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독사과-62화 (62/139)

제 62 화

진심처럼 들렸다. 분명 그가 소문을 만들 생각이라고 했다. 그러니 지금 이 상황은 세이란이 약혼자로서 자신의 역할을 충실히 이행하는 중이었다.

그런데 착각을 할 것만 같았다.

“이제 그만 가봐야겠습니다. 시간이 너무 늦었습니다.”

당황한 키안이 외투의 후드를 머리에 쓰곤 돌아갈 준비를 했다.

심장이 진정이 되지 않았다. 조금 전 혀를 얽고 타액을 삼키는 농밀한 키스를 할 때보다, 심장이 몇십 배는 빨리 뛰는 느낌이었다.

“기다려. 돌아가기 전에 해줄 말이 있다.”

세이란이 키안을 붙잡더니, 진지한 얼굴로 이야길 꺼냈다.

“넌 전쟁이 일어났던 테란국과 인접해 있는 작은 시골 영지의 딸로 소개될 것이다.”

“제가 말입니까?”

“그래. 우리가 처음 만난 건, 숲에서였다. 은빛 늑대의 서식처에서 네가 날 도와준 거지. 그렇게 만났고, 서로 호감을 품었지만 넌 내 정체를 알지 못한 채 우린 헤어진 거지. 그러다 최근에 아버지께서 돌아가신 후, 너는 친척집을 방문하기 위해 키엘체에 왔다가 다시 날 우연히 만나게 된 거야.”

“귀족들이 그 얘길 믿을까요?”

“내가 너에게 홀딱 빠져 있으니, 믿을 거야. 무엇보다, 황궁의 참새들이 소문을 내줄 것이다. 내가 너한테 미쳐 있다고 말이야.”

그 말과 함께 세이란이 고갤 숙여왔다. 그러곤 키안을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보더니, 다정하게 머리카락을 쓸어 넘겨주었다.

두근두근.

심장이 뛰었다. 분명히 세이란이 다정하게 구는 이유가 뭔지 알고 있었다.

‘이건 거짓말이야. 이건 소문을 위해 연극하는 것뿐이야. 절대 착각해선…….’

마음속으로 되뇌었지만, 세이란과 눈이 마주치자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해 아무것도 생각할 수가 없었다. 키안은 재빨리 시선을 피하며, 돌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알겠습니다. 그럼 전 이만 돌아…… 어어엇!”

정말, 오늘은 이상한 날이 분명했다. 긴장했는지, 자꾸만 평소에 하지 않는 실수를 연발하고 있었다.

‘제길, 드레스 자락을 밟다니!’

키안이 드레스를 입은 채 개구리처럼 벌러덩 넘어지는 꼴을 세이란에게 보일 생각을 하자,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하지만 키안의 예상과는 달리 넘어지려는 자신의 몸을 그가 단단히 붙잡았다.

‘뭐지? 지금 이 상황은?’

세이란의 품에 안겨 있는 키안은 그를 올려다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이 상황, 어디서 많이 본 모습이었다. 어디서 봤더라?

“괜찮아?”

“아, 네. 감사합니다, 전하. 자꾸 왜 이런 실수를 하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평소엔 이런 적이 없는데.”

키안이 몸을 바로 하기 위해 그에게서 몸을 떼려 했다. 하지만 그는 놓아주는 대신 고갤 숙여왔다. 그러곤 의미심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이건 굉장히 고전적인 수법이다, 키안. 남자를 유혹하는 레이디들이 가장 많이 사용하는 방법이기도 하지.”

“그런 게 있습니까?”

“응. 책에서 봤다. 이건 남녀가 사랑에 빠지는 기본 공식 같은 거니까, 우린 그대로 따라 해.”

잠깐 책에 연애에 대한 공식 같은 게 있다는 건가? 대체 그 공식이란 게 뭐……? 라고 생각한 순간, 세이란이 입술이 바로 코앞에 있었다.

설마 그 고전적인 공식이란 게, 키스……인 건가?

그제야 키안은 이 상황이 어디서 봤는지 생각이 났다. 세이란의 말처럼 무도회가 열리는 정원에서 넘어지려던 레이디를 붙잡던 귀족들의 모습이었던 것이다.

‘말도 안 돼. 그럼 그런 것들이 모두……?’

두근, 두근.

두 사람의 시선이 얽혔다. 이번엔 격정적인 욕망이 아닌, 설렘 가득한 눈빛으로 그가 자신을 바라보고 있었다.

왜 이렇게 심장이 간질거리는 거지? 왜 이렇게 긴장이…….

키안은 그의 시선에 입술이 바짝 타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어느새 그의 숨결이 입가에 닿았다. 조금 전 키스로 부풀어 오른 입술을 작은 스침에도 민감하게 반응했다.

“눈은 감아야지.”

세이란의 목소리가 나른하게 울렸다. 키안의 눈꺼풀이 무겁게 가라앉았다. 그와 동시에 세이란의 입술이 키안의 입술에 닿았다.

달빛이 두 사람의 어깨 위로 쏟아져 내렸다. 그림처럼 아름다운 모습에 주위의 모든 것이 숨을 죽였다.

**

이른 새벽, 커다란 숄로 얼굴을 가린 시녀 하나가 셀서스 궁을 빠져나갔다. 궁을 나온 시녀는 길가에 멈춰서 있는 마차에 올라탔다.

“대신전으로 가줘요.”

“또 대신전으로 기도하러 가시는 모양이군요. 곧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부인.”

익숙한 듯 마부가 마차를 출발시켰다. 그러자 안에 타고 있던 시녀가 숄을 벗고는 마차에 몸을 기댔다.

덜컹덜컹, 창문을 통해 들어오는 아침햇살에 갈색의 머리카락을 단정하게 묶은 황제 궁의 시녀인 엘렌의 차분한 모습이 유리창에 비쳤다.

“휴우-”

엘렌은 천천히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인 윈슬러가 쓰러진 후, 엘렌은 비번인 날이면 대신전에서 기도를 했다.

하지만 오늘은 대신관으로부터, 급한 전갈이 온 것이다.

사실, 의아했다.

유스타나 제국의 대신관이 일개 황제궁의 시녀인 자신에게 보자는 연락을 취하다니.

엘렌은 불안감에 손끝이 차가워졌다.

“대체 무슨 이유로 날 찾는 걸까?”

엘렌이 고민하는 사이 마차는 어느새 대신전 앞에 멈춰 섰다.

“부인, 도착했습니다. 나오실 때까지 기다릴깝쇼?”

마부의 질문에 엘렌이 마차에서 내리며, 숄을 다시 얼굴에 썼다.

“아닙니다. 대신전에 갔다가 갈 곳이 있습니다. 여기.”

엘렌은 마부에게 품삯을 주곤 대신전으로 향했다. 상앗빛의 흰색과 금색으로 장식된 대신전의 건물이 새벽 여명을 받아 신비로워 보였다.

엘렌은 대신전으로 올라가는 대리석 계단을 한 계단, 한 계단 오르기 시작했다.

**

같은 시각, 렌스터 공작가의 문장이 새겨진 마차가 수도인 키엘체에 들어섰다.

“아가씨, 드디어 키엘체입니다. 무도회에 늦지 않게 도착해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하녀인 젬마가 흥분을 감추지 못하고 마차의 커튼을 열었다. 성 캐서린 수도원으로 떠난 지 벌써 1년이었다. 그녀가 흥분한 채 호들갑을 떨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때까지 마차에 기대 잠들어 있던 베로니카가 눈을 떴다. 그러곤 창밖의 어스름한 여명 사이로 보이는 키엘체를 바라보았다. 익숙한 풍경이 눈에 들어오자, 순식간에 잠이 달아나는 느낌이었다. 그러다 문득 뭔가 떠오른 듯 눈을 빛냈다.

“젬마, 지금 몇 시나 됐지?”

“글쎄요. 로체 거리의 상점가가 문을 열지 않을 걸로 보아, 아직 6시가 되지 않은 모양입니다.”

“그렇단 말이지? 론!”

베로니카가 다급한 목소리로 마부인 론을 불렀다. 그러자 마차를 멈춘 론이 재빨리 마차에서 내려와 창문 앞에 섰다.

“네, 아가씨. 무슨 일이십니까?”

“집으로 가기 전에 들를 곳이 있다.”

베로니카의 말에 젬마는 물론, 론의 시선이 동시에 그녀에게 향했다. 사실 오늘 밤이 사교 시즌의 첫 무도회가 열리는 날이었다. 지금 바로 렌스터 공작저로 가 충분히 휴식을 취한 후 무도회 준비를 해도 빠듯한 시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다짜고짜 들를 곳이 있다니.

“하지만 공작님께서…….”

“오는 길에 비가 와 잠시 늦어진 것이라고 하면 되잖아.”

베로니카의 말에 론이 떨떠름한 얼굴을 했다. 그러자 베로니카가 눈을 깜빡이며, 가련한 표정을 만들었다.

“안 될까? 아버지껜 비밀로 하고 말이야.”

그제야 론이 얼굴을 붉히며 고갤 끄덕였다.

“어디로 모시면 되겠습니까?”

“셀서스 궁으로 가줘.”

“셀서스……. 황제 폐하께서 계시는 그 궁을 말씀하시는 겁니까?”

이번엔 론이 아니라 젬마가 놀란 얼굴로 되물었다.

“그렇다니까. 론, 서둘러. 6시가 되기 전에 가야 해.”

서두르라는 말에 론이 재빨리 마차의 마부 석에 올랐다. 이내 마차가 출발하자, 젬마가 눈을 가늘게 뜨곤 잔뜩 설렌 표정으로 앉아 있는 베로니카를 보았다.

“그렇게 보고 싶으셨습니까?”

“당연하지. 전쟁터로 나가시는 모습도 간신히 봤어.”

그것도 아주 멀리서 본 것이라, 얼굴도 보이지 않았었다. 베로니카는 그게 못내 아쉬웠었다. 전쟁터는 아주 위험한 곳이었다. 그가 다칠 수도 있었고, 운이 나쁜 경우 죽을 수도 있었다. 당연히 그가 돌아올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지만, 후회했었다. 자신이 만든 레이스 손수건을 그에게 건네지도 못했던 게.

“벌써 못 뵌 지 1년이 넘었어.”

그러니 사정 좀 봐달라는 뜻이었다. 젬마는 그런 자신의 주인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젬마, 그렇게 있지만 말고 내 모습이 어떤지 말이나 해줘. 괜찮아? 얼굴이 창백하진 않고? 아, 어쩌지? 볼이라도 꼬집을까?”

젬마는 한껏 들뜬 채, 옷매무새를 점검하는 주인의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사실 유스타나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레이디인 베로니카가 짝사랑 중인 귀족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입에 거품을 물고 뒤로 넘어갈 귀족들이 한두 명이 아닐 터였다.

거기다 짝사랑의 상대를 몰래 훔쳐보기 위해 이른 새벽, 황궁까지 간다는 사실을 알면, 더더욱 그럴 터였다.

‘그것보다, 아가씨께서 황태자비가 되시길 원하는 렌스터 공작께서 이 사실을 아신다면 경을 칠지도 모르지.’

아니, 어쩌면 당장 성 캐서린 수도원으로 보내질 수도 있었다.

“지금으로도 충분히 아름다우세요. 그리고 멀리서 뵙는 거니까, 볼을 꼬집는 것보단, 향수를 뿌리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향수라고?”

“네. 아침이니 과하지 않게 은은한 향으로요. 사실 남자들은 시각뿐만 아니라, 후각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거든요.”

“그래? 그럼 어서 뿌려줘.”

베로니카가 서둘러 손을 내밀었다. 그러자 젬마가 마차 아래 놓아둔 가방에서 향수병을 꺼냈다.

“공작님 앞에서 너무 과하게 웃으시면 안 됩니다. 그분 성품으론 헤프고 경박스러운 분위기의 레이디는 질색하실 것 같거든요.”

“그렇겠지? 워낙 차갑고 무표정한 분이니 말이야.”

젬마가 베로니카의 손목 안쪽과 귓불 아래에 향수를 발라주었다. 곧 은은한 향이 마차 안에 퍼졌다.

“날 보고 반가워하실까?”

젬마는 향수 뚜껑을 닫으며, 약간 회의적인 표정을 지었다. 다행히 자신의 주인은 짝사랑 중인 상대를 생각하느라 자신의 표정을 읽지는 못한 듯했다.

‘검술과 기사단밖에 몰라서, 무도회에도 거의 참석 안 하시는 분인데……. 과연 우리 아가씨를 기억은 하실지 모르겠군. 그래도 사교계에서 가장 아름다운 레이디신데. 당연히 얼굴과 이름 정도는 기억하실 테지?’

하지만 젬마는 불안감을 떨쳐 버릴 수 없었다. 그리고 제발, 그런 불상사가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랐다.

덜컹 소리와 함께 마차가 셀서스 궁 앞에 멈춰 섰다.

“아가씨, 도착했습니다.”

마부인 론의 말에 베로니카가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창밖을 내다보았다. 어스름한 새벽빛에 셀서스 궁이 보였다.

“내려서 기다릴까?”

“멀리서 보고만 가려던 것 아니셨습니까?”

“그러려고 했는데, 막상 오니까 가까이서 뵙고 싶어서. 이렇게 후드를 눌러쓰면, 나인지 모를 것도 같은데. 어때?”

베로니카가 외투에 달린 후드를 쓰며 젬마를 보았다. 후두 밖으로 나온 황금빛 머리카락과 미인형의 뾰족한 턱이 살짝 드러난 것뿐이었지만, 묘하게 눈길을 끌었다. 아무리 감추려 해도 예쁜 건 숨길 수 없는 모양이었다.

“제 생각엔 오늘은 그냥 멀리서 보시고, 성장을 하신 후 정식으로 대면하시는 게…….”

“어떡하지, 젬마? 저기 공작님이셔.”

손톱까지 깨물며 안절부절못하는 베로니카를 보며, 젬마가 고갤 쭉 빼곤 셀서스 궁 쪽을 보았다.

그때 기사단 제복의 남자가 말에서 내리는 게 보였다. 여명에 은빛으로 빛나는 머리카락은 분명, 꽃미남이라고 소문난 레녹스 공작이 분명했다.

“세상에, 젬마. 우리 쪽을 보셨어. 어떡하지? 날 알아보고 온 거면?”

젬마는 레녹스 공작에게서 눈을 떼곤, 그럴 일 없다는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어쩌면 좋아. 이쪽으로 오시고 계셔.”

뭐? 이쪽으로 오신다고? 젬마가 놀라 다시 창문을 보았다. 베로니카의 말대로 흰색과 금색으로 된 기사단 제복을 입은 키안 레녹스 공작이 그들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아가씨, 진정하세요. 최대한 우아하게 앉아 계셔야 합니다. 제발, 입가에 미소는 거두시고요. 레이디로서의 긍지를 잃으시면, 안 된다니까요.”

젬마의 충고에 베로니카가 입가에서 미소를 거뒀다. 그러자 젬마는 재빨리 베로니카의 외모를 정돈한 후, 천천히 마차 문을 열고 밖으로 나갔다.

**

말에서 내린 키안은 셀서스 궁 앞에 서 있는 렌스터 공작가의 마차를 바라보았다.

6시가 조금 안 된 이른 새벽에 공작가의 마차가 궁 앞에 있다니.

키안은 본능적으로 마차 안에 성 캐서린 수도원에 갔다던 렌스터 공작가의 영애가 타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다.

‘키엘체에 돌아오자마자 전하를 뵈러 온 건가?’

그런 생각이 들자, 키안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그러곤 마차로 다가가는 걸 망설이고 있는 자신이 한심하게 느껴졌다.

‘전하께서도 레이디 베로니카께서 돌아오시길, 간절히 바라고 계실 거야. 확인하고 알려 드려야 해.’

키안은 서둘러 렌스터 공작가의 마차가 서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 순간 마차의 문이 열리고 하녀인 듯 보이는 갈색 머리카락의 여인이 그를 향해 고갤 숙였다.

“렌스터 공작가의 하녀, 젬마입니다.”

“키안 레녹스 공작이다. 영애께서 성 캐서린 수도원에서 돌아오신 모양이군.”

키안의 말에 자신을 젬마라고 소개한 하녀가 고갤 들더니, 놀란 표정을 했다.

“저희 아가씨께서 수도원에 가셨던 것을 알고 계셨습니까?”

키안이 눈을 가늘게 뜨곤 하녀인 젬마를 보았다. 뭐에 놀랐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굉장히 흥분한 얼굴이었다.

“키엘체에 돌아오자마자 들었던 소문 중 하나가 바로 그것이었다. 사교 시즌이 되어 돌아오신 모양이군.”

“네, 그렇습니다. 우리 아가씨께선 오늘 황실 무도회에 참석하실 예정입니다.”

황제의 독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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