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7 화
“황태자비 후보라고 하셨습니까?”
키안이 놀란 표정으로 헬로이즈를 보았다. 그러자 키안의 반응을 충분히 예상한 듯 헬로이즈가 고갤 끄덕였다.
“제가 테란국을 떠나 유스타나에 온 이상, 무슨 일이 있어도 국혼을 성사시킬 생각이거든요. 전하의 마음을 사로잡을 겁니다.”
굉장한 자신감이었다. 키안은 그런 헬로이즈를 보며, 자신이 무척이나 작게 느껴졌다.
겉모습은 황실 기사단의 단장에, 레녹스 공작가의 후계자였지만, 키안에겐 언제나 어둡고 움츠러드는 마음이 존재했다. 그래서인지 솔직하고 당당한 헬로이즈를 보자 괜스레 주눅이 들었다.
“그래서 드리는 말인데, 혹시 레이디 베로니카에 대해 알 수 있을까요?”
“렌스터 공작가의 베로니카 영애를 말씀하시는 겁니까?”
“네. 테란국을 떠나오기 직전 전하와 렌스터 영애의 스캔들에 대해 들었습니다. 그래서 혹시나 레녹스 공작께선 잘 알고 있지 않을까 해서요.”
키안은 뭐라고 해야 할지 몰라 잠시 망설였다.
“죄송합니다, 제가 또 어려운 부탁을 드린 모양입니다.”
“그런 게 아니라, 저 역시 드릴 말씀이 없습니다. 전하께선 사적인 부분에 대해선 저에게도 말씀하지 않으십니다.”
“아, 그랬군요.”
“제가 해드릴 수 있는 건, 렌스터 영애께선 지금 성 캐서린 수도원에 계시다는 정도입니다. 조만간 돌아올 것처럼 보이지만요.”
키안의 대답에 헬로이즈가 만족스러운 듯 고갤 끄덕였다. 자신 역시 베로니카가 수도원에 있다는 소문은 들어 알고 있었다.
“두 번밖에 보지 않았지만, 전하는 대하기 어려운 분인 것 같아요. 특히 무슨 생각을 하시는지 표정만으로 전혀 알 수가 없어, 더 무서운 것 같기도 하고.”
그때 노크 소리와 함께 아레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들어와, 아레오.”
문이 열리고 쟁반을 든 아레오가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곤 탁자에 찻잔을 내려놓은 후, 김이 모락모락 나는 차를 찻잔에 따라주었다.
“고맙다, 아레오.”
“고마워요.”
헬로이즈의 말에 아레오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곤 부끄러운 듯 후다닥 사무실을 빠져나갔다. 그렇게 두 사람은 조용히 차를 마셨다.
잠시 후 차를 다 마신 헬로이즈가 돌아가려는 듯 자리에서 일어섰다.
“제가 너무 시간을 많이 빼앗은 것 같군요. 다음엔 제가 별궁에서 테란국의 차를 대접하고 싶군요.”
“기회가 된다면, 초대에 응하겠습니다.”
“그 말씀은 전하께서 허락하신다는 전제가 깔려 있는 것 같군요.”
“죄송합니다, 공주님.”
“뭐, 어쩔 수 없죠. 아쉬운 쪽은 저니까요. 공작님과 차를 마시고 싶어지면, 먼저 전하의 허락을 받도록 하죠.”
키안의 사과에 헬로이즈는 그것도 상관없다는 듯 말했다.
“살펴 가십시오, 공주님.”
테란국의 공주인 헬로이즈가 가고 난 후, 드레이크가 심각한 표정으로 키안에게 다가왔다.
“왜 테란국의 공주가 단장님을 찾아온 겁니까?”
잔뜩 경계심을 드러내는 드레이크를 보며, 키안이 말했다.
“황태자비가 되실지도 모르는 분이다.”
“말도 안 됩니다. 전하께서 적국의 공주를…….”
“전쟁은 끝났다, 드레이크. 사신단까지 온 마당에, 적의는 숨기도록 해. 전하께서 난처해지실 수도 있다.”
키안의 지적에 드레이크가 마지못해 고갤 끄덕였다.
“하지만 전하께서 저분을 황태자비로 맞아들이신다면, 실망할 것 같습니다. 죄송합니다, 단장님. 이런 말씀을 드리게 돼서.”
드레이크가 건물 밖으로 나가 버렸다.
사무실에 혼자 남겨진 키안은 한숨을 내쉬었다. 충분히 드레이크의 심정이 이해가 갔다. 전쟁이 끝이 나긴 했지만, 그 전쟁을 통해 서로를 형제처럼 의지하던 황실 기사단의 동료를 잃었다.
“난, 정말 못난 사람인 모양이야.”
아름다운 테란국의 공주가 황태자비로 안 되는 이유를 자신 역시 찾고 있었다니. 키안은 드레이크의 말에 안도하는 자신을 보며, 누구에게도 보이고 싶지 않은 속마음을 들킨 느낌이었다.
마음속 밑바닥에 있던, 어둡고 진득한 검은 질투심이 모습을 드러냈다.
‘질투였던 거였어.’
테란국의 공주인 헬로이즈를 처음 봤을 때부터, 가슴을 짓누르던 답답한 감정은 그녀에 대한 질투였다. 그저 외면하고 싶었을 뿐이었다.
“질투였다니.”
한숨이 새어 나왔다. 이젠 부정할 수 없는 감정이었다.
자신은 황태자인 세이란을 사랑하고 있었다. 키안이 해선 절대 안 되는 일이 바로, 그에게 마음을 주는 것이었는데.
결국…….
‘어떡하지? 어쩌면 좋지? 그냥 욕망이길 바랐는데. 육체적인 끌림이기만을 바랐는데…….’
키안의 하늘빛 눈동자가 절망으로 흐려졌다. 정말, 최악이었다.
오늘 밤이 블랙, 아니, 세이란이 말했던, 일주일 후 자정이었다.
키안은 오두막으로 접어드는 길목에서 말을 내렸다. 말고삐를 나무에 단단히 묶어놓은 후, 천천히 심호흡했다. 이 좁다란 오솔길을 걸어가면, 그 끝에 오두막이 있었다.
“처음도 아닌데, 왜 이렇게 떨리는 거지.”
키안은 식은땀이 밴 손바닥을 옷자락에 문질렀다. 하지만 긴장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진정해. 이렇게 떨다간, 세이란 님께서 이상하게 생각하실 거야. 나란 걸, 눈치챌지도 몰라.’
키안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가 자신을 알아본다면, 모든 게 끝이었다. 스스로의 감정을 깨달은 후, 키안은 이곳에 오는 걸 망설였다.
하지만 와야 했다. 와서, 그에게 말을 해야 했다.
‘다신 세이란 님을 만나선 안 돼. 이런 만남이 계속될수록, 더는 내가 키안 레녹스란 사실을 숨길 수 없을 거야.’
키안은 오늘을 마지막으로 그와 만남을 그만둘 생각이었다.
‘그러니 오늘만이야. 오늘만, 이대로 있고 싶어.’
키안은 눈을 질끈 감고는 천천히 숨을 내쉬었다. 욕심이었다. 고귀하고 아름다운 빛 가운데 있는 세이란을 어둠인 자신이 소유하려 하다니. 하지만 오늘은 자신의 뻔뻔함에 눈을 감고 싶었다.
키안은 망토에서 가죽 가면을 꺼냈다. 자신의 정체를 들키지 않기 위해 당연히 써야 했다. 하지만 가면을 내려다보는 키안의 눈동자엔 복잡한 감정이 얽혀 있었다.
‘만약에……. 아주 만약에…….’
키안은 가면을 쓰며, 생각했다. 만약 세이란에게 자신의 비밀을 말하게 된다면, 어떻게 될까? 하는.
“그래도 될까? 날, 용서해 주실까?”
키안의 심장이 쿵쿵 뛰었다. 하지만 이내, 다시 절망적인 생각에 한숨이 새어 나왔다.
‘내 비밀을 알게 된다면, 날 다신 보려 하지 않을 거야. 만에 하나 전하께서 날 용서하신다고 해도, 여인으로 봐줄 리 없어. 이미 전하께선 마음에 품고 계시는 레이디가 따로 있으시니까.’
정말 지독한 욕심이었다. 자신과 레녹스 가문이 지은 죄를 용서받는 동시에 그의 옆자리까지 탐을 내다니. 키안의 고개가 저절로 떨궈졌다.
사박, 사박.
바람이 스치는 소리와 함께 아주 가까운 곳에서 발소리가 들렸다. 고갤 들자, 검은 옷을 입은 사내가 달빛을 등지고 서 있었다.
“아직도 망설이는 모양이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어두운 숲을 울렸다. 키안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아직 마음의 준비를 하지 못했는데……. 그가…….
그 순간 세이란이 성큼성큼 키안을 향해 다가오는 게 보였다.
“상관없다. 망설이는 너의 손을 계속해서 잡아끌 생각이거든. 수십 번, 수백 번이라도 난 상관없다.”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세이란이 키안의 손을 붙잡았다. 그러곤 오두막을 향해 잡아끌었다. 그에게 붙잡힌 손이 뜨거웠다. 키안은 울컥,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오르는 걸 느꼈다.
‘그의 말엔 아무런 의미도 없어. 그러니 설레면 안 돼.’
분명 세이란에겐 아무런 의미도 없는 말이었다.
‘절대 착각하면 안 돼. 세이란 님께선 내 비밀을 모르셔. 내 손을 몇 번이나 잡겠다는 건, 그런 뜻이 아니야.’
키안은 들뜨는 감정을 억눌렀다. 세이란은 이 만남을 계속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비밀스럽고 은밀한, 몸만 나누는 이 행위를.
‘이런 관계를 귀족들은 섹스파트너라고 부르겠지?’
실망해야 했다. 하지만 주책없게도 키안의 심장이 두근두근 뛰었다. 그에게 붙잡힌 손목에 느껴지는 열감은 실제였다. 그리고 아무런 의미도 없겠지만, 세이란의 말은 키안에겐 심장을 움켜쥐는 뜨거운 고백이었다.
‘말해야 해, 이젠 이곳에 오지 않겠다고.’
하지만 그런 생각과는 달리, 오두막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키안이 손을 뻗어 그의 목덜미를 꼭 끌어안았다.
“헉-”
키안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듯 세이란의 입술 새로 신음이 새어 나왔다. 하지만 이내 키안이 이끄는 대로 그가 고갤 숙여왔다.
“굉장히 대범해졌군.”
그의 숨결이 뺨에 닿았다. 키안은 가면 너머 보이는 세이란의 붉은색 눈동자를 응시했다.
“눈동자가…….”
“섹시하다고 하더군.”
그의 농담에 키안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그 미소와 함께 키안의 마음속에 들끓던 불안이 사라졌다. 키안이 웃자, 세이란이 정색하며 말했다.
“동의하지 않는 모양이군.”
“그냥 낯설어서.”
“나 역시 그래. 모든 게 낯설다. 여기에 있는 난, 내가 아닌 것 같거든.”
키안이 그의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얼굴을 가린 가면이 스쳤다. 그 소리만 아니었다면,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을 터였다.
‘그래, 한 번이야. 오늘이 마지막이니까…….’
그의 팔이 키안의 허릴 천천히 휘감아왔다. 옥죄듯 힘을 주자 두 사람의 하체가 빈틈없이 맞닿았다. 그 나른한 떨림에 키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하아-”
키스조차 하지 않았다. 그저 몸이 맞닿은 것뿐인데도 이젠 아랫배 안쪽에 짙은 열감이 느껴졌다. 키안의 더운 숨결이 세이란의 목덜미에 닿았다. 그 역시 팔에 힘을 주며, 키안을 더 힘껏 끌어안았다.
“흐읏-”
세이란의 입술이 키안의 입술에 닿았다. 뜨거운 혀로 입술을 쓸며, 애를 태우듯 입술 안쪽을 느릿느릿 핥는 느낌에 움찔 몸을 떨었다. 뜨거운 숨결이 섞이자, 키안이 입술을 열어 그의 혀를 건드렸다.
“후웃-”
서툰 그 행위에 세이란이 웃는 소리가 들려왔다. 키안이 민망함에 고갤 돌리려 하자, 그의 손이 키안의 턱을 붙잡더니 깊숙이 혀를 묻어왔다.
순식간에 열기를 품은 두 개의 혀가 하나처럼 들러붙었다. 혀를 얽고 서로의 타액을 삼키는 행위가 마치 사랑을 나누는 것처럼 야릇하다고 생각했다.
“하아-”
세이란은 자신을 향해 입술을 열며 적극적으로 키스에 반응해 오는 키안을 보자, 더는 참을 수가 없었다. 이미 다리 사이의 남성은 뻐근한 감각을 넘어서 바지를 뚫고 나올 정도로 뜨거워져 있었다.
세이란은 격정을 삼키며, 자신의 하체를 키안의 아랫배에 문질렀다. 불덩이처럼 단단해진 남성이 키안의 아랫배에 닿자 더욱 크고 단단해졌다.
“하아-”
키안 역시 아랫배에 느껴지는 그의 남성에 하체를 밀착시켜 왔다. 두 사람의 은밀한 그곳이 거친 옷감을 사이로 비벼지자 짙을 열감이 두 사람을 관통했다.
“헉, 제길!”
세이란이 거친 숨을 뱉어내며 입술을 뗐다. 그러곤 두 팔로 키안을 번쩍 안아 들더니, 침대로 향했다.
“하아-”
키안은 아릿한 기대감에 몸을 떨었다. 짙은 열감에 다리 사이에 자리한 수풀에선 투명한 애액이 흘러내리고 있었다. 이미 자신의 몸은 세이란을 받아들일 준비를 끝낸 것이다. 키안은 몸을 내리누르는 야릇한 무게감에 밭은 숨을 내쉬었다. 옷을 사이에 두고 두 사람의 몸이 하나처럼 얽혔다.
황제의 독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