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황제의 독사과-61화 (61/139)

제 61 화

“너, 괜찮아?”

고갤 든 세이란이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키안을 보며,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별일 아닙니다. 너무 긴장했는지, 위가 욱신거려서.”

“어디 가서 잠깐 앉을까? 얼굴이 창백해.”

“아닙니다. 지금은 괜찮습니다. 사실 부럽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부럽다고?”

“네. 전하의 이런 모습은 처음이라서 놀라는 중입니다. 그래서 부럽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분의 어떤 면이 전하의 마음을 흔들어놓으셨는지, 궁금했습니다.”

세이란이 눈을 가늘게 뜨곤 자신을 바라보는 게 느껴졌다.

‘왜 그런 눈빛으로 날 보는 거지? 마치……?’

키안은 숨을 죽인 채 그와 시선을 마주했다. 그러다 세이란이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처음엔 몰랐다. 이 감정의 정체가 뭔지. 하지만 전쟁터에 있는 동안 깨달았다. 내가 아주 많이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아끼고, 또 그 아이 없인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또다시 심장이 욱신거렸다.

왜 이렇게 안타까운 걸까? 그가 말하는 대상이 자신이 아니란 것쯤은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스스로의 감정을 깨닫고 난 후부터, 아팠다. 그에게 사랑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에 실망할 것도 없었지만, 자꾸만 욕심이 생겼다.

자신에게 향해 있는 세이란의 녹색 눈동자와 마주할 때마다 자꾸만 갖고 싶었다.

감히, 눈앞에 서 있는 유스타나 제국의 황태자를…….

“전하께 애정을 받고 계시는 그분은 행복하실 것 같습니다.”

다행히 목소리는 평소처럼 담담했다.

“그럴까?”

“네. 그러실 겁니다.”

키안의 대답에 세이란의 눈동자가 더욱 짙어졌다. 굉장히 기쁜 모양이었다.

“그럼, 네가 하면 되겠다.”

“네?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난 네가 행복했으면 좋겠거든. 그러니 네가 하라고. 내가 좋아하는 그 사람.”

뭐지? 키안이 눈을 가늘게 뜨곤, 세이란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바라보았다. 분명 조금 전까지만 해도 심각한 얼굴로 이야기하던 그였다.

그런데 순식간에 그의 얼굴엔 장난스러운 감정이 떠올라 있었다. 거기다 농담까지 하다니.

“장난 그만하십시오.”

“부럽다며? 그러니까 부럽지 않게 네가 하면 되겠군.”

키안은 이제 어이가 없었다. 자신은 진지했는데, 세이란이 자신을 놀리는 것 같아 기분이 상하기까지 했다.

“대부분의 레이디들은 나와 눈만 마주쳐도 좋아 죽겠다는 표정인데, 너는 내가 특별히 좋아하겠다는데도 싫은 것이냐?”

키안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곤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말했다.

“혹시 전하께선 제가 몰랐던 심각한 지병이 있으신 겁니까?”

“지병? 그게 뭔데?”

“왕자병 말입니다. 아니, 대부분의 레이디들은 그것을 도끼병이라고도 하더군요.”

키안이 살짝 비꼬자, 세이란이 픽하고 웃었다. 그러곤 고갤 가로젓더니, 즐거운 듯 속삭였다.

“아니, 황태자병이다.”

“풋-”

순간적으로 터져 나온 웃음에 키안이 서둘러 정색을 했다. 그러곤 세이란의 눈치를 살피기 위해 고갤 들자, 그 역시 웃고 있었다.

“이제야 웃는군.”

“죄송합니다. 절 놀리는 것 같아 저도 모르게 그만.”

“발끈했지, 마치 질투라도 하는 것처럼.”

“질투라니, 절대 아닙니다. 제가 왜 질투를.”

“난 질투가 난다.”

세이란이 키안이 쓰고 있는 외투의 후드를 벗겼다. 그러자 달빛에 키안의 아름다운 모습이 드러났다. 투명하고 신비로운 하늘빛 눈동자가 자신을 보고 있었다. 그 모습에 온몸의 피가 뜨겁게 날뛰었다.

“그리고 앞으로는 더 질투할 것 같고.”

키안의 모습은 숨이 막힐 정도로 예뻤다. 하지만 한 가지 아쉬운 건, 자신이 좋아하는 키안의 은빛 머리카락이 가발에 숨겨졌다는 사실이었다.

“저는…….”

무슨 말이든 해야 했다. 하지만 말은커녕, 그의 시선을 마주하는 것만으로도 벅찼다.

왜 또 심장이 뛰는 걸까? 분명 자신을 향한 감정이 아니란 걸 알고 있었지만, 매 순간 그의 말과 눈빛과 표정에 흔들리는 자신이 있었다.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 약자가 된다더니. 그 말이 맞는 모양이었다. 바보처럼, 그의 말에 기뻤다. 그를 사랑해선 안 된다는 결심을 스스로 무너뜨릴 만큼.

“너무 예뻐지지 마. 내가 어떻게 변하게 될지 장담할 수 없을 것 같으니까.”

두근, 두근.

심장이 가슴을 뚫고 나올 것처럼 뛰었다. 하지만 다행인 건, 수년간의 훈련 끝에 어떤 상황에서든 표정을 숨길 수 있다는 사실이었다.

“전하께서 이렇게 빈말을 잘하시는 분인지 처음 알았습니다.”

농담으로 넘길 생각이었다. 하지만 세이란은 정색하며, 또다시 진지한 표정으로 자신을 보았다.

“정말 빈말이라고 생각하는 거야?”

키안이 대답이 없자, 그가 다시 물어왔다.

“너도 잘 알 텐데? 곧 죽어도 빈말을 하지 못하는 성격이란 걸 말이야.”

알고 있었다. 14년 동안 그의 그림자처럼 옆에 있었으니까. 그래서 더 혼란스러웠다.

"키안, 네가 키엘체에 돌아오면 많은 것이 바뀌어 있을 것이다."

지금 이 순간, 왜 그때 일이 떠오르는지 알 수가 없었다. 키안이 혼란스러운 눈빛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초조함 때문인지 자꾸만 입술이 바짝 마르는 느낌이었다.

키안이 혀로 입술을 축이자, 순식간에 세이란의 눈동자가 열기로 짙어졌다.

“제길!”

욕설과 함께 그가 키안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곤 어디론가 무작정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어딜 가시는…….”

하지만 그는 대답해 줄 생각이 없는 듯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어느새 황궁의 정원을 벗어난 두 사람은 건물의 모퉁이를 돌았다. 그리고 그 순간, 세이란이 걸음을 멈추더니, 키안을 어두운 건물 벽 쪽으로 밀어붙였다.

“전하…….”

“하아, 키안.”

순식간에 그가 자신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는 입술을 비벼왔다. 그 선연한 감촉에 키안은 몸을 떨었다. 습기를 머금은 입술이 이내 귓불에 닿더니, 조심조심 더듬었다.

“전하…….”

놀란 키안이 그를 밀어내려 했다. 아무리 인적이 드문 건물 벽이라 할지라도, 이곳은 시녀와 시종들이 수시로 드나드는 황궁이었다. 누가 보기라도 한다면…….

“하아-”

귓불을 빨리는 느낌에 키안이 흠칫 몸을 떨었다. 뜨거운 숨결이 느껴지자, 눈을 질끈 감았다.

“놓아주십시오. 누가 보기라도 하면…….”

키안이 두 손을 그의 가슴 위에 놓고는 밀어냈다. 그러자 귓불을 핥던 그가 고갤 들더니, 잔뜩 쉰 목소리로 속삭였다.

“볼 테면 보라지. 난 지금 너 때문에 미칠 것 같아.”

내내 참고 있었다. 오두막에서 키안이 자신의 입술에 입을 맞추고 돌아간 후부터 심장은 물론, 온몸이 타는 듯 뜨거워 미칠 것 같았다.

하루에 몇 번씩이나 키안이 근무 중인 황실 기사단의 사무실로 가서 얼굴이라도 보고 싶은 걸 참아내느라 인내심의 한계에 다다라 있었다.

그런데……. 이런 모습으로 자신의 앞에 나타나다니.

키안 잘못이었다, 자신의 안에 잠자고 있는 맹수를 깨운 건.

“이제 한계다.”

그의 입술이 귓불에 닿더니 뜨거운 혀로 느릿느릿 핥기 시작했다. 순간 뜨거운 열기가 온몸에 확 퍼졌다. 어깰 움츠리며 키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전하, 싫습니다. 놓아, 흣-”

발끝까지 찌릿찌릿한 감각에 벌써부터 아랫배가 아릿했다. 귓불을 핥던 그의 입술이 이번엔 키안의 입술을 열곤 깊숙이 파고들었다. 집요하게 혀를 얽어오는 행위에 키안의 턱이 바들바들 떨렸다.

“하아, 숨을…….”

쉴 수가 없다는 말을 하려는 순간, 그의 입술이 떨어졌다. 키안이 밭은 숨을 두 번 내쉰 순간, 더는 기다릴 수 없다는 듯 그가 또다시 입술을 겹쳐 왔다. 이번엔 애를 태우듯 입술을 잘근잘근 삼키며 안달이 날 정도로 느른하게 혀를 얽어왔다.

“흣-”

키안은 참지 못하고 그의 목에 팔을 감았다. 그러곤 턱을 살짝 기울이며, 그의 혀가 더욱 깊숙이 들어올 수 있게 했다.

쿡 하고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이내 그의 두 팔이 키안의 허리에 힘껏 두르더니, 농밀하게 입술을 겹쳐 왔다. 순식간에 두 사람의 키스가 열기를 띠며 깊어졌다. 타액으로 젖은 입술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서로를 찾아 하나처럼 녹아내렸다.

“하아- 세이란…….”

참을 수 없는 뜨거움에 키안이 젖은 신음을 뱉어냈다. 다리 안쪽이 욱신거렸다. 그와의 키스가 깊어질수록 자꾸만 짙은 갈증에 몸이 떨려왔다. 두 사람을 둘러싼 공기가 순식간에 뜨겁게 달아올랐다.

“하아, 하아-”

위험했다. 여기서 더 키스를 하게 된다면, 그걸로 끝내지 못할 것만 같았다. 떨어질 것 같지 않던 그의 입술이 멀어졌다.

세이란은 밭은 숨을 내쉬며, 열기로 젖은 눈빛으로 키안을 내려다보며 짓궂게 말했다.

“거짓말쟁이. 이렇게 좋아하면서 싫다고 하다니.”

순식간에 키안의 얼굴이 붉어졌다. 억울했다. 사실 자신이 이렇게 속수무책으로 그의 키스에 빠져든 이유에는 그의 책임도 있었다.

키안이 그의 목에 둘렀던 팔을 내려놓으며, 볼멘 목소리로 말했다.

“그건 전하께도 잘못이 있습니다. 누가 그렇게 키스를 잘하라고 했습니까? 설마 어디서 저 몰래 연습이라도 하신 건 아닐 테죠?”

잠깐, 지금 내가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키안은 순간 혀를 깨물고 싶었다. 하지만 그 말을 뱉고 나니, 속이 좀 후련했다.

“그런 황당한 말은 또 처음 들어보는군. 칭찬과 비난 중 하나만 해. 헷갈리니까.”

“둘 다 틀렸습니다. 제가 한 건, 질투였습니다. 저 역시 질투가 납니다. 그러니 저와 약속한 기간 동안엔, 그 어떤 레이디에게도 시선을 주시면 안 됩니다. 제가 어떻게 변할지, 저 역시 잘 모르거든요.”

그 말고 함께 키안이 그를 밀어냈다. 그러곤 드레스 자락을 붙잡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미쳤어. 그런 말을 잘도 내뱉다니. 이건 마치, 진짜 약혼자라도 된 것처럼 굴고 있잖아.’

키안은 쥐구멍에라도 숨고 싶었다. 얼굴이 화끈거려 미칠 것 같았다. 지금 생각해도 왜 그런 말도 안 되는 소릴 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질투라니. 분명 이상하게 생각하셨을 거야.’

뒤에서 그가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지금 그와 얼굴을 마주치면 창피할 것 같아 무작정 걸었다.

“어엇-”

“죄송합니다. 괜찮으십니까?”

“아, 괜찮습니다. 제가 앞을 보지 않는 바람에. 제 실수입니다.”

평소와 달리 침착하지 못한 자신이 너무도 한심했다. 고갤 들지도 못한 채 스스로를 책망하는 사이 앞에 서 있는 남자의 옷이 어딘지 익숙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잠깐, 이건 옷은 황실 기사단 제복이야.’

놀란 키안이 천천히 고갤 들었다. 그러자 사무엘 스텐호프가 키안의 팔을 잡고는 서 있었다.

“아…….”

어떤 표정을 해야 할지 망설이는 사이, 세이란이 키안에게 손을 뻗어왔다. 순식간에 그의 등 뒤로 숨겨진 키안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황태자 전하.”

세이란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사무엘이 고갤 숙였다.

“도와줘서 고마웠다, 스텐호프.”

사무엘은 황태자인 세이란이 자신을 기억한다는 사실에 감격한 듯 눈을 빛냈다.

“아닙니다. 제가 더 신중했어야 했다고 생각합니다.”

사무엘의 말에 고갤 끄덕인 세이란이 그의 뒤에 몸을 숨긴 채 서 있는 키안을 향해 말했다.

“갑자기 도망치다니, 놀랐잖아.”

“그럴 수밖에 없었습니다.”

키안은 사무엘의 눈치를 보며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게 싫었던 거야? 내가 다른 레이디들에게 눈길을 줄까 봐?”

“네?”

키안이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후, 그만하라는 듯 눈으로 사무엘을 가리켰다. 그러자 그의 눈동자가 장난스럽게 변하더니 짓궂게 말했다.

“걱정할 것 없다. 내 눈엔 그대밖에 보이지 않으니까. 질투할 필요 없다는 뜻이다.”

키안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누가 질투를 했다고 그러십니까?”

“누구긴, 너지.”

세이란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키안을 바라보는 녹색 눈동자 역시 짙어지면서 그윽한 빛을 띠고 반짝였다. 누가 봐도 그의 눈빛은 눈앞에 있는 아름다운 여인에게 홀딱 빠진 모습이었다.

키안이 제발 그만하라는 듯 세이란의 옆구리를 꼬집었다. 평소 레녹스 공작이라면 절대 할 수 없는 일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너무도 자연스럽게 손이 갔다. 그러자 그의 미소가 더욱 깊어졌다.

“흠흠! 전하, 저는 이만 가보겠습니다.”

옆에 서 있던 사무엘이 시뻘겋게 달아오른 얼굴을 하곤, 도망치듯 자릴 떴다. 하지만 세이란은 사무엘에겐 시선조차 주지 않은 채, 키안을 바라보았다.

“혹시 일부러 그러신 겁니까?”

“당연하지. 나 역시 그렇거든. 네 옆에 다른 사람이 서 있다면,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죽일 것이다. 널 바라본다면, 그 눈을 뽑아버릴 테고, 네 몸을 만진다면 그 손을 잘라 버릴 수도 있다.”

지독한 소유욕이었다. 키안은 뭐라고 대답해야 할지 몰라, 어색한 표정으로 말했다.

“욕심이 너무 많으십니다. 그러다 도망이라도 치면…….”

“나도 똑같으면 공평한 것 같은데?”

“네……?”

“그러니까, 내 말은 나도 그렇다고. 내 곁엔 단 한 사람밖에 없다. 그러니 욕심은 아니란 것이다.”

황제의 독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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