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90 화
순간 키안의 하늘빛 눈동자와 마주쳤다. 바로 코앞에 있는 그 눈동자가 어딘가 낯이 익었다.
이목구비 역시도……. 베로니카의 푸른 눈동자가 믿을 수 없다는 듯 커졌다.
“믿을 수가 없네요, 당신은…….”
베로니카가 떨리는 목소리로 키안을 보았다. 하지만 말을 잇지 못하는 것으로 보아, 알아챈 모양이었다.
‘이제 어떡하지? 들켜 버렸어.’
키안이 난처한 얼굴로 베로니카를 바라보았다.
“설마, 전하께서 연극을 하신 겁니까? 혼약하지 않기 위해서 말입니다.”
“레이디 베로니카, 진정하시고 제 말을…….”
“말도 안 돼. 공작님께 여장을 시키다니. 믿을 수가 없군요.”
베로니카가 미간을 찡그리며 불만스럽다는 듯 말했다.
‘어, 잠깐만. 그러니까 내가 여자란 사실을 들킨 게 아니라, 여장했다고 생각하는 건가?’
베로니카의 표정을 보니, 그런 모양이었다. 다행이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레이디 베로니카. 당분간은 모르는 척해주십시오. 이건 아주 중요한 문제라…….”
키안의 말에 베로니카가 잠시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다. 그러다 자신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던 키안의 시선을 의식한 듯 얼굴을 붉혔다. 그러곤 수줍은 얼굴로 조심스럽게 말했다.
“절 구해주셨으니, 비밀을 지켜 드리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걱정 마세요, 레녹……. 아니, 레이디 릴리스.”
베로니카의 약속에 키안은 안도했다.
“감사합니다, 레이디 베로니카. 이제 서둘러 돌아가야 합니다.”
키안이 말에서 내렸다. 그러곤 자신의 말의 고삐를 붙잡는 순간, 날카로운 경고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위험해, 당장 도망쳐!”
“말도 안 돼.”
세이란이었다. 그리고 믿을 수 없게도 그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북쪽 숲에 서식하는 호랑이가 사냥을 했는지 먹잇감을 먹고 있었다.
키안이 재빨리 말 위에 올랐다. 그러곤 얼떨떨한 얼굴로 앉아 있는 베로니카를 향해 말했다.
“절대 뒤돌아보지 마시고, 곧장 달리십시오. 그럼 막사에 도착할 겁니다. 절대 멈춰선 안 됩니다, 레이디 베로니카.”
“하지만…….”
“절대 멈춰선 안 됩니다.”
그 말과 함께 키안이 말의 엉덩이를 찰싹 때렸다. 그러자 베로니카를 태운 말이 전속력으로 앞으로 달려가기 시작했다.
키안 역시도 반대쪽으로 말을 달려 세이란이 있는 곳으로 가기 시작했다.
“당장 가!”
자신을 향해 달려오는 키안을 보며, 세이란이 무섭게 소리쳤다.
하지만 키안은 도망칠 수 없었다. 맹수가 지척에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그를 보고도 혼자 살겠다고 갈 수는 없었다.
“정말 미치겠군.”
다행히 키안이 세이란에게 갈 때까지 호랑이는 사냥감을 먹어 치우느라 자신들의 존재를 알아채지 못했다. 하지만 이미 숲의 공기 중엔 비릿한 피 냄새로 가득했다. 구역질이 나올 것 같았다.
“어떻게 된 거지? 왜 네가 여기 있는 거야?”
딱딱하게 굳은 그의 목소리엔 걱정과 함께 질책이 담겨 있었다.
“사냥을 나왔다가 레이디 베로니카의 말이 흥분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었습니다. 그나저나 드레이크와 기사단은 어디에 두고 전하 혼자 계시는 겁니까?”
“반대쪽으로 갔다. 포위할 계획이었거든.”
하지만 호랑이가 사냥감을 쫓아 그들의 포위망을 뚫고 이쪽으로 도망친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뒤를 세이란 혼자서 쫓은 것이고.
“말이 흥분한 이유를 확실히 알 것 같군요. 자신보다 더 강한 포식자가 곁에 있는 걸 느끼곤 본능적으로 위험을 감지한 모양입니다.”
“그랬겠지. 우리가 타고 있는 말들은 전쟁터에서 피 냄새를 주구장창 맡아서 상관없었겠지만, 다른 말들은 그 짙은 야생의 냄새에 흥분했을 거야.”
세이란이 날카로운 눈빛으로 아직 배를 채우고 있는 호랑이를 주시하며 말했다.
“어떻게 하실 계획입니까? 제가 다가가 복종하게 만들겠습니다.”
“안 돼, 그건 불가능해. 저놈은 지금 렌스터 공작가의 독을 먹은 상태라 살육의 본능만 남아 있다. 네 힘이 통하지 않을 거야.”
세이란의 말에 키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가 말하지 않아도 대충 상황을 짐작할 수 있었다.
또 제임스 에버콘과 렌스터 공작이 더러운 술수를 쓴 모양이었다.
“빌어먹게도 그 독을 북쪽에서 남쪽으로 뿌려놓았더군. 그걸 따라 이쪽까지 온 모양이야.”
사실 그 독엔 수컷 호랑이가 발정할 수 있도록 암컷 호랑이의 오줌이 섞여 있었다. 그걸로 인해 호랑이가 더 흥분해 날뛰고 있었다.
“제길, 움직이기 시작했어. 키안, 북쪽으로 다시 돌아가야 해.”
북쪽이라면 호랑이의 원래 서식처였다.
“그럼 북쪽으로…….”
“아니, 나 혼자 간다. 그러니 넌 내가 호랑이를 유인해 북쪽으로 가면…….”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함께 가겠습니다. 지금은 흥분 상태라 제 힘이 듣지 않겠지만, 독의 효력이 떨어진 후라면 가능합니다.”
“위험해. 난 너를 두고 그런 모험을 할 수 없다. 그러니 넌…….”
“이미 늦었습니다. 호랑이가 저희 발견하고 움직이기 시작했으니까요. 어서 서두르십시오.”
키안이 먼저 북쪽으로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세이란이 욕설을 내뱉는 소리가 들렸다. 하지만 그 역시 말고삐를 당겨 뒤를 쫓아오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신호할 때까지, 절대 멈춰선 안 돼.”
“방법은 있는 겁니까?”
“북쪽 숲에 갔을 때, 호랑이를 가둘 지하 동굴을 봐뒀다.”
그의 계획은 흥분한 호랑이를 지하 동굴에 가둔 후, 생포하려는 모양이었다. 그리고 북쪽 숲까지 두 사람이 미끼였다.
그때 세이란이 화살을 꺼내 뒤따라오는 호랑이를 겨냥해 쏘았다. 쌩하고 날아간 화살이 정확히 호랑이의 앞다리에 맞았다.
“키안, 서둘러. 잠시 시간을 벌어놓은 것뿐이니, 곧 따라올 거야.”
세이란의 명령에 키안이 고갤 끄덕였다. 두 사람은 전속력으로 북쪽 숲을 향해 말을 달렸다.
**
“레이디 베로니카! 릴리스는요? 릴리스는 함께 오지 않았나요?”
베로니카를 태운 말이 막사에 당도하자, 초조한 얼굴로 서성거리던 벨라가 베로니카에게 뛰어갔다.
“죄송합니다, 아키텐 공작부인.”
울상이 된 표정으로 말에서 내린 베로니카가 휘청거리며 넘어지려 했다. 다리에 힘이 풀린 모양이었다.
“아가씨! 베로니카 아가씨. 불안해 죽는 줄 알았습니다. 흑, 흐윽-”
젬마가 서둘러 베로니카를 부축했다. 젬마의 얼굴은 얼마나 울었는지 퉁퉁 부어 있었다. 하지만 무사히 돌아온 베로니카를 보자, 또다시 울음을 터뜨렸다. 그러자 그녀의 울음소리에 막사에 있던 귀부인들이 우르르 몰려나왔다.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레이디 베로니카.”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저는 괜찮습니다. 흥분한 말 때문에 죽을 뻔한 절, 레이디 릴리스 님께서 구해주셨습니다. 만약 레이디 릴리스가 아니었다면, 전…….”
베로니카가 상상하기도 싫다는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 모습에 귀부인들은 그녀를 동정했다. 사실 베로니카의 창백한 얼굴이며, 붉게 충혈된 눈. 그리고 엉망이 된 머리카락이 그녀가 어떤 위험에 직면해 있었는지 충분히 말해주고 있던 것이다.
“다행이네요. 레이디 릴리스께서 큰일을 하셨네요.”
릴리스가 베로니카를 구했다는 말에 귀부인들은 정말 놀라는 눈치였다. 그리고 릴리스에게 적대감을 드러내던 분위기가 조금씩 누그러졌다.
“릴리스는 함께 돌아오지 않은 건가요? 레이디 베로니카, 제발 말씀 좀 해주세요.”
그때까지 초조하게 서 있던 벨라가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두 손을 꼭 마주 쥐고 있는 걸로 보아, 두려움을 감추고 있는 모양이었다. 그 모습이 너무 안타까워 보여, 귀부인들 역시 입술을 깨물었다.
“죄송합니다, 아키텐 공작부인. 레이디 릴리스께서 절 구해주신 후, 호랑이가 갑자기 나타나…….”
“호랑이가요?”
순간 귀부인들은 놀라 숨을 멈췄다. 이번 사냥대회에 참가한 귀부인들은 1년 전 북쪽 숲에 갔다가 호랑이에게 물려 처참한 시신으로 돌아온 기사들의 모습을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럼 릴리스를 혼자 남겨두고 돌아오셨다는 겁니까?”
벨라의 격앙된 목소리에 막사가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싸늘해졌다. 그곳에 있는 귀부인들은 모두가 릴리스가 죽었을 것이라 생각하는 듯했다.
“혼자가 아닙니다. 제가 마지막을 돌아봤을 땐, 레이디 릴리스께서 전하께 달려가는 걸 보았거든요.”
“황태자 전하요?”
“네, 분명 괜찮을 겁니다. 전하께서 구해주실 겁니다.”
베로니카는 세이란에게 가는 릴리스, 아니, 레녹스 공작을 보았다. 분명 함께 무사히 돌아올 터였다.
“맙소사, 어떡하죠? 황태자 전하께 무슨 일이라도 생기…….”
“재수 없게 그런 말씀 마십시오.”
날카로운 지적에 귀부인들은 입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여전히 불안한 얼굴이었다.
현 황제가 위독한 상황에서 황태자에게 무슨 일이라도 생긴다면, 유스타나 제국은 뿌리째 흔들릴 수도 있었다.
“다들 괜찮으신 겁니까?!”
그때 에드윈 리치문트가 모여 있는 귀부인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곳에 모여 있던 여인들의 시선이 일제히 에드윈에게 향했다. 그는 얼마나 전력을 다해 말을 몰고 왔는지 얼굴은 물론, 온몸이 땀으로 흠뻑 젖어 있었다.
“저희는 괜찮습니다. 하지만 릴리스가 위험합니다. 전하와 함께 있는 것 같지만, 호랑이를 보았다고 레이디 베로니카께서 말씀하셨거든요. 그 말이 사실인가요?”
벨라가 에드윈에게 다가가, 그의 팔을 붙잡곤 울 것 같은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자 그의 미간이 찌푸려지더니, 한숨을 내쉬었다.
“우선은 전하와 함께 있다니 다행입니다. 그런데 다른 귀족분들은 아직 돌아오지 않았습니까?”
“어, 저기 오시네요. 아가씨, 주인님이세요.”
젬마가 서둘러 베로니카를 부축해 이제 막 도착한 렌스터 공작에게 다가갔다. 말에서 내린 렌스터 공작은 초췌한 모습의 베로니카를 발견하곤 험상궂은 얼굴을 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이냐, 베로니카. 네가 왜 이런 모습인 것이냐?”
렌스터 공작이 서둘러 베로니카를 품에 안으며, 다친 곳이 없는지 살피기 시작했다.
“저는 괜찮습니다, 아버지. 갑자기 말이 흥분해 위험했지만, 레이디 릴리스께서 절 구해주셨습니다. 그분이 아니었다면, 전 죽었을 겁니다.”
말이 흥분했다는 말에 렌스터가 베로니카를 힘껏 품에 안았다.
“대체 어쩌다가 말이…….”
“호랑이 때문입니다. 북쪽 서식처에 있어야 할 호랑이가 남쪽으로 내려와, 동물들이 모두 흥분 상태가 되었거든요.”
에드윈이 렌스터 공작의 말을 자르며, 끼어들었다.
“호랑이가 남쪽 숲으로 내려왔다는 건가, 리치문트 공작?”
“그렇습니다, 렌스터 공작님. 밤새 무슨 약을 먹었는지 잔뜩 흥분한 상태였습니다.”
에드윈의 말에 베로니카를 안은 렌스터 공작의 얼굴이 창백해졌다. 하마터면 호랑이에게 자신의 하나밖에 없는 혈육을 잃을 뻔한 것이다.
“대체 왜 그런 일이……?”
“그거야 조사해 보면 알게 되겠죠. 누가 벌인 일인지 말입니다.”
에드윈의 시선이 제임스 에버콘에게 향했다. 그러자 제임스가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럼 전하와 기사단은 지금 호랑이에게 쫓기고 있는 겁니까?”
쫓기고 있다는 말에 에드윈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처음으로 저 비열하게 웃는 얼굴에 주먹을 날리고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아직 아무것도 드러나지 않은 상황에서 그를 무턱대고 공격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정말 무뢰하시군요, 에버콘 공작님. 감히 황태자 전하께 쫓긴다는 표현을 하시다니. 그건 황실에 대한 모독입니다.”
벨라의 지적에 제임스를 바라보는 귀족들의 분위기가 싸늘해졌다. 사실 유스타나 제국과 황실에 자부심을 갖고 있는 귀족들 역시 제임스 에버콘의 말에 불쾌감을 느끼고 있었다.
“아키텐 공작부인 말이 맞습니다. 이번엔 에버콘 공작님께서 경솔하셨습니다.”
렌스터 공작이 재빨리 벨라를 두둔했다. 그러자 제임스 에버콘의 입가가 싸늘하게 비틀렸다. 하지만 자신의 실수를 바로 시인했다.
“제가 좀 경솔했던 것 같군요. 자숙하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말에서 내린 제임스가 자신의 막사로 가버렸다. 하지만 분위기 여전히 싸늘했다.
멀어져 가는 제임스를 보며, 에드윈은 눈살을 찌푸렸다. 조금 전 서로를 쏘아보던 렌스터 공작과 제임스 에버콘 사이에 흐르던 싸늘한 분위기로 보아, 두 사람 사이에 미묘한 균열이 생긴 것 같았다.
‘하지만 전하께서 분명 렌스터 가문에서 제조한 독이라고 하셨어.’
두 사람이 공모했을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렌스터 공작에게 도움을 청할 수는 없었다.
‘제길, 어쩐다? 전하를 돕기 위해 기사를 보내야 하는데……. 이럴 때 아센 공작님께서 함께 사냥 대회에 오셨더라면, 좋았을 텐데.’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센 공작은 사냥 대회 직전 무릎의 관절염이 도저 참석하지 못하겠다는 통보를 해왔었다.
그때 렌스터 공작의 품에 안겨 있던 베로니카가 공작에게 먼저 말을 꺼냈다.
“절 구해주신 레이디 릴리스가 아직 숲에 있습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베로니카?”
“레이디 릴리스가 아니었다면, 저는 죽었을 겁니다. 도와주세요. 렌스터 공작가의 기사들을 숲으로 보내주세요. 부탁드리겠습니다.”
렌스터 공작의 품에 안겨 있던 베로니카가 아버지 앞에 무릎을 꿇었다. 그러자 놀란 렌스터 공작이 서둘러 베로니카를 일으켜 세웠다.
“더러운 곳에 무릎을 꿇다니. 젬마, 어서 아가씨를 막사로 데려가거라.”
“네, 주인님.”
“아버지, 부탁드리겠습니다. 제발 기사들을 숲으로 보내주세요. 저는 은혜도 모르는 사람으로 남고 싶지 않습니다. 그렇게 되면, 렌스터 가문의 명예가…….”
“알았으니, 어서 들어가도록 해. 당장 보낼 테니까.”
렌스터 공작이 눈살을 찌푸리며 대답했다.
‘제임스 에버콘을 믿는 게 아니었어. 알아서 한다고 해서 맡겨놨더니, 북쪽 숲에 있어야 할 호랑이만 풀어놓은 꼴이라니. 거기다 날 함정으로 몰아넣으려 했어.’
렌스터 공작은 서둘러 헤링턴 백작에게 다가갔다.
“백작, 기사들을 숲으로 보내야 할 것 같네.”
렌스터 공작의 말에 헤링턴 백작이 고갤 끄덕였다.
“당장 전하께서 계시는 숲으로 기사를 끌고 가겠습니다.”
“그래, 부탁하지. 그리고 레이디 릴리스를…….”
렌스터 공작이 말끝을 흐리자, 헤링턴 백작이 알겠다는 듯 고갤 끄덕였다.
“렌스터 공작가의 영애를 구해주신 분이라면, 당연히 구해 돌아오겠습니다.”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헤링턴 백작. 제가 전하께서 계시는 곳을 압니다.”
에드윈이 서둘러 말에 올랐고, 에드윈을 선두로 기사들은 숲을 향해 무서운 속도로 말을 달렸다.
황제의 독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