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6 화
순간 침묵이 흘렀다. 세이란은 물론이고, 귀족들 역시 숨을 죽인 듯 말이 없었다. 너무 바보 같았나? 이런 얼빠진 고백을 마치 아름다운 미술품을 감상하듯 말하다니.
키안은 불안감에 슬쩍 눈을 떴다. 그러자 세이란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랬군.”
아, 쥐구멍이라도 있다면 숨고 싶었다. 이런 낯 뜨거운 말을 세이란과 귀족들 앞에서 하게 되다니.
분명 귀족들은 레이디로서 자존심도 없다고, 손가락질할 게 뻔했다.
어쩌지? 내 평판은 바닥에 떨어져, 시궁창에서 구르게 될 텐데.
“풋! 하하, 하하하.”
순간 그의 입술 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러곤 급기야 소리내 웃기 시작했다. 유스타나 제국의 잔혹한 황태자인 그가. 미소라곤 냉소밖에 지을 줄 모른다고 생각했던, 냉혹한 사내가 눈꼬리까지 휘어가며 웃고 있었다.
귀족들은 넋이 나간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가 웃고 있다는 것도 놀라웠지만, 냉기를 지운 그의 얼굴은 숨을 삼킬 정도로 매혹적이었기 때문이다.
“처음이다, 내 앞에서 내 외모에 대해 이렇게 열정적으로 칭찬을 한 레이디는.”
그제야 귀족들은 정신을 차린 듯 고갤 숙였다. 하지만 귀족들의 머릿속엔 똑같은 생각을 했다. 황태자가 릴리스 프로필리아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것.
“제 무례를 용서해 주십시오, 전하.”
키안이 고갤 숙였다. 그러자 그때까지 무릎을 꿇고 있던 키안에게 명령했다.
“일어나도 좋다, 릴리스 프로필리아. 날 웃게 한 레이디를 무릎 꿇릴 순 없으니까.”
세이란이 키안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키안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리자, 그가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감히 내 도움을 거절하는 것이냐, 릴리스 프로필리아?”
거절은 절대 용납하지 않겠다는 오만함이 묻어 있는 목소리였다.
“아닙니다, 전하.”
키안이 재빨리 그의 손을 잡고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감사합니다. 그런데 손을…….”
그제야 귀족들은 황태자인 세이란이 키안의 손을 놓지 않고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왜 놓아야 하지?”
“네?”
“왜 놓아야 하는지 물었다.”
세이란의 뻔뻔함에 키안은 얼굴이 붉어졌다. 왜라니. 당연히 민망해서였다. 귀족들이 빤히 쳐다보고 있어, 부담스러웠다. 키안은 그가 손을 놓아주면 벨라와 함께 바람을 쐬러 밖으로 나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제 손을 계속 잡고 계시다간, 첫 댄스를 놓치실 겁니다.”
순간 세이란이 픽 하고 웃었다. 그 모습에 귀족들의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커졌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었다. 미소는커녕, 귀족들 앞에서 부드러운 눈빛조차 내보이지 않던 황태자가 레이디를 향해 두 번이나 미소를 지었던 것이다.
“그 말은 지금, 내 첫 댄스 상대가 되고 싶다고 돌려 말하는 것이냐?”
“아닙니다. 제가 어찌…….”
키안이 난처한 표정으로 고갤 숙였다.
“싫은 모양이군.”
“네? 그게 무슨……?”
정말 바보가 된 느낌이었다. 그의 질문에, 네? 네? 하는 말만 반복하다니.
“눈치가 없는 건가, 릴리스 프로필리아? 나는 지금 그대에게 첫 댄스를 신청하고 있는 것이다.”
“아, 네. 네에?”
“네라는 대답은 내 댄스 신청을 허락한다는 의미인 건가?”
황태자의 첫 댄스 상대가 결정되자, 귀족들은 실망 가득한 표정이었다. 특히 렌스터 공작의 얼굴을 새파랗게 질렸다. 이 상황이 믿어지지 않는 눈치였다.
“전하, 저는…… 춤에 익숙하지 않습니다. 분명 발을 밟을지도 모릅니다.”
순간 세이란의 녹색 눈동자가 짙어졌다. 그 모습에 키안은 입술을 잘근잘근 씹으며, 얼굴을 붉히는 게 보였다.
“상관없다. 내가 춤을 추고 싶은 상대는 바로 너니까.”
“하지만 저는…….”
키안의 시선이 베로니카를 지나, 헬로이즈로 향했다. 그러자 세이란이 단호한 표정으로 말했다.
“발을 밟혀도 상관없다면 될까?”
세이란의 파격적인 제안에 주변에 있던 귀족들이 숨을 삼켰다. 귀족들에게 평판과 명예는 목숨만큼이나 중요한 것이었다. 특히 황실의 자부심은 이루 말할 필요가 없었다.
그런데 발을 밟히는 망신을 당하는 것까지 눈감아주겠다니…….
“…….”
키안은 얼굴을 붉힌 채, 세이란을 바라보았다. 흔들림 없는 녹색 눈동자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허락해 주겠나, 릴리스 프로필리아?”
낮게 울리는 세이란의 목소리에 키안이 그의 손을 잡았다.
그러곤 그와 함께 댄스 플로어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
‘쳇, 일이 재미있게 돌아가는군.’
제임스 에버콘 공작은 들고 있는 술잔을 꽉 쥐었다. 잔을 채운 술이 위험스럽게 흔들리며, 손으로 흘러내렸다.
하지만 전혀 개의치 않는 얼굴로 황태자인 세이란과 음악에 맞춰 춤을 추고 있는 레이디를 쏘아보았다.
춤에 서툴다고 하더니, 크게 걱정할 정도는 아닌 모양이었다. 음악에 맞춰 춤을 추는 두 사람의 모습은 완벽했다.
그래서 더 화가 났다.
사실 마음속으론 저 시골뜨기 레이디가 세이란의 발이라도 밟아 창피를 당했으면 좋겠다고 은근히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음악에 맞춰 우아하게 움직이는 두 사람의 모습은 심술이 덕지덕지 붙은 눈으로 봤을 때도 흠잡을 곳 없이 완벽했다.
정말 한미한 가문의 여식이 맞는 건가 의심이 들 정도로, 외모 역시 굉장히 아름다웠다. 윤기가 흐르는 벌꿀 빛 금발과 섬세한 이목구비는 굉장히 귀족적이었다.
‘그래 봤자, 가난한 가문의 영애일 뿐이지.’
명문가에서 태어났다면 좋았을 테지만, 이름조차 들어본 적 없는 가문의 레이디였기 때문에 얼마 동안 황태자의 장난감이 되었다가, 곧 돈 많은 귀족 늙은이의 후처가 될 터였다.
‘아카데미 시절부터 도통 속을 알 수가 없으니. 대체 렌스터 공작가의 영애와 테란국의 공주를 놓아두고 얼굴밖에 볼 것 없는 멍청한 레이디를 선택하다니. 설마 날 교란시킬 작정인 건가?’
그런 생각이 들자, 제임스는 눈살을 찌푸렸다.
제길! 며칠 전엔 데칸 상단의 정보원을 빼돌려 내 뒤통수를 치더니, 이번에도 분명 숨은 꿍꿍이가 있는 게 분명했다.
‘뭐, 상관없지. 어쩌면 새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서 있는 렌스터 공작에게 접근할 절호의 기회일지도 모르니까.’
제임스는 들고 있던 잔을 내려놓았다. 그러곤 주머니에서 실크 손수건을 꺼내, 손에 묻은 술을 닦아냈다.
하지만 그는 렌스터 공작가의 영애인 베로니카에게 가는 대신, 테란국의 공주에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곧 첫 댄스의 음악이 끝난다.
테란국의 공주 헬로이즈 앞에 선 제임스는 정중한 태도로 말을 걸었다.
“유스타나 제국의 제임스 에버콘 공작입니다. 무도회에서 공주님을 뵙게 돼, 영광입니다.”
세이란과 키안의 춤을 보고 있던 헬로이즈가 제임스를 향해 고갤 돌렸다. 그녀의 보랏빛 눈동자가 예리하게 제임스를 살피는 게 보였다.
‘그래, 귀족이라면 이 정도는 되어야지.’
제임스는 만족스러운 눈빛으로 헬로이즈를 바라보았다.
“테란국의 헬로이즈입니다. 제게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신 겁니까?”
헬로이즈가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제임스를 보자, 그가 허릴 숙여 정중한 태도로 청했다.
“곧 첫 번째 음악이 끝납니다. 제게 공주님과 춤을 출 수 있는 기회를 허락해 주시겠습니까?”
제임스 에버콘의 댄스 신청에 주변에 있던 귀족들이 호기심 어린 눈빛으로 바라보기 시작했다. 그 시선들 가운데는 렌스터 공작의 것도 있었다. 제임스는 속으로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글쎄요, 저는…….”
“어엇-”
그 순간 세이란의 품에 안겨 춤을 추던 키안이 균형을 잡지 못하고 휘청거리는 게 보였다.
‘그럼, 그렇지…….’
제임스 에버콘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이제 까칠한 세이란이 화를 낼 일만 남은 것이다. 하지만 제임스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내게 기대.”
당연히 불쾌한 표정을 지을 것이라 예상했던 세이란이 릴리스를 두 팔로 안아 들었던 것이다.
“맙소사!”
“전하께서…….”
여기저기서 귀족들의 억눌린 탄성이 새어 나왔다. 그때 키안을 품에 안은 세이란이 옆에 서 있던 에드윈 리치문트를 보며 말했다.
“리치문트 공작, 잠시 자릴 비워야겠다.”
“네, 전하.”
에드윈의 대답이 끝나자 세이란이 귀족들을 향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대들은 신경 쓸 필요 없이 무도회를 즐기도록.”
세이란은 경악에 가까운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귀족들을 뒤로하고, 키안을 안은 채 무도회장을 유유히 빠져나갔다.
**
“이렇게 나와도 괜찮은 겁니까?”
키안이 불안한 눈빛으로 자신을 품에 안고 걷고 있는 그를 올려다보았다.
“당연히 괜찮지. 이젠 그들에게도 생각할 시간을 줘야 하거든.”
세이란의 말에 키안 역시 동의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레이디의 등장에다, 황태자의 새로운 면모까지 보았으니 귀족들에게도 혼란스러운 감정을 추스를 시간을 줘야 할 것 같았다.
“그나저나 너 굉장히 연극에 소질이 있더군. 특히 잘생겼다고 말을 할 땐, 믿을 뻔했다.”
세이란의 지적에 키안이 미간을 좁혔다.
“컨셉을 잘못 잡은 모양입니다. 성격에 맞지 않아 혼났습니다. 거기다 전하께 첫눈에 반한 여인 역할이라니.”
“아니, 굉장히 잘 어울렸다. 청순가련에, 순종적인 레이디. 타고난 건가? 연기를 잘하더군.”
“마차를 타고 무도회장으로 오는 동안 벨라의 충고를 새겨들었습니다. 귀족들은 따박따박 말대답하는 레이디는 매력이 없다고 했거든요.”
세이란이 픽 하고 웃었다. 벨라의 말처럼 대부분의 귀족들이 선호하는 여인상이었다.
“그 덕분에 무사히 넘길 수 있었던 것이군. 네 순진하고 연약해 보이는 얼굴에 모두 속아 넘어가는 분위기였거든.”
세이란의 지적에 키안이 얼굴을 붉혔다. 사실 눈꼬리를 내리느라 얼굴에 경련이 일어, 죽을 뻔했다.
“혹시 전하께서도 그런 레이디를 원하십니까?”
키안의 질문에 앞을 보고 걷던 세이란이 고갤 숙였다. 그러곤 알 듯 모를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넌 어떨 것 같은데?”
그 순간, 그의 뜨거운 숨결이 귓불을 건드렸다. 키안은 그제야 자신이 여전히 그의 품에 안겨 있다는 사실을 의식했다.
“어, 이제 내려주십시오.”
“지켜보는 자들이 있을지도 모르니, 얌전히 있어.”
키안이 고갤 들어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주위엔 아무도 없는 것 같았다.
“그럼, 슬슬 두 번째 작전을 펼쳐야겠군.”
“두 번째 작전이 있었습니까?”
의아한 눈빛으로 고갤 들자, 그가 음흉한 미소를 지었다. 사실 두 번째 계획 따위 없었다. 그저 키안을 끌어안고 있자, 참을 수 없게도 키스를 하고 싶었을 뿐이다.
“여기가 적당하겠군.”
세이란이 걸음을 멈추곤, 키안을 내려놓았다. 바닥에 선 키안이 주위를 살폈다. 자세히 보니 두 사람이 있는 곳은 셀서스 궁의 유리정원으로 통하는 주랑이었다.
“뭘 하시려고……. 흣!”
황제의 독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