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독사과-80화 (80/139)

제 80 화

“30분 후에 도착하시는 것 아니었습니까?”

“뭐야, 너? 다리가 아픈 것이냐?”

세이란이 눈을 가늘게 뜨고 자신의 다리를 쏘아보는 게 느껴졌다. 그의 시선에 당황한 키안이 재빨리 부정했다.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세이란은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을 했다. 하지만 더는 추궁하지 않을 생각인지, 막사 안으로 들어와 테이블 위에 사냥 도구를 내려놓았다.

“필요하시면 부르십시오.”

키안이 서둘러 막사를 나가기 위해 몸을 돌리자, 세이란이 무심한 목소리로 말했다.

“힘들면 여기서 쉬어. 오늘 사냥은 드레이크에게 맡기면 되니까.”

“네?”

“네가 나설 필욘 없다는 뜻이다. 아키텐 공작부인은 도착했나?”

“아니요, 아직입니다.”

“도착하면 함께 있도록 해. 기사단엔 내가 알아서 말할 테니까.”

무심한 듯 말했지만, 세이란이 자신을 걱정하고 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오늘 사냥에만 참석하겠습니다. 제가 빠진다면, 귀족들이 이상하게 생각할 겁니다. 어차피 밤엔 키안 레녹스로 있지도 못합니다.”

키안의 말에 세이란이 고갤 들었다. 물끄러미 키안을 응시하던 그가 마지못해 고갤 끄덕였다.

“마음대로 해. 하지만 절대, 무리는 하지 마.”

“네, 전하.”

**

부우우웅, 부우우웅!

사냥 대회를 알리는 뿔피리 소리가 숲을 울렸다. 황실 사냥 대회에 참석한 귀족들은 들뜬 표정으로 어서 빨리 대회가 시작되길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세이란이 귀족들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황금빛 금발이 햇살 아래 반짝이고 있었다. 조각처럼 완벽한 외모와는 달리, 말 위에 서 있는 그는 이제 막 사냥 준비를 마친 잔혹한 맹수처럼 보였다.

그 모습에 귀족들의 표정이 긴장으로 굳어졌다. 황궁의 무도회에서 보았을 때도 그랬지만, 사냥터에서 본 그는 눈이 마주치는 것조차 꺼려질 만큼 위협적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올해는 황태자 전하께서 참가하셨으니, 우승은 당연히 황태자 전하시겠네요.”

“그럼 로열레이디는 황태자 전하께서 뽑게 되겠군요.”

“누가 될까요?”

“글쎄요. 올해는 워낙 후보가 많아서. 그런데 그 레이디가 보이지 않는군요.”

한 귀부인의 말에 레이디들의 시선이 일제히 벨라 아키텐에게 향했다.

“함께 오지 않았나 봐요. 아니면, 승마복을 준비할 돈이 없었거나요.”

귀부인의 말에 주위에 있던 레이디들의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분명 전하께서 초대장을 보내신다고 하셨는데, 혹시 그새 마음이 바뀌어 보내지 않으신 건지도 모르죠.”

“그럴 수도 있겠군요. 아무리 얼굴이 반반해도, 이름도 들어보지 못한 한미한 가문이잖아요. 그런 집안의 영애를 전하께서 마음에 두실 리 없죠. 프로필리아 자작가라니. 저는 그런 가문이 있는 줄도 몰랐다니까요.”

질투가 담긴 악의적인 목소리에 지금까지 귀부인들의 뒷담화를 모른 척 눈감아주고 있던 벨라가 귀부인들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쏘아보았다.

그러자 흠흠! 헛기침하며, 재빨리 시선을 피하는 게 보였다.

‘질투에 완전 눈이 멀었군.’

벨라는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귀부인들을 쏘아본 후, 황태자인 세이란의 곁에 서 있는 키안 쪽으로 고갤 돌렸다. 남자답고 카리스마가 느껴지는 세이란 곁에 서 있어서인지 키안은 그 어느 때보다 아름다웠다. 황실 기사단의 제복을 입은 키안에겐 릴리스일 때와는 달리, 사람을 끌어당기는 위엄과 카리스마가 느껴졌다.

‘키안 레녹스 공작이 릴리스 프로필리아라는 사실을 안다면, 다들 까무러치겠군.’

그렇게 되면, 분명 릴리스의 가문을 두고 입방아를 찧은 귀부인들은 혀를 깨물고 싶어질 터였다.

그때 키안 옆에 서 있던 에드윈 리치문트가 벨라 쪽으로 고갤 돌렸다. 순간 벨라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파티장에서 레이디들과 춤을 추던 그의 모습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 순간 충동적이게도 그를 향해 입술을 움직였다.

‘바! 람! 둥! 이!’

벨라가 부채로 에드윈만 볼 수 있게 얼굴을 가린 후, 입모양으로만 말했다. 처음엔 그 말을 알아듣지 못한 에드윈이 눈을 가늘게 뜨는 게 보였다. 하지만 벨라의 입모양이 뭘 의미하는지 깨달았는지, 순식간에 얼굴이 붉어지는 게 보였다.

‘뭐야? 꽉 막힌 책벌레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귀여운 면이 있었잖아? 얼굴을 붉히다니.’

벨라는 고갤 돌리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이상하게 심장 부근이 자꾸만 간질거렸다.

그때 말발굽 소리가 들리더니, 사냥터로 테란국의 공주인 헬로이즈와 호위기사인 이고르가 말을 타고 들어왔다. 이내 말에서 내린 그녀는 곧장 세이란에게 다가가 예를 갖췄다.

“늦지 않아 다행입니다, 전하. 혹시 저도 사냥 대회에 참가해도 되겠습니까?”

헬로이즈의 물음에 귀족들이 의아한 얼굴을 했다. 사실 황실 사냥 대회에 참가하는 대부분은 남자였다. 그런데 여인의 몸으로 사냥 대회에 참가하겠다니. 귀족들은 놀란 눈빛으로 헬로이즈 공주를 바라보았다.

“사냥 대회에 레이디가 참가해서는 안 된다는 규칙은 없다. 하지만 유스타나 제국의 레이디들은 사냥에 참여하는 대신, 막사에 남아 차를 마시지. 그러곤 자신을 로열레이디로 뽑아줄 기사들을 기다린다.”

한마디로 쓸데없는 데다 힘 빼지 말고, 귀부인들과 함께 차나 마시란 뜻이었다.

“전 유스타나 제국의 레이디가 아닙니다. 직접 제 손으로 사냥을 하고 싶습니다.”

“저기, 전하. 저도 사냥 대회에 참가하고 싶습니다.”

그때까지 얌전히 앉아 있던 베로니카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순간 귀족들은 물론, 귀부인들의 시선 역시 베로니카 렌스터에게 향했다.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그럼 저도 참석하고 싶습니다, 전하.”

벨라 역시 앞으로 나서며 황태자인 세이란에게 허락을 구했다. 사실 귀족들의 사냥이 끝날 때까지 귀부인들과 노닥거리느니, 차라리 사냥하는 편이 마음이 편할 것 같아서였다.

“참 이상한 일이군. 올해엔 사냥 대회에 참가하겠다는 레이디들이 많을 걸 보면. 좋다. 규칙에 어긋나는 건 아니니까. 대신 자신의 몸은 스스로 지키도록 해.”

허락이 떨어지자, 제임스 에버콘이 헬로이즈 공주에게 다가왔다.

“공주님, 그럼 저희 팀과 함께 사냥하시는 게 어떻겠습니까?”

“혹시 팀으로 나뉜 시합인 건가요?”

“황실 사냥 대회는 두 개로 나뉘어 시합하는 게 규칙입니다.”

제임스의 설명에 헬로이즈가 실망했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래요? 시시하네요. 저는 각자 알아서 가장 많이 사냥을 하는 사람이 우승하는 것이라 생각했거든요. 전하, 혹시 저는 타국인이니 개인 자격으로 참가해도 되겠습니까?”

거만하지만 헬로이즈의 당당한 요구에 귀족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하지만 세이란은 그녀의 제안이 마음에 들었다.

“흥미롭군. 개인 자격으로 참가하겠다니.”

세이란은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었다. 잠시 후 고갤 든 그가 귀족들을 향해 선언하듯 말했다.

“황실 사냥 대회의 규칙을 바꾼다. 이번 대회는 지금까지와는 달리 팀이 아닌 개인으로 참가한다. 가장 많은 사냥감을 잡은 자에겐 큰 포상이 주어질 것이다. 그러니 마음껏 사냥을 즐기도록.”

세이란의 말이 떨어지자, 귀족들은 바뀐 규칙에 얼떨떨한 표정이었다.

“사냥이 끝나는 시각은 내일 저녁 6시입니다. 그때까지 가장 많은 사냥감을 잡은 분이 우승자로 결정될 겁니다. 우승자에게 주어지는 포상은 그때 알려 드리겠습니다.”

키안이 사냥 대회에 참석한 귀족들을 향해 규칙을 설명했다. 그러곤 뿔피리를 들고 있던 자에게 고갤 끄덕였다.

부우우웅!

뿔피리 소리와 함께 드디어 사냥 대회가 시작되었다. 대회에 참석한 귀족들이 사냥감을 잡기 위해 서둘러 말을 달려, 숲으로 가는 게 보였다.

“레녹스 공작, 여기 있는 레이디들은 그대의 책임이다. 안전하게 모시도록 해.”

“네?”

세이란의 명령에 키안이 놀란 얼굴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뭘 놀라는지 모르겠군. 그대들의 생각은 어떻지?”

세이란이 벨라를 비롯해 베로니카와 헬로이즈를 향해 물었다.

“그렇게만 해주신다면, 저희는 더 바랄 게 없을 겁니다.”

세이란이 헬로이즈의 대답에 그것 보란 듯 키안을 보았다. 그러곤 황실 기사단의 기사들을 향해 말했다.

“리치문트 공작, 드레이크. 우리도 출발해 볼까? 늦게 출발하면, 우리가 사냥할 사냥감이 줄어들 테니 말이야.”

세이란은 리치문트 공작과 황실 기사단을 데리고 숲을 향해 출발했다. 혼자 남겨진 키안이 레이디들을 향해 돌아섰다.

그러자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세 명의 레이디의 시선과 부딪혔다. 무척이나 부담스러웠다.

키안은 천천히 숨을 고른 후,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절 따라오십시오. 안내하겠습니다.”

**

말을 타고 숲을 달린 지, 한 시간이 지났다. 그동안 베로니카는 키안의 뒷모습만 넋을 잃고 바라보고 있었다. 이를 보다 못한 하녀인 젬마가 한숨을 내쉬며, 베로니카만 들을 수 있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아가씨, 정신 차리세요. 지금이 절호의 기회입니다. 제가 아키텐 공작부인을 맡을 테니, 아가씨께선 공작님 곁에서 떨어지지 마십시오.”

젬마의 말에 베로니카가 정신이 확 든 얼굴로 고갤 끄덕였다. 말을 타고 앞서가는 키안의 뒷모습만 봐도,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정말 주책없이 뛴다는 말이 맞는 듯했다.

그때 키안이 뒤를 돌아보았다. 그러곤 손으로 숲의 한 지점을 가리켰다. 자세히 보니, 토끼였다. 토끼 사냥을 하려는 모양이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레녹스 공작님. 이고르, 활과 화살을 줘.”

헬로이즈가 재빨리 이고르에게 활과 화살을 받아 든 다음, 수풀에 웅크리고 있는 토끼를 향해 시위를 당겼다.

휘릭! 공기를 가르는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화살이 날아가 땅에 박혔다. 그 소리에 토끼가 재빨리 도망치는 게 보였다.

“이런, 놓쳤네요.”

“솜씨가 굉장히 좋으십니다, 헬로이즈 공주님. 다음번엔 조금 더 위쪽을 보고 조준하십시오. 그러면 성공하실 겁니다.”

“충고 감사합니다, 레녹스 공작님.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키안이 고갤 끄덕였다. 두 사람의 대화를 듣고 있던 베로니카가 입술을 깨물었다. 키안이 타국의 공주인 헬로이즈를 칭찬하며 웃는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아서였다.

‘나도 뭐라도 잡아야겠어. 그래야 자연스럽게 공작님께 도움을 청할 수 있을 테니까.’

베로니카가 키안에게 자신도 토끼 사냥을 하고 싶다고 말하려는 순간, 불쑥 벨라 아키텐이 끼어들었다.

“저기 레녹스 공작님, 말을 너무 탔더니 다리가 아파서 그러는데, 잠시 쉬면 안 될까요?”

벨라가 몹시 지친 듯 손부채질까지 하며 약한 모습을 보이자, 키안이 숲을 둘러보았다.

“조금 더 가면 개울이 있습니다. 그곳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신 후 다시 사냥을 하겠습니다.”

키안 일행은 휴식을 취하기 위해 숲을 달려 개울로 향했다.

하지만 그곳엔 먼저 와 휴식을 취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었다.

“누가 있습니다.”

헬로이즈의 호위기사인 이고르의 말에 키안이 개울 쪽을 보았다. 깃발과 제복으로 보건에 황실 기사단이었다. 그렇다는 건 세이란 역시도 이곳에 있다는 뜻이었다.

“걱정할 것 없습니다. 황실 기사단입니다.”

“레녹스 공작님이십니다, 전하.”

그때 드레이크 역시 키안을 알아보곤, 소리쳤다. 그러자 냇물에 손을 씻던 세이란이 자리에서 일어서 자신이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전하, 이곳에 계셨군요.”

키안이 재빨리 말에서 내리기 위해 몸을 움직이자, 그가 손을 뻗어 그를 제지했다.

“기다려. 내가 도와줄 테니까.”

“네? 아닙니다. 전, 괜찮으니 다른 분을…….”

당황한 키안이 뒤따라온 레이디들을 돌아보았다. 자신은 괜찮으니 레이디 베로니카를 도우라는 듯 눈짓을 보냈다. 그러자 이상하게도 세이란이 눈살을 찌푸리곤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네가 걱정할 것 없다. 도와줄 기사들이 아주 많으니까.”

세이란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주변에 있던 기사들이 레이디들을 돕기 위해 걸음을 옮기는 게 보였다.

“넌, 내 손이나 잡아.”

“아니요, 전…….”

“다리 아프잖아.”

“도움을 받을 정도는 아닙니다.”

“당장 내 손을 잡아. 사람들 앞에서 창피한 꼴을 보이고 싶지 않거든.”

그의 눈빛이 차갑게 빛났다. 더 거절하면,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그가 자신을 두 팔에 안아 내릴 기세였다.

어쩔 수 없이 키안이 자신에게 내민 세이란의 손을 잡았다. 최대한 침착한 표정을 지으려 노력했다. 지금 냇가에 모여 있는 기사단은 물론이고, 레이디들의 시선이 두 사람에게 쏠려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침착해야 해. 평소처럼 평정심을…….’

하지만 그의 손을 잡는 순간, 손끝이 뜨거웠다. 귓불이 붉어질 만큼.

“감사합…….”

휘청! 그의 손을 붙잡고 말에서 내리던 키안의 몸이 균형을 잃고 흔들렸다.

“이러면서 고집은?”

세이란이 당연하다는 듯 키안을 품에 안았다. 놀란 키안이 서둘러 그를 밀어냈다. 그러곤 눈을 위로 살짝 치켜뜨곤 억울하다는 듯 말했다.

“전하께서 일부러 잡아당기신 겁니다.”

그 순간 싸늘하던 세이란의 얼굴에 장난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곤 웃음기가 담긴 나른한 목소리로 말했다.

“들켰군. 눈치가 둔치라 전혀 모를 줄 알았는데.”

황제의 독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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