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82 화
휘릭! 화살이 빠르게 날아가 목표물에 정확히 꽂혔다. 털썩 소리와 함께 제임스 에버콘의 화살을 맞은 노루가 바닥에 쓰러졌다.
“사냥 실력이 굉장하군요, 에버콘 공작.”
데칸 후작의 말에 제임스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떠올랐다.
“사냥은 이제부터입니다. 목숨이 붙어 있는 동물의 눈을 마주한 채, 숨통을 끊어놓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사냥의 묘미거든요.”
말에서 내린 제임스가 옆구리에 차고 있던 단검을 꺼냈다. 그러곤 아직 살아 몸부림치고 있는 노루에게 다가가 단숨에 목을 베었다.
붉은 피가 순식간에 바닥을 적셨다. 제임스가 들고 있는 단검에는 물론, 손에도 노루의 뜨거운 피가 뚝뚝 떨어졌다.
“이번 사냥은 제가 이길 것 같군요. 감이 아주 좋습니다.”
피를 보며 비릿하게 웃는 제임스를 보며, 데칸은 속으로 혀를 찼다.
‘피를 보고 광기가 번뜩이다니. 살생을 즐기는 모양이야.’
데칸 후작은 제임스 에버콘이 생각보다 훨씬 잔혹한 자임을 알게 되었다. 샤론의 아들이었기에 그냥 봐 넘겨왔지만, 사냥하는 동안 미친 사람처럼 말을 달리는 그를 보자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렌스터 공작과는 언제 만나기로 하셨습니까, 에버콘 공작?”
“오늘 밤 자정입니다. 제가 렌스터 공작가의 막사로 찾아가기로 했으니, 데칸 후작께서도 시간에 맞춰 오시면 됩니다. 다른 이의 눈에 띌 걸 대비해 술병을 가져와 오십시오. 황태자의 끄나풀에게 걸리더라도 술을 마신다는 핑계를 댈 수 있을 테니까요.”
“알겠습니다. 아참, 헬로이즈 공주님과 만났던 일은 어떻게 됐습니까?”
데칸 후작은 제임스가 황실 무도회가 끝난 다음 날, 별궁으로 헬로이즈를 찾아갔던 일을 떠올리며 말했다.
“긍정적인 반응이었습니다. 뭐, 황태자비가 되는 걸 돕는다고 했으니, 마다할 이유가 없었을 테죠. 그리고 그 대가로 테란국의 무역 교역권을 요구했습니다.”
“헬로이즈 공주께선 그러겠다고 하던가요?”
데칸 후작이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제임스를 바라보았다.
“별수 있겠습니까? 어차피 유스타나의 황태자비가 되려면, 자신을 비호해 줄 세력이 필요할 테니 말입니다. 분명 거절할 수 없을 겁니다. 그리고 힘없는 테란국의 공주가 유스타나 제국의 황태자비가 된다면, 우리에겐 더할 나위 없는 기회가 될 겁니다. 공주를 우리 손아귀에 쥘 수 있을 테니까요.”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제임스를 보며, 데칸 후작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사실 자신은 제임스 에버콘과는 조금 생각이 달랐다.
테란국의 국왕은 둘째 공주인 헬로이즈를 총애한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런데 특별한 호위도 없이 사신단의 일원으로 유스타나 제국에 보내다니. 아무리 지금 테란국의 정세가 바람 앞의 등불이라고 할지라도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이었다.
‘혹시 공주를 유스타나 제국으로 보낸,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건가?’
하지만 딱히 다른 이유가 생각나지 않았다. 어쩌면 아름다운 공주의 미모를 이용해 황태자의 마음을 사려는 속셈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그렇게만 된다면, 걱정은 없겠군요. 하지만 렌스터 공작께서도 그 생각에 동의하실지는 의문입니다. 소문엔 공작가의 영애를 황태자비로 세우기 위해 성 캐서린 수도원에서 불러들이기까지 했다고 하던데 말입니다.”
사실 제임스가 가장 걱정하는 것 역시 그것이었다. 그 순간 사교 클럽의 비밀 방에서 자신을 무시하던 렌스터 공작이 떠오르자,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자 그나마 봐줄 만하던 제임스의 잘생긴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후작님께서도 알고 계시겠지만, 렌스터 공작은 욕심이 많은 자입니다. 오늘 절 만나려 하는 이유 역시 귀족 회의의 투표권 때문일 겁니다. 자신의 딸을 황태자비로 만들기 위해서 말입니다.”
하지만 어림도 없는 생각이었다. 유스타나에서 가장 혈통 좋은 렌스터 가문의 피를 지닌 베로니카 렌스터는 에버콘 공작가의 안주인이 되어야만 했다. 그렇게 되면, 에버콘 공작가는 유스타나에서 가장 고귀한 혈족이 될 수 있었다.
‘그 욕심 많은 영감탱이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우선은 비위를 맞출 수밖에 없겠어. 딸의 결혼에 대한 결정권은 가문의 수장인 렌스터 공작에게 있으니까.’
제임스는 일단 결혼할 때까지만 렌스터 공작의 비위를 맞출 생각이었다. 그리고 결혼 서약서에 서명만 하면, 그 뒤론 자신을 무시한 그에게 본보기를 보일 생각이었다.
“그럼 곧 귀족 회의가 열리겠군요. 렌스터 공작을 설득할 방법은 있으십니까?”
데칸 후작의 말에 제임스의 입가가 비틀리며, 비열한 미소가 떠올랐다.
“렌스터 공작은 우리 뜻을 따르게 될 겁니다. 제가 그가 절대 거절할 수 없는 약점을 들고 있거든요.”
제임스가 피가 묻어 있는 단검을 혀로 쓰윽 핥아 내렸다. 그 섬뜩할 정도로 묘한 느낌에 데칸 후작의 등줄기에 서늘한 냉기가 흘렀다.
데칸 후작은 생각이 많아졌다. 샤론 에버콘 때문에 제임스 에버콘과 손을 잡긴 했지만, 그로 인해 위험에 빠질 수 있다는 불길한 예감이 그를 불안하게 만들었다.
‘미친 자야. 조심하지 않으면 내 목이 달아날지도 모르겠어.’
**
식사를 끝마친 벨라는 기사단과 조금 떨어진 숲으로 걸어갔다. 사냥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평소 신지 않던 가죽 부츠를 신어서인지, 자꾸만 뒤꿈치가 아렸다.
오후 사냥을 위해 다시 말을 타기 전, 발의 상처를 확인해야 할 것 같았다.
“이 정도면, 안 보이겠지?”
벨라는 나무 그루터기에 자릴 잡고 앉았다. 서둘러 가죽 부츠를 벗은 뒤 발뒤꿈치를 확인했다. 아직 물집이 터지진 않았지만 붉게 변한 살엔 벌써 희미하게 물집이 잡혀 있었다.
“이를 어쩐다? 이러다 물집이 터지기라도 하면, 걷지도 못할 텐데. 혼자서라도 막사로 돌아가야 하는 걸까?”
벨라가 한숨을 내쉬며, 다시 가축 부츠를 신기 위해 발을 들었다. 그때 바스락 소리와 함께 사람의 발소리가 들렸다. 놀라 고갤 들자, 에드윈 리치문트가 앞에 서 있었다.
“무, 무슨 일이시죠?”
벨라가 서둘러 드레스 자락을 끌어내리며 부츠와 발을 감췄다. 그러곤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섰다.
“곧 출발인데, 오시지 않아 모시러 왔습니다.”
말과는 달리 에드윈의 시선이 어느새 벨라의 드레스 자락 아래로 보이는 맨발에 닿아 있었다.
그가 벨라에게 다가왔다. 그러곤 그녀의 팔을 붙잡아 그루터기에 앉혔다.
“제가 봐드리겠습니다.”
“아니요, 그러실 필요 없습니다. 괜찮아질 겁니다.”
벨라가 별일 아니라는 듯 다시 자리에서 일어서려 하자, 에드윈이 눈살을 찌푸리며 그녀를 보았다.
“정말 그렇게 생각하시는 겁니까? 아니면 바람둥이인 제 도움은 받기 싫어 그러시는 겁니까?”
바람둥이란 말에 벨라가 슬쩍 그의 눈치를 살폈다. 사냥대회가 시작되기 전, 그녀가 에드윈에게 입 모양으로 했던 말이었다.
“제대로 알아들었네요.”
“그럼 이제 제 도움을 받으셔도 되겠군요. 바람둥이가 미망인과 어울린다고 해서, 더 떨어질 평판 같은 건 없을 테니까.”
벨라는 그 말이 자신이 키안과 함께 참석했던 로이스톤 자작의 생일 파티에서 그에게 했던 말이란 걸 깨달았다.
정확히 기억이 나진 않지만, 미망인인 자신과 있다간 이상한 소문에 휘말려 그의 평판에 문제가 될 것이라는 분위기의 말이었다.
‘그때 일을 아직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다니.’
거기다 로열페이퍼에 난 기사 역시도 신경을 쓰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니요. 전 바람둥이에게 휘둘린 슬픈 미망인이란 말은 듣고 싶지가 않군요. 그러니 지금까지처럼 서로 필요한 말만 했으면 합니다, 리치문트 공작님. 스펜서 백작님과의…….”
벨라가 잠시 말을 멈췄다. 에드윈이 주머니에서 뭔가를 꺼냈던 것이다. 그리고 그 주머니에 든 것은 다름 아닌 핏물이 배어 있는 생고기였다.
“그게 뭐죠? 세상에 이것, 생고기 아닌가요?”
“맞습니다. 이렇게 천에다 생고기를 넣어 둘둘 만 다음, 부츠 뒤꿈치에 넣으십시오. 아프지 않을 겁니다. 물집도 터지지 않을 테고요.”
“이걸 나보고 부츠 속에 넣으라고요? 생고기를요?”
벨라가 미간까지 찌푸리곤 미심쩍은 얼굴을 했다.
“의심을 품은 이유는 알겠지만, 임시방편으로 이만한 게 없을 겁니다.”
에드윈이 가죽 부츠를 집어 들곤 천에 감아놓았던 생고기를 넣었다.
“신어보십시오. 제가 직접 신겨 드리는 게 싫다면 말입니다.”
에드윈이 평소와 달리 강경한 태도로 말했다.
‘뭐야, 이 박력은? 책벌레 범생이 귀족인 줄 알았더니, 세게 나오기도 하잖아?’
벨라가 얼떨결에 그에게서 신발을 받아 들었다.
“제가 신겠습니다.”
벨라가 서둘러 발을 밀어 넣었다. 그러곤 시험 삼아 몇 발짝 걸어보았다. 믿을 수 없게도 아프지 않았다. 그렇다고 불쾌하지도 않았다.
“세상에, 아프지 않아요.”
벨라가 눈을 빛내며 신기한 듯 에드윈을 향해 돌아서며 외쳤다. 그러다 그와 눈이 마주치자, 멋쩍은 표정으로 시선을 돌렸다.
그가 자신을 보며 웃고 있었다. 벨라는 그 모습에 괜스레 심장이 간질거렸다.
“다행입니다, 아프지 않다니. 그럼 가실까요? 사람들이 기다릴 겁니다.”
에드윈이 앞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벨라는 그의 뒤를 따라가며,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고 보니, 어떻게 알았지? 내가 발이 아픈 것 말이야.’
분명 그는 생고기를 미리 준비해 가지고 자신을 따라왔었다. 그건 자신이 발을 저는 걸 보지 않고선 알 수 없는 일이었다.
“뭐야, 날 지켜보고 있었던 거야?”
벨라가 혼잣말을 했다.
“뭐라고 하셨습니까? 듣지 못했습니다.”
에드윈이 뒤를 돌아보자, 벨라가 재빨리 고갤 가로저었다.
“아니요. 혼잣말이었습니다.”
에드윈이 다시 고갤 돌리곤 앞서 걸어갔다. 벨라는 그의 뒤를 따라가며, 손으로 뺨을 만졌다.
‘왜 이렇게 덥지? 얼굴은 물론, 온몸에 열이 나는 것 같아.’
**
“저희는 따로 움직이겠습니다. 사냥에 방해가 될 겁니다.”
“그럴 것 없다. 오히려 따로 다니면 더 신경이 쓰여 방해될 것 같거든.”
“그게 무슨?”
키안은 그가 왜 이렇게 화를 내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무엇보다 방해가 될 것 같아 따로 다니겠다는데, 그것이 오히려 방해된다며 꼭 붙어 있으라니.
“정말 눈치라곤 없다니까.”
세이란이 씹어뱉듯 말한 다음, 키안 쪽으로 고갤 숙인 후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내가 없는 곳에서 네 다릴 주물럭댈 것 같아 안 된다는 거야. 그러니 어디 갈 생각 말고, 내 옆에 딱 달라붙어 있어.”
순간 얼굴이 붉어졌다. 그제야 세이란이 너럭바위에서 있었던 일을 아직도 신경 쓰고 있음을 깨달았다.
“걱정 마십시오. 그런 일은 다신 없을 겁니다.”
“그렇게 무방비한 얼굴을 해가지고는 턱도 없다. 그러니 내 말 명심해. 난 그게 누구든 네 다릴 주물럭대는 건, 질색이니까.”
세이란은 키안이 말에 타는 걸 도와준 후, 자신의 말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 버렸다. 멀어져 가는 그를 보며, 키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잠시 잊고 있었어, 전하께서 얼마나 소유욕이 강하신지.’
키안은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자 드레이크의 도움을 받아 말에 오르는 베로니카가 보였다.
‘잠깐, 그러고 보니 벨라는?’ 하고 조금 떨어진 곳으로 시선을 돌리자, 에드윈 리치문트가 벨라가 말에 오르는 걸 돕고 있었다.
‘저건 또 어떻게 된 거지? 드레이크가 아니라, 에드윈 리치문트 공작이라니.’
키안은 벨라와 에드윈 사이에 감도는 묘한 분위기에 미간을 찌푸렸다.
“내가 신경 쓸 일은 아니지. 벨라가 잘할 테니까.”
“저기 레녹스 공작님?”
그때 레이디 베로니카가 말을 몰고 키안에게 다가왔다. 순간 키안은 세이란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그는 드레이크과 숲의 지도를 보며, 사냥 계획을 짜고 있었다.
“무슨 일이십니까, 레이디 베로니카.”
“제가 사냥을 하고 싶은데, 활을 다루는 게 영 서툴러서요. 혹시 공작님께서 가르쳐 주실 수 있을까 해서요.”
수줍게 웃는 베로니카를 보며, 키안은 잠시 망설였다. 자신에게 부탁하는 게 어려웠을 텐데도 용기를 내준 그녀를 생각하자, 가르쳐 주고 싶었다.
하지만 전하께서…….
“혹시 제가 너무 형편없는 실력이라, 가르쳐 줄 수 없는 건가요?”
잔뜩 실망한 표정으로 고갤 숙이는 베로니카를 보자, 키안은 결심을 굳혔다. 사냥이 끝나고 막사로 돌아간 후, 전하껜 사정을 잘 설명하면 될 것 같았다. 싫은 소리도 그때 들으면 되고.
“아닙니다, 레이디 베로니카. 제가 가르쳐 드리겠습니다.”
“정말 가르쳐 주실 건가요?”
“검을 다루는 것보단 못하지만 레이디 베로니카를 가르치는 덴 모자람이 없을 겁니다.”
베로니카의 푸른 눈동자가 반짝였다.
“부족하시다니, 말도 안 됩니다.” 사실 베로니카는 정치며, 전쟁엔 관심조차 없었다. 하지만 레녹스 공작이 얼마나 대단한 실력이 있는 기사인지는 소문을 통해 익히 잘 알고 있었다.
“저야말로 영광입니다, 공작님. 열심히 배우겠습니다.”
황제의 독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