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독사과-84화 (84/139)

제 84 화

“문제라고? 뭔데?”

“그게 손이 닿지 않아서, 등에 있는 지퍼가 올라가지 않습니다. 벨라를 부를 수도 없고…….”

“지퍼만 올려주면 되는 것이냐?”

세이란의 물음에 키안이 고갤 끄덕였다.

“알았으니, 이리 와서 앉아. 해줄 테니까.”

키안이 드레스 자락을 붙잡곤 천천히 세이란이 앉아 있는 탁자로 걸어왔다. 그러곤 그의 앞에 등을 보이고 섰다. 다행히 여성용 속옷을 입어서인지 등의 상처는 보이지 않았다.

“이렇게 하면 되는 거지?”

세이란이 손을 뻗어 지퍼를 붙잡곤 위로 천천히 끌어 올렸다. 지퍼가 위로 올라갈수록 그의 시선 역시 키안의 등에서 날씬한 목으로 올라갔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상큼한 비누향이 났다. 자신과 똑같은 향이 키안에게서 나자, 또다시 다리 사이가 욱신거렸다. 세이란은 키안의 목에 입술을 묻고 여린 살을 핥아 올리고 싶었다. 그가 그곳에 키스할 때마다 키안이 몸을 비틀며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인지 그 유혹을 떨쳐 내기가 쉽지 않았다.

“다 되었습니까, 전하?”

그의 변화를 눈치챘는지 키안의 목소리 역시 떨리고 있었다. 마지못해 지퍼에서 손을 뗀 세이란이 키안이 들고 있는 타월을 받아 들었다.

“앉아. 숲이라 공기가 차다.”

“아닙니다. 제가 하겠습니다.”

“시간이 없다니까. 어서 앉아.”

어쩔 수 없이 키안이 그의 앞에 자릴 잡고 앉았다. 그러자 세이란이 키안의 젖은 머리카락을 타월로 닦아주었다.

“가발은 가져왔고?”

“저기 꾸러미에 있습니다.”

“그나저나 내 막사에선 어떻게 나갈 생각이지?”

“저쪽 틈으로 나가면 됩니다.”

키안이 문제없다는 듯 막사 구석을 가리켰다. 자세히 보니 틈이 조금 벌어져 있었다.

“너무 좁은 것 아닐까? 이 차림으로 나가기엔 말이다.”

“걱정 마십시오. 충분히 나갈 수 있습니다.”

키안의 대답에 세이란은 말없이 젖은 머리카락을 닦아주었다. 그러고 보니, 황실 사냥터에 왔을 때도 키안의 젖은 머리카락을 닦아준 적이 있었다.

그때는 구스타프 1세의 비밀의 방에서 발견한 붉은 액체를 마시고 정신을 잃은 자신을 살리기 위해, 키안이 먼저 자신에게 몸을 맞대 왔을 때였다.

‘그때도 마음을 숨기느라 미치는 줄 알았는데. 지금도 그렇군.’

그날 밤, 세이란은 미치는 줄 알았다. 차가워진 자신의 몸을 데우기 위해 키안이 알몸으로 자신에게 안겨왔을 때, 이성을 잃고 날뛰고 싶었다. 하지만 키안은 자신이 액체 때문에 정신을 잃었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래서 먼저 손을 뻗어 안을 수가 없었다.

‘하아, 위험해.’

서늘하던 그의 몸에 닿던 키안의 뜨거운 몸이 떠오르자, 이성의 끈이 또 끊기려 했다. 아득하던 쾌락이 온몸의 피를 뜨겁게 달구어놓았다.

“키안.”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엔 명백한 욕망이 담겨 있었다. 키안 역시 그의 열기를 느낀 듯 드레스 자락을 꼭 쥐는 게 보였다.

그는 키스라도 해서 몸속에 들끓는 갈증을 풀어내고 싶었다. 하지만 한 번 시작하면, 절대 멈추지 못할 것이란 잘 알고 있었다.

“나도 가서 씻어야겠다. 보초에게 들어가지 말라고 말해둘 테니, 적당한 기회를 봐서 빠져나가도록 해. 잘할 것이라 믿는다.”

키안이 붙잡기도 전에 세이란은 타월을 집어 들곤 막사를 나가 버렸다. 그가 나가자, 키안은 참고 있는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두 사람 사이에 감돌던 팽팽한 성적 긴장감에 키안은 숨도 쉬지 못할 정도였다.

“휴우- 위험했어.”

사실 세이란이 급히 나가지 않았다면, 자신이 그의 목에 팔을 감고는 매달린 뻔했다. 키스해 달라고. 온몸을 관통하는 나른한 열기를 참지 못하고 그와 몸을 섞을 뻔했다.

키안은 자신의 인내심이 조금 전 두 사람을 갈라놓았던 모포보다 더 얇다는 사실을 깨닫는 중이었다.

떨리는 손을 꼭 쥐곤, 꾸러미 안에서 가발을 꺼내 대충 썼다. 그가 오기 전에 벨라의 막사로 가야 했다.

막사의 앞을 지키는 보초병들의 눈을 피해 키안은 능숙하게 막사의 비좁은 틈을 빠져나와 벨라의 막사로 향했다.

**

사냥터의 숲을 가로지르는 냇가에서 목욕을 마친 세이란은 막사로 바로 돌아왔다. 놀란 듯 자신을 바라보는 경비병들을 지나쳐, 그는 막사 안으로 들어갔다.

다행히 키안은 무사히 막사를 빠져나간 듯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세이란이 입고 있던 옷을 벗고는 만찬을 위해 옷을 갈아입기 시작했다. 평소라면 아이크가 따라와 그의 시중을 들었겠지만, 세이란이 아이크에게 셀서스 궁에 남아 있으라고 명했다.

“전하, 리치문트 공작입니다.”

“들어와.”

막사 안으로 들어온 에드윈은 세이란의 옷 시중이라도 들려는 듯 셔츠로 손을 뻗는 게 보였다.

“아이크가 그대에게 부탁한 모양이군.”

“이번 사냥대회에 시종들을 따라오지 못하게 하셨다며, 저에게 부탁했습니다.”

“전쟁터에서도 시종 없이 1년을 지낸 나다. 그러니 그대의 도움은 필요 없다.”

에드윈은 세이란이 시종 없이도 능숙하게 옷을 입는 걸 보며, 그의 말이 헛말이 아니란 걸 깨달았다.

“그런데 레녹스 공작이 보이지 않더군요. 어디에 있는지 알고 계십니까?”

에드윈의 물음에 세이란이 그를 돌아보며 말했다.

“내 명령으로 셀서스 궁으로 갔다. 황제궁을 레녹스 공작에게 맡겨야 마음이 놓일 것 같아서.”

“레녹스 공작이 있어준다면야, 걱정할 게 없겠군요. 유스타나에서 전하 다음으로 검을 잘 쓰는 기사니 말입니다.”

사실 에드윈은 키안을 셀서스 궁으로 보냈다는 말을 듣고 안도했다. 세이란이 릴리스 프로필리아에게 특별한 감정을 갖고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냇가에서 키안 레녹스를 바라보던 세이란의 표정이 심상찮았던 것이다.

‘그건 분명, 질투였어.’

하지만 그곳엔 두 명의 레이디가 있었다.

‘아니, 키안 레녹스 공작까지 셋인 건가?’

미친 생각인지 몰라도, 에드윈은 세이란이 두 명의 아름다운 레이디를 향해 질투의 감정을 드러냈다고 생각했다. 키안이 아니라.

“내게 묻고 싶은 게 있는 건가, 리치문트 공작?”

옷을 마저 다 입은 세이란이 눈을 가늘게 뜨곤 에드윈을 보았다.

“아닙니다. 전하의 아름다운 외모에 넋을 잃고…….”

“헛소리할 거면 당장 꺼져. 난 사내에게 관심 없으니까.”

세이란이 험악한 표정을 지으며 에드윈을 쏘아보았다. 자신을 바라보는 경멸스러운 눈빛으로 보아, 세이란의 성적 취향이 남자가 아닌 건 분명했다.

“다행입니다. 사실 저 역시 여인에게 관심이 있어서. 하지만 전하의 매력은 너무도 치명적…….”

“내일 사냥에서 내 화살의 표적이 그대가 되고 싶지 않다면, 당장 그 입을 다무는 게 좋을 것이다.”

세이란의 입가가 잔혹하게 비틀리는 것을 보며, 에드윈은 마른침을 삼켰다. 농담 한마디에 이제 자신은 세이란의 사냥감이 되어버린 것이다. 에드윈이 창백한 얼굴로 세이란을 올려다보았다.

“입 다물었습니다, 전하.”

그제야 세이란의 입매가 풀렸다. 하지만 여전히 서늘한 표정으로 말했다.

“늦었군. 벌써 만찬이 시작되었겠어.”

세이란이 서둘러 막사를 나갔다. 에드윈은 어깰 축 늘어뜨리곤 그의 뒤를 따르며, 낮게 읊조렸다.

“농담이실 거야. 분명 장난이실 거야.”

**

막사 중앙에 모닥불이 피워졌다. 모닥불을 중심으로 둥글게 탁자가 놓였고, 탁자 위엔 황궁 요리사가 준비한 음식들이 차려졌다.

모닥불 위엔 세이란이 사냥한 멧돼지가 먹음직스럽게 구워지고 있었다. 그래서인지 귀족들의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들뜬 표정이었다. 야외에서의 바비큐 파티라니. 색다른 경험이었던 것이다.

“어머, 저기 전하께서 나오시네요.”

귀부인의 말에 자리에 앉아 있던 귀족들이 일제히 일어서, 세이란을 향해 예를 갖췄다.

“음식은 충분하니, 마음껏 즐겨도 좋다. 또한 내일 사냥 대회를 위해 일찍 들어가 쉬는 게 좋을 것이다. 힘든 하루가 될 테니까.”

세이란이 자리에 앉으며 귀족들에게 말했다. 그러자 제임스 에버콘이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서며 말했다.

“감사합니다, 전하. 미리 말씀하셨다면, 저 역시 오늘 잡은 사냥감들 중에서 만찬을 위해 몇 마리 내놓았을 겁니다.”

“마음만 고맙게 받겠다, 에버콘 공작. 몇 마리나 내놓을 정도라면, 오늘 사냥이 성공적이었던 모양이군.”

세이란의 말에 제임스 에버콘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운이 좋았습니다.”

“노루 세 마리와 멧돼지 네 마리, 그리고 토끼며, 꿩은 숫자를 세는 게 힘들 정도로 잡아놓으시곤, 운이 좋았다니요. 실력이 좋았던 것 아닙니까?”

옆 탁자에 앉아 있던 헤링턴 백작이 대단하다는 듯 말했다.

“그러는 백작께선 많이 잡으셨습니까?”

“저희야 뭐, 말하기도 부끄러운 숫자라. 토끼 다섯 마리가 전부입니다.”

헤링턴 백작의 말에 제임스가 선심이라도 쓰듯 말했다.

“내일 사냥은 제가 돕고 싶군요. 저희와 함께 가시겠습니까, 헤링턴 백작님?”

제임스의 제안에 헤링턴 백작의 눈동자가 반짝였다.

“저희야 좋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렌스터 공작님?”

헤링턴 백작이 렌스터 공작 쪽으로 고갤 돌렸다. 그러자 그가 헛기침하며, 못 이긴 척 고갤 끄덕였다. 내일 함께 사냥하자는 의미였다.

“저기 테란국의 공주님께서 오시는군요.”

“아키텐 공작부인도 있는 것 같군요. 그리고 그 뒤엔…….”

순간 어색하게 말이 멈춰졌다. 그러자 만찬 자리에 참석했던 귀족들의 시선이 일제히 벨라 아키텐 뒤에 서 있는 레이디로 향했다.

“그 레이디군요, 황실 무도회에서 보았던.”

“프로필리아 자작가의 영애군요. 예의도 없이 이제야 나타나다니.”

왁자지껄하던 만찬장 안에 갑작스러운 침묵이 찾아들더니, 이내 부채 뒤에서 귀부인들의 수군거림이 들려왔다. 그때까지 세이란은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않은 채 음식을 먹고 있었다.

“전하, 레이디 릴리스이십니다.”

에드윈이 세이란만 들을 수 있게 낮게 속삭였다.

“알고 있다.”

세이란이 포크를 내려놓으며, 천천히 고갤 들었다. 그 순간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고, 그는 숨을 쉬는 것조차 잊은 듯 키안을 바라보았다.

키안은 조금 전 자신의 막사에서 보았던 것과는 달리 물빛 드레스 차림이었다. 구불거리는 금발을 허리까지 늘어뜨린 모습은 숲의 정령처럼 신비롭고 아름다웠다.

키안 역시 그의 뜨거운 시선을 느낀 듯, 얼굴을 붉히며 고갤 숙였다. 그의 강렬한 눈빛에 서늘하던 숲의 공기가 변하기 시작했다. 귀족들 역시 키안을 바라보는 세이란의 시선을 눈치챈 듯 얼굴을 붉히는 게 보였다.

“늦어 죄송합니다, 전하.”

헬로이즈가 끼어들자, 팽팽하게 날 서 있던 긴장감이 깨어졌다. 세이란 역시 키안에게서 눈을 뗀 후 목이 타는 듯 음료 잔을 들어 모두 비워냈다. 그러곤 헬로이즈를 향해 별 감흥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음식이 입에 맞을지 모르겠군. 충분히 만찬을 즐겼으면 좋겠다, 헬로이즈 공주.”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에드윈이 자리에서 일어서, 세 사람에게 자릴 권했다.

“이쪽에 자리를 마련해 두었습니다. 앉으십시오.”

“감사합니다, 리치문트 공작님.”

에드윈의 안내로 헬로이즈가 먼저 자릴 잡고 앉았다. 그리고 그 옆으로 벨라와 키안이 순서대로 앉았다. 키안은 자신을 바라보는 세이란의 시선이 느껴졌지만 고갤 들지 않았다.

조금 전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을 때, 그의 강렬한 눈빛에 얼굴이 다 화끈거렸다. 다시 그와 눈이 마주친다면, 얼굴은 물론 온몸이 붉게 달아오를 것 같아서였다.

“릴리스, 양고기야. 좀 먹도록 해.”

벨라가 키안의 접시에 양고기를 덜어 주었다. 사실 너무 긴장돼 음식이 넘어가지 않을 것 같았지만, 막상 요리를 앞에 두고 보니 식욕이 당겼다.

“고마워, 벨라.”

“두 분 사이가 참 좋군요. 친자매처럼 보여요.”

옆에 앉아 있던 헬로이즈가 벨라와 키안을 보며 부러운 듯 말했다.

“릴리스는 제게 친자매 같은 존재랍니다. 얼마 전 릴리스의 아버님께서 돌아가시는 바람에 상심이 크거든요. 그래서 제가 키엘체로 불러들였답니다. 위로도 해줄 겸, 기분 전환을 하라고요.”

“그랬군요. 슬픈 일이에요, 누군가를 잃는다는 건.”

헬로이즈의 보랏빛 눈동자가 순간 슬픔으로 어두워졌다. 마치 그녀 역시 최근에 누군가를 잃은 듯 슬픈 눈빛이었다.

‘테란국에 혼자 남아 있는 아버지를 걱정하는 모양이야.’

정치적으로 그녀가 어떤 상황인지 충분히 짐작이 갔다. 믿었던 혈육에게 배신당하고, 아버지마저 볼모로 잡혀 있는 상황일 테니까.

하지만 헬로이즈는 지금까지 유스타나에 도착한 이래, 언제가 강하고 당당한 모습만 보여왔다. 이렇게 솔직히 감정을 드러낸 것은 처음인 듯했다.

“공주님도 최근에 누군가를 잃으신 모양이네요.”

벨라가 별 뜻 없이 말을 건넸다. 그러자 헬로이즈의 얼굴이 가면을 쓴 것처럼 무표정하게 변하며, 얼굴에 드러났던 감정을 순식간에 숨겼다. 그 모습에 키안은 눈을 가늘게 떴다.

“아니요, 그런 적 없습니다. 그저 폐전국의 신세가 돼, 이곳에 온 제 신세가 너무 처량하게 느껴져 한 말입니다.”

헬로이즈의 설명에도 불구하고, 키안은 어딘지 모르게 묘한 느낌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뭔가, 또 숨기고 있어. 대체 그게 뭘까?’

키안은 음식을 먹는 척하며, 헬로이즈를 살폈다. 생각해 보니, 그녀가 오늘처럼 감정을 드러낸 적이 한 번 더 있었다. 그건 바로 테란국와 유스타나 제국의 전쟁을 언급했을 때였다.

‘혹시 전쟁에 참가한 기사들 중 헬로이즈 공주에게 연인이 있었던 걸까?’

지금 상황에선 그것밖엔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생각에 빠져 있던 키안의 옆구리를 벨라가 슬쩍 건드렸다.

“왜?”

키안이 고갤 들자, 그녀가 턱으로 앞을 가리켰다. 무슨 일이지? 하고 고갤 든 순간, 세이란이 바로 눈앞에 서 있었다.

황제의 독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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