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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독사과-71화 (71/139)

제 71 화

헬로이즈는 찻잔을 들어 올리며, 맞은편에 앉아 있는 제임스 에버콘 공작을 조심스럽게 살폈다.

30분 전 그가 접견을 신청했을 때, 헬로이즈는 그다지 놀라지 않았다.

어젯밤 황실 무도회에서 자신에게 접근한 그의 태도에서 조만간 찾아올 것이라 예상은 했었다.

‘하지만 이렇게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야심은 있지만, 때를 기다릴 줄 모르는 성급한 타입인 모양이군. 무엇보다 그것이 단점인 줄도 모르는 어리석은 바보.’

뭐, 상관은 없었다. 그가 욕심이 많든, 단점투성이든. 헬로이즈는 제 발로 굴러들어 온 행운을 걷어찰 이유가 없었다.

사실 제임스 에버콘 공작처럼 욕심과 탐욕이 많은 사람은 타인을 이용하려다, 자신의 덫에 걸려 목숨을 잃는 경우가 허다했다. 자신은 그런 제임스 에버콘을 이용하면 그만이었다.

“테란국의 국왕께서 황태자 전하께 동맹혼을 제안하셨다고 하더군요. 그 칙서를 공주님께서 직접 들고 오셨다고 하던데, 사실입니까? 소문으로 듣긴 했지만, 믿기지 않아서요.”

“굉장히 무례한 질문이군요.”

헬로이즈가 찻잔을 내려놓으며 제임스 에버콘을 응시했다. 분명 그는 자신을 모욕해 모멸감을 느끼게 할 심산이었겠지만, 그 누구도 테란국의 공주인 자신에게 그런 감정을 느끼게 할 순 없었다.

단 한 사람, 아버지인 테란국의 국왕 외엔.

아니,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을 생각이었다.

“죄송합니다. 궁금한 것은 참을 수가 없어서.”

제임스가 마음에도 없는 사과를 하자, 헬로이즈의 보랏빛 눈동자가 날카로워졌다. 하지만 이내 환하게 웃으며 말했다.

“차라리 뒤에서 수군거리는 것보단 났군요. 소문이 맞습니다. 그리고 저는 황태자 전하의 눈에 들기 위해 고군분투 중이죠. 불행히도 어젯밤 황실 무도회에 참석해 보니, 실패한 것 같더군요. 전하께선 이미 첫눈에 반한 레이디가 있으셨다니. 놀랐습니다.”

헬로이즈가 애석하다는 듯 말했다. 그러자 제임스 에버콘이 기다렸다는 듯 말했다.

“신경 쓰실 필요 없을 겁니다. 신분이 낮은 귀족가의 영애가 감히 유스타나 제국의 황태자비가 될 수나 있겠습니까? 황실의 고귀한 피가 망쳐지는 꼴은 절대 허락할 수 없지요. 귀족 회의에서 받아들이지 않을 겁니다.”

“그게 가능할까요? 어제 무도회장에서 보니, 황태자 전하께선 그런 것 같지 않았거든요. 무섭도록 잔혹한 황태자 전하께서 황태자비로 맞아들이겠다고 하시면, 귀족 회의에서도 어쩔 수 없는 것 아니겠습니까?”

헬로이즈의 지적에 제임스 에버콘이 마땅찮은 얼굴을 했다.

“귀족 회의는 유스타나 제국의 천 년의 역사와 함께해 온 기관입니다. 아무리 황태자 전하라 하셔도, 귀족 회의 결정을 무시할 순 없을 겁니다. 특히, 국혼의 경우엔 더더욱.”

“그런가요?”

하지만 이내, 헬로이즈는 소용없다는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휴우, 그래도 저는 불가능할 것 같군요. 제가 유스타나에 도착한 이래 매시간 접견을 신청 중이지만 황태자 전하께선 번번이 거절하셨습니다. 굉장히 매정한 분이시더군요.”

헬로이즈는 과장되게 한숨을 내쉬며, 제임스의 눈치를 살폈다. 아니나 다를까, 제임스 에버콘이 안타까운 얼굴로 말했다.

“제가 헬로이즈 공주님을 돕고 싶습니다.”

“공작님께서 저를 말인가요?”

헬로이즈가 의외라는 듯 제임스를 바라보았다.

“그렇습니다.”

“하지만 이유를 모르겠군요. 타국인인 절 왜 도우려 하시는지 말입니다.”

“대가 없이 돕는다기보단, 거래 쪽이 더 맞을 겁니다.”

“거래라고요? 저에게 뭘 원하는지 물어도 될까요?”

제임스 에버콘이 기다렸다는 듯 입을 열었다.

“테란국은 비옥한 농토와 광물 자원이 풍부한 나라입니다. 그리고 바다와 접해 있어 해상 무역에 최상의 입지 조건을 가진 곳이기도 하고요. 만약 국왕께서 가장 총애하는 공주님께서 다음 왕위 계승자가 되신다면, 저희 데칸 상단에게 교역권을 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상단의 교역권이라고?

‘생각보다 더 욕심이 많은 자였어.’

테란국은 입지 조건상, 유스타나 제국을 통하지 않고는 대륙으로 갈 수 없었다. 해상 무역 역시 테란국의 기술력으론 아직 무리였다.

따라서 테란국에서 교역권을 갖는다는 건, 테란국으로 흘러들어 오는 물자와 화폐를 통제할 수 있다는 뜻이었다. 한마디로 테란국을 날로 삼키겠다는 말과 다를 바가 없던 것이다. 헬로이즈의 입매가 살짝 비틀렸다. 하지만 이내 감정을 숨긴 채 환하게 웃었다.

“저야 에버콘 공작님과 거래를 할 수 있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습니다. 고양이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심정이니까요.”

헬로이즈의 대답에 제임스 에버콘이 만족스러운 얼굴을 했다.

“조만간 은밀히 자릴 마련하겠습니다.”

제임스 에버콘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헬로이즈 역시 따라 일어서며, 고갤 끄덕였다.

“좋은 소식 기다려야겠군요.”

제임스 에버콘이 별궁을 나서자, 헬로이즈는 그녀의 호위기사인 이고르를 불렀다.

“무슨 일이십니까, 공주님.”

“에버콘 공작가와 데칸 상단에 대해 알아봐.”

“그들과 손을 잡을 생각이십니까?”

“우리에게 도움이 된다면, 이용해야지. 이건 우리에게 굴러들어 온 기회니까.”

헬로이즈의 보랏빛 눈동자가 의미심장하게 빛났다.

**

휘릭, 휘리릭!

날카로운 검이 허공을 갈랐다. 두 시간 동안 계속된 검술 훈련에도 불구하고, 키안의 얼굴엔 지친 기색이라곤 하나도 느껴지지 않았다.

“헉, 헉- 단장님.”

거친 숨을 내쉬며, 자신을 부르는 아레오의 목소리에 키안이 검을 내려놓았다.

“아레오, 괜찮아?”

뒤를 돌아보자,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이마에 땀을 닦고 있는 아레오가 보였다. 그리고 그 옆엔 아직도 팔팔한 새끼 늑대가 뛰어다니고 있었다.

“이 녀석 대단한데요? 가죽을 걸레로 만들어놨습니다.”

아레오가 팔에 낀 훈련용 가죽 뭉치를 키안에게 흔들어 보였다. 그의 말처럼 늑대의 날카로운 이빨에 찢겨 너덜너덜해져 있었다.

“수고했다, 아레오.”

“아닙니다, 단장님. 앞으로 제가 이 녀석을 훈련시키고 싶은데, 괜찮을까요?”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아레오를 보자, 키안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지금이야 늑대가 어리니 가능하겠지만, 한 달만 지나도 아레오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힘이 세질 게 분명했다. 하지만 새끼 늑대를 훈련시키는 동안 아레오 역시 자연스럽게 체력을 키울 수 있을 거란 생각에 고갤 끄덕였다.

“드레이크 경에게 말해놓을게, 네가 앞으로 늑대의 훈련 담당이라고.”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레오가 기쁜 듯 눈을 빛냈다. 키안은 훈련장을 뛰어다니고 있는 은빛 늑대를 향해 휘릭! 휘파람을 불었다. 그러자 늑대가 앙증맞은 새하얀 귀를 쫑긋 세우더니, 키안에게 쏜살같이 달려왔다.

“단장님, 대체 어떻게 하신 겁니까?”

아레오가 신기한 듯 눈을 빛냈다. 하지만 이내, 레녹스 공작가는 맹수를 다루는 능력이 있다는 사실이 기억이 났는지 멋쩍은 듯 웃었다.

키안은 손을 뻗어 새끼 늑대의 목덜미며 털을 천천히 쓰다듬어 주었다.

“아레오, 지금부터 늑대에게 네 체향을 기억하게 할 거야. 그러니 긴장할 필요 없다.”

키안의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새끼 늑대가 아레오에게 다가갔다. 그러곤 냄새를 기억하려는 듯 귀를 쫑긋 세우며 손에 코를 박았다.

“큭큭, 간지러워.”

다행히 새끼 늑대는 아레오를 동료로 받아들였다. 생각해 보니, 은빛 늑대의 숲에서 새끼 늑대를 처음으로 발견했을 때, 아레오가 자신의 막사까지 늑대를 데려다주었던 것이다. 그때부터 아레오의 냄새를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 녀석, 정말 귀엽습니다. 이를 드러낼 땐 제법 늑대 같지만, 이렇게 코를 묻고 침을 잔뜩 묻히곤 혀로 핥아올 땐, 완전 강아지라니까요.”

“그래도 방심하면 안 돼. 언제 늑대의 본성을 드러낼지 모르거든.”

“벌써 훈련이 끝난 겁니까?”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키안과 아레오가 동시에 고갤 돌렸다. 사무엘 스텐호프가 아쉽다는 눈빛으로 서 있었다.

“네, 조금 전에요. 이것 좀 보십시오. 이 녀석이 이렇게 걸레를 만들어놓았다니까요.”

아레오가 자랑스러운 듯 너덜너덜해진 가죽 뭉치를 흔들어 보였다.

“제법인데요? 이렇게 어린데도 늑대는 늑대인 모양입니다.”

“스텐호프, 훈련은 끝났나?”

키안의 물음에 사무엘이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더니, 키안에게 건네며 말했다.

“네. 조금 전 끝났습니다.”

“아니, 필요 없다.”

키안이 땀이 나지 않아 그럴 필요 없다고 손을 가로젓자, 사무엘이 키안의 손을 잡았다.

“손에 피가 납니다.”

그제야 키안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연습용 검의 손잡이에 긁혀 피가 나고 있었다. 사무엘이 상처가 난 키안의 손에 손수건을 감아주었다.

“곪을지 모르니, 치료는 하셔야 합니다.”

“고맙다, 스텐호프. 손수건은 내일 돌려주겠다.”

고갤 끄덕이는 사무엘의 귓불이 유난히 붉었다. 그러고 보니 조금 전 손에 닿았던 그의 손도 뜨거웠다. 훈련을 하느라 몸에 열이 나는 모양이었다.

“저기 저도 한 번만 훈련을 시켜봐도 되겠습니까?”

사무엘 스텐호프가 시선을 피하듯 은빛 늑대 쪽으로 고갤 돌렸다. 그러다 아레오의 바지를 문 채, 귀를 쫑긋 세운 새끼 늑대를 귀엽다는 듯 바라보았다.

“겉모습만으로 판단하면, 큰코다칠 거야. 만약 가능하다면, 능력껏 훈련시켜 봐도 좋다.”

키안의 허락이 떨어지자, 사무엘이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허릴 숙였다. 그러자 아레오와 장난을 치던 늑대가 경계심을 드러내더니, 순식간에 사무엘을 향해 달려들었다.

“어엇-”

예상치 못한 공격에 놀란 사무엘이 주춤주춤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그 순간 늑대의 황금빛 눈동자가 짙게 변하더니, 숨겨두었던 맹수의 본능을 드러내며 사무엘의 목을 물어뜯으려는 듯 날카로운 이를 드러냈다.

“멈춰!”

키안의 날카로운 목소리에 새끼 늑대가 공격을 멈췄다. 그러곤 재빨리 키안에게 달려와 언제 그랬냐는 듯 복종했다.

하지만 이미 얼이 빠져 버린 사무엘은 다리에 힘이 풀린 듯 바닥에 털썩 주저앉았다. 사무엘은 창피해 얼굴을 들 수가 없었다.

“이거, 완전히 사기인데요.”

“쿡쿡, 스텐호프 기사님께서 이 녀석의 귀여운 얼굴에 완전 속으신 모양이네요. 늑대는 자신의 주인이 인정한 사람에게만 복종하거든요.”

사무엘은 아레오의 말에 동의했다.

“괜찮나, 스텐호프?”

키안이 사무엘에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사무엘이 얼굴을 붉혔다. 자신만만하게 훈련을 시켜보겠다고 큰소리 쳤던 게 무안한 모양이었다.

“괜찮습니다.”

사무엘이 자신에게 내밀어진 키안의 손을 외면한 채, 자리에서 일어섰다. 이상한 건, 그의 얼굴이 조금 전보다 더 붉게 달아올라 있다는 사실이었다.

‘창피한 건가?’

키안은 고갤 숙인 채 자신과 시선조차 마주하지 못하는 사무엘을 보자, 괜스레 미안해졌다.

“저기, 사무엘 스텐호프. 지난번에 약속을 지키지 못한 것에 대해 오늘 저녁에 술을 사고 싶은데. 괜찮겠나?”

지난번 로체 거리에서 자신을 두고 가버린 일을 두고 하는 말인 듯했다.

“오늘 말씀입니까?”

“약속이 있다면 거절해도 상관없다. 다음으로 미루면 되니까.”

“아닙니다. 됩니다. 약속 같은 건 없습니다.”

그렇게 말한 순간, 사무엘의 얼굴이 수습 불가능할 정도로 붉어졌다. 그러곤 서둘러 키안에게 인사를 했다.

“어, 그럼 저녁에 뵙겠습니다.”

“7시 렌슬롯이다.”

황제의 독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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