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독사과-76화 (76/139)

제 76 화

“레녹스 공작님, 괜찮으십니까? 얼굴이 창백합니다.”

수리된 검을 들고 나오던 로베르트가 창백한 키안의 얼굴을 보며,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아, 조금 전에 로체 거리에서 여인과 아이의 시신을 보았거든.”

전쟁터에서 기사들의 시신은 모았을 때완 달랐다. 그들은 적이었고, 죽이지 않으면 안 되는 상대였다.

하지만 여인과 아이의 시신을 보는 건, 꽤 충격이었다.

특히 아이의 사체는…….

‘안 돼. 기억을 떠올려선.’

순간 등줄기에 서늘한 기운이 느껴져, 키안은 주먹을 꼭 쥐었다. 하지만 한 번 시작된 기억의 영상은 주마등처럼 머릿속을 스쳐 지나가고 있었다.

“살인 사건입니까?”

로베르트의 물음에 키안은 침착하게 대답했다.

“아직은 모르겠어. 아마 지금쯤 치안 감독관과 조사원이 사건을 파악하고 있을 거야. 곧 알게 되겠지.”

“참 별일이군요. 여인과 아이의 시신이라니. 모자 관계일 테죠?”

“그럴 거야.”

“지난번에 맡겨놓으셨던 검, 여기 있습니다.”

로베르트에게서 검을 받아 든 키안은 검의 상태를 확인했다. 차가운 금속성이 손에 느껴지자, 왠지 온몸이 오소소 떨렸다. 서둘러 검을 검집에 밀어 넣은 후, 재빨리 말했다.

“완벽하게 고쳐 놓았군. 고맙네, 로베르트.”

“고맙긴요. 당연히 해야 할 일인걸요. 그나저나 검은 확인해 보셨습니까? 전 공작님께서 7년 전에 의뢰하신 그 검 말입니다.”

로베르트의 지적에 키안은 카이우스가 태어났을 때, 아버지께서 의뢰했다던 검이 떠올랐다.

“아직이야. 생일까지 기다렸다가 주려고 보관 중이거든.”

검을 확인하지 않았다는 말에 로베르트가 실망한 표정으로 말했다.

“제 평생 가장 심혈을 기울인 작품입니다. 절대 실망하지 않으실 겁니다.”

재차 강조하는 로베르트를 보며, 키안이 고갤 끄덕였다. 사실 유스타나 제국에서 최고로 손꼽히는 대장장이 중 한 명인 로베르트가 만든 검이니, 당연히 명검일 것이다.

“최고의 대장장이 솜씨니 당연하겠지. 기대 중이야.”

키안의 칭찬에 로베르트의 얼굴이 살짝 붉어졌다.

“카이우스 님께 드리기 전에 공작님께서 먼저 확인해 보십시오.”

“내가 먼저? 이유가 있나?”

“그것이 좀, 이상한 점이 있어서…….”

이상한 점이라고? 키안이 그게 뭐냐고 물으려는 순간, 대장간 안으로 흰색의 신관 복장을 한 사내가 들어왔다. 그러곤 키안 앞에 서더니 고갤 숙였다.

“레녹스 공작님이십니까?”

“그렇습니다. 무슨 일이시죠?”

“대신관님께서 공작님을 뵙길 청하셨습니다.”

“저를 말입니까?”

키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대신관이 자신을 찾을 이유가 전혀 없던 것이다.

“그렇습니다. 제가 대신전까지 모시겠습니다.”

신관의 말에 키안은 여전히 어리둥절했다.

“제가 여기에 있다는 걸 어떻게 알았는지 궁금하군요.”

키안의 물음에 신관은 너무도 당연하다는 얼굴로 말했다.

“대신관님께서 이곳으로 가면 공작님께서 계실 것이라 하셨습니다.”

순간, 놀랐다. 유스타나 제국의 대신관은 신탁을 받거나, 미래를 볼 수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내가 이곳에 있다는 걸 알았다는 건 내 미래, 아니면 나와 관련된 뭔가를 봤다는 뜻인 건가?’

그런 생각이 들자, 긴장이 됐다.

조만간 대신관을 찾아뵙고 은빛 늑대에 대해 물어볼 생각이긴 했다. 하지만 그가 자신을 먼저 찾다니.

키안은 밀려드는 불안감에 천천히 숨을 골랐다.

“대장간 앞에 마차가 준비되어 있습니다. 오르시지요.”

신관이 앞장서 걷기 시작했다. 키안은 로베르트에게 눈인사를 한 후, 신관의 뒤를 따라갔다.

그가 문을 열어주자, 마차에 올랐다. 신관이 출발해도 좋다는 뜻으로 마차의 벽을 두 번 두드리자, 두 사람을 태운 마차가 대신전을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어느새 해는 서서히 기울어 저녁을 향해 가고 있었다.

**

“접견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황태자 전하.”

아이크의 안내를 받으며 접견실 안으로 들어온 헬로이즈가 세이란을 향해 허릴 숙였다.

“매일같이 접견을 신청하니, 이젠 거절할 명분이 다 떨어졌거든.”

그래서 원치 않았지만, 어쩔 수 없이 허락했다는 뜻이었다.

“그럼 앞으론 더 열심히 접견을 신청해야겠습니다. 전하를 더 자주 뵈려면 말입니다.”

헬로이즈가 기쁜 듯 미소를 짓자, 세이란의 입가가 냉소로 비틀렸다.

“그댄 절망을 모르는군.”

“제 상황이 절망을 느껴선 안 되기 때문입니다.”

“그 말은 지금 그대는 몹시 절망스럽다는 것이군. 하지만 지금은 그 절망을 애써 모르는 척해야 할 만큼, 더 중요한 일이 있는 것이고.”

세이란은 그것이 굳이, 자신과의 결혼이란 말은 하지 않았다.

“그렇습니다. 테란국에선 지금도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알 수가 없으니 초조할 수밖에요. 그래서 전 전하의 허락이 더욱 간절합니다.”

“정말 이유가 그것뿐인 건가? 그대가 시도 때도 없이 접견을 신청하며, 초조함을 드러내는 이유 말이다.”

순간 헬로이즈의 보랏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이내, 그럼 또 무슨 이유가 있겠냐는 듯 그를 바라보았다.

“그렇습니다. 제게 가장 중요하고 급한 일은 테란국의 안정입니다. 그리고 국왕이신, 아버지의 안전이 보장되는 일이고요.”

헬로이즈는 자신이 국혼을 허락한다면, 첫째 공주 역시 현재의 국왕을 죽이지 못할 것이라 확신하는 모양이었다.

‘정말 속겠어, 자신의 나라와 아버지를 걱정하는 공주의 연기에.’

세이란은 초조한 얼굴로 서 있는 헬로이즈를 바라보았다. 그러고 보니, 처음 보았을 때보다 얼굴이 해쓱해진 것도 같았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동정심 같은 건 들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자릴 권하지도 않았군. 편한 곳에 앉도록 해.”

그제야 세이란은 테란국의 공주를 세워두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는 듯 자릴 권했다. 하지만 헬로이즈는 그가 일부러 그랬단 사실을 알고 있었다. 그녀와의 접견을 원하지 않는다는 뜻을 내비치기 위해서.

“감사합니다, 전하.”

헬로이즈가 자리에 앉자, 세이란이 그녀의 찻잔에 차를 따라주었다.

“그대를 보니, 마지막 전투에서 내 검에 죽음을 맞이한 기사가 떠오르는군.”

찻잔을 들어 올리던 헬로이즈의 손이 잠시 멈칫하는 걸 세이란은 놓치지 않았다.

“그랬습니까? 그 기사가 누군지 궁금하군요. 전쟁을 통해 워낙 많은 테란국의 기사들이 죽었거든요.”

헬로이즈는 테란국의 기사들을 죽인 그를 원망이라도 하는 듯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뭐, 당연한 감정이었다. 전쟁은 승패와 상관없이 양국 모두에게 손실을 안겨주었으니까.

그게 잃지 말아야 할 소중한 사람일 경우, 분노가 남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만약 전쟁에서 자신 또한 키안을 잃었다면, 테란국을 초토화시켜 버렸을 테니까.

“유스타나 역시 많은 기사를 잃었지. 테란국에 비해선 적은 숫자지만. 그렇다고 아픔이나, 슬픔이 덜한 건 아니다, 헬로이즈 공주.”

“죄송합니다, 전하. 제가 너무 감정적이었습니다.”

“공주로서 당연한 것이라 생각한다. 내가 마지막으로 죽인 기사 역시 그대가 발끈하며 화냈다는 사실을 알게 되면, 무척이나 기뻐하겠군. 유독 테란국에 충성심이 높은 기사였거든. 그대가 알 수도 있겠군. 작위를 가진 기사였으니까. 그의 이름이, 루틴 공작이라고 했던 게 기억나는군.”

달그락 소리와 함께 헬로이즈가 찻잔을 내려놓는 소리가 들렸다. 유난히 날카롭고 크게 들리는 그 소리에 세이란이 고갤 들었고, 그 순간 두 사람의 시선이 마주쳤다.

“죄송합니다, 전하. 손잡이가 너무 뜨거워서 그만.”

헬로이즈가 재빨리 시선을 피하며 변명을 했다. 하지만 세이란은 그녀가 당혹스러워하고 있다는 사실을 놓치지 않았다.

“아니다. 충분히 그럴 수 있지. 혹시 아는 이름인가?”

“아니요, 모르는 분입니다. 제가 전쟁 쪽으론 워낙 관심이 없어서요.”

“그 얘긴, 처음 만났을 때도 했던 것 같군.”

세이란이 이제야 생각난다는 듯 말했다. 그러자 헬로이즈가 차분함을 되찾은 듯 침착하게 대답했다.

“부끄럽지만, 유스타나 제국에 오기 전까진 저 역시 다른 레이디들처럼 사교계 외엔 관심이 없었답니다. 공주의 신분인데도 불구하고요.”

“그랬을 테지. 전쟁은 기사들의 몫이니까.”

세이란은 천천히 차를 마셨다. 전쟁은 기사들의 몫이었다. 하지만 자신은 사교계엔 관심조차 없는 여인을 알고 있었다.

귀하고 아름다운 보석으로 장식해야 할 손엔 검을 들었고, 최고급 천으로 만든 드레스 대신 기사단의 제복을 입은 이를 말이다.

‘키안 레녹스.’

세이란의 혀끝에 그 이름이 감돌았다. 그 누구보다 고귀하고 행복해야 할 가녀린 어깨에 가문을 지켜야 하는 책임감과 목숨을 위협하는 비밀에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하는 이를 그는 알고 있었다.

키안의 하늘빛 눈동자를 떠올리자, 심장이 욱신거렸다.

“그댄 운이 아주아주 좋았군.”

“네?”

세이란의 눈빛이 싸늘하게 변해 있었다. 마치 그녀의 투정이 너무도 하찮아 화가 난다는 듯 쏘아보고 있었다.

“아니, 이젠 아닌 건가? 테란국을 위해 이곳까지 왔으니 말이야. 이젠 그대의 인생에도 책임이란 무게가 생겼겠군.”

자신을 비꼬는 세이란의 말에 헬로이즈는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전하의 말씀처럼 지금까지 저는 운이 좋았습니다. 아니, 사실은 지금도 운이 좋습니다. 제가 테란국을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있으니까요.”

세이란의 녹색 눈동자가 얼음송곳처럼 날카로워졌다. 불쾌한 모양이었다.

“그것이 나와의 혼약인 것이고.”

“그렇습니다. 하지만 전하께선 원치 않으신 일이시죠.”

“잘 알고 있군. 난 상황 파악도 못하고 들러붙는 자는 딱 질색이라.”

이번에도 세이란은 헬로이즈에게 틈조차 주지 않고, 딱 잘라 거절했다.

“그럼, 황실 무도회에서 전하께서 손을 내미셨던 그분을 황태자비로 생각하고 계시는 겁니까?”

“내가 그대에게 말해야 할 의무가 있는 건가?”

“아닙니다. 하지만 제가 넘어야 할 상대가 누군지 정도는 알고 있어야 할 것 같아서요.”

“아무리 노력해도 그대는 넘지 못할 것이다. 아니, 그 누구도 넘을 수 없다.”

그의 단호한 목소리에 헬로이즈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갤 끄덕였다.

“짐작은 했습니다. 하지만 저는 미련해서 포기를 모른답니다.”

“포기하는 게 좋을 것이다, 헬로이즈 공주. 그래야 나와 협상할 여지가 조금은 생길 테니까.”

허튼 생각 말라는 듯 경고하는 세이란의 서늘한 눈빛에 헬로이즈는 마른침을 삼켰다.

‘내가 제임스 에버콘 공작을 만났다는 사실을 알고 있는 모양이야.’

그리고 오늘 자신의 접견을 허락한 이유 역시 경고하기 위한 것임이 분명했다.

제임스 에버콘과 손을 잡더라도, 절대 그대의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라는 경고. 아니, 자신과의 협상의 기회조차 없어질 것이란 협박이었다.

“왜 험난한 길을 선택하려 하십니까? 더 풍요롭고 안락한 길이 있는데도 말입니다. 테란국이 황태자 전하께 줄 수 있습니다.”

테란인에게 받은 두 번째로 똑같은 질문이었다. 하지만 세이란의 대답은 같지 않았다.

“지루하다. 이미 답이 보이는 길은 피가 뜨거워지지 않아서.”

지루하다니. 아니, 피가 뜨거워지지 않다니.

정말 소문처럼 유스타나의 황태자는 뼛속까지 잔혹한 자가 분명했다. 헬로이즈는 주먹을 꽉 쥐었다. 그러곤 마지막 결심을 하기 전, 꼭 물어야 할 것이 있었다.

“마지막 전투에서 만났다던 테란국의 기사는 명예로운 죽음을 맞으신 건가요?”

“그게 왜 궁금한지 모르겠군.”

이상하다는 듯 헬로이즈를 바라보는 녹색 눈동자가 얼음처럼 서늘했다.

“지금까지 제가 운이 좋았던 이유가 누군가의 희생을 밟고 서 있기 때문이라 생각이 문득 들었습니다. 그래서 테란국을 위해 목숨을 다한 기사의 죽음은 기억을 해줘야 할 것 같아서요.”

침착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가 자신이 그 기사의 얘길 듣고 싶어 한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않기를 바랐으니까.

하지만 그의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손바닥에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입술 역시 바짝 말라 타들어갔다.

“그럼 해줘야겠군. 테란국의 공주로서 그대의 나라를 위해 죽은 자의 마지막은 기억해도 좋을 것 같으니까. 기사로서 명예로운 죽음이었다.”

“마지막 남긴 말은 없었습니까?”

“글쎄다. 있었나?”

세이란이 생각에 잠긴 듯 찻잔을 들어 올렸다. 그 모습에 헬로이즈는 초조해졌다. 당장에도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 따져 묻고 싶었다. 어떤 표정이었고, 또 어떻게 죽었는지.

“했던 것도 같군.”

“그것이 뭔지 물어도 되겠습니까?”

“나에게 후회할 것이라고 협박을 하더군, 마지막 순간까지.”

세이란은 그가 예언자의 별에서 태어난 자이며, 자신에게 했던 말들을 모두 헬로이즈에게 해줄 생각은 없었다. 아니, 그녀 역시 어느 정도는 알고 있을 터였다. 생각해 보면, 그자가 그토록 지키고 싶어하는 건 테란국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나라를 위한 신하로서의 충성심이 아니라, 연인을 향한 연정에 가까웠었어.’

세이란이 찻잔을 내려놓았다. 달그락 소리가 두 사람 사이에 팽팽하게 날이 섰던 긴장감을 누그러뜨렸다. 그제야 헬로이즈 역시 참았던 숨을 천천히 내쉬었다. 그러곤 재빨리 감정을 추슬렀다.

“그랬군요. 마지막까지 기사로서 명예로웠군요. 다행입니다. 명예로운 죽음을 맞이해서.”

황제의 독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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