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6 화
테란국의 공주인 헬로이즈가 접견실 안으로 들어왔다. 창문 앞에 서서 자신에겐 등을 보인 세이란의 모습에 한숨이 새어 나왔다. 명백한 거부였던 것이다.
“접견을 허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전하.”
헬로이즈가 세이란을 향해 고갤 숙였다. 그러자 미동도 하지 않던 그가 돌아서더니,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매시간마다 접견을 청하니, 별수 있나. 거기다 얼마 전에 내 측근에게까지 찾아갔다지?”
세이란이 창문에 기대선 채 가슴 팔짱을 끼곤 거만하게 말했다. 변명할 게 있으면, 한번 해보라는 투였다.
‘하아, 심장이 얼어붙을 것 같아.’
헬로이즈는 세이란이 서 있는 창문 쪽으로 가는 대신 창과 떨어져 있는 소파에 자릴 잡고 앉았다.
허릴 곧게 세우고, 턱을 들었지만 묘하게 손끝이 차갑게 식었다. 생각을 해야 했다. 세이란이 자신에게 이렇게 화가 난 이유가 자신이 매시간마다 접견을 청해서인지, 아니면 그의 최측근인 레녹스 공작을 만나려 한 거 때문인지를.
“레녹스 공작님에 관한 것부터 말씀드리겠습니다.”
세이란이 어서 해보라는 듯 고갤 까딱였다. 아침 햇살을 등지고 서 있어서, 그의 표정을 읽을 순 없었다. 하지만 풍기는 분위기론 폭군 같았다. 마치 한마디라도 잘못 뱉었다간, 목이 달아날 것 같은 느낌이었다.
‘내 예상이 맞았어. 내가 접견을 신청한 것보다, 황실 기사단의 단장인 레녹스 공작에게 접근했다는 것에 화가 나 있던 거야.’
헬로이즈는 주먹을 꽉 쥐었다. 하지만 두려움이 가시기는커녕, 그의 서늘한 눈빛에 자꾸만 긴장이 됐다.
헬로이즈는 두 달 전, 테란국과 유스타나 제국이 마지막 전투를 벌이기 직전 자신에게 보내온 편지의 내용을 떠올렸다.
그는 악마처럼 매혹적이며, 칼날처럼 잔혹한 자입니다. 그자의 검에 테란국의 명운이 달려 있습니다.
전쟁터에서 그가 보내온 마지막 편지의 끝부분에 쓰여 있던 말이었다.
‘로렌스 루틴 공작이며, 예언자의 별 아래 태어난 테란국의 기사.’
헬로이즈는 로렌스의 마지막 경고를 떠올리며, 천천히 심호흡했다. 그러자 떨리던 몸이 조금씩 안정이 되기 시작했다.
“제가 보낸 호위기사의 말을 인용하자면, 레녹스 공작은 바위처럼 단단한 신념과 충성심을 갖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거야, 당연한 사실이다.”
한마디로 왜 레녹스 공작을 만나려 했는지 이유를 말하라는 뜻이었다.
‘동정심을 유발해야 하는 걸까?’
헬로이즈는 어쩌면 약한 자에겐 관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입술을 깨물며 순진한 얼굴을 했다.
“저는 단지, 며칠 전 접견실에서 절 도와준 것에 대한 감사 인사를 하고 싶었을 뿐입니다. 하지만 전하의 기사이신 레녹스 공작님께선 전하의 허락 없인 만날 수 없다고 하셨습니다.”
헬로이즈를 본, 세이란의 눈빛이 날카로워졌다. 그러곤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거짓말이 서툴군, 헬로이즈 공주. 베풀어준 친절에 대한 감사 인사 때문에 레녹스 공작을 찾은 것뿐이라는 변명은 너무 진부하다고 생각하지 않나?”
하아, 제길. 동정심은 그에게 통하지 않는 모양이었다. 헬로이즈가 고갤 들자, 세이란이 비꼬듯 말했다.
“차라리, 내 측근인 레녹스 공작을 구슬려 내 마음을 돌리려고 했다는 변명이 설득력이 있겠군.”
“그럼, 그쪽으로 하겠습니다.”
순간, 헬로이즈의 대답에 세이란의 눈썹이 확 치켜 올라갔다. 불쌍한 척 연기를 하던, 헬로이즈의 표정이 순식간에 변했다. 솔직하게 대면하는 쪽이 자신에게 유리하다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아주 맹랑한 구석이 있었군.”
“그쪽이 전하의 마음에 드신다면, 맹랑한 여인이 될 의향도 있습니다.”
헬로이즈의 대답에 세이란의 표정이 굳어졌다.
‘저런 캐릭터였나? 분명 내가 본 미래에서는 테란국의 두 번째 공주인 헬로이즈는 자기 연민에 빠진, 나약한 여인이었어. 그리고 내내 나를 두려워했었지. 눈도 제대로 맞추지 못할 정도로 말이야.’
하지만 변해 있었다. 헬로이즈의 턱은 여전히 두려움에 떨리고 있었다.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눈빛에는 그 어떤 흔들림도 없었다.
‘또 변한 미래라. 이번엔 헬로이즈 공주란 말이지?’
세이란은 예리한 눈빛으로 헬로이즈를 주시했다. 자신이 바꾼 미래가 조금씩 변하고 있었다. 키안을 살린 것뿐이었는데, 그로 인해 모든 것이 미묘하게 변하고 있었다.
‘찾아야겠어, 특정한 사람들에게만 일어나는 이 변화의 원인을.’
세이란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헬로이즈를 보며 말했다.
“내 마음에 든 후에 뭘 할 생각이지?”
헬로이즈가 고갤 들어, 세이란을 보았다. 서늘하기 짝이 없는 그의 표정에 몸이 덜덜 떨렸다. 하지만 이내 용기를 내, 또박또박 말했다.
“테란국을 다시 일으킬 것입니다.”
“지금도 건재한 것 아니었나? 네가 모르는 것 같아 말해두지. 나라란, 누가 국왕이 되든지 계속된다. 그냥, 솔직히 테란국을 갖고 싶다고 말하는 게 어때? 나와 결혼해, 그대의 언니가 쥔 권력을 빼앗고 싶다고 말이야.”
세이란의 날카로운 지적에 헬로이즈는 한숨을 내쉬었다.
“왕좌에 욕심이 없다고 한다면, 거짓일 겁니다. 하지만 폐륜을 저지르면서까지 욕심을 내고 싶진 않습니다.”
“그 말은, 지금 테란국엔 그런 폐륜이 일어났다는 건가?”
헬로이즈의 낯빛이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사실 숨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분명 유스타나 제국의 수많은 비밀 첩자가 지금 테란국에서 벌어지는 일들을 전하는 건 시간문제였다.
“제가 테란국을 떠나올 당시까진, 아버지께선 왕좌에 계셨습니다.”
헬로이즈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보랏빛 눈동자 역시 테란국에 남아 있는 아버지의 걱정으로 흐려졌다.
“안타까운 상황이군. 하지만 난, 테란국엔 관심 없다.”
“테란국의 다음 계승자를 지목할 권리를 가지신 아버지께서 이미 신관을 통해 테란국의 계승자를 지정하셨습니다. 전하께서 국혼을 치르겠다는 칙서를 테란국에 보내시면, 바로 공표될 겁니다. 그래도 관심이 없으십니까?”
헬로이즈는 자신만만한 얼굴로 세이란을 보았다. 당연히 그가 거절할 리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사실 이건 다시없을 절호의 기회였다. 무엇보다 테란국은 비옥한 농토와 값비싼 광물들을 다량으로 묻혀 있는 보물 창고였다.
그런데 그런 보물 창고를 손쉽게 갖는 방법이 있는데도 마다하다니. 헬로이즈의 관점에선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1년 전이라면 흥미가 생겼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다. 테란국의 비옥한 농토와 다량의 광물보다 더 갖고 싶은 게 생겼거든.”
헬로이즈가 눈을 가늘게 떴다.
‘설마, 마음에 둔 여인이라도 있는 걸까?’
그것이 아니라면, 절대적으로 유스타나 제국에게 유리한 동맹혼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별궁에 있는 동안, 시녀들에게 재미있는 소문을 들었습니다. 전하께서 이번 사교 시즌 동안 황태자비를 맞아들이기로 하셨다더군요.”
“뭐, 비밀도 아니니까.”
“저 역시 황태자비 후보가 되고 싶습니다.”
헬로이즈의 말에 세이란이 물끄러미 그녀를 응시했다. 사실, 그러지 않을까 예상은 했었다. 그리고 그는 그녀의 이런 결정을 이용하기 위해 접견을 허락한 것이다.
“뭐, 이미 그럴 것이라 추측은 했었다.”
“그 말은, 허락하시는 것입니까?”
헬로이즈가 의외라는 표정으로 세이란을 보았다. 당연히 거절할 것이라 생각했다.
“좋도록 해. 나는 상관없으니까.”
세이란에겐 지금 필요한 건, 명분이었다. 자신은 상관없었지만, 명색이 한 나라의 국왕이 보내온 청혼서를 무턱대고 거절할 순 없는 노릇이었다.
‘이로써 동맹혼을 거절할, 명분을 갖게 되는 건가?’
헬로이즈가 유스타나 제국의 사교계에 데뷔해, 황태자비로 지목되지 못한다 해도 문제 될 게 없었다. 공식적으론 유스타나의 모든 귀족가의 영애와 마찬가지로 공평한 기회가 주어진 것처럼 보일 테니까.
“혹시 이미 황태자비로 정해진 레이디가 있으신 겁니까?”
헬로이즈의 물음에 세이란의 입가에 냉소가 떠올랐다.
“그게 문제가 되나? 자신이 없나 보군.”
당연히 아니었다. 그녀가 가진 혼약의 조건은 유스타나 제국의 귀족들을 매료시킬 만큼 충분히 매력적이었다.
“아닙니다.”
“그럼, 이야긴 끝났군. 나가봐도 좋다.”
세이란이 이젠 귀찮다는 듯 헬로이즈를 바라보았다.
‘휴우- 어렵겠어. 나에겐 여인으로서 매력을 전혀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아.’
하지만 상관없었다. 며칠 뒤 키엘체에 도착하는 사신단에는 자신의 시녀들이 있었다. 분명 그들이 최고로 아름답게 만들어줄 터였다.
‘유스타나 제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레이디가 되어드리겠습니다. 저에게서 눈을 떼지 못하게 말입니다.’
헬로이즈는 세이란을 보며, 생각했다. 그러곤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럼, 무도회에서 뵙겠습니다.”
허릴 굽혀 인사를 한 헬로이즈가 접견실을 나왔다.
“내 접견을 허락한 이유가, 내가 황실 기사단의 단장인 레녹스 공작을 만나려 했기 때문이었어.”
헬로이즈는 접견실을 나오며, 무슨 수를 써서라도 황실 기사단의 레녹스 공작을 자신의 편으로 만들어야겠다고 결심했다.
‘잠깐, 그런데 황태자가 레녹스 공작을 바라보는 눈빛이 조금 이상했어.’
신뢰하는 부하이니, 당연히 자신이 접근하는 걸 꺼려할 수는 있었다. 하지만 자신을 쏘아보는 세이란의 시선엔 뭔가 더 감정적인 부분이 얽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설마, 황태자의 취향이 그쪽은 아닐 테지?’
생각해 보니, 유스타나의 황태자에 대한 스캔들을 딱히 들어본 적이 없었다.
‘아니야, 있었어. 딱 한 사람, 베로니카 렌스터가.’
소문에 의하면 렌스터 공작가의 영애와 황태자가 결혼한다고 했었다. 악마처럼 잘생긴 황태자가 영애에게 홀딱 빠져 있다는 소문이 테란국까지 퍼져 있었으니까.
하지만 전쟁으로 인해, 그들의 결혼은 잠시 유보되어 있었다.
“레이디 베로니카라…….”
자신이 베로니카보다 황태자의 마음을 사로잡는다면, 충분히 승산이 있을 것 같았다.
헬로이즈는 임시 거처인 별궁으로 가는 대신, 황실 기사단 건물이 있는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레이디 베로니카에 대한 정보는 물론, 세이란에 대해 알고 싶어서였다.
**
키안은 기사단 사무실 앞에 서 있는 헬로이즈를 발견하곤, 자리에서 일어섰다. 곧 자신을 찾을 것이라 생각은 했지만, 이렇게 빠를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긴장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레녹스 공작. 사실 조금 전 황태자 전하를 접견하고 오는 길이거든요.”
헬로이즈가 안으로 들어오자, 키안의 옆에 서 있던 아레오가 쭈뼛거리며 밖으로 나가려 했다.
“아레오, 차를 부탁할게.”
“네, 단장님.”
아레오는 사무실을 나가기 전 다시 한 번 헬로이즈의 얼굴을 보았다. 그러곤 후다닥 밖으로 나갔다. 붉어진 귓불을 보건대, 헬로이즈의 아름다운 외모에 홀딱 빠진 눈치였다.
“며칠 전 제 호위기사가 공작님을 놀라게 한 모양이더군요. 사실 전 감사 인사를 하고 싶었을 뿐인데, 제가 너무 마음만 급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제 무례를 용서해 주겠어요, 레녹스 공작?”
“아닙니다. 저 역시 공주님의 의도를 오해한 것, 사과드립니다.”
키안의 말에 헬로이즈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전하와 성격이 비슷한 건가? 곁을 내주지 않는 점이 말이에요.”
헬로이즈가 키안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았다. 하지만 이내, 어깰 으쓱해 보이더니 입을 열었다.
“흐흠, 그런 것 같지 않군요. 기본적으로 황태자 전하와 공작은 전혀
다른 유형의 사람 같아요. 하지만 함께 보낸 시간이 많아 닮았다는 느낌이 든 모양이에요.”
키안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헬로이즈는 나무랄 데 없이 예의 바른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자신이 테란국의 공주인 그녀의 청을 거절한 것에 대해 불만을 토로하고 있었다.
‘궁정에서 살아온 여인들의 화법은 정말 어렵다니까. 돌려 말하는 대신, 직설적으로 기분 나빴다고 말하면 될 걸.’
키안은 침착한 태도로 헬로이즈의 말을 받아쳤다.
“의심하는 게 습관이 된 모양입니다. 전쟁터에 있는 동안, 수많은 첩자가 기사단 안으로 숨어들었거든요.”
키안의 설명에 헬로이즈가 고갤 끄덕였다.
“이해합니다. 그곳은 한시도 방심할 수 없는 죽음과 맞닿아 있는 곳이라고 했었거든요.”
키안의 눈빛이 미묘하게 변했다. 분명 지난번엔 그녀는 전쟁엔 관심도 없었다고 했다. 그런데 지금, 헬로이즈는 전쟁터에 있던 누군가와 얘길 나눈 것처럼 말하고 있었다.
‘누굴까?’
키안은 문득 호기심이 생겼다. 눈앞의 공주는 무의식적으로 그자를 숨기려 하고 있었다.
“이제 전쟁은 끝났으니, 습관 역시 버려야 하지만 그게 쉽지 않은 모양입니다. 자꾸 의심하는 병이 생겨서.”
“당연할 테죠. 아무리 전쟁이 끝났다고 해도, 나는 적국이었던 테란국의 공주니까요. 경계하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처음엔 불쾌하긴 했지만, 감사 인사를 전하려고 했던 것은 진심이었습니다.”
헬로이즈는 잠시 말을 멈췄다. 그러곤 처음으로 접견실에서 세이란을 만났을 때를 떠올렸다.
“사실 낯선 유스타나 제국에 도착해 무서운 황태자 전하를 접견실에서 뵈었을 때, 저는 홀로 싸우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거든요. 제게 내밀어진 호의가 뭐든 간에 전, 너무도 기뻤습니다. 안심도 되었고요. 감사했습니다, 레녹스 공작.”
헬로이즈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떠올랐다. 그러자 차분하게 보이던 헬로이즈의 얼굴에 화사한 빛이 떠올랐다.
‘아름다운 사람이야.’
키안은 헬로이즈를 보며 그렇게 생각했다. 구불거리는 갈색의 머리카락이 아름다운 얼굴을 감싸고 있었다. 특히 보랏빛의 눈동자는 이슬을 머금은 듯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빛이 나, 세이란 님과 똑같이 빛이 나는 사람이야.’
그때 헬로이즈가 키안의 눈치를 보며, 슬쩍 운을 뗐다.
“레녹스 공작님, 가끔 이렇게 차를 마시러 와도 될까요? 아, 제 편이 되어달라는 말은 아니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헬로이즈의 요구에 키안이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저보단 차라리 레이디들과 친구가 되시는 게 더 좋을 겁니다.”
“휴우- 레녹스 공작님께선 사교계에 대해 잘 모르시는 걸 보니, 참석하지 않으시는 모양이군요.”
“그렇습니다, 그쪽으로 관심이 없어서.”
“사실, 가장 어려운 일이 마음에 맞는 레이디를 사귀는 것이랍니다. 테란국에서도 그랬지만, 유스타나에서 이방인인 저에겐 더 적대적일 겁니다. 더군다나, 제가 황태자비 후보가 되겠다고 전하께 말씀드린 이상 텃새는 더 심해질 것이라 생각합니다.”
황제의 독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