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60 화
세이란 역시 결국은 다음 말을 밖으로 뱉어내지 못한 채, 마른침을 삼켰다. 믿을 수 없었다.
분명, 예쁠 것이라고 예상은 했었다. 하지만 막상 키안의 모습을 직접 눈으로 확인하자, 심장이 무섭게 뛰었다.
‘미치겠군, 눈을 뗄 수가 없다니.’
홀린 듯 바라보던 그가 키안을 향해 손을 뻗었다. 허리까지 오는 벌꿀 빛 머리카락이며, 아름답게 호를 그린 눈썹. 그리고 오뚝한 콧날과 장미꽃을 연상시키는 입술은 이슬을 머금고 있는 듯 촉촉했다. 그의 손끝이 입술을 건드리자, 키안의 얼굴이 붉어졌다.
“정말, 너 맞아?”
“이상합니까? 사실 저도 거울을 봤을 때, 놀랐습니다. 화장도 과한 것 같고, 또 드레스도 너무 화려한 것 같기도 하고. 바꿔야 할 게 있으면 말씀해 주십시오.”
키안은 말끝을 흐리며, 자신의 모습에 확신하지 못하는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세이란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눈을 가늘게 떴다. 키안의 모습은 흠잡을 곳 없이 완벽했다. 그런데 여기서 뭐가 더 필요한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바꿔야 할 것이라고?”
“네.”
키안이 신중한 모습으로 주위를 살폈다. 그러곤 세이란 쪽으로 고갤 숙인 후,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제가 레이디 같아 보입니까? 이 모습이라면, 귀족들이 절, 알아보지 못할까요?”
진지하다 못해 심각하기까지 한 키안의 질문에 세이란은 픽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이 모습을 하고도, 불안해하는 건가? 그래서 날 찾아온 모양이군.’
세이란은 제 모습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모르고 있는 키안에게 알려주고 싶었다. 자신의 심장이 얼마나 크게 뛰고 있는지도.
그가 키안의 양쪽 어깨를 붙잡았다. 그러곤 수많은 감정을 품고 물끄러미 응시했다. 순식간에 그의 녹색 눈동자가 그윽해지더니, 차갑게만 보이던 얼굴이 부드러워졌다.
열기를 품은 그의 눈빛에 키안은 물론, 옆에 서 있던 벨라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난, 네가 남자란 걸 알면서도 고백할 뻔했다면, 믿겠어? 네가 원한다면, 여기서 무릎을 꿇고 구애도 할 수 있다.”
낮게 울리는 그의 목소리가 너무도 달콤했다. 거만하고 서늘하기 짝이 없는 유스타나의 황태자가 사랑에 빠진 얼굴로 키안에게 매달리고 있었다. 그 모습에 키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벨라가 보고 있으니, 제발 그만 좀 하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목소리가 떨려 차마 입을 뗄 수 없었다.
‘침착해야 하는데, 왜 이렇게 심장이 뛰는 거지? 이러다 다 알아채겠어.’
키안은 고갤 숙여 표정을 숨겼다. 그가 이렇게 달콤한 연인들의 언어를 거리낌 없이 사용한다는 사실에 놀랐다. 그리고……. 진심인 것 같아 심장의 떨림이 쉽사리 잦아들지 않았다.
두 사람을 둘러싼 공기가 순식간에 팽팽하게 달아올랐다. 그 모습을 보다 못한 벨라가 어렵게 끼어들었다.
“흠흠, 저기 전하. 여긴 보는 눈이 많습니다. 계속 얘기하시려면, 자릴 옮기시는 게…….”
벨라의 목소리에 키안이 재빨리 시선을 돌렸다. 하지만 세이란은 부끄럽지도 않은지 태연한 얼굴로 벨라를 보며 말했다.
“아키텐 공작부인, 미안하지만 혼자 돌아가야겠다.”
“네?”
“그대가 타고 온 마차는 어디에 있지?”
“어, 그게…….”
당황한 표정의 벨라가 키안 쪽을 보았다.
“전하, 함께 돌아가겠습니다. 너무 시간이 늦었습니다.”
“안 돼. 널 이대로 보낼 순 없다.”
세이란이 키안의 손목을 붙잡고는 자신 쪽으로 끌어당겼다. 그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키안과 벨라의 시선이 동시에 그에게 향했다.
하지만 세이란은 뭐가 문제냐는 듯 태연한 얼굴을 했다.
“어, 그러니까…….”
결국 키안 역시 더는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당연하다는 듯 자신의 손을 잡고 있는 세이란을 보자, 괜스레 민망하고 부끄러워 얼굴이 뜨거웠다.
키안이 민망함을 감추기 위해 고갤 돌린 순간, 입가를 씰룩이며 의미심장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던 벨라와 눈이 마주쳤다.
‘아, 미치겠네. 어쩌지? 분명 이상한 쪽으로 오해할 거야.’
키안은 그런 게 아니라고 말하려 했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 변명처럼 들릴 것 같아 입을 다물었다.
“부탁하겠다, 아키텐 공작부인. 대신 오늘에 대한 보상은 충분히 하겠다.”
잠깐, 부탁이라고?
순간 벨라는 자신의 귀를 의심했다. 거만하고 냉정한 황태자의 입에서 부탁이란 말이 흘러나오다니.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세이란의 진지한 표정으로 미루어 보건대, 정중한 부탁이 맞는 모양이었다.
‘세상에, 말도 안 돼. 믿을 수가 없어.’
하지만 더 말이 안 되는 건, 황태자인 세이란이 키안을 바라보는 눈빛이었다.
‘이건 홀딱 빠진 눈빛이야. 남자가 여자에게 느끼는 그런 종류의 감정이라고.’
벨라는 무척이나 만족스러웠다. 사실 그녀는 궁금했다. 키안의 모습을 보고, 세이란이 어떤 표정을 지을지.
‘기대 이상이야. 전하께서 키안에게 눈을 떼지 못하다니.’
벨라는 희망이 생겼다. 만약 세이란이 성별에 상관없이 키안을 사랑하게 된다면, 비밀이 밝혀지는 순간이 그렇게 두렵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리고 키안이 유스타나를 떠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벨라는 키안이 레녹스 공작의 작위를 동생인 카이우스에게 물려준 후, 유스타나 제국을 떠날 계획이란 걸 알고 있었다. 분명 키안은 마지막 순간까지, 그 사실을 비밀로 할 생각이란 것도 알고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제자리를 찾았을 땐, 유스타나 제국엔 키안의 자린 없다는 사실을.
벨라는 세이란을 향해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럼, 저는 혼자 돌아가겠습니다. 대신 릴리스를 잘 부탁드립니다.”
벨라가 키안에게 눈인사를 하는 사이, 세이란이 말했다.
“여기서 기다려. 마차까지 데려다주고 올 테니까.”
그 말과 함께 그가 벨라와 함께 마차가 세워져 있는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벨라는 옆에서 함께 걷고 있는 그를 몰래 훔쳐보았다.
‘오늘은 이상한 것투성이군. 유스타나 제국의 황태자가 이런 상냥한 사람이었나?’
벨라는 그가 베푸는 친절이 바로 키안 때문이란 사실을 깨달았다.
“키안을 내게 데려와 줘서 고맙다.”
순간 벨라는 진심으로 심장이 두근거릴 뻔했다. 분명 자신을 향한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잔뜩 설렌 표정으로 들떠 있는 그는 눈을 뗄 수 없을 만큼 매혹적이었다.
‘정말 희망을 가져도 되는 걸까? 키안의 운명을 그에게 걸어도 되는 걸까?’
벨라는 세이란을 보며, 희망으로 심장이 뛰기 시작했다. 그저 조금 전까지는 바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가능한 희망이었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키안이 여인이란 사실을 알게 된다면, 처음엔 화는 내겠지만 그 역시 기뻐할 것 같았다. 키안이 여인이란 사실에.
‘제발 그렇게만 된다면…….’
어느새 마차 앞에 도착한 벨라는 조금은 들뜬 표정으로 그를 돌아보았다.
“전하, 조금 전 말씀하신 그 보상 말인데요. 아주 값비싸게 받아도 되겠습니까? 제가 필요한 순간에 말입니다.”
벨라의 엉뚱함을 익히 알고 있기에 그녀가 어떤 보상을 요구할지 걱정이 되긴 했다. 하지만 세이란은 키안을 자신에게 데려와 준 보답으로, 완벽한 호구가 되어줄 생각이었다.
“그대가 요구하는 것, 이상의 대가를 받게 될 것이다.”
벨라가 마차에 오르자, 그녀를 태운 마차가 도로를 따라 움직이기 시작했다.
세이란은 마차가 어둠 속으로 사라지자마자, 키안이 서 있는 곳으로 걸어왔다. 그러곤 손을 잡더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우린, 이쪽이다.”
키안은 두 사람이 향하는 방향이 셀서스 궁이란 사실을 깨닫곤, 놀라 그의 팔을 잡아 당겨 멈춰 세웠다.
“잠깐만, 전하. 이쪽은 셀서스 궁입니다.”
알고 가는 것이냐고 묻는 키안을 향해 그가 고갤 끄덕였다.
“알아.”
“알고 있다고요? 그런데도, 여기로 간다는 겁니까?”
놀란 표정으로 서 있는 키안을 보며, 그가 고개까지 끄덕이며 대답했다.
“확인할 생각으로 날 만나러 온 것 아니었어?”
“그랬습니다.”
“그럼, 걱정 말고 따라와.”
세이란이 셀서스 궁의 정문으로 들어가기 전 키안의 외투에 달린 후드를 머리에 씌워주었다.
“이건, 소문을 위해서다.”
“소문이요?”
“나에게 여인이 있다는 소문을 만들어야지. 하지만 얼굴이 알려지면, 네가 곤란해질 테니 무도회까진 비밀로 해야겠지?”
그제야 키안은 그의 의도를 파악했다.
“그럼 지금부터 시작인 겁니까?”
“맞아. 그리고 난 지금부터 완벽하게 너에게 빠진 남자가 될 것이다.”
나에게 빠졌다니. 키안은 조심스럽게 고갤 들어 그를 보았다. 그의 말처럼 세이란은 한시도 눈을 떼고 싶지 않다는 듯 자신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고 있었다. 그 노골적인 눈빛에 얼굴이 다 붉어질 정도였다.
“흠흠.”
키안이 민망한 듯 시선을 피하며 헛기침을 하자, 세이란이 은근한 목소리로 물어왔다.
“어때? 네가 보기에 성공할 것 같아?”
그의 더운 숨결이 뺨에 닿았다.
“떨어지십시오. 너무 가깝습니다.”
키안이 손을 뻗어 그의 얼굴을 밀어냈다. 그러자 그가 자신의 손을 붙잡더니, 손바닥에 입술을 댔다.
“전하!”
놀라 손을 빼내, 뒤로 감추자 세이란이 장난기 가득한 눈빛으로 키안을 보며 말했다.
“그 표정, 굉장히 마음에 들어.”
“…….”
자신이 어떤 표정을 짓고 있는지 상상이 되지 않았다. 분명 당혹감에 놀라 눈을 커졌을 테고, 얼굴을 잘 익은 토마토처럼 붉어져 있을 게 뻔했다. 거기다 표정 또한 어색할 터였다. 그런데 그런 이상한 표정이 마음에 들다니. 그의 취향은 굉장히 특이한 모양이었다.
“잠깐, 손 좀 내밀어봐.”
“싫습니다. 이번엔 또 무슨 장난을 하시려고요? 절대 안 됩니다.”
키안이 고갤 가로저었다.
“줄 게 있어서 그래. 그러니 앞으로 내밀어봐.”
여전히 머뭇거리는 키안에게 그가 믿어도 된다는 표정으로 재촉했다.
“응? 어서.”
쭈뼛쭈뼛 손을 내밀자, 그가 주머니에서 황태자의 상징인 검은 사자가 양각된 회중시계를 꺼냈다. 달칵 소리와 함께 회중시계의 뚜껑이 열렸고, 그 안엔 세이란의 이니셜이 새겨져 있었다.
“이건 왜?”
“앞으로 문지기에게 이걸 보이도록 해. 언제 어느 때든 셀서스 궁에 들어올 수 있게.”
그가 회중시계의 뚜껑을 닫은 후, 키안의 손에 쥐어주었다. 손에 닿는 묵직하고 차가운 시계의 감촉에 키안은 손끝으로 검은 사자를 더듬었다. 금으로 세공된 시계와는 달리 검은 사자는 흑요석으로 되어 있었다.
기분이 묘했다.
그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물건을 몸에 지닌다는 건, 낯설고 심장이 두근거리는 일이었다.
“이제 네 것이다. 잃어버리지 마.”
키안이 고갤 끄덕인 후, 그를 따라 셀서스 궁의 성문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키안은 본능적으로 쓰고 있던 후드를 깊이 눌러썼다.
잠시 후 두 사람은 문지기 앞에 섰다. 세이란은 키안의 손을 잡고는 문지기 앞에 시계를 내밀었다. 그러곤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앞으로 잘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것을 가진 사람이 날 찾아 궁에 온다면, 언제가 되었든 무조건 들여보내도록 해.”
“명심하겠습니다, 황태자 전하.”
유스타나 제국의 황태자의 회중시계를 갖고 있는 레이디. 그 의미는 너무도 명백했다. 바로 눈앞에 서 있는 레이디가 황태자인 세이란이 마음을 허락한 유일한 여인이란 뜻이었다.
문지기가 고갤 숙이자, 세이란이 키안의 손을 잡고는 궁 안으로 들어갔다. 키안은 고갤 돌려 넋이 나간 표정으로 서 있는 문지기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충격을 받은 얼굴이었다. 그리고 세이란의 의도대로 두 사람을 둘러싼 소문이 빠르게 퍼질 것이란 사실 역시 짐작할 수 있었다.
“그래도 되는 겁니까?”
“뭐가?”
“그러니까 나중에 말입니다. 나중에 전하께서 마음에 두고 계시다는 그분께서 오늘 일을 알게 된다면, 서운해하시지 않으실까 걱정이 되어서요.”
앞서 걷던 세이란이 걸음을 멈췄다. 그러곤 정말 궁금하다는 듯 키안을 돌아보았다.
“난 잘 모르겠군. 만약 너라면 어떨 것 같은데?”
잠깐, 내가 한 질문에 오히려 질문을 해오다니. 뭔가 좀 이상했다.
“그걸 왜 저한테 물으십니까?”
“그냥 난 전혀 알 수 없는 마음이거든. 그래서 넌 아나 해서.”
키안은 잠시 생각에 잠겼다. 만약 나려면 난…….
“미안할 것 같습니다.”
세이란의 눈빛이 흥미롭다는 듯 빛났다.
“미안하다고?”
“네. 그리고 고마울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네 말은 원망하고 불쾌한 것이 아니라, 미안하고, 고맙다는 거지?”
“네, 만약 저라면 말입니다. 하지만 그분은 다르실 수도 있습니다. 여인의 마음은 워낙 복잡 미묘해서요.”
키안이 자신 없는 얼굴로 말했다. 그러자 전적으로 자신의 말을 믿지 말라는 뜻이었다.
“상관없다. 네 생각을 들었으니까. 지금 나에겐 네 생각이 중요하거든.”
“전하, 하지만…….”
순간 세이란이 키안을 꼭 끌어안았다. 그러곤 정말 안심했다는 듯 속삭였다.
“다행이다. 정말 걱정했거든. 모든 걸 다 알게 됐을 때, 날 원망하고 미워할까 봐 심장이 조이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젠 괜찮아.”
안도하는 그를 보며, 키안은 눈을 가늘게 떴다.
‘내 의견을 전적으로 신뢰한다는 건가? 이러다 만약, 그분이 싫다고 한다면 어쩌지?’
키안은 다시 한 번 이건, 자신의 의견일 뿐이라고 말하기 위해 입술을 달싹였다.
“너와 비슷한 성격이다. 그러니 분명 같은 생각일 거야.”
세이란은 마치 자신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듯, 설명을 덧붙였다. 키안은 고갤 끄덕였다.
‘대답을 들었는데, 왜 이렇게 마음이 답답한 거지?’
이번엔 심장 역시 욱신거렸다. 누군가 날카로운 실로 심장을 꽉 움켜쥐는 느낌이었다.
‘감히, 내가 그분께 질투를 느끼다니.’
키안은 그런 자신이 너무도 한심하게 느껴졌다. 자신이 절대로 해서는 안 되는 것 중 또 하나가 바로, 세이란이 마음에 담은 여인에게 질투하는 것이었다.
황제의 독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