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독사과-83화 (83/139)

제 83 화

베로니카의 푸른 눈동자가 기쁨으로 반짝였다. 진심인 것 같았다.

“먼저 활을 잡고 시위를 당기는 것부터 알려 드리겠습니다.”

키안이 말을 몰아 베로니카의 말 옆에 섰다. 그러곤 어깨에 메고 있던 활을 베로니카에게 건넨 후 잡게 했다. 그러곤 화살을 건넸다.

“이제 활시위를 당기면 됩니다.”

“이렇게 말입니까?”

베로니카가 허공을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놓았다. 휘릭, 소리와 함께 화살이 숲으로 날아갔다.

“잘하셨습니다. 이젠 조금만 더 힘껏 당겼다 놓으십시오. 그리고 목표는 저기 나무입니다.”

키안이 칭찬을 하며, 숲에 있는 커다란 나무 하나를 가리켰다.

베로니카가 고갤 끄덕인 후, 자신감이 붙은 듯 힘껏 활시위를 당겼다가 놓았다.

휘리릭! 이번엔 화살이 좀 더 힘껏 공기를 가르며, 나무 옆에 떨어졌다.

“금방 실력이 느는군요. 이젠 좀 더 정확하게 표적을 맞추는 것에 집중하시면 될 겁니다.”

“어, 저기 나뭇가지 위에 새가 있네요. 제가 맞춰보겠습니다.”

키안의 칭찬에 의욕이 넘치는지 베로니카가 새를 향해 활시위를 당겼다. 하지만 새를 맞추기엔 베로니카의 실력은 역부족이었다.

“될 줄 알았는데…….”

실망한 표정으로 돌아보는 베로니카를 보며, 키안은 피식 하고 미소를 지었다. 카이우스가 사냥에 실패해 눈물을 그렁거렸던 모습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실망하지 마십시오. 점점 더 좋아질 겁니다. 그럼 출발할까요? 오후 사냥부턴, 황태자 전하 일행과 함께 움직이기로 했습니다.”

화살을 당기는 게 힘이 들었던 걸까? 베로니카의 얼굴이 눈에 띄게 붉어져 있었다. 거기다 자신과 눈이 마주치자, 서둘러 고갤 돌리기까지 했다.

‘나 때문에 부끄러워하는 건가? 하지만 왜?’라는 의문이 떠올랐다.

하지만 헬로이즈가 끼어들어 말을 하는 바람에 더는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그럼 전, 황태자 전하 옆에서 사냥을 해도 될까요?”

키안의 시선이 말 위에 앉아 있는 헬로이즈 공주에게 향했다. 풍성한 갈색 머리카락을 실크 천으로 질끈 묶은 모습은 너무도 아름다웠다.

그녀에게선 햇살 냄새가 나는 것 같았다. 상큼하고 기분 좋은 그런 향이.

“호위기사와 함께 움직이십시오. 그리고 조금 떨어져 달리는 게 좋을 겁니다.”

“충고 감사합니다, 레녹스 공작님. 하지만 걱정 마십시오. 저도 제법 말을 탈 줄 안답니다. 이고르, 가자.”

헬로이즈가 자신만만한 모습으로 세이란이 있는 곳으로 말을 몰았다. 어느새 그의 옆에 자릴 잡고 선 헬로이즈를 보자, 키안은 두 사람이 굉장히 잘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

“잘 어울리네요, 두 사람. 마치 황태자 부부 같지 않나요?”

베로니카의 말에 키안이 그녀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을 바라보는 베로니카의 푸른 눈동자가 여러 가지 감정을 담고 흔들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키안은 어쩌면 베로니카 역시 세이란의 옆에서 함께 사냥하고 싶었던 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눈치도 없이. 내가 그걸 깨닫지 못하다니.’

키안은 자신의 무신경함에 어이가 없었다.

“레이디 베로니카, 조금만 더 연습하시면 전하와 함께 사냥하실 수 있을 겁니다.”

베로니카가 살짝 미간을 접고는 키안을 바라보았다.

‘황태자 전하와 사냥을 함께한다고?’

생각만 해도 온몸이 얼어붙는 느낌이었다. 베로니카는 자신을 쏘아보던 냉기 어린 녹색 눈동자를 떠올리자 몸이 부르르 떨렸다.

하지만 황태자인 세이란에 관해선 평소보다 더 열성적으로 말하는 키안을 보자, 황태자 전하와 사냥을 할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다는 말은 하지 않기로 했다. 그가 실망할 것 같아서였다.

“그렇게 하려면, 열심히 노력해야겠네요.”

“제가 돕겠습니다, 레이디 베로니카.”

자신을 돕겠다는 키안의 말에 베로니카의 입가에 미소가 깊어졌다. 정말 오늘은 운이 좋은 모양이었다. 이렇게 가까이에서 레녹스 공작과 함께 있을 수 있다니.

“부탁드리겠습니다.”

그때 황태자인 세이란 일행과 함께 있던 에드윈이 키안 일행 쪽으로 다가왔다.

“무슨 일이십니까, 리치문트 공작님.”

“전하께서 함께 가라고 명하셔서.”

“전하께서요?”

키안이 고갤 들어 헬로이즈와 얘기 중인 세이란을 바라보았다. 자신 쪽으로 시선 한 번 주지 않는 그를 보자, 묘하게 가슴이 답답했다.

‘내 것인데. 어쩌면 그의 옆자리가 내 것일 수도 있었는데…….’

순간 키안은 머릿속에 떠오른 생각에 당황했다.

황태자인 세이란을 보며, 자신의 것이라 칭하다니. 대신관이 말했던 신탁 때문인 듯했다. 그 신탁의 내용 때문에 마음속에 욕심이 한 뼘은 더 커져 있었다.

‘더 위험해졌어. 내가 아니라, 전하가 내 욕심으로 위험해질 거야. 내가 더는 포기하고 싶지 않다는 마음이 커지면 커질수록…….’

신탁의 내용이 공표되고, 또 자신의 비밀까지도 귀족들에게 알려진다면 레녹스 가문과 자신이 위험에 빠지는 건 당연했다.

하지만 자신으로 인해, 세이란 역시 위험한 수렁에 발이 묶일 수도 있었다. 자신이 그를 놓아주지 못하고 그의 주변을 계속해서 맴돌게 된다면.

‘감히 저주받은 내가, 아니, 제국법을 어긴 내가 황태자비라니.’

그 신탁만으로도 고귀하고 특별하게 여겨지는 구스타프 황실엔 오점이었다.

‘절대 그렇게 할 순 없어. 대신관이 새로운 신탁을 받는 동안, 방법을 찾아야 해.’

**

숲속의 밤은 일찍 찾아들었다. 어둠이 깔릴 무렵 황태자 일행이 막사로 돌아오자, 손꼽아 기다리던 귀부인과 레이디들이 서둘러 그들에게 다가왔다.

“레이디 베로니카, 사냥은 어떠셨나요? 잡으셨어요?”

헤링턴 백작가의 영애인 플로라가 붉게 상기된 채, 말에서 내리는 베로니카를 보며 눈을 빛냈다. 뭔가 기쁜 일이 있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쉽지만 한 마리도 잡지 못했답니다. 대신 헬로이즈 공주님께서 꿩을 네 마리나 잡으셨죠. 황태자 전하께선 사나운 멧돼지를 비롯해 노루며, 사슴을 더 많이 잡으셨고요.”

베로니카의 설명에 플로라가 이상하다는 듯 고갤 갸웃했다. 베로니카의 설명으론 그녀가 이렇게 기분 좋을 이유는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요? 저는 레이디 베로니카께서 웃고 계셔서 눈먼 토끼라도 잡으신 줄 알았지 뭡니까?”

플로라의 말에 옆에 서 있던 젬마가 의미심장하게 웃으며 말했다.

“플로라 아가씨, 사실 우리 아가씨껜 그보다 더 좋은 일이 있었답니다. 아가씨, 어서 막사로 가요. 저녁에 있을 만찬에 참석하려면 서두르셔야 합니다. 제가 목욕물을 들이겠습니다.”

그 말과 함께 젬마는 베로니카와 함께 렌스터 공작가의 막사로 향했다.

혼자 남겨진 플로라는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그녀 역시 곧 헤링턴 백작가의 막사로 있는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 시간 후면 황실 사냥대회의 첫 만찬이 시작될 시간이었다. 그녀 역시 최대한 아름답게 치장을 해야 했던 것이다.

10장. 각성.

“이 시간에 무슨 일이지, 레녹스 공작?”

키안이 막사 안으로 들어서자, 목욕하려는지 이제 막 땀에 젖은 옷을 벗던 세이란이 싸늘한 표정으로 돌아보았다. 마치 화가 나 있는 듯 그의 입매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그게, 옷을 갈아입을 곳이 마땅찮아서…….”

“설마 여기서 옷을 갈아입겠다는 뜻이냐? 네 막사를 두고? 왜?”

시간차를 두고 연달아 질문하는 세이란을 보며, 키안은 당황했다. 자신을 쏘아보는 세이란의 모습은 발톱에 가시가 박힌 맹수 같았다.

조금이라도 신경을 거슬렸다간, 달려들어 물 것처럼 예민해 보였다.

‘차라리 위험하더라도, 숲으로 들어가 옷을 갈아입어야 하는 걸까?’

하지만 그러다가 다른 사람의 눈에 띄기라도 한다면 큰일이었다. 키안은 마른침을 삼키며 그에게 상황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그게, 제 막사에서 옷을 갈아입다가 들킬 수도 있고, 그렇다고 제가 벨라의 막사 안으로 들어가는 것 역시 남들 보는 눈이 있어서…….”

머뭇머뭇 상황을 설명하는 키안을 보며, 그제야 세이란은 키안이 말하는 옷이 드레스란 사실을 깨달았다.

그러고 보니, 키안의 손엔 커다란 꾸러미가 들려 있었다. 그 안에 드레스와 가발이 들어 있는 모양이었다.

“목욕은 했고?”

“그게…….”

“못한 모양이군. 여기서 잠시 기다려.”

“아니요, 전하. 저는 괜찮습니다.”

키안이 놀라 막사를 나가려는 세이란의 팔을 붙잡았다.

“걱정 마. 함께하자는 말은 아니니까.”

“그게 아니라…….”

“그럼 뭔데?”

“제 등에 커다란 상처가 있습니다. 보이고 싶지 않습니다. 죄송합니다.”

키안이 면목 없다는 얼굴로 고갤 숙였다. 그러자 세이란이 손을 뻗어 키안의 고갤 들어 올려 자신을 보게 했다.

“지난번에도 말했던 것 같은데? 그건 네 잘못이 아니라고. 그러니 날 믿고, 여기에서 기다리고 있어.”

세이란이 재빨리 막사를 나갔다. 그러곤 막사를 지키고 있던 보초병을 향해 아무도 막사 안으로 들어가게 해선 안 된다고 명령하는 소리가 들렸다.

안도감에 키안은 탁자 앞에 놓인 의자에 앉았다. 하지만 여전히 고민이 됐다. 그가 오기 전에 목욕을 해야 하는 건지, 아니면 기다려야 하는 건지 도무지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다.

그렇게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서늘한 바람이 들어왔다. 키안이 고갤 들자, 두꺼운 모포를 든 세이란이 서 있었다.

“내가 목욕을 하는 것이고, 네가 내 목욕 시중을 드는 걸로 하면 될 거야. 어차피 황궁에서 시종을 데려오지 않았으니, 네가 목욕 시중을 드는 것에 대해 아무도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을 거야.”

그 말과 함께 세이란이 들고 온 커더란 모포에 끈을 묶더니, 막사의 공간을 두 개로 나눴다.

“이럼 됐지? 네가 목욕을 하는 동안, 나는 여기 이 탁자에 앉아 있겠다.”

“그게…….”

“걱정할 것 없다고 했잖아. 널 보진 않을 거야. 네가 네 등에 있는 검상에 대해 예민하다는 건 알고 있으니까. 그리고 내가 여기에 있어야, 내 막사에 아무도 들어올 수 없다. 그래야 네가 릴리스란 비밀 역시 지킬 수 있을 테고.”

“아, 네. 당연히 그렇죠.”

“어쩔 수 없는 상황이잖아. 더 머뭇거렸다간, 만찬 시간에 맞추긴 힘들 거야. 그러니 서둘러.”

세이란이 꾸물거리지 말라는 말에 키안이 꾸러미를 꽉 쥐곤 모포가 둘러진 목욕통 쪽으로 걸어갔다. 하지만 옷을 벗지 못한 채 서 있었다.

“뭐해? 서둘러야 한다니까.”

“아, 네.”

키안이 서둘러 입고 있던 겉옷의 단추를 풀기 시작했다.

사락, 사락. 옷을 벗기 시작하자 천이 스치는 소리가 막사 안을 울렸다. 그 소리가 유난히 크게 들리는 건, 세이란의 착각인 걸까?

그는 억지로 그 야릇하고 가슴 떨리는 소릴 듣지 않기 위해 귀를 막아야 했다.

첨벙첨벙. 세이란은 탁자에 팔을 괴고 앉아 눈앞을 가린 두꺼운 모포를 쏘아보았다. 아니, 그의 시선은 모포를 살짝 비켜 나간 막사의 천막에 비친 그림자에 향해 있다는 표현이 맞을 듯했다.

누가 보면, 미쳤다고 했겠지만 세이란은 천막에 어른거리는 키안의 그림자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특히 지금 물을 끼얹고 있는 키안의 목에서 어깨로 연결된 가녀린 선을 보고 있자니, 입안에 바짝 타들어가는 느낌이었다. 눈에 깊이 들어와 아릿하게 박힌다는 표현이 맞는 듯했다.

‘하아, 제길.’

몸을 씻는 물소리도 나른한 상상을 불러일으켰지만, 키안의 그림자는 잠들어 있는 욕망을 마구마구 건드렸다.

다리 사이의 남성은 몸을 씻기 위한 키안의 움직임을 야릇하고 관능적인 몸짓으로 인식했다. 그래서 이미 단단하게 부풀어 올라 바지를 뚫고 나올 기세였다. 그는 지금 그림자를 보는 것만으로 발정한 몸이 단 맹수처럼 굴고 있었다.

“고문이 따로 없군.”

그가 더운 숨을 삼키며 낮게 으르렁거렸다. 그 목소리가 키안에게까지 들렸는지, 물소리가 잠시 멈췄다.

“네? 저에게 무슨 말이라도 하신 겁니까?”

키안의 목소리엔 긴장한 듯 경계심이 드러나 있었다. 키안의 행동에 픽 하고 웃음이 새어 나왔다. 겁 많은 새끼 늑대 같았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요새 키안이 새끼 늑대를 훈련시키기 위해 황궁에 데려온 게 떠올랐다.

“전하?”

키안이 초조한 듯 다시 그를 불렀다. 그러자 세이란이 천천히 숨을 고른 뒤 평소와 같은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혼잣말이었다. 얼마나 남았지?”

“아, 네. 다 끝나갑니다.”

그의 질문을 재촉으로 알아들었는지 키안이 목욕통에서 재빨리 몸을 일으키는 게 보였다.

텀벙텀벙. 키안이 목욕통에서 나오는지 물소리가 크게 들렸다.

“잠시만 기다리십시오. 곧 끝납니다.”

세이란은 그림자를 통해 키안이 타월에 손을 뻗어 몸을 닦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정말 음흉해. 마치 관음증 환자처럼 그림자를 훔쳐보며, 흥분하다니.’

세이란은 가까스로 그림자에게서 눈을 뗐다. 그러곤 뜨겁게 일어선 하체의 열기를 식히기 위해 천천히 숨을 골랐다.

사락, 사락. 다시 천이 스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이젠 옷을 입는 모양이었다.

“휴우, 이제 곧 끝나는 모양이군.”

세이란이 안도의 한숨을 내쉰 것도 잠시, 키안이 머뭇머뭇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저기, 전하.”

“뭐지?”

“그게…….”

망설이던 키안이 모포 너머로 살짝 고갤 내밀었다. 그러곤 얼굴을 붉히며, 난처한 얼굴로 말했다.

“문제가 하나 생겼습니다.”

황제의 독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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