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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독사과-81화 (81/139)

제 81 화

키안의 귓불은 물론, 목덜미까지 붉게 달아올랐다. 다행이었다. 그나마 얼굴이 아니라서.

키안이 고갤 들었다.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는 그를 보자 눈살이 찌푸려졌다.

‘전하께서 언제 이렇게 뻔뻔해지셨지?’

아니, 생각해 보면, 전하께선 어렸을 때부터 민망한 상황에서도 얼굴을 붉힌 적은 없었던 것 같다. 한 마디로 어렸을 때부터 얼굴이 두껍……. 아니, 강심장이었다.

키안이 한숨을 내쉬며 고갤 돌리자, 기사단은 물론이고 말에서 내린 레이디들 역시 헛기침을 하며 재빨리 시선을 피하는 게 보였다.

특히 베로니카는 시선을 돌리기 전 세이란을 마땅찮은 눈빛으로 쏘아보기까지 했다.

‘어떡하지? 레이디 베로니카께서 오해하신 모양이야.’

키안이 어색한 표정으로 세이란에게서 한발 물러섰다.

“어, 우선은 감사합니다. 전쟁터에서 돌아온 후 훈련을 쉬어서인지, 쥐가 자주 나서……. 이제 괜찮으니 놓아주셔도 됩니다.”

키안은 베로니카의 시선을 의식하며 말했다. 하지만 너무 궁색하고 어색한 변명이었다. 거기다 당황해 횡설수설이라니.

“쥐가 난 게 확실한 건가, 레녹스 공작?”

세이란이 미심쩍은 표정으로 자신의 다리를 내려다보는 게 느껴졌다.

“네에?”

“막사에서도 내내 다릴 저는 것 같아서 하는 말이다. 만약 쥐가 난 게 맞는다면, 근육을 풀어야 할 것 같아서. 여기 앉아보던가. 내가 뭉친 근육을 풀어줄 테니까.”

세이란이 당장에라도 자신의 다릴 주무를 기세로 손을 뻗어왔다.

‘자, 잠깐 여기서 지금 사람들이 다 보는 앞에서 내 다리를 주물러 주겠다고?’

키안이 재빨리 그의 손을 밀어내며, 서둘러 부정했다.

“아니요, 아닙니다. 쥐가 난 건 아닌 것 같습니다.”

“그래? 그럼 다리가 후들거리는 이유가 뭔지 말해보겠나, 레녹스 공작? 자꾸만 개구리처럼 어정쩡하게 걷는 이유 말이다. 그리고 비틀거리는 이유도 함께.”

키안은 꿀꺽하고 마른침을 삼켰다. 그가 자신의 허벅지 안쪽 근육이 후들거리는 이유를 알고 물어본 건 절대 아니었다. 알았다면, 자신이 오두막에서 만나는 그 여인이란 사실을 그가 알았을 테니까.

하지만 순간, 짜증이 났다. 사실 따지고 보면, 제발 그만해 달라는 자신의 요구를 무시하고 밤새 그가 욕심을 채웠기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여기서, 그만하라고 했는데 달려든 사람이 누구냐고, 따져 물을 수도 없고.’

지금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최대한 아무렇지 않은 척하는 것뿐이었다.

“그런 적 없습니다. 잘못 보신 겁니다.”

“그래? 그럼 걸어봐.”

순간 키안이 눈을 동그랗게 뜨곤 그를 올려다보았다.

“지금, 여기서 말입니까?”

“네가 창피하다면, 숲 뒤로 몰래 가줄 수도 있다. 그러면, 여기에 있는 사람들이 우릴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겠지만 말이야.”

키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대체 그가 무슨 꿍꿍이인지 도무지 알 수 없기 때문이었다.

“저는…….”

당황한 키안이 정색하며 뭔가를 말하려는 순간, 그가 픽 하고 웃었다.

“장난이었다, 레녹스 공작. 네가 자꾸 고집을 부리는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그가 사랑스러워 미치겠다는 듯 손을 뻗어 자신의 은빛 머리카락을 흩뜨렸다.

“놀랐습니다.”

“그런 것 같더군. 얼굴이 가관이었거든.”

세이란이 키안의 머리카락에서 손을 떼곤, 언제 그랬냐는 듯 냇가로 걸어가 버렸다. 그러곤 서둘러 드레이크에게 명령했다.

“모닥불을 피워야겠다. 조금 전 사냥해서 잡은 것들을 손질해 굽도록 해. 여기서 간단히 점심을 먹겠다. 사냥은 오후부터 시작할 것이다.”

“곧 준비하겠습니다.”

드레이크를 비롯해 기사들이 점심 준비를 위해 일사불란하게 움직였다. 전쟁을 치르는 동안 수도 없이 해온 일이라 순식간에 불을 피우고 맛있는 음식 냄새를 내기 시작했다.

“레녹스 공작님, 이쪽으로 오십시오. 저희 아가씨께서 간단한 다과를 준비해 오셨으니, 함께 드세요.”

어느새 키안 앞에는 렌스터 공작가의 하녀인 젬마가 서 있었다. 젬마가 냇가 옆, 너럭바위를 가리켰다. 고갤 돌리자, 그곳엔 세 명의 레이디가 모포를 깔고 앉아 있었다. 사냥터에서 피크닉이라도 할 태세였다.

“그래.”

키안이 젬마와 함께 너럭바위로 다가가자, 베로니카가 옆으로 자릴 옮겨 앉더니 옆자리를 권했다.

“앉으십시오, 레녹스 공작님.”

“감사합니다, 레이디 베로니카.”

자릴 잡고 앉은 키안에게 벨라가 시원한 음료를 건넸다.

“여기 음료입니다.”

“감사합니다, 아키텐 공작부인.”

음료를 받아 든 키안이 목을 축였다.

“그런데 레녹스 공작님, 조금 전 황태자 전하와는 무슨 얘길 하셨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굉장히 사이가 좋아 보여서요.”

벨라가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참으며, 은근슬쩍 질문했다.

“제가 다리에 쥐가 나, 도와주셨습니다. 말에서 내리다 떨어지기라도 하면, 기사단의 단장으로서 체면이 말이 아니라고 말씀하시면서요.”

키안은 대충 둘러댔다. 그제야 묘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던 헬로이즈와 베로니카가 납득을 한 듯 고갤 끄덕였다.

“사실 놀라긴 했습니다. 전하께서 레녹스 공작님과 함께 계실 때는 딴 사람 같은 얼굴을 하셔서 말입니다.”

헬로이즈의 지적에 키안이 어색하게 말했다.

“오랜 시간 함께하다 보니, 종종 장난도 치시고 그렇습니다. 흔치 않지만요.”

장난을 친다는 말도 유스타나 황태자와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말이었다. 아니, 장난뿐만 아니라, 조금 전 레녹스 공작을 향해 지었던 미소 역시도 전혀 상상할 수 없던 황태자의 모습이었다. 헬로이즈는 음료 잔을 마시는 척하며, 냇가에 서 있는 세이란을 살폈다.

‘이 아름답고 매혹적인 젊은 공작에게 특별한 감정을 느끼고 있는 건 분명해.’

하지만 그것이 연정인지, 아니면 친우에 대한 감정인지는 확실치 않았다. 그때 베로니카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끼어들었다.

“그러셨군요. 그럼 이제 다리는 괜찮으신 건가요?”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베로니카가 키안의 다리 쪽으로 손을 뻗어왔다. 그녀의 손이 갑자기 다리에 닿자, 당황한 키안이 재빨리 대답했다.

“아, 이제 괜찮습니다.”

“어머, 죄송합니다. 걱정이 돼 저도 모르게.”

베로니카 역시 자신의 행동을 깨닫고 놀라, 손을 뗐다. 얼굴이 붉게 물들어 있었다.

“괜찮습니다, 레이디 베로니카.”

키안의 말에 베로니카가 수줍은 듯 고갤 들었다.

“그런데 조금 의외입니다.”

의외라고? 대체 뭐가 또 의외라는 거지? 키안이 무슨 의미냐는 듯 베로니카를 보자, 그녀가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다리가 돌덩이처럼 탄탄한 것 같아서요. 이게 다 근육인가요?”

그 순간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베로니카 역시 자신이 주책없이 떠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은 듯 난처한 얼굴로 고갤 숙이는 게 보였다.

“칭찬 감사합니다, 레이디 베로니카.”

키안이 베로니카가 무안하지 않게 웃으며 말했다. 그 순간 벨라가 특유의 장난기가 발동한 듯 키안의 다리에 손을 뻗어왔다.

“저도 한 번 만져 봐 될까요, 레녹스 공작님? 정말 근육인지 확인해 보고 싶어서요.”

그러곤 허락하기도 전에 키안의 다리를 밀가루 반죽 주무르듯 만져대기 시작했다.

“어, 그게…….”

“저도 한 번 만져 봐도 되겠습니까? 갑자기 호기심이 생기네요. 레녹스 공작님처럼 아름답게 생기신 분껜 근육 같은 건 없을 것처럼 보이거든요.”

헬로이즈까지 합세해 키안의 다릴 주무르자, 옆에서 눈치를 보던 베로니카와 젬마 역시도 손끝으로 꾹꾹 눌러보기 시작했다.

‘대체 이게 무슨 상황인 건지…….’

키안은 황당한 표정으로 자신의 다리를 주물럭거리는 네 명의 여인을 바라보았다. 정말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키안은 그들의 손을 밀어내지도 못한 채 앉아 있을 수밖에 없었다.

만약 사내들이 그랬다면, 싸늘한 표정으로 당장 꺼지라며 불호령을 내렸겠지만, 자신의 다릴 만지는 이는 품위 있는 레이디들이었다. 그녀들에게 상욕을 하며, 목에 검을 들이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저기 이제 그만하시는 게…….”

“키안 레녹스 공작!”

그때 세이란의 차갑고 날카로운 목소리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키안이 재빨리 고갤 돌리자, 그가 불쾌한 듯 미간을 찌푸린 채 자신을 쏘아보고 서 있었다.

“어…….”

당황한 키안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자신의 다리를 주무르던 레이디들의 손 역시 떨어졌다.

“네, 전하. 무슨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식사 준비가 다 끝났다. 가져가도록 해. 그리고 너는 레이디들과 노닥거리고 싶은 모양이지만, 우린 사냥을 해야 한다. 그러니 당장 이쪽으로 와.”

평소보다 더 싸늘한 목소리로 타박하는 세이란의 행동이 조금 이상하게 여겨졌다. 마치 화가 난 듯 보였다.

‘혹시 내가 레이디 베로니카와 너무 친해 보여, 화가 나신 건가? 당장 오라고 명령할 정도로?’

그런 생각이 들자, 키안이 베로니카에게서 떨어졌다.

“죄송합니다, 전하. 곧 가겠습니다.”

키안이 레이디들을 향해 양해를 구했다.

“제가 음식을 가져오겠습니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키안이 재빨리 기사들이 준비한 점심을 가지러 자릴 떴다. 그리고 다시 한 번 결심했다. 세이란의 신경을 자극하지 않게, 레이디 베로니카를 조금 멀리해야겠다고.

하지만 바위 위에 앉아 있던 네 명의 여인은 키안이 아니라, 황태자 세이란을 묘한 눈길로 바라보고 있었다.

조금 전 키안 레녹스 공작을 부르던 세이란의 눈동자와 날카로운 목소리에 질투의 감정이 담겨 있었기 때문이다.

네 여인의 머릿속엔 똑같은 의문이 떠올랐다.

‘여기 있는 사람들 중, 전하께서 질투한 사람은 대체 누구인 거지?’

황제의 독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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