을 깊숙이 찔러 넣었다.

“윽-”

고통에 몸부림치며 날뛰던 호랑이가 날카로운 발톱으로 그의 어깨를 찢어놓았다. 이번엔 살짝 긁힌 정도가 아니라, 붉은 피가 뚝뚝 떨어졌다.

“쳇, 빨리 끝내야겠어.”

세이란의 녹색 눈동자가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맹수와 마주한 그의 녹색 눈동자 역시 냉혹한 눈빛이 떠올라 있었다.

두려움 따윈 없는 강한 눈빛이었다. 그 눈빛에 동물적인 본성만 남은 맹수 역시도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감히 미물 따위가, 구스타프 혈족의 팔에서 피를 쏟게 만들다니.”

세이란이 한 발짝 한 발짝 맹수를 향해 다가섰다.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는 강한 살기로 어둠이 찾아든 숲의 공기가 차갑게 얼어붙기 시작했다.

구스타프 혈족의 핏속에 흐르는 잠들어 있는 힘은 인간의 힘과는 다른 속성을 지닌 것이었다.

모든 살아 있는 것을 복종시키고, 무릎 꿇리게 하는 그런 절대적인 힘이었다. 하지만 그 힘은 유스타나 제국에선 써서는 안 될, 금기의 힘이기도 했다.

유스타나의 별이라 일컬어지는 힘이 바로, 세이란이 갖고 있는 힘이었다.

“다행히 그 힘은 쓰지 않아도 되겠군. 이제 끝이다.”

세이란이 마지막 공격을 위해 검을 든 순간, 맹수의 황금빛 눈동자가 그의 뒤로 향했다.

“제길!”

세이란이 욕설을 뱉어내곤 뒤를 돌아보았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키안이 위험했다.

“당장 돌아가!”

날카롭게 외친 순간, 맹수 역시 본능적으로 키안이 그의 암컷임을 깨달은 듯했다.

뒤로 물러서던 호랑이가 순식간에 키안의 목을 물어뜯기 위해 달려들었다

“루멘(빛)의 이름 아래, 명하노니. 아니마(영혼)를 정화하라.”

그 순간 키안의 목소리와 함께 은빛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겁도 없이…… 맹수에게 달려들다니.”

세이란은 키안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맹수의 심장을 향해 검을 드는 모습을 보자, 온몸의 피가 싸늘하게 식는 느낌이었다. 더는 망설일 시간이 없었다.

“빌어먹을.”

욕설과 함께 그가 몸을 돌려 키안에게 달려드는 맹수를 향해 몸을 날렸다.

“테라(땅)의 주인에게 힘을.”

그 순간 세이란의 눈동자가 붉게 변했다. 그가 들고 있던 검 역시 붉은 빛을 뿜어내더니, 키안을 향해 달려드는 맹수의 심장을 단숨에 꿰뚫었다.

붉은 피가 사방에 튀었다. 비릿하고 짙은 피 냄새가 코를 찔렀다.

“헉, 헉-”

키안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키안이 창백해진 얼굴로 세이란을 바라보았다.

‘조금 전, 그건 뭐였지? 분명…….’

그 순간 세이란이 맹수의 심장에 박힌 검을 뽑아냈다. 그러자 거대한 덩치의 호랑이가 뒤로 몇 발짝 뒷걸음치더니 쿵 하고 바닥에 쓰러졌다.

“괜찮아?”

세이란이 창백한 얼굴로 서 있는 키안에게 다가왔다.

“놀랐잖아. 겁도 없이 맹수에게 달려들다니. 내 심장이 멈추는 줄 알았다, 키안.”

그가 힘껏 키안을 끌어안았다.

“하아, 다행입니다. 저는 전하께서…….”

순간 신음 소리와 함께 키안의 무릎이 꺾이며 바닥에 주저앉으려는 걸, 세이란이 팔을 뻗어 재빨리 부축했다.

“왜 그래?”

“윽-”

고통스러운 듯 등을 움찔하는 게 보였다. 사색이 된 그가 키안의 몸을 살폈다. 다행히 팔과 다리엔 아무런 상처가 없었다.

“어디야? 대체 어딜 다친 거야?”

“헉, 헉-”

하지만 키안은 극심한 고통에 몸을 떨며, 거친 숨을 내쉴 뿐이었다. 그 순간 세이란은 깨달았다. 맹수가 그의 검에 찔리기 직전, 날카로운 발톱으로 찢어놓은 곳이 바로 키안의 등이라는 걸.

“더 빨리 죽였어야 했는데.”

세이란이 키안의 등을 살폈다. 찢어져 너덜너덜해진 옷 사이로 검상처럼 긴 발톱 자국이 나 있었다. 그곳에선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키안, 키안!”

세이란이 키안을 품에 안았다. 고통에 몸을 떨던 키안이 어렵게 눈꺼풀을 밀어 올리고 그를 올려다보았다. 하늘빛 눈동자에 안도감이 떠올랐다.

“다행…….”

그 말과 함께 지독한 고통에 키안은 거친 숨을 내쉬면 그의 어깨에 얼굴을 묻었다.

“제기랄, 빌어먹을! 눈 떠. 어서, 눈을…….”

바로 곁에 있었는데도 상처 입히고 말았다. 세이란은 밭은 숨을 내쉬면 키안을 품에 안고 재빨리 말에 올랐다. 안전한 장소가 필요했다. 사람들의 눈을 피해 키안의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그런.

황제의 독사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