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8 화
“이제 막 자려던 참이었습니다. 전하께서도 피곤하실 텐데, 주무시지 않고 어쩐 일이십니까?”
키안의 물음에 세이란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렇지 않아도 말을 달려 이곳으로 오는 내내, 마음속으로 되뇌던 질문이었다.
“사흘 밤낮을 전쟁터에서 적과 싸운 기분이야.”
세이란이 지친 듯 침대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자 키안이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보았다.
“쫓아낼 생각 하지 마. 이걸 주러 온 거니까.”
세이란이 핑계 삼아 가져온 벨벳 상자를 침대에 툭 하고 던져 놓았다.
“이게 뭡니까?”
“열어보면 알아.”
세이란이 시선을 피하며, 별것 아니라는 듯 퉁명스럽게 말했다. 평소와 다른 그의 태도에 키안이 눈치를 살피며 조심스럽게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이건…….”
“어때? 마음에 들어?”
그제야 세이란이 바짝 긴장한 얼굴로 키안의 안색을 살폈다. 마음에 들어하지 않으면 어쩌나 조마조마한 모양이었다.
“아, 저는…….”
뭐라고 해야 할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키안이 상자만 한참을 바라보며, 머뭇거리고 있자 세이란이 도저히 초조해 기다릴 수 없다는 듯 성급한 목소리로 말했다.
“싫으면 버려.”
키안이 고갤 들자, 세이란이 머쓱한지 잔뜩 굳은 얼굴로 앉아 있었다.
‘설마, 쑥스러우신 건가? 천하의 세이란 님이?’
눈이 마주치자, 세이란이 손을 뻗어 상자를 빼앗으려 했다.
“버려. 다른 걸로 사 줄 테니까.”
“아닙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게 아니라, 이런 선물은 처음이라서.”
당연했다. 모두가 남자로 알고 있는 레녹스 공작에게 보석을 선물할 간 큰 자는 없었으니까.
“그럼, 하던가.”
그제야 표정을 푼 세이란이 선심이라도 쓰듯 말했다. 고갤 돌려 다른 곳을 보고 있는 그의 귓불이 붉어져 있었다.
“감사합니다.”
“정말?”
“네. 다음 파티에 하고 가겠습니다.”
“지금 해볼래?”
“아…….”
키안이 머뭇거리자, 그가 눈을 빛내며 다시 말했다.
“어울리는지 어울리지 않는지 봐야 하잖아.”
키안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세이란이 상자에서 다이아몬드 목걸이를 꺼냈다. 그러곤 침대로 올라오더니, 자신의 옆에 자릴 잡고 앉았다.
두근! 그에게서 청량한 비누 향이 났다. 오기 전에 목욕을 한 모양이었다.
“제가 하겠습니다.”
“그냥 있어. 내가 해주고 싶어서 그러니까.”
꼼짝없이 앞을 보고 앉게 된 키안은 긴장으로 어깨가 굳어지는 걸 느꼈다. 바로 뒤에 그가 있었다.
찰칵 소리와 함께 걸쇠를 푼 그가 손을 뻗어왔다. 그러자 두 사람의 팔이 부딪히며 자연스럽게 그가 뒤에서 끌어안은 자세가 되었다.
“긴장할 것 없다. 잡아먹진 않아.”
바짝 얼어 있는 키안을 보며, 농담으로 한 말이었다. 하지만 키안의 귓불이 붉어지는 것을 보자, 그 역시 몸속의 피가 뜨겁게 날뛰기 시작했다.
“윽-”
걸쇠를 걸던 그의 손가락이 키안의 귓불을 건드렸다. 흠칫 놀라 어깨를 움츠리는 모습을 보자, 아랫배가 묵직해졌다. 순식간에 찾아든 나른한 열기에 세이란은 당장에라도 침대에 키안을 눕히곤, 자신의 남성을 묻고 싶었다. 가까스로 욕망을 참아내며, 세이란이 잔뜩 쉰 목소리로 말했다.
“나, 여기서 자고 가고 싶은데.”
정말 미친 짓이었다. 안고 싶다는 욕망으로 온몸이 팽팽하게 긴장된 상황에서 이곳에서 잠을 자다니.
분명 밤새 욕망을 참아내느라 괴로워할 게 불 보듯 뻔했다.
하지만…… 곁에 있고 싶었다. 아무것도 하지 않더라도.
“키안, 그래도 될까?”
목걸이의 걸쇠를 채운 그가 뒤에서 키안을 끌어안았다. 그러곤 목덜미에 얼굴을 묻으며, 낮게 속삭였다. 마치 유혹하듯, 그의 목소리엔 짙은 열기가 묻어 있었다.
‘흣-’
입술이 목덜미에 비벼지는 감촉에 온몸의 솜털이 바짝 일어서며 예민해졌다. 키안은 속으로 신음을 삼키며, 목을 움츠렸다.
당연히, 거절해야 했다. 하지만 그의 제안은 떨쳐 낼 수 없을 만큼 유혹적이었다.
“잠만 자는 거면…….”
“풋, 마치 내가 순진한 처녀를 꿰는 느낌이군.”
“제 말은 그런 게 아니라…….”
키안이 얼굴을 붉힌 채, 고갤 들었다. 그러자 그가 손을 뻗어 키안의 볼을 건드렸다.
“걱정 마. 남자를 안을 만큼, 욕망에 굶주려 있는 건 아니니까.”
그 말과 함께 세이란이 키안을 놓아주었다. 그러곤 입고 있던 겉옷을 벗어 바닥에 떨어뜨렸다.
그사이 키안이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를 천천히 어루만지는 게 보였다. 예뻤다. 목걸이가 걸린 목에 입을 맞추고 싶을 만큼.
“괜찮습니까?”
“응. 아마 무도회장에서 레이디들이 부러워 너만 쳐다볼 것 같군. 너무 예뻐, 질투가 나서 말이야.”
“이런 예쁜 걸 받아본 건, 처음입니다. 마음에 듭니다.”
키안이 목걸이를 손끝으로 조심조심 어루만졌다. 차가운 느낌이 묘하게 설렜다.
“이리 와. 지금 풀지 않으면, 그걸 하고 잘 기센 것 같으니 내가 풀어주겠다.”
세이란이 놀리며, 키안의 목에 걸려 있는 목걸이를 풀어 상자에 넣었다. 그러곤 탁자에 올려놓은 후, 잠을 자기 위해 자릴 잡았다.
“여기면 될까?”
침대에 누워 있는 그를 보자, 자신이 얼마나 대범한 결정을 했는지 실감이 났다.
‘거절해야 했어.’
그가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문제였다. 편하게 침대에 누워 잔뜩 흐트러져 있는 그는 묘하게 색스러웠다. 그 모습에 아랫배가 움찔거렸다.
사실 무도회장에서 그를 봤을 때부터,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뭐해? 어서 오지 않고.”
잔뜩 쉰 그의 목소리엔 짙은 관능이 묻어 있었다.
‘위험해. 이러다가 내가 세이란 님을 덮치기라도 하면…….’
정말 큰일이었다.
마른침을 삼키며, 키안이 그의 옆에 자릴 잡고 누웠다. 그러곤 최대한 몸이 붙지 않도록 거릴 둔 채로 그에게 등을 돌리려는 순간, 그가 자신의 어깨를 붙잡곤 그의 품으로 끌어당겼다.
“새벽에 춥잖아.”
그의 품에 안긴 채, 시선을 마주했다. 그의 녹색 눈동자가 열기로 짙어져 있었다.
키안은 그의 강렬한 시선을 피하기 위해 눈을 내리깔았다. 하지만 여전히 그의 시선은 자신의 얼굴에 닿아 있었다.
“주무십시오.”
“응.”
건성으로 대답하는 그의 목소리에 키안이 슬쩍 고갤 들었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그가 고갤 숙여왔다. 어느새 그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라 있었다.
“이제 도망갈 수 없다, 키안. 대놓고 유혹했는데, 대놓고 넘어왔잖아.”
당황한 키안이 눈을 크게 뜨고는 입술을 달싹였다.
“저는…….”
“이제 와서 아니라고 하지 마. 변명하기엔 너무 늦었다.”
그가 조심스럽게 입술을 겹쳐 왔다. 열기를 품은 입술이 맞닿자 자석에 이끌리듯 서로를 끌어당겼다. 말캉하고 촉촉한 입술에 단단하고 모양 좋은 세이란의 입술이 비벼졌다.
“으응-”
나른한 열기를 참지 못하고 키안이 신음을 뱉어냈다. 그러자 그가 상체를 살짝 들어 올리더니, 키안의 턱을 기울이며 깊이 혀를 묻어왔다. 열기로 젖은 입술이 닿았다 떨어지길 반복할수록 안타까운 듯 깊숙이 얽혀들었다.
츄읍, 츄우. 혀가 얽혔다 떨어졌다. 잠시 후 떨어졌던 입술은 더 짙은 갈증을 품고 깊숙이 파고들었다. 그의 혀가 입술 안쪽의 여린 살을 핥고 집요하기 빨아 당겼다.
다 삼키지 못한 타액이 키안의 입술 새로 흘러나오자, 세이란이 입술을 떼곤 혀로 진득하게 핥아 먹었다.
“세이란……. 으흣!”
그의 입술이 키안의 뾰족한 턱을 지나 귓불을 깨물었다. 그러자 입술을 꼭 깨문 턱이 바르르 떨리더니, 위로 살짝 치켜 올라갔다.
키스로 인해 발끝까지 오므라들 정도로 저릿한 쾌락이 등줄기를 타고 흘렀다.
예민한 귓불을 혀로 건드리며, 말랑한 귓바퀴를 입술로 쓸었다. 그러자 농밀한 열기로 키안의 어깨가 떨리며 또다시 나른하게 턱이 들렸다.
솜털이 바짝 설 정도로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아랫배 안쪽이 뜨거웠다. 이렇게 가다간……. 자신이 먼저 그를 옭아맬 것 같았다.
그 순간 세이란의 손가락이 키안의 머리카락 속으로 얽혀들었다.
“자, 잠깐……. 거긴 안 됩니다.”
키안이 화들짝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밀어냈다. 그러자 목덜미 뒤쪽 셔츠 안으로 들어오던 그의 손이 떨어졌다.
“네 상처, 봐도 될까?”
어느새 셔츠 단추가 두 개나 풀려 있었다. 다행히 몸을 둘러싼 붕대 때문에 가슴이 보일 리 없었지만, 조금만 더 단추가 풀린다면, 붕대로 다 덮지 못한 검상이 그에게 보일 수 있었다.
“안 됩니다.”
키안이 필사적으로 고갤 가로저었다. 절대 보일 수 없었다. 키안이 두 손으로 셔츠 앞섶을 꽉 쥐었다. 얼마나 힘을 주었는지 가느다란 손이 새하얗게 변해 부들부들 떨렸다.
그런 키안을 보며, 세이란이 품에 끌어당겨 안았다. 그러곤 진정하라는 듯 등을 천천히 토닥였다.
“진정해. 네가 원치 않는다면, 더는 요구하지 않을 테니까. 불안에 떨 필요 없다, 키안.”
세이란이 안타까운 눈빛으로 여리고 여린 키안의 등을 내려다보았다.
‘네가 싫다고 하면, 절대 하지 않을 거야. 말하고 싶지 않다면, 말할 때까지 기다리면 그만이니까.’
하지만 키안이 아파하는 건 볼 수가 없었다. 그것은 생각보다 많이 아팠다. 심장이 구멍이 나 피가 나는 것처럼 지독히도 아렸다. 그의 품에 안겨 여전히 몸을 경직시키고 있는 키안을 보며, 안타까움에 은빛 머리카락에 입을 맞췄다.
“미안. 내가 잘못했다, 키안.”
놀란 키안이 고갤 들었다. 그의 목소리에 담긴 침통함에 놀란 것도 잠시, 자신을 내려다보는 녹색 눈동자에 담긴 아픔에 울컥 목구멍 사이로 뜨거운 것이 치밀었다.
세이란이, 황태자가 자신에게 사과했다. 미안하다고.
절대 있어선 안 될 일이었다.
“아닙니다. 제 잘못입니다.”
키안이 고갤 가로저었다. 그러자 그가 양손으로 뺨을 붙잡곤 자신을 바라보게 했다.
“네 잘못이 아니야.”
키안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하지만 이내 투명하던 하늘빛 눈동자가 흐려졌다. 그러곤 그의 시선을 피했다.
“키안, 날 봐.”
마지못해 키안이 고갤 들었다. 그러자 분명 조금 전까지 녹색이던 그의 눈동자가 붉은색으로 변해 있었다.
“세이란 님의 눈동자가 붉은색입니다.”
“말했잖아. 평생에 단 한 번, 내 운명의 짝을 만나게 되면, 눈동자 색이 변한다고.”
“네? 그게 무슨……?”
키안이 처음 듣는 말인 양 세이란을 보았다. 그러자 그가 고갤 숙여 키안의 귓가에 낮게 속삭였다.
“비밀을 하나 알려줄까? 조금 전 했던 말은 내가 너에게 이미 했던 말이다. 네가 기억하지 못할 뿐.”
세이란이 다시 고갤 들었다. 두 사람의 시선이 맞닿았다.
“제게 말입니까?”
“그래.”
키안이 눈을 가늘게 뜨곤, 세이란을 보았다.
‘평생에 단 한 번. 운명의 짝을 만났을 때, 눈동자 색이 변한다니…….’
키안은 그가 내뱉었던 말을 곱씹었다. 그러곤 기억을 떠올리려 노력했다. 하지만…….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머릿속에 희뿌연 막이 낀 것처럼 손을 뻗으면 금세 사라져 버렸다.
“키안!”
열기로 잔뜩 쉰 그의 목소리에 키안의 심장이 뛰었다. 고갤 들어 그의 붉은 눈동자와 마주하자, 키안은 순간 지독한 두통에 미간을 찌푸렸다.
붉은 눈동자가……. 키안이 기억의 조각을 붙잡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이, 세이란이 손을 뻗어왔다.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키안.”
“네? 그게 무슨?”
“금기된 주문이거든.”
금기된 주문이란 말에 키안은 숨을 삼켰다. 대체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그러니 기억해 내. 네 의식의 밑바닥 속에 침잠되어 있는 기억들을. 그것을 기억해 내면, 모든 게 해결될 거야”
키안이 지금껏 짊어진 고통과 죄책감 역시 사라질 터였다. 세이란이 고갤 숙여 키안의 이마에 입을 맞췄다.
“그리고 지금은 잠을 자야 할 때다, 키안.”
그 순간 거짓말처럼 키안의 눈꺼풀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가 키안을 꼭 끌어안고는 귓가에 처음 듣는 언어로 뭔가를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멀어져 가는 의식 속에서 그것이 천 년 전 사라진 고대어, 유스타나의 별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기억해야 하는데……. 세이란 님께서 하신 말을 기억…….’
하지만 세이란의 속삭임이 멈추자, 키안은 깊은 잠 속으로 빠진 후였다. 고른 숨소리가 들려왔다.
그의 몸은 아직 채워지지 않는 열기로 다리 사이가 욱신거렸다.
“단단히 미쳤군. 쓰지 말아야 할 금기의 힘을 자꾸 쓰게 되다니.”
세이란은 잠이 든 키안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 넘겨주었다. 마음만 먹는다면, 키안의 등에 있는 검상을 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 검상은 키안에겐 건드려선 안 될 역린이었다. 아무리 안타까워도 절대 떼어줄 수 없는 깊은 상처였다.
“끝끝내 네 비밀을 말할 용기를 내지 못한다고 해도 상관없다. 처음엔 날 믿고 말해주길 원했지만, 이제야 깨달았거든. 그 비밀이 네 목숨과도 같다는 걸. 그러니 안심해. 하지만 대신 기억해 내. 내가 널 처음으로 안았던 날의 기억을.”
세이란은 키안을 짙어진 붉은 눈동자로 바라보았다.
‘기억해 내라, 키안. 널 안고서 내가 얼마나 가슴이 벅찼는지. 또, 얼마나…… 기뻤는지를.’
황제의 독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