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독사과-89화 (89/139)

제 89 화

말에서 내린 세이란이 나무의 꺾임을 보며, 심상찮은 얼굴을 했다. 북쪽 숲에서 한 시간을 달려 남쪽으로 이동하는 중이었다. 드레이크 역시 세이란의 옆에 서더니, 심상찮은 얼굴로 말했다.

“전하, 이걸 보십시오. 모두 남쪽 방향으로 나무들이 꺾여 있습니다.”

“제길, 남쪽으로 이동 중이야. 그나마 다행인 건 중간에 사냥에 성공한 듯한 모양이야.”

그 말은 흥분제를 먹은 호랑이가 허기가 져 아무나 닥치는 대로 공격할 위험성은 사라졌다는 뜻이었다.

“전하, 근처 숲에서 이런 걸 발견했습니다.”

드레이크가 푸른색으로 변한 이끼를 세이란에게 보여주었다.

“대체 이건?”

빌어먹게도 제임스 에버콘은 자신만 덫에 밀어 넣은 건 아닌 모양이었다. 북쪽에서 남쪽으로 이어지는 길목에 맹수를 흥분시키는 약이 뿌려져 있었던 것이다. 누군가 일부러 위험할 줄 알면서도 맹수인 호랑이를 남쪽으로 불러들인 것이다.

“어떻게 할까요?”

드레이크가 어두워진 얼굴로 세이란을 올려다보았다.

“어쩌긴 뭘 어째? 당연히 막사에 남아 있는 기사단에게 신호를 보내야지. 레이디들을 막사 밖으로 절대 나오게 해선 안 된다고 전해.”

“알겠습니다, 전하.”

드레이크가 주머니에서 기다란 피리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러곤 길게 불어 신호를 보내기 시작했다.

“우린 최대한 빨리 움직여, 호랑이를 포획해야 한다.”

“네, 전하.”

세이란이 다시 말에 올랐다. 맹수가 키안이 있는 막사로 가기 전에 포획해야 했다. 릴리스의 모습으로 레녹스 공작가의 직계 혈족에게만 전해지는 힘을 귀족들 앞에서 쓰게 된다면, 모두가 릴리스의 신분을 의심하게 될 게 분명했다. 지금쯤이면 드레이크가 보낸 신호를 키안 역시 알아챘을 터였다. 세이란은 말을 달리며, 키안에게 제발 아무 일 없기를 간절히 바랐다.

**

삐이. 삐이이이! 삐이, 삐이이이!

활시위를 당기던 키안은 익숙한 피리 소리에 몸을 바로 했다.

그 순간 헬로이즈의 화살이 공기를 가르며 빠르게 날아가더니, 토끼의 목을 꿰뚫었다.

“어머, 축하드립니다, 공주님. 성공하셨습니다.”

젬마가 놀란 표정으로 테란국의 공주를 돌아보며 축하의 말을 전했다. 그러자 헬로이즈가 고맙다는 듯 고갤 끄덕인 다음 키안을 돌아보았다.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레이디 릴리스? 표정이 무척이나 어둡군요. 설마 내게 사냥감을 빼앗겨 실망한 건 아닐 테죠?”

헬로이즈의 말에 키안이 굳은 얼굴로 말했다.

“막사로 돌아가야 할 것 같습니다, 헬로이즈 공주님.”

키안의 갑작스러운 태도 변화에 헬로이즈가 미간을 찌푸렸다.

“그게 무슨 말이죠? 이제 시작인데, 돌아가자니. 정말 자신이 없는 건가요?”

삐이, 삐이이이!

그때 다시 피리 소리가 들려왔다. 이번엔 헬로이즈를 비롯해 그곳에 있는 사람들 모두 들었는지 주위를 두리번거리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소리죠? 무슨 신호 같은데.”

“신호요? 혹시 사냥에 성공했다는 뜻일까요?”

헬로이즈의 말에 베로니카가 호기심을 드러내며 말했다.

“그런 의미는 아닌 것 같은데…….”

헬로이즈가 말끝을 흐리며 키안 쪽으로 고갤 돌렸다. 키안에게 이 피리의 의미를 알고 있느냐는 의미였다.

“잘은 모르지만, 국경 지역에 있을 때 저런 소리가 들린 후면 전쟁이 있었습니다.”

“그래요? 그렇다면 위험한 것 아닌가요?”

벨라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주위를 살폈다. 하지만 사위는 고요할 뿐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지금은 어떤 상황인지 모르니, 우선은 막사로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 만일의 경우를 생각해야 하니까요. 무엇보다 동물들의 기척이 심상찮습니다.”

키안은 드레이크가 부는 피리 소리가 들리기 전부터, 뭔가 이상한 낌새를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뭔지 구체적으로 알지 못했었다. 그런데 드레이크가 위험을 알리는 피리 소리를 듣고 난 후에야, 동물들이 숨을 죽인 채 수풀에 숨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맹수야. 최고의 포식자, 호랑이. 북쪽 숲의 호랑이가 남쪽으로 내려왔어.’

하지만 왜 갑자기 이런 일이 생긴 거지? 머릿속에 여러 가지 의문이 떠올랐지만, 지금은 그걸 고민할 여유가 없었다. 최대한 빨리 막사로 돌아가는 게 우선이었다.

“그럼 서둘러야겠군요. 어서 돌아가요.”

베로니카가 긴장한 얼굴로 고갤 끄덕였다. 일행이 고삐를 바짝 쥐곤 막사 쪽으로 말머리를 돌려 말을 몰기 시작했다.

“그런데 레이디 릴리스는 소리에 무척 예민하신 모양이군요. 몇 번 들어보고, 그런 소리를 기억하다니 말입니다.”

헬로이즈의 지적에 키안은 태연한 얼굴로 대답했다.

“1년이란 시간은 아주 길거든요. 저희 마을은 매 순간 위험 속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기억을 해야 했고요.”

한마디로 자신이 소리에 예민한 것이 아니라, 살기 위해서 기억을 해야 했다는 뜻이었다.

“그렇겠군요.”

헬로이즈는 납득한 듯 앞을 보고 말을 달렸다. 하지만 키안은 헬로이즈의 표정을 살폈다.

‘분명, 날 의심하고 있어. 무엇보다 드레이크가 보낸 신호가 전쟁터에서 황실 기사단의 기사들 사이에서만 사용되는 비밀 암호라는 걸 알고 있는 것 같아.’

그렇다는 건, 헬로이즈 공주 역시 전쟁터에 한 번은 왔을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기도 했다.

‘거짓말에, 뭔가를 숨기고 있는 테란국의 공주라…… 그렇다는 건 국혼 역시 다른 의도가 있는 건가?’

키안은 문득 그런 의심이 들었다.

“어엇, 말이 왜 이러지?”

“무슨 일이십니까, 레이디 베로니카?”

베로니카가 말고삐를 바짝 쥐곤 말을 진정시키려 애쓰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그게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갑자기 말이……. 어엇!”

“베로니카 아가씨! 누가 도와주십시오. 아가씨의 말이 이상합니다.”

옆에서 말을 타고 있던 하녀 젬마가 초조한 표정으로 이고르를 보았다.

“이고르, 도와줘.”

헬로이즈의 명령에 이고르가 베로니카의 말이 있는 쪽으로 움직였다. 하지만 흥분한 암말이 앞발을 들곤 바닥을 치는 바람에 가까이 다가갈 수가 없었다.

“아악-”

두려움에 몸을 떨며, 베로니카가 고삐를 쥔 손을 힘껏 당겼다. 그러자 앞발로 땅을 박차던 말이 미친 듯이 앞으로 달려나가기 시작했다.

“아가씨!”

젬마가 새파랗게 사색이 된 얼굴로 베로니카를 불렀다. 하지만 이미 그녀를 태운 말은 숲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당장, 쫓아가야 해.’

키안이 서둘러 헬로이즈와 이고르를 향해 말했다.

“제가 뒤쫓아 가겠습니다. 여기 있는 레이디들을 부탁합니다.”

“아니요,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제 걱정은 마십시오. 혼자가 더 편합니다. 이럇!”

키안이 고삐를 당겨, 베로니카를 뒤쫓기 시작했다.

“어떻게 할까요, 공주님? 뒤쫓을까요?”

이고르의 말에 생각에 잠겨 있던 헬로이즈가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우선은 막사로 돌아간다. 안전이 최우선이니까.”

“그럼, 저희 아가씨는요?”

젬마가 울먹이며 헬로이즈를 올려다보았다.

“걱정 마. 곧 돌아오실 거야. 네가 따라간다고 해서 달라질 건 없으니, 돌아가서 기다리는 게 나아.”

헬로이즈의 냉정한 말에 젬마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하지만 헬로이즈이 말은 사실이었다. 어쩔 수 없이 젬마는 헬로이즈 일행과 함께 막사로 돌아갔다.

벨라 역시 막사로 돌아가면, 계속해서 뒤를 돌아보았다. 키안이 레녹스 공작가의 사람인 건 잘 알고 있었지만, 걱정됐다. 벨라는 질끈 눈을 감고는 마음속으로 간절히 빌었다.

‘제발 무사히 돌아와야 해, 키안. 제발!’

**

앞서 말을 달리던 세이란이 말고삐를 당기더니 재빨리 멈춰 섰다. 그러곤 뒤따라오던 기사들을 향해 조용히 하라는 듯 손가락으로 입에 가져다 댔다.

“쉿!”

드레이크를 비롯해 에드윈과 기사단의 기사들이 숨을 죽인 채, 움직임을 멈췄다. 세이란이 눈을 감고 귀를 기울였다. 그러곤 맹수의 기척을 찾았다.

“이쪽이다.”

눈을 뜬 세이란이 녹음이 우거진 숲을 가리켰다.

“두 개로 조를 나눈다. 이쪽은 내가 맡을 테니, 드레이크 너는 옆에서 포위망을 좁히도록 해.”

드레이크를 비롯해 기사들이 고갤 끄덕이곤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리치문트 공작, 그댄 막사로 돌아가는 게 좋겠다.”

“아닙니다. 저도 함께…….”

“아니, 그대는 돌아가 막사에 남아 있는 레이디들을 살피도록 해. 반대쪽 길은 안전하다.”

“그럴 순 없습니다, 전하.”

“에드윈!”

순간 에드윈은 놀라 세이란을 올려다보았다. 처음이었다. 지금까지 세이란은 키안을 제외하고 기사단의 드레이크만 이름으로 불렀다.

그런데 지금…….

“전하?”

“에드윈, 부탁한다. 막사로 가서 내가 돌아갈 때까지, 곁에 있어줘.”

에드윈은 그가 안전을 부탁하는 이가 릴리스란 사실을 바로 알아차렸다. 순간 에드윈의 얼굴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알겠습니다, 전하. 걱정 마시고, 무사히 돌아오십시오.”

에드윈이 재빨리 막사를 향해 말을 달리기 시작했다. 세이란 역시 맹수인 호랑이를 포획하기 위해 말을 몰았다.

**

“흑, 흐윽- 흑!”

베로니카가 겁에 질린 목소리로 울음을 삼키는 소리가 들려왔다. 키안은 고삐를 바짝 당겨 쥐곤 몸을 숙여 빠른 속도로 말을 몰았다.

하지만 장애물이 많은 숲에서 이성을 잃고 미친 듯이 달리는 말을 따라잡기엔 힘이 부쳤다.

“쳇, 나뭇가지가 너무 많아.”

욕설과 함께 키안은 최대한 베로니카의 말에 가까이 가기 위해 말을 몰았다. 자신에게 아무리 맹수를 다루는데 탁월한 능력이 있다고 해도, 이렇게 멀리 떨어져 있으면 무용지물이었다.

“레이디 베로니카, 제 말 들리십니까?”

고갤 숙인 채 울고 있던 베로니카가 두려움에 떨며 고갤 들었다.

“무, 무섭습니다. 흐흑, 저 좀 도와주세요.”

“돕기 위해 온 겁니다. 하지만 레이디 베로니카께서 내가 도울 수 있게 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키안의 단호한 목소리에 입술을 깨물던 베로니카가 고갤 끄덕였다.

“하지만 잘할 수 있을지는…….”

“그건 걱정 마세요. 제가 무슨 일이 있어도 도와드리겠습니다. 그러니 절 믿으세요.”

키안의 단호한 목소리에 베로니카가 용기가 생긴 듯 다시 한 번 고갤 끄덕이며 말했다.

“해볼게요. 제가 뭘 해야 하는지 알려주세요, 레이디 릴리스.”

키안이 안심시키듯 베로니카에게 미소를 지어 보인 다음,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가 말을 진정시킬 겁니다. 하지만 그전에 레이디 베로니카께서 말 속도를 늦추셔야 합니다. 제가 옮겨 탈 수 있게요.”

키안이 자신의 말로 옮겨 탄다는 말에 베로니카는 처음엔 놀란 듯했다.

“네, 제가 해볼게요.”

베로니카가 서둘러 고삐를 당겼다. 그러곤 허벅지에 힘을 주곤 말을 멈춰 세우려 했다. 하지만 흥분한 말은 제어하는 건 쉽지 않았다.

“안 돼요. 어쩌죠?”

“괜찮으니, 침착하게 하세요. 말은 주인의 감정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동물입니다. 심호흡을 해 먼저 두려움을 가라앉히세요.”

키안의 명령에 따라, 베로니카가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그렇게 몇 번 심호흡을 한 후, 다시 말을 멈추기 위해 고삐를 당겼다. 그러자 미친 듯이 뛰던 말이 조금씩 속도를 늦추기 시작했다.

“잘하셨습니다. 이제 제가 그쪽을 최대한 가까이 다가갈 겁니다.”

베로니카가 고갤 끄덕이자 키안이 말을 몰아 베로니카의 말 옆에 다가갔다. 사실 눈을 마주친 상태라면, 말을 조종하는 게 쉬웠다.

하지만 지금은 말이 흥분한 상황이라 직접 힘을 전달하는 방법을 사용해야 했다. 키안이 손을 뻗은 동시에 날렵하게 몸을 움직여 베로니카가 타고 있는 말로 옮겨 탔다.

“헙! 서, 성공했어요. 믿을 수 없어요.”

놀란 베로니카를 키안이 감싸 안고는 그녀가 쥐고 있던 말고삐를 틀어쥐었다. 그러자 두려움에 숨을 삼키던 베로니카의 어깨가 떨리는 게 느껴졌다. 안도한 모양이었다.

키안이 재빨리 눈을 감은 후, 한 손을 말의 갈기에 올려놓은 후 주술을 외웠다.

‘루멘(빛)의 이름 아래, 명하노니. 아니마(영혼)를 정화하라.’

순식간에 키안의 손을 통해 은빛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왔다. 따뜻하고 맑은 그 빛이 순식간에 키안과 베로니카를 감쌌다.

“이건 대체…….”

놀란 것도 잠시, 베로니카는 눈을 뜨고 있을 수 없어 서둘러 눈을 감았다. 그러자 무섭게 뛰던 심장이 원래의 속도를 되찾으며, 안정되기 시작했다. 그 낯선 경험에 베로니카는 몸을 떨었다.

그 순간 흥분해 발을 구르던 말 역시 진정이 되었는지 움직임을 멈춰 섰다.

“믿을 수 없습니다, 레이디 릴리스. 대체 조금 전 그 빛은 뭐였죠? 분명 그건 레녹스 공작가의…….”

흥분한 목소리로 베로니카가 뒤를 돌아보았다. 여전히 키안의 손에선 은빛의 찬란한 빛이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다, 당신은…….”

황제의 독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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