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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독사과-67화 (67/139)

제 67 화

뺨에 닿는 뜨거운 숨결에 키안은 숨을 삼켰다.

‘설마, 지금 여기서…….’

라고 생각한 순간, 세이란이 한 발짝 다가왔다. 그러곤 양손으로 키안의 뺨을 감쌌다. 그의 손이 뜨거웠다. 그리고 녹색 눈동자는 이미 열기를 품고 짙어져 있었다.

“맞아.”

다시 입가에 그의 더운 숨결이 닿았다. 그러곤 키안을 향해 고갤 숙여왔다.

“전하…….”

“눈, 감아.”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엔 나른한 열기가 담겨 있었다. 키안 역시 기대감에 입술이 바짝 타들어갔다.

키안이 눈을 감자, 그의 입술이 야릇하게 비벼졌다.

“사람들이 볼 수도…….”

있다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의 입술이 자신의 입술을 쓸자, 나른한 열기에 그를 거부할 수 없었다. 그의 혀가 능숙하게 입 안으로 파고들었다.

“흣­”

키안의 입술 새로 열기에 젖은 신음이 새어 나왔다. 그 순간, 그가 키안의 턱을 붙잡곤 더욱 깊숙이 혀를 얽어왔다.

**

“릴리스, 괜찮아?”

벨라가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키안의 손을 붙잡았다. 그제야 손끝이 떨리고 있음을 깨달았다.

“응, 괜찮아.”

사실 말과는 달리, 얼굴이 뜨거워 미칠 것 같았다. 대체 어떤 얼굴을 하고 귀족들을 봐야 할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았다.

조금 전 밖으로 나갔던 두 사람이 무도회장으로 돌아왔을 때까지만 해도, 이 정도는 아니었다. 견딜 만했다. 예상한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에드윈 리치문트가 급하게 세이란에게 다가오더니, 뭔가 속삭였다. 그러곤 주머니에서 실크 손수건을 꺼내 그에게 건네는 게 보였다.

그때까진 그 이유를 알아채지 못했다. 하지만 세이란이 손수건으로 입술을 닦는 것을 본 순간, 키안은 귓불이 뜨거워졌다. 자신의 입술과 똑같은 색깔이 그의 입술에 묻어 있었던 것이다.

그때 벨라가 다가와 자신을 테라스로 데리고 나오지 않았더라면, 아마 부끄러움을 참지 못하고 무도회장을 뛰쳐나가는 추태를 보였을 터였다.

“전하께 말씀드리고 오늘은 돌아가도록 하자.”

“이렇게 빨리 돌아가도 될까? 만약 귀족들이 수군거리기라도 하면…….”

키안의 말에 벨라가 안심하라는 듯 미소를 지었다.

“걱정 마. 두통을 핑계로 돌아가는 레이디들이 아주 많거든.”

“그럼 돌아가자.”

키안은 벨라와 함께 다시 무도회장으로 들어갔다. 그러자 세이란이 기다렸다는 듯 두 사람이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얼굴이 창백하군. 돌아가려는 건가?”

세이란이 키안에게서 눈을 떼지 않은 채 말했다.

“허락하신다면, 아키텐 공작부인과 함께 돌아가고 싶습니다. 갑자기 두통이 와서…….”

레이디들의 뻔한 레퍼토리였지만, 그 누구도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 눈치였다.

“돌아가도 좋다. 대신 그대를 황실 주최로 열리는 사냥 대회에 초대하고 싶은데, 참석해 주겠나?”

매년 사교 시즌에 열리는 사냥 대회는 황실 기사단이 주최가 되어 준비하는 행사였다.

만약 키안이 릴리스 프로필리아로 행사에 참석한다면, 레녹스 공작은 공식적인 일정에 참석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아, 그게…….”

“네, 당연히 참석하겠습니다.”

머뭇거리고 있는 키안을 대신해 벨라가 대답했다.

“아키텐 공작가로 초대장을 보내겠다.”

그 말을 끝으로 세이란이 냉정한 표정으로 아센 공작과 리치문트 공작이 있는 곳으로 걸어가 버렸다. 키안 역시 벨라와 함께 서둘러 황실 무도회장을 나왔다.

자정이 되자 무도회에 참석했던 귀족들이 하나둘 셀서스 궁을 떠나기 시작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귀족들의 표정은 마치 유령이라도 본 듯 얼이 빠진 얼굴이었다. 다들 충격이 컸던 모양이었다.

세이란은 마지막 마차가 황궁을 빠져나가는 것을 보며, 옆에 서 있던 시종장 아이크에게 장갑을 건넸다.

“카일은 도착했나?”

“지금 집무실에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리고 루칸 백작님도 와계십니다. 함께 있는데, 괜찮겠습니까?”

아이크가 조심스럽게 물어오자, 세이란이 고갤 끄덕였다.

“어차피 루칸 백작의 도움이 필요했었다. 이번 기회에 안면을 터놓는 것도 좋겠군.”

세이란은 서둘러 집무실로 향했다. 그가 집무실의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카일과 루칸 백작이 동시에 자리에서 일어섰다.

“많이 기다린 모양이군.”

“아닙니다, 전하. 조금 전 도착했습니다.”

세이란은 루칸 백작에게 고갤 끄덕여 보인 후, 자리에 앉으며 카일을 보았다.

“어떻게 됐지?”

하지만 카일은 신중한 표정으로 루칸 백작 쪽을 보았다.

“괜찮다. 얼마 뒤에 있을 검술 시합에서 루시타니아 상단이 우릴 돕게 될 것이다.”

안심한 카일이 서둘러 주머니에서 밀봉된 편지봉투를 꺼내 세이란에게 건넸다.

“데칸 상단의 정보원과 거래를 했습니다. 이것이 그가 테란국에서 가지고 온 정보입니다.”

봉투를 받아 든 세이란이 고갤 끄덕였다.

“수고했다, 카일. 정보원인 베일리는 어디에 있지?”

“우리 쪽에 정보를 판 이상 키엘체에 머무르는 건 위험한 것 같아, 다른 곳으로 보낼 계획을 세우는 중입니다.”

“루칸 백작, 그대의 상단은 언제 키엘체를 떠나지?”

“보름 후입니다.”

“그럼 부탁 하나만 해도 될까?”

“혹시 데칸 상단의 정보원인 베일리를 상단에 넣어달라는 말씀이십니까?”

“그렇다. 욕심이 많은 자이긴 하지만, 잘만 구슬린다면 루시타니아 상단의 정보원으로 꽤 쓸 만은 할 것이다.”

“저야 좋습니다. 사실 데칸 상단의 정보원 중 베일리만 한 실력자가 없거든요. 이 일로 데칸 상단과 껄끄러워지겠지만, 충분히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루칸 백작의 말에 세이란이 고갤 끄덕였다. 그러곤 카일이 건넨 봉투를 뜯어 안의 내용을 확인했다.

“뭐라고 적혀 있습니까?”

루칸 백작이 테란국의 정세가 궁금했는지 초조한 얼굴로 물었다.

“아직은 국왕이 물러나진 않은 모양이야. 왕위를 차지할 명분을 찾고 있을 거야. 반란 쪽으로 무게가 실린다면, 모양이 좋지 않을 테니까.”

세이란의 말에 루칸 백작과 카일 역시 동의했다. 세이란이 봉투를 탁자 위에 내려놓으며 말했다.

“루칸 백작, 테란국에 있는 정보원에게 부탁할 일이 있는데, 가능할까?”

“전서구를 띄우면 가능합니다.”

“그럼 대신전과 은밀히 접촉해 보라고 해.”

“테란국의 대신전 말씀이십니까?”

“그래. 테란국의 공주에 의하면 왕위 계승자의 지목권을 갖고 있는 국왕이 대신관에게 칙서를 보낸 모양이야.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첫 번째 공주 쪽에서도 그 칙서를 빼돌려 없애려는 시도를 할 것이다.”

“그럼 저희는 첫 번째 공주보다 한발 앞서, 칙서를 손에 넣으면 되는 겁니까?”

“아니, 우리가 할 일은 칙서의 존재 유무만 확인하면 된다. 만약 칙서를 우리가 갖게 된다면, 테란국의 내정에 간섭한 꼴이거든.”

세이란은 테란국이 어찌 되든 관심 없었다. 다만 알고 싶은 정보가 있었다.

‘테란국과의 마지막 전투에서 내 검에 죽었던 기사의 이름이 분명, 로렌스 루틴 공작이었어.’

그는 자신과 똑같이 미래를 보았고, 바꾸려 했던 자였다. 만약 그자가 예언의 별 아래 태어난 사람이라면, 테란국의 대신관이나 국왕 역시 그자의 예언을 알고 있을 수 있었다.

사실 대신관이나 국왕보다 더 의심이 가는 자는 따로 있긴 했다.

‘예언의 별 아래 태어난 기사와 테란국의 공주라…….’

세이란은 헬로이즈 공주의 보랏빛 눈동자를 떠올리며, 미간을 접었다.

아무리 급박한 상황일지라도 공주가 직접 사신단으로 온 건, 납득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알겠습니다, 전하. 곧 알아보겠습니다.”

루칸 백작이 고갤 끄덕였다.

“그리고 하나 더. 여기 있는 카일을 테란국으로 보냈으면 하는데, 가능할까?”

알베르트 루칸의 시선이 카일에게 향했다.

“그대를 믿지 못해서가 아니라, 정보원을 믿지 못해서 보내는 것이다.”

그제야 알베르트 루칸의 얼굴에 안도의 감정이 떠올랐다.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테란국으로 들어갈 수 있는 루트를 찾아보겠습니다. 그리고 여기. 주문하신 물건입니다.”

세이란이 보랏빛 벨벳 상자를 받아 들고 내려다보았다. 상자를 바라보는 그의 눈빛이 평소와 달리 그윽해져 있었다.

순간 루칸 백작은 속으로 신음을 삼켰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던 황태자가 저런 표정을 짓다니. 대체 그 상대가 누군지 진심으로 궁금했다.

“그럼 저흰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카일과 루칸 백작이 집무실을 나가자, 밖에서 대기 중이던 아이크가 안으로 들어왔다.

“목욕물을 준비해 두었습니다.”

세이란 역시 집무실을 나와 황태자궁으로 향했다. 평소 참석하지도 않는 무도회에 저녁 늦게까지 있었더니, 피곤했다.

‘이건 뭐, 전쟁터에서 밤새 싸운 것보다 더 힘이 드니.’

거기다 사교 시즌이 끝날 때까지 이 짓을 계속해야 한다고 생각하자, 고개가 절로 흔들어졌다. 세이란은 욕설을 뱉어내며 황태자궁으로 향했다.

**

무도회장에서 일찍 빠져나온 것치곤, 자정이 되어서야 키안은 침대에 누울 수 있었다. 온몸이 물에 젖은 솜뭉치처럼 무거워 저절로 눈이 감겼다. 익숙지 않는 드레스를 입고 잔뜩 긴장했더니, 목덜미가 욱신거렸다.

휴우, 이 짓을 사교 시즌 내내 해야 하다니. 머리가 지끈거려 죽을 것 같았다.

“어차피 전하께서 참석하는 파티에만 가면 돼.”

하지만 밤엔 무도회, 낮엔 황실 근위대에 출근 도장을 찍는다면 얼마 가지 않아 몸이 가루가 되어버릴 것 같았다.

“휴우-”

한숨을 내쉬며 키안은 몸을 뒤척였다. 하지만 지친 것과는 달리 이상하게 잠이 오지 않았다.

“자야 해. 지금 자지 않으면 내일 하루가 지옥이 될 거야.”

키안은 억지로 다시 잠을 청했다. 하지만 이내 눈이 떠지더니, 시선이 창문 쪽으로 향했다.

‘설마, 전하께서?’

라고 생각한 순간, 키안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둘러 옷의 앞섶을 확인했다. 다행히 단추가 목까지 채워져 있었다. 하지만 가운을 입기엔 시간이…….

그때 세이란이 유리창을 넘어 방으로 들어왔다.

“뭐야? 아직 안 잤던 거야?”

황제의 독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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