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7 화
신관을 따라간 곳은 대신전의 지하에 위치한 기도실이었다. 사방이 벽으로 막혀 있는 그곳은 등을 밝히지 않았는데도 밝았다. 벽 자체가 야광석인 모양이었다.
그때 벽의 한쪽이 움직이는가 싶더니, 도미니크 대신관이 모습을 드러냈다. 기도실로 연결된 비밀통로인 모양이었다.
“레녹스 공작님, 저를 따라오십시오.”
키안은 도미니크 대신관을 따라 비밀통로 안으로 들어갔다. 좁고 기다란 통로를 따라 걷는 동안 키안은 초조함을 감추기 위해 주먹을 꽉 쥐었다.
한참을 그렇게 기다란 통로를 따라 걸었을 때, 도미니크 대신관이 걸음을 멈췄다.
그러곤 손을 뻗어 벽을 밀자, 덜컹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이쪽입니다, 공작님.”
키안이 그가 가리키는 방 안으로 천천히 발을 들여놓았다. 그러곤 재빨리 안을 확인했다.
‘여기가 어디지? 건물 밖으로 나온 건가?’
조금 전 기도실과는 달리, 두 사람이 도착한 곳은 숲이었다. 울창한 나무가 주변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졸졸졸 물이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 것으로 보아 냇가도 있는 모양이었다.
하지만 숲이라고 하기엔 공기의 흐름이 거의 없었다. 마치 온실에 있는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였다.
“신기하실 겁니다. 지하의 통로를 따라 나왔더니, 숲이 있어서. 이곳은 대신전의 지하에 존재하는 비밀의 숲입니다.”
“이곳이 지하라니 놀랍군요. 사실 전 온실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키안의 말에 도미니크가 물소리가 나는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와 함께 숲 안으로 들어가자, 커다란 연못에서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고 있었다.
“온천입니까?”
“대신전 아래에 온천이 있습니다. 그리고 그 열기로 이 숲은 1년 내내 따뜻합니다.”
도미니크의 설명에 키안이 고갤 끄덕였다.
“신기하군요. 온천의 온기로 유지되는 숲이라니 말입니다.”
“사실 이 숲엔 더 많은 비밀이 숨겨져 있습니다. 제가 알기론 천 년 전 시작된 제국의 역사와 함께 만들어졌거든요.”
“천 년이나 된 겁니까? 이 숲이 말입니다.”
키안이 신기하다는 듯 숲을 둘러보았다. 그사이 도미니크는 은백색의 눈동자로 키안을 천천히 살폈다. 기사단의 제복이 아니었다면, 분명 여인이라고 생각할 정도로 아름다운 모습이었다. 하지만 어딘지 모르게 슬픔이 느껴졌다.
욱신! 갑작스러운 심장의 통증에 도미니크가 손을 들어 심장을 꾹 눌렀다. 그러자 서서히 고통이 사라졌다. 다시 평상심을 되찾은 도미니크 대신관이 키안을 향해 말을 걸었다.
“레녹스 공작님, 제가 공작님을 이곳으로 부른 이유가 궁금하실 겁니다.”
주위를 살피던 키안이 침착한 태도로 도미니크 대신관을 향해 돌아섰다. 그의 말처럼 궁금했다. 하지만 섣불리 입을 열지 못한 이유는 그의 은백색 눈동자에 서린 묘한 긴장감 때문이었다.
‘거기다, 대신전 지하에 있는 비밀의 숲으로 날 데려오다니.’
키안은 조금 전 도미니크 대신관의 눈을 피해 숲을 살피던 중, 온천을 둘러싼 괴석 옆에 낯익은 문양을 발견했던 것이다. 이끼에 덮여 있었지만, 그건 분명 유스타나의 별의 상징이었다.
“뜻밖이라 궁금하긴 했습니다.”
“그러셨을 겁니다. 저 역시 레녹스 공작님을 개인적으로 뵐 날이 올 것이라곤 생각도 하지 못했습니다.”
차분한 목소리와는 달리 도미니크 대신관 역시 당혹스러운 모양이었다.
“공작님께서도 제가 신탁을 받기 위해 기도 중이란 건 이미 알고 계실 겁니다.”
“황태자 전하의 국혼과 관련된 것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도미니크는 잠시 말을 멈췄다.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할지 망설여졌기 때문이었다.
“사실 제가 신탁을 받았습니다.”
“그렇습니까? 그런데 왜 전하를 부르시지 않고 저를……?”
당연한 의문이었다. 자신 역시 그랬으니까.
“그게 신탁에 이상한 점이 있어서입니다.”
이상한 점이라고? 키안이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대신관님, 혹시 신탁의 내용을 황실의 주인이신 황제 폐하와 황태자 전하 외의 사람에게 누설하는 것은 제국법을 어기는 금기란 사실을 알고 계십니까?”
당연히 도미니크 대신관이 모를 리 없었다. 하지만 키안이 한 번 더 물어 확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알고 있습니다.”
차분하지만, 단호한 목소리였다. 제국법을 어길 만큼, 이 사안이 중대하다는 뜻이기도 했다.
‘하지만 왜 나인 거지? 황태자 전하의 국혼에 대한 신탁인데, 왜 내가……. 설마? 전하와 내가 벌이는 연극을 알게 된 건가?’
키안은 마른침을 삼키며, 도미니크 대신관을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의 입을 통해 들은 내용은 전혀 뜻밖의 것이었다.
“신탁에서 정한 황태자비는 은빛 늑대였습니다.”
은빛 늑대라고? 신탁은 대부분이 상징성을 갖고 있다는 걸 키안 역시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 상징성을 풀어내는 것이 바로, 대신관의 역량이기도 했다.
그런데 신탁에 은빛 늑대가 등장했다는 건, 은빛 늑대를 가문의 상징으로 삼고 있는 레녹스 공작가의 영애가 바로 황태자비라는 의미였다.
“그게 무슨……?”
너무 놀라 키안은 입을 다물었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키안은 머릿속이 멍해지는 느낌이었다. 도무지 믿기지 않았다.
‘잘못 들은 거야. 다시 확인해야 해.’
키안이 고갤 들어, 여전히 믿기지 않은 얼굴로 도미니크 대신관을 향해 입을 열었다.
“조금 전 제가 들은 말의 의미가, 레녹스 가문이란 뜻입니까?”
당황한 키안과는 달리 도미니크 대신관은 의외로 침착한 얼굴이었다.
“그렇습니다. 몇 번을 기도했지만, 결과는 같았습니다. 그래서 공작님을 뵙길 청한 겁니다.”
그의 대답에도 불구하고 충격은 쉽게 가시지 않았다.
“혹시 레녹스 가문에 알려지진 않았지만, 16세 이상의 영애가 계십니까?”
당연히 있었다. 레녹스 공작가에 태어난 유일한 여자아이가. 하지만 세간에선 그 사실을 알지 못했다.
태어난 순간, 철저히 비밀이 붙여졌고 또… 절대 알려져서는 안 될 일이었으니까.
“유감이지만, 전 알지 못합니다. 제 나이 일곱 살 때, 로열아카데미에 들어간 이후 카이우스가 태어날 때까지 또 다른 레녹스가의 아이가 태어났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
“혹시 레녹스 공작께서 밖에서…….”
도미니크가 조심스럽게 물어왔다. 한마디로 사생아가 존재하는지 묻고 있었다.
“그 사실 역시 알지 못합니다. 하지만 만약 존재한다고 해도, 사생아의 신분으로 황태자 전하의 비가 될 수는 없을 겁니다. 그것이 아무리 신탁이 정한 반려라 해도 말입니다.”
동요도 없이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하는 키안을 보며, 도미니크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제가 잘못된 신탁을 받은 모양입니다.”
“괜찮으십니까, 대신관님?”
다리에 힘이 빠지는지 도미니크 대신관이 휘청거리자, 키안이 재빨리 그를 부축했다.
“괜찮습니다. 신탁을 받은 이후, 잠을 이루지 못했습니다. 아마 그래서인 모양입니다.”
키안의 부축을 받으며, 도미니크 대신관이 근처에 있는 의자에 앉았다. 두통이 밀려오는지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는 게 보였다.
그 모습에 키안은 죄책감에 가슴이 답답했다.
‘대신관님껜 미안하지만, 사실을 말할 수는 없어. 만약 이 사실이 알려진다면, 레녹스 공작가는 끝이야. 나는 상관없지만 카이우스도…….’
하지만 놀라웠다.
신탁의 내용이 너무도 당혹스러웠다. 그리고 심장이 욱신거릴 만큼 안타까웠다.
‘내가…….’
순간 키안은 입안의 살을 깨물어 목구멍을 타고 흘러나오려는 말을 삼켰다. 비릿한 피 맛이 느껴지자, 키안은 정신을 차렸다. 감히 자신은 마음속으로도 되뇌어서는 안 되는 단어였다.
“한 번도 이런 적이 없었는데, 제 신력이 다한 모양입니다.”
감정이 담기지 않은 은백색의 눈동자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그 역시 충격이 큰 모양이었다. 혼란스러워하는 도미니크 대신관을 보며, 키안이 입을 열었다.
“대신관님, 부탁이 있습니다.”
대신관이 고갤 들자, 은백색의 눈동자가 오롯이 키안에게 향했다. 마치 자신의 모든 것 꿰뚫어 보는 듯 투명한 눈동자였다.
‘설마, 대신관은 레녹스 가문의 비밀을 알게 된 걸까?’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키안은 예리한 눈빛으로 대신관을 응시했다. 하지만 그의 태도에선 그 어떤 이상한 점도 발견할 수 없었다.
“말씀하십시오, 레녹스 공작님.”
“다시 한 번 기도를 올려주십시오.”
“신탁을 다시 받으란 말씀이십니까? 하지만 제가 몇 번이나 기도했지만, 신탁의 내용은 바뀌지 않았습니다.”
“그래도 만약이란 게 있지 않겠습니까? 무엇보다 대신관께선 이번 신탁이 황태자비에 대한 것이라고 확신할 수 있으십니까? 다른 신탁일 가능성은 없는 건가요?”
키안의 물음에 도미니크 대신관이 생각에 잠긴 듯 말이 없었다. 유스타나 제국민이라면 레녹스 공작가에 여아가 없다는 것은 다 알고 있었다. 한마디로 신탁이 의미하는 황태자비는 존재하지 않았다.
도미니크 대신관이 물끄러미 키안을 응시했다. 그러곤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제 신탁이 맞는 것이라면, 레녹스 공작님께서 황태자 전하의 반려라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순간 키안의 등줄기에 서늘한 냉기가 흘렀다.
“말도 안 되는 소립니다. 제가 어떻게……?”
키안이 단호한 목소리로 부정하자, 도미니크 대신관이 물끄러미 키안을 응시했다. 키안의 얼굴에서 뭔가를 찾아내려는 듯 은백색의 눈동자가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당연히 말도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남자이신 공작님께서 황태자 전하의 반려일 리는 없으니까요.”
감정이 실리지 않은 도미니크 대신관의 목소리에 키안은 초조해졌다. 그리고 그 순간, 절대 듣고 싶지 않았던 질문을 받았다.
“혹시 공작님께선 여인이십니까?”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입안이 바짝 말라 까슬까슬했다. 키안은 서늘한 얼굴 아래 감정을 숨겼고, 흔들림 없는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닙니다. 만약 제가 여인이었다면, 로열아카데미에 들어갈 수도 없었을 겁니다. 또한 공작의 작위 역시 받지 못했을 테고요.”
키안의 지적에 도미니크 대신관이 고갤 끄덕였다. 하지만 여전히 대신관의 태도에는 모호한 구석이 있었다. 고갤 끄덕이고 있었지만, 눈빛은 차가웠다.
“저도 그럴 리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만약 공작님께서 여인이시라면, 유스타나 제국이 발칵 뒤집힐 테니까요.”
키안은 마른침을 삼켰다. 그의 눈빛에 키안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정말 뭔가 알고 있는 건가? 그의 태도로 보아, 신탁의 내용이 이게 다는 아닐 거야. 분명 뭔가 더…….’
하지만 도미니크 대신관은 이 이상 신탁의 내용을 말해줄 생각은 없는 듯했다.
사실 이렇게 자신을 불러 신탁의 내용에 대해 말한 것 자체가 유스타나 제국의 대신관으로서 굉장한 결단이 필요한 일이었다.
‘이상해. 왜일까? 그가 왜 날 도우려 하는 거지? 이유를 모르겠어.’
대신관이 그가 받은 신탁의 내용을 황태자에게 말하는 대신, 자신을 먼저 찾아왔다는 사실 하나만으로 그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날 도우려는 게 아니라면, 분명 대신관은 황태자와 귀족들 앞에서 그가 받은 신탁의 내용을 공표했을 터였다. 그리고 조금 전 자신에게 했던 질문을 황태자와 귀족들이 보는 앞에서 했어야 했다.
"혹시 공작님께선 여인이십니까?"
대신관의 질문에 자신은 황태자와 귀족들 앞에서 여인이 아니라 사실을 증명해야 했다.
그렇게 되면…….
키안은 천천히 숨을 골랐다. 여전히 놀란 가슴은 진정되지 않았다. 하지만 이런 때일수록 냉정해야 했다.
앞으로 더한 위험이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일로 흔들릴 수는 없었다. 그럼 남은 방법은 하나였다. 직접 문을 두드리는 것.
“질문을 바꾸겠습니다. 저를 도와주시는 이유가 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아니, 언제까지 저를 도와주실 수 있겠습니까?”
목소리가 떨리지 않기를 바랐다. 자신의 초조함을 그에게 들키고 싶지 않았다. 순간 도미니크 대신관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 역시 아직 결정하지 못했다.
자신이 본 신탁의 내용과 그것을 통해 알게 된 레녹스가의 비밀을 어떻게 할 것인지를.
하지만 눈앞에 서 있는 아름다운 레녹스 공작을 본 순간, 안타까웠다.
고귀한 운명을 타고난 자가, 지독한 운명의 소용돌이에 고통받고 있었다.
“저는…….”
대답을 위해 입술을 연 순간, 도미니크 대신관은 눈을 질끈 감았다. 심장이 선뜩했다. 지독한 어둠과 절망이란 감정이 순식간에 그를 덮쳤다.
숨이 쉬어지지 않았다. 죽음보다 더한 고통이 그를 뒤흔들었다.
‘이건 누구의 것이지? 누가 이런 절망의 감정을…….’
도미니크가 고갤 가로저으며, 자신을 집어삼킨 어둠을 떨쳐 내려 안간힘을 썼다. 하지만 심장을 찢는 그 고통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았다.
“괜찮으십니까, 대신관님?”
키안의 목소리에 도미니크 대신관이 천천히 눈을 떴다. 그러자 눈앞에는 키안 레녹스 공작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서 있었다.
‘평생 이런 고통을 느끼며 살아왔던 건가?’
도미니크는 조금 전 그가 엿본 감정이 키안 레녹스 공작의 어깨에 짊어진 운명의 멍에라는 걸 깨달았다.
“대신관님?”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자신을 부르는 키안을 보며, 도미니크는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당장에라도 손을 뻗어 키안 레녹스에게 축복을 내려주고 싶었다. 성수로 몸을 씻기고, 마음의 평화를 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건, 자신이 해야 할 몫이 아니었다.
‘고귀하고 고귀한 자의 운명을 갖고 태어난 분에게, 감히 나 같은 하찮은 자가 할 일은 아니지.’
도미니크는 감정을 추스른 후, 침착한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레녹스 공작님. 이제 괜찮습니다. 그리고 제가 공작님께 드릴 수 있는 시간은 그리 길지 못합니다.”
유스타나 제국엔 자신 외에도 미래를 볼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자가 몇 있었다. 그중 하나가 바로, 전 대신관이었다. 황태자의 명으로 전 대신관의 행방을 찾고 있으니, 그가 곧 유스타나 제국으로 돌아올 터였다. 그렇게 되면, 자신은 더 이상 신탁의 내용을 함구할 수가 없었다.
“알고 있습니다. 제게 주어진 시간이 얼마 되지 않는다는 걸 말입니다.”
“나중에라도 황태자 전하께서 이 사실을 알게 되신다면 뭐라 말씀하실 생각입니까?”
“그땐, 신탁에 의문점이 많아 다시 기도해 달라고 요청했다고 말할 생각입니다.”
도미니크가 고갤 끄덕였다.
“레녹스 공작님의 요청대로 오늘부터 새로운 신탁을 받기 위해 기도하겠습니다. 그때까진 오늘 공작님과 나눴던 말은 모두, 비밀에 붙이겠습니다.”
우선은 다행이었다. 뜻하지 않은 신탁으로 인해 레녹스가의 비밀이 알려질 위험성이 커져 버렸다. 하지만 도미니크 대신관의 약속으로 시간을 조금 번 것이다. 그사이 결정을 내려야 했다.
‘전하께 비밀을 말해야 할지, 아니면 혼자 감당해야 할지.’
키안이 주먹을 꼭 쥐었다. 그제야 손끝이 차갑게 식어 떨리고 있음을 알았다.
황제의 독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