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9 화
8장. 황실 무도회
“세상에, 키안. 이것 좀 봐. 여기서부터 저기까지, 로웬 부인이 만든 최고급 드레스로 가득 차 있어.”
벨라는 화이트가 23번지의 옷장을 가득 채운 드레스를 보며, 연신 감탄사를 뱉어냈다.
“대체 이걸 언제 다 준비하신 거지? 내가 알아본 바론, 분명 로웬 부인의 의상실은 사교 시즌이 끝난 후에나 자리가 생긴다고 했었거든. 아마, 이 드레스들을 만드느라 그런 모양이야.”
레이디들의 드레스에 대해 전혀 아는 게 없는 키안이었지만, 옷장을 가득 채운 드레스들은 하나같이 자신이 좋아하는 색들이었다.
“내가 다 좋아하는 색들이야.”
키안의 말에 벨라가 뒤를 돌아보았다.
“정말? 그렇다면, 놀랄 일이네. 전하께서 그렇게 섬세하신 분인 줄 몰랐거든. 네가 좋아하는 색들로 드레스를 만들라고 명하시다니 말이야.”
벨라가 의외라는 듯 말했다. 사실 키안 역시 벨라의 말에 동의했다.
그날 오두막에서 돌아온 후, 키안은 최대한 황궁에서 세이란과 마주치지 않기 위해 의식적으로 노력했다. 세이란에게 이것이 마지막이라고 말하지 못했다.
하지만 자신이 두 번 다시는 그 오두막을 찾지 않는다면, 그 역시 알게 될 터였다.
두 사람의 비밀 만남은 끝이 났다는 걸.
무엇보다 세이란은 자신이 누군지 알지 못했다. 그가 자신을 찾을 방법은 전혀 없었던 것이다.
또다시 심장이 욱신거렸다. 키안은 애써 감정을 억제한 채 벨라를 올려다보았다.
‘이렇게 끝내는 게 맞아.’
키안은 최대한 담담한 표정으로 옷장을 가득 채우고도 남을 정도로 많은 드레스와 각각의 드레스에 맞게 제작된 최고급 레이스 장갑과 수제 신발. 그리고 자신의 눈동자 색을 닮은 아름다운 보석을 천천히 응시했다.
마치 로체 거리의 의상실을 통째로 옮겨다 놓은 느낌이었다.
“키안, 이리 와서 입어봐. 아니, 아니다. 우선 화장부터 하자. 아니, 가발부터 써봐야 하는 건가?”
잔뜩 들뜬 표정으로 벨라가 뭘 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물건들을 하나하나 들었다 놨다 했다. 키안은 그런 벨라를 보며, 피식 웃었다.
키안은 한쪽 벽을 가득 채운 가발 쪽으로 손을 뻗으며 말했다.
“우선 나에게 맞는 가발부터 찾는 게 좋을 것 같아, 벗겨지지 않는 튼튼한 것으로.”
키안의 말에 벨라가 웃음을 터뜨렸다. 아름다운 것보단 실용성을 먼저 생각하다니.
“그럼 예쁘면서, 튼튼한 걸로 하자. 키안, 나만 믿어.”
벨라가 의욕적으로 말했다.
“너만 믿을게, 벨라.”
두 시간 후, 키안은 거울 앞에 서 있었다. 정말, 믿어지지 않았다. 거울 속에 있는 신비롭고 아름다운 레이디가 자신이라니.
키안은 난생처음 보는 낯선 자신의 모습에 뭐라 말을 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사실 벨라와 파튬의 가면무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드레스를 입었다. 하지만 그때와는 전혀 달랐다.
“키안, 어때? 마음에 들어?”
키안이 거울에서 시선을 떼곤, 벨라를 향해 돌아섰다.
“벨라, 이게 정말 내가 맞아?”
“당연하지, 키안. 이게 바로 너야. 네 진짜 모습.”
자신의 모습이라고 했지만, 키안은 믿기지 않았다.
“키안, 어떡하지? 네 모습에 왜 이렇게 눈물이 나는 건지 모르겠어. 나, 주책인가 봐.”
벨라가 손등으로 붉어진 눈가를 훔쳤다. 그 모습에 키안이 벨라에게 다가가 꼭 끌어안았다. 말하지 않아도 알게 되는 감정이란 게 있었다.
그저 눈이 마주치고, 꼭 끌어안고만 있어도 위안이 되고 힘이 되는 그런 감정이.
“벨라, 고마워.”
고맙다는 말속엔 많은 감정이 담겨 있었다.
일곱 살 생일에 벨라가 레녹스 공작가의 옥탑을 올라오지 않았다면 어땠을지 생각해 보았다.
끔찍했다.
혼자 남겨진 키안에게 벨라는 자신의 비밀을 공유한 유일한 친구였다.
사방이 막힌 현실 속에서 숨을 쉴 수 있는 유일한 곳이 바로, 벨라였다. 이건, 세이란에게조차도 느낄 수 없는 그런 감정이었다.
“아름다워, 키안. 내가 지금까지 본 그 어떤 레이디들보다, 네가 제일 예뻐. 이번 사교 시즌에 넌, 유스타나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레이디가 될 거야.”
키안은 벨라를 놓아준 후, 다시 거울을 통해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허리까지 오는 풍성한 금발의 가발이 하늘빛 눈동자와 너무 잘 어울렸다. 화장으로 인해 투명해진 피부는 상아처럼 깨끗했고, 모양 좋은 입술은 장미 빛깔로 물들어 있었다.
지금 자신의 모습은 황실 기사단의 레녹스 공작이라곤 생각할 수 없을 정도였다.
“안 되겠어, 키안. 우리 셀서스 궁으로 가서 전하를 만나 뵙도록 하자.”
“뭐, 전하를? 안 돼. 그러다 들키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니까 가보자는 거야. 어차피 이틀 후면 무도회잖아. 그전에 시험을 해봐야지.”
벨라의 말처럼 확인을 해보면, 무도회에 참석하는 게 그리 두렵지는 않을 것 같았다. 하지만 그 대상이 세이란이란 게 문제였다. 아직은 그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키안, 가자. 가서 전하께 네 모습을 보여 드려야지. 그러니 어서 서둘러. 나는 너무 기대가 돼. 전하께서 네 모습을 보고 어떤 표정을 지을지 말이야. 네가 남자라고 생각하고 있으면서도, 너에게 홀딱 반하지나 않을까 걱정도 되고 말이야.”
“그런 일은 절대 없어.”
키안이 자신 없다는 듯 고갤 가로저었다. 그러자 벨라가 키안의 손을 잡고는 의미심장한 얼굴을 했다.
“키안, 그건 모르는 일이야. 그리고 어차피 무도회가 시작되기 전에 네 모습을 전하께 한번은 보여야 하잖아. 내 생각엔 지금이 딱 좋은 기회인 것 같아. 멋지게 전하의 심사를 통과하는 거지.”
세이란이 자신의 모습을 보며 평가를 할 리는 없었다. 하지만 벨라의 말처럼 그가 만족한다면, 훨씬 마음은 편할 것도 같았다.
“통과할 수 있을까?”
“그러니까 각오 단단히 해. 황태자 전하는 네가 넘어야 할, 첫 난관이 될 테니까.”
첫 난관이라고? 사실 세이란을 넘지 못한다면, 유스타나 제국의 귀족들을 속이는 건 불가능했다.
키안은 마음이 복잡했다. 아직은 그를 만나는 게 망설여졌다. 하지만 이내 세이란과 약속한 가짜 약혼녀 역할을 충실히 해내는 것이 자신의 감정보다 더 중요하다는 결론에 다다랐다.
키안이 천천히 심호흡하곤,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러곤 벨라에게 고갤 끄덕였다.
“가자, 벨라. 전하를 뵈러.”
**
오두막에서 돌아온 후 세이란의 입가엔 자꾸만 미소가 떠올랐다. 시종장 아이크를 비롯해, 법무대신인 에드윈 리치문트는 그런 세이란을 보며 걱정하는 눈치였다.
‘쳇, 과도한 업무로 인해 넋이 나갔다고 생각하다니.’
세이란의 모습은 어디까지나 사랑에 빠져 나사 하나가 빠진 덜떨어진 모습이었다. 하지만 이상할 정도로 주변 사람들은 세이란에게 여자가 생겼다는 사실을 추호도 의심하지 않는 눈치였다.
그러고 보니, 자신의 이런 모습을 아는 유일한 사람은 키안밖에 없었다.
“벌써, 보고 싶군. 감정을 주체할 수 없을 것 같아서 무도회 전까지 일부러 만나지 않으려 했는데.”
세이란은 오늘 일이 끝나면, 키안을 만나러 가야겠다고 생각했다. 며칠 동안 보지 못했더니, 금단 현상이 일 것 같았다.
“그나저나, 패트리샤와 카일은 무사히 일을 끝마쳤는지 모르겠군. 생각보다 데칸의 정보원은 약은 자인 것 같았는데 말이야.”
세이란은 셀서스 궁의 성벽에 서서, 로체 거리 쪽을 응시했다. 어둠이 내려앉기 시작할 무렵, 데칸 상단의 정보원이 키엘체의 성문을 통과했다는 연락을 왔었다.
그의 예상대로 데칸 상단의 정보원인 베일리는 욕심이 많은 자였다. 키엘체로 돌아오자마자, 데칸 후작이 있는 상단으로 가는 대신 파튬으로 향한 것이다.
‘자신이 들고 있는 정보가 얼마만큼의 값어치가 있는지 먼저 확인해야 했겠지.’
세이란은 주머니에서 회중시계를 꺼내 시각을 확인했다.
밤 11시. 지금 시각이면 패트리샤와 카일을 중심으로 한 비밀 기사단인 ‘블랙’이 움직였을 것이다.
사실 그들의 예상대로라면, 사흘 전에 데칸 상단의 정보원인 베일리는 키엘체에 도착했어야 했다.
하지만 키엘체로 오던 도중 베일리는 도적 떼를 가장한 괴한들에게 공격을 받았다. 다행히 베일리를 뒤따르던 비밀 기사단인 ‘블랙’이 그들을 도왔고, 데칸 상단의 정보원인 베일리는 아무런 의심 없이 블랙 기사단의 도움을 받아 키엘체로 도착했다.
“도적 떼라니, 운이 좋았어.”
세이란은 카일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성벽에 기대섰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평화였다. 전쟁이 끝나자마자 황제인 윈슬러가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키엘체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 후 세이란의 일상은 밀린 업무를 처리하고, 황제의 독살에 가담한 귀족들을 찾아내느라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하루에 세 시간 이상 잠을 잔 경우는 손에 꼽을 정도였다.
“휴우-”
세이란은 전쟁터에서 돌아온 후 처음으로 만족스러울 때까지 길게 숨을 내쉬었다. 답답한 마음이 조금은 풀리는 느낌이었다.
성벽에 몸을 기댄 세이란은 카일이 돌아오기 전까지 휴식을 취하기 위해 눈을 감았다. 그 순간 아래에서 들려오는 소란스러움에 미간을 찌푸렸다.
‘대체 이 시각에 누구지?’
세이란은 몸을 바로하고 셀서스 궁으로 들어오는 문 쪽을 내려다보기 위해 허릴 숙였다. 그러자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하지만 세이란이 서 있는 성벽 위에선 그림자만 보였다.
하나는 문지기의 것으로 보였고, 남은 그림자는…… 둘이었다.
“죄송합니다, 아키텐 공작부인. 통행증이 없인 황궁에 들어갈 수 없습니다.”
잠깐, 아키텐 공작부인이라고? 대체 그녀가 이 시간에 왜 나를 찾아온 거지?
그것도 잠시, 세이란은 무심한 표정으로 몸을 바로 했다. 그와는 전혀 상관없는 일인 것이다. 세이란이 궁으로 돌아가기 위해 몸을 돌렸다. 그때 다시 여인의 조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전하께 제가 왔다고 한다면, 만나 주실 거야. 그러니 이걸 전하께…….”
“사정은 잘 알겠지만 원칙을 깰 순 없습니다, 아키텐 공작부인.”
깐깐하게 말하는 문지기의 대답에 벨라가 아닌, 다른 여인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벨라, 돌아가는 게 좋겠어.”
순간 세이란이 걸음을 멈췄다. 표정 없던 녹색 눈동자가 흔들리더니, 수많은 감정을 담고 그윽해졌다. 너무도 익숙한 목소리였다. 투명하고 차분한, 그래서 세이란이 좋아하는 바로 그 목소리였다.
“설마, 키안?”
어느새 세이란이 성벽의 계단을 내려가고 있었다. 심장이 뛰었다. 기대감과 설렘으로 세이란의 눈동자 역시 기쁨으로 빛나고 있었다.
**
셀서스 궁의 성문 앞에서 20분 넘게 문지기와의 실랑이가 계속되자, 키안은 불안해졌다. 지금 이 시각엔 셀서스 궁의 정문을 지키는 자가 문지기 하나뿐이었지만, 30분 후 자정이 되면 성문을 지키는 문지기를 대신해 기사단으로 교체될 시각이었다.
10여 명이 넘는 기사들이 성문을 지킬 테고, 그렇게 되면 황실 기사단의 누군가와 얼굴을 마주칠 수도 있었다. 위험했다.
“벨라, 돌아가는 게 좋겠어.”
키안이 벨라의 팔을 붙잡으며, 말했다. 그러자 벨라의 얼굴에 실망한 기색이 역력했다.
“정말 돌아갈 생각이야? 전하를 만나 뵙지도 않고?”
“어쩔 수 없잖아. 통행증을 준비하지 못한 건 우리의 잘못이니까.”
키안이 문지기를 향해 고갤 끄덕여 보이곤, 벨라를 잡아끌었다.
“아쉬워. 전하께서 놀라시는 모습을 꼭 보고 싶었단 말이야.”
사실 키안은 세이란은 만나지 못했다는 사실보단, 하루에 두 번 황실 기사단으로 출퇴근할 때마다 어김없이 마주치는 문지기가 자신을 알아차릴까 자꾸만 긴장이 됐다.
‘다행이야. 날 알아보진 못한 것 같아.’
키안은 안도했지만, 서둘러 이곳을 떠나고 싶었다.
“돌아가자, 벨라. 시간이 너무 늦었어.”
키안의 말에 벨라가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갤 끄덕였다.
“알았어. 날이 오늘만 있는 건 아니니까. 사교 시즌이 시작되면, 전하의 표정은 질리도록 볼 수 있을 테니까.”
다시 기운을 차린 벨라가 환하게 웃었다.
그때였다. 성문 쪽에서 소리가 들려왔다. 그러곤 성큼성큼 걸어오는 발소리가 들리더니, 누군가 키안의 팔을 확 끌어당겼다.
“설마, 너……?”
세이란이 외투의 망토를 깊이 눌러쓴 채로 서 있는 키안을 내려다보았다. 그의 강렬한 시선에 키안이 입술을 깨물며, 고갤 숙였다.
“전하.”
그 순간 세이란이 참지 못하고 키안의 얼굴을 확인하려는 듯 후드 쪽으로 손을 뻗어왔다.
두근, 두근.
심장이 뛰고 있었다. 그의 손이 외투의 후드에 닿는 데까지 아주 짧은 시각이었지만, 키안은 손바닥에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사락 소리와 함께 쓰고 있던 후드가 벗겨졌다. 키안이 바짝 언 표정으로 고갤 들었다. 그러자 익숙한 녹색의 눈동자가 내려다보고 있었다.
“전…….”
하지만 키안은 다음 말을 입속으로 삼킨 채,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세이란의 강렬한 눈빛에 귓불이 붉게 달아올랐다.
“너……?”
황제의 독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