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3 화
“카이우스, 편식하면 안 된다고 했을 텐데?”
키안은 카이우스의 접시 한쪽에 모여 있는 콩을 보며 말했다.
“카이우쯔는 꽁은 시러함미다.”
“골고루 먹어야 해. 그래야 전하처럼 훌륭한 기사가 될 테니까.”
키안이 맞은편에 앉아 식사 중인 세이란을 보았다. 그는 저녁 식사 내내 뭐가 또 불만인지 잔뜩 기분 나쁜 표정으로 자신과 카이우스를 쏘아보고 있었다.
“나도 당근 싫어해.”
“네?”
“전하께서도 찌러하는 음식이 이쯔심미까?”
키안과 카이우스가 동시에 세이란을 보았다. 그러자 키안에게 말했다.
“당근은 싫어한다. 그러니 네가 먹어.”
세이란이 마치 떼를 쓰듯 자신의 접시에 있던 당근을 키안의 접시 위에 올려놓았다.
“아, 죄송합니다. 지금까지 전하께서 아무런 내색이 없으셔서, 당근을 싫어하시는지 몰랐습니다. 제가 먹겠습니다.”
“그건 투정 부릴 사람이 없어서 그랬던 것뿐이다. 이건, 내가 먹지. 너도 가지 싫어하잖아.”
세이란이 너무도 자연스럽게 키안의 접시에서 가지 요리를 가져갔다.
“아닙니다. 어떻게 제가 먹던 음식을. 남기면 버리면 됩니다. 그러니…….”
하지만 말릴 새도 없이 세이란이 키안의 접시에서 가지 요리를 포크로 찍어 입으로 가져갔다.
‘말도 안 돼. 유스타나의 황태자가 남이 먹던 음식을 먹다니.’
키안과 카이우스는 세이란의 행동에 놀라 입을 다물지 못했다.
“전하께선 더럽지 안으심미까?”
“뭐가?”
“나미 먹던 걸 먹는 거요.”
카이우스의 질문에 세이란이 포크로 키안의 접시에 남아 있는 가지 요리를 마저 먹으며 대답했다.
“전혀. 키안이 먹었던 음식은 더럽지 않다. 내가 네 헝님을, 아주 많이 좋아하거든. 그러니 꼬맹이, 넌 네 접시에 남아 있는 콩이나 먹도록 해.”
세이란의 말에 시무룩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카이우스가 자신의 접시에 남아 있는 콩을 노려보았다. 그러곤 대단한 결심이라도 한 듯 포크로 콩을 찍어 입을 가져갔다.
“윽, 맛업떠.”
카이우스의 모습에 키안과 세이란이 동시에 풋 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옆에 서 있던 집사인 가브리엘과 에리스의 입가에도 미소가 떠올랐다.
“카이우스, 괜찮으니까 굳이 먹지 않아도 돼.”
“하지만 저도 헝님을 아주 마니 조아하는 걸요. 콩을 먹은 후엔 헝님의 가지도 꼭 머거드릴 겁니다.”
야무지게 대답하는 카이우스를 보자, 키안의 입가에 저절로 미소가 떠올랐다.
“고맙구나, 카이우스.”
키안이 손을 뻗어 카이우스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카이우스를 바라보는 키안의 눈동자엔 애정이 잔뜩 묻어 있었다.
“주인님, 시간이 늦었으니 작은 도련님을 모셔가 재우도록 하겠습니다.”
유모인 에리스의 말에 키안이 고갤 끄덕였다.
“카이우스, 가도 좋다.”
키안의 말이 떨어지자, 카이우스가 의자에서 내려섰다. 그러곤 키안에게 오더니 까치발을 하며, 키안의 볼에 입을 맞췄다.
“굳나잇 키쯔입니다.”
순간 세이란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그러자 카이우스가 재빨리 뒤로 물러서더니, 세이란을 향해 고갤 숙였다.
유모인 에리스와 함께 카이우스가 식당을 나가자, 세이란이 키안 쪽으로 고갤 숙여왔다.
“나도 해줘.”
“네?”
키안이 가브리엘의 눈치를 보며, 그가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짐짓 딴청을 부렸다. 키안은 난처함을 숨기기 위해 접시에 놓여 있는 양고기를 포크로 쿡쿡 찔렀다.
그러자 식당 문 앞에 서 있던 가브리엘에 눈치 빠르게 식당을 나가는 게 보였다.
“이제 보는 사람도 없는데, 얼른 해줘. 치사하게 나만 빼는 건 아니지?”
“전하, 카이우스는 어린아이입니다. 왜 자꾸 아이처럼 그러시는 겁니까?”
“어른이라고 칭찬을 받지 말라는 법은 없다. 굿나잇 키스는 생략할 테니, 어서.”
세이란이 다시 키안에게 고갤 숙여왔다. 다 큰 성인 남자가 자신에게 칭찬받기 위해 머리를 내밀다니. 키안은 어이가 없었지만, 한편으로 그의 머리카락을 만져 보고도 싶었다. 망설이던 키안이 천천히 손을 뻗었다.
사락, 사락. 손에 닿는 그의 머리카락은 무척이나 부드러웠다. 카이우스는 복슬복슬한 느낌이었다면, 세이란의 머리카락은 차갑고 매끄러웠다.
그리고 묘하게 설렜다.
“감사합니다, 제 것을 먹어줘서.”
잠깐, 말을 뱉고 보니 조금 이상했다. 가지라는 말이 빠지자, 왠지 묘한 뉘앙스를 풍겼다.
순간 키안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의 혀가 자신의 다리 사이의 밀부를 핥던 모습이 생각났던 것이다.
‘미친 게 분명해. 이런 순간에 그런 야한 모습이 떠오르다니.’
키안이 당혹스러움에 세이란의 머리에서 손을 떼려 했다. 그 순간, 그의 손이 키안의 손목을 꽉 붙잡았다. 그러곤 그가 고갤 들며 말했다.
“언제든 먹어줄 수 있으니, 말해.”
심장이 쿵 하고 내려앉았다. 당연히 가지에 대한 말이었지만, 키안의 귀엔 음란마귀라도 씐 듯 야하게 들렸다. 아랫배가 욱신욱신 조이며, 나른한 열기가 피어올랐다. 입안이 바짝 마르기 시작했다.
“어…….”
당황한 키안이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자 그에게 붙잡혔던 손 역시 자유로워졌다.
“시간이 너무 늦었습니다. 돌아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키안은 세이란이 자리에서 일어나기도 전에 부엌을 빠져나갔다. 세이란은 자신을 혼자 식당에 남겨둔 채 밖으로 나가는 키안의 뒷모습을 보며, 의미심장하게 웃었다.
“당황해하는 모습도 귀여워, 자꾸 괴롭히고 싶을 만큼.”
**
등골이 서늘했다. 왜 자꾸 눈물이 나는지, 키안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분명 잠이 들었다. 그런데 지금 키안은 일곱 살 그때로 돌아가 있었다.
‘제길, 왜 다시 꿈을 꾸게 된 거지?’
키안은 입술을 깨물었다. 한동안 꾸지 않게 된 그 꿈속에 다시 들어왔다는 사실을 깨달은 순간, 키안의 눈에서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지독한 공포와 절망감이 키안을 통째로 집어삼켰다. 성인이 되었지만, 이 꿈속에선 키안은 언제나 어린아이의 모습이었다.
“흑, 흑-”
일곱 살의 어린 키안은 그저 지켜보는 것밖엔 할 수 없다. 쌍둥이 오빠인 키안, 그리고 쌍둥이 여동생인 키안. 레녹스가엔 성별이 다른 쌍둥이가 아니라, 그저 키안만이 존재했다.
"그림자입니다. 이 아이는 평생, 자신의 쌍둥이 오빠의 그림자로 살아가야 합니다."
“누구? 넌, 누구지? 내가 왜 그림자여 하는 거지?”
키안은 어둠 속에서 속삭이는 누군가에게 소리쳤다. 하지만 대답을 들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지금까지 수백 번 같은 질문을 했지만, 돌아오는 건 공허뿐이었다.
“흑, 흑-”
누가 또 우는 걸까? 키안은 고갤 들어 어둠뿐인 그곳을 천천히 살폈다. 그러자 자신과 똑같은 모습을 한 어린아이가, 피를 뚝뚝 흘리며 서 있었다.
극심한 고통을 참아내기 위해, 이를 악문 아이는 절망스러운 눈빛으로 자신의 아버지를 바라보고 있었다.
‘죄책감. 자신의 존재에 대한 거부감. 그리고 지독한 자신에 대한 경멸.’
일곱 살 어린아이의 눈동자에 담겨서는 안 될 감정들이 수도 없이 담겨 뚝뚝 눈물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용서…….”
라는 말을 목구멍으로 삼켰다. 자신은 용서받아선 안 될 존재였다.
"키안, 너 때문이다. 키안이 죽은 건, 네가 저주받은 피를 갖고 태어났기 때문이다."
왜 아버지는 자신에게 그런 잔인한 말을 한 것일까?
나는 태어나고 싶어서 태어난 게 아니었다. 태어나고 보니, 쌍둥이였다. 그것도 유스타나 제국에선 금기시 되는 성별이 다른 여아 쌍둥이.
‘나는 불행한 아이다.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죽음으로 이끄는 저주받은 아이야. 난, 행복해선 안 되는 아이야.’
언제부터 시작되었는지 알 수가 없었다. 하지만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때, 키안은 마음속으로 언제나 이 말을 되뇌고 있었다.
그래, 또 잊고 있었다. 그때처럼 자신에겐 절대 허락되지 않던 것을 또 탐을 내고 있었다.
‘그날, 오빠인 키안의 손을 잡지 말았어야 했어. 아니, 그전에 투정 따위 부리지 말았어야 했어.’
마음씨 착한 오빠 키안은 7년 동안 레녹스 저택의 옥탑에 갇혀 지내는 동생이 안타까워, 열지 말아야 할 문을 열어버렸다. 그렇게 오빠인 키안의 손을 잡고 햇살 아래 선 순간, 너무도 행복했다.
이름도 없는 그림자인 자신이 처음으로 햇빛 아래 서자, 너무도 행복해 자신이 그림자란 사실을 잊어버렸다.
그리고 거짓말처럼, 오빠 키안이 죽었다. 그렇게 이름도 없고 그림자였던 자신이 오빠의 자릴 대신했다. 하지만 이미 키안은 죽은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레녹스 공작가의 후계자라는 의무가 아니었다면, 죽었을 터였다. 영혼도 없이 거죽만으로 살던, 키안에게 거짓말처럼 세이란이 손을 뻗어왔다.
‘안 돼. 두 번은 안 돼. 세이란 님까지 잃을 순 없어.’
자신은 사랑하는 사람을 불행으로 이끄는 저주받은 아이였다.
절대…….
낑, 낑-
그때, 키안의 얼굴에 뜨거운 것이 닿았다. 어둠 속에서 웅크리고 있던 키안을 따뜻하고 포근 털이 감쌌다. 연신 뺨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핥던 것이 은빛 늑대라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 키안은 천천히 눈을 떴다.
끼잉- 낑, 낑-
꿈에서 깨어났다. 눈을 뜨니, 키안은 자신의 침대에 누워 있었다. 그리고 키안의 얼굴을 새끼 늑대가 핥고 있었다. 마치 지독한 악몽에서 키안을 깨우려는 듯 필사적으로 얼굴을 핥고, 두 발로 키안의 몸을 두드리고 있었다.
“하아, 하아-”
키안이 벌떡 일어나 앉았다. 그러자 새끼 늑대가 안심한 듯 더는 키안의 얼굴을 핥지 않았다.
“날, 깨운 거야? 내가 악몽을 꾸고 있는 걸 알고, 네가 깨운 거였어.”
키안은 손을 뻗어 새끼 늑대를 꼭 끌어안았다. 그러다 문득 요 며칠 새끼 늑대가 보이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키안이 품에 끌어안고 있던 늑대를 밀어내곤, 천천히 늑대를 살폈다.
“이상해. 갑자기 이렇게 커버리다니.”
눈에 띄게 성장한 은빛 늑대를 보며, 키안은 미간을 찌푸렸다. 아무리 동물이라고 하지만, 이렇게 순식간에 성장하는 늑대는 처음이었다.
키안은 문득 셀서스 궁에서 만났던 대신관 도미니크가 떠올랐다. 그는 자신이 은빛 늑대를 데려온 사실을 알고 있었다.
“조만간 대신전에 가봐야겠어.”
키안은 다시 침대에 누워 잠을 청했다. 그러자 침대 위에 있던 은빛 늑대가 바닥으로 내려와 어슬렁어슬렁 한쪽 벽으로 걸어갔다. 그곳은 키안이 구스타프 1세의 보물 상자를 넣어둔, 벽장이 있는 장소였다.
그곳, 바로 앞에 멈춰 선 은빛 늑대는 마치 파수꾼이라도 된 듯, 자릴 잡고 앉았다. 달빛이 창문을 통해 들어오고 있었다. 은빛 늑대는 하늘에 떠 있는 붉은 빛을 머금은 달을 응시했다.
삭망(朔望).
음력 초하루. 오늘이 바로 한 달 중 달의 음에 기운이 가장 충만한 날이었다. 그리고 유스타나에서 금기시 되는 마녀의 힘이 가장 강해지는 시기이기도 했다.
은빛 늑대는 달이 기울고, 아침 여명이 떠오르기 전까지 잠들지 않았다. 마치 키안을 지키려는 듯 신경을 잔뜩 곤두세운 채, 어둠을 응시하고 있었다.
황제의 독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