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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독사과-52화 (52/139)

제 52 화

갑자기 들려온 세이란의 목소리에 키안이 걸음을 멈췄다. 키안은 기사단 사무실 앞에 서 있는 세이란을 보자, 표정이 굳어졌다.

“다친 거야?”

아무런 대답이 없자, 세이란의 눈빛이 험악해졌다. 그러곤 키안이 서 있는 곳으로 성큼성큼 걸어오더니, 손을 뻗어 피가 묻어 있는 팔을 샅샅이 살피기 시작했다.

갑작스러운 세이란의 등장에 사무엘이 잔뜩 긴장한 표정으로 허릴 숙였다. 놀란 것도 놀란 것이었지만, 키안을 챙기는 세이란의 살뜰한 모습에 사무엘은 더 놀랐다.

“저는 괜찮습니다.”

키안이 세이란의 손을 밀어내며 말했다. 그제야 세이란의 시선이 사무엘 스텐호프의 팔로 향했다.

“무슨 일이지?”

“훈련 도중 제가 스텐호프의 팔을 베었습니다.”

다친 사람은 키안이 아니라, 사무엘이란 말을 듣고서야 날카롭게 치켜 올라갔던 세이란의 눈썹이 아래로 내려왔다. 그러곤 민망할 정도로 눈에 띄게 안심한 표정을 했다.

“그래? 치료를 해야겠군.”

그 확연한 온도 차에 키안이 괜스레 사무엘에게 미안해졌다.

“아레오가 의사를 모셔올 겁니다.”

“잘됐군.”

대답과는 달리 세이란의 시선은 어느새 사무엘이 아니라 자신에게 향해 있었다. 사무엘의 상처엔 더는 관심도 없는 눈치였다.

키안은 그런 세이란을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타인에겐 관심도 없는 사람인 걸 알고는 있었지만, 대놓고 그러니 조금 불편했다.

“저는 이만 들어가 보겠습니다. 스텐호프가 다쳐서 치료해야 합니다.”

키안의 말에 그의 시선이 다시 사무엘에게 향했다. 하지만 이내 키안에게 고갤 돌리더니, 뭔가 긴히 할 얘기가 있는 듯 키안의 팔을 붙잡았다.

“레녹스 공작, 잠깐 할 이야기가 있다.”

당연히 황태자의 명령이니, 따라야 했다. 하지만 키안은 왠지 그러고 싶지 않았다. 그를 보자 검술 시합 내내 가슴을 짓누르던 감정이 되살아났다.

불쾌하고 답답한, 하지만 자신의 힘으론 어쩔 수 없는 묘한 감정이 뒤범벅되어 키안을 평소와 달리 삐뚤어지게 만들었다.

“죄송합니다, 전하. 지금은 스텐호프의 상처를 치료하는 게 먼저입니다. 잠시 후, 제가 따로 전하를 찾아뵙겠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돌아가 주십시오. 들어가자, 스텐호프.”

키안이 세이란에게 고갤 숙인 후, 그가 붙잡기 전에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어, 저기…….”

사무엘은 어정쩡한 상태로 그 자리에 서 있었다. 키안의 명령대로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야 했지만, 자신의 앞엔 키안보다 더 높은 신분의 황태자가 떡하니 버티고 서 있었다.

“전하, 들어가도 되겠습니까?”

사무엘이 세이란의 안색을 살피며 허락을 구했다. 그 순간 세이란의 녹색 눈동자가 날카롭게 변하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자신 때문에 네가 다쳐서 그러는 것뿐이다, 스텐호프.”

그 말과 함께 세이란이 찬바람을 일으키며, 자릴 떴다. 사무엘은 멍한 얼굴로 세이란의 뒷모습을 바라보았다.

“나, 미움받은 건가?”

사무엘은 눈을 가늘게 뜨고, 조금 전 두 사람을 떠올렸다. 당연히 황태자와 기사단장 사이는 주종관계였다. 하지만 세이란이 키안을 바라보는 모습은 마치, 절절매는 연인 같았다. 주종관계가 아니라, 황태자인 세이란이 기사단장인 키안의 안색을 살피고 있었다.

“말도 안 돼. 절대 그럴 리 없지.”

유스타나 제국의 황태자인 세이란이 아무리 친하다지만, 신하의 눈치를 보다니.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아마, 이것이 드레이크가 전에 말했던, 황태자와 세이란의 관계가 조금 특별하다고 얘기했던 부분인 모양이었다.

“잠깐, 그렇다는 건 단장님께 내가 황태자 전하보다 더 우선이란 건가?”

그런 생각이 들자, 사무엘은 입꼬리가 자꾸만 위로 말려 올라가려 했다. 사무엘은 자꾸 들뜨는 심장을 억누르며, 사무실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

키안은 기사단의 건물을 나와 집으로 돌아가기 위해 마구간으로 향했다. 하지만 얼마 가지 못해 걸음을 멈췄다. 세이란이 마구간으로 가는 길목에 떡하니 서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키안은 그에게 가는 대신, 잠시 세이란을 바라보았다. 햇살 아래 서 있는 그는 눈을 사로잡을 정도로 완벽한 모습이었다. 황금빛 머리카락이 오후의 햇살을 받아 반짝이고 있었고, 곧고 높은 콧날과 짙은 녹색 눈동자 역시 눈이 갈 정도로 아름다웠다. 특히 모양 좋은 입술은 끌로 조각해 놓은 듯 완벽했다.

그는 빛나는 존재였다. 자신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고귀했다.

밝은 햇살 가운데 서 있는 세이란을 보자, 더욱 확실해졌다.

‘내가 욕심내선 안 되는 사람이야.’

그 순간 세이란이 고갤 들었다. 그러곤 키안을 발견하곤 걸어오기 시작했다. 가까워질수록 그의 짙은 녹색 눈동자에 담긴 감정이 기쁨이란 걸 깨닫는 순간, 심장이 욱신거렸다.

“늦었잖아, 키안.”

한참이나 기다린 듯 세이란이 키안의 팔을 잡더니, 인적이 없는 황실 마구간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키안이 도망칠세라 재빨리 말했다.

“할 얘기가 있다.”

평소와 달리 초조해 보이는 세이란과는 달리, 키안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말씀하십시오, 전하.”

“키안, 내 계획은 바뀌지 않아. 그따위 국왕의 칙서에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다는 뜻이다.”

키안은 그가 가짜 약혼에 대한 얘기란 걸 단박에 알아챘다.

“국가 간의 칙서입니다. 무시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왜 무시하면 안 되지? 그들의 일방적인 청일 뿐인데, 내가 왜 일일이 대응해야 하는 거지? 유스타나 제국에선 다른 나라의 국왕이 보낸 칙서 따위에 목메지 않는다. 그것도 이제 막 전쟁에서 진 패전국엔 더더욱.”

세이란의 표정은 단호했다. 재고의 여지가 없다는 듯 말하는 세이란을 보며, 키안은 한편으로 안도했다.

“무엇보다 난 너와 약혼하기로 했다는 걸 잊지 마. 어떤 상황에서든 절대 변하지 않는다는 걸 다시 한 번 말해두지.”

세이란은 자신과의 약혼이 마치 진짜처럼 말하고 있었다.

두근, 두근. 심장이 뛰었다. 만약 진짜였다면…….

하지만 이내, 키안은 쓰게 웃었다.

“저와의 약혼은 기한이 정해진 약속일 뿐입니다.”

세이란이 마음에 두고 있다던 레이디든, 아니며 테란국의 공주든. 누가 상대가 될지 모르지만, 사교 시즌이 끝날 쯤엔 세이란의 곁엔 정식으로 약혼한 레이디가 있을 터였다. 자신과는 상관없이, 세이란은 결혼을 하게 되어 있었다.

“화가 난 거냐?”

“제가 말입니까?”

“그래. 나에게 화가 난 것 같아서.”

“아닙니다. 그럴 이유도 없고…….”

“이유가 왜 없지? 넌 내 약혼녀가 될 텐데, 당연히 질투하고 화를 내야 하는 것 아닌가?”

키안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 상황에서도 그런 말도 안 되는 농담을 하는 그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장난은 그만하십시오. 용건이 끝나셨으면,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카이우스와 저녁 식사를 하려면, 서둘러야 합니다.”

키안이 세이란에게 고갤 숙인 후, 말이 매어져 있는 쪽으로 걸어가기 시작했다.

“기다려, 키안.”

세이란은 키안의 팔을 붙잡았다. 아직 더 할 말이 남은 모양이었다.

“놓아주십시오. 보는 눈이 많습니다.”

“아무것도 변한 건 없다, 키안.”

“전하.”

키안이 그에게 붙잡힌 팔을 빼냈다. 그러자 세이란이 다시 한 번 말했다.

“난 너와 약혼한다. 어쩌면 더한 것도 할지 모르지.”

여전히 미동도 없는 키안을 보자, 세이란은 초조해졌다. 자신은 표정 하나, 말투 하나하나에 입안이 바짝 타들어가는데, 키안은 자신과 달리 너무도 평온했다.

심술이 날 정도로.

“저는 전하께서 무슨 말씀이신지 모르겠습니다.”

“모르긴, 다 알면서. 너와 이런 것도 할 것이란 뜻이다.”

세이란이 다른 한쪽 손으로 키안의 턱을 붙잡았다. 그러곤 그가 고갤 숙여온 순간, 키안의 하늘빛 눈동자가 처음으로 흔들렸다. 그 모습이 세이란은 굉장히 만족스러웠다.

“기억해. 변하는 건 없다, 키안. 아무것도.”

세이란의 더운 숨결이 입가에 닿았다. 심장이 또 뛰었다. 누가 볼 수도 있는 위험한 상황인데도, 키안의 심장은 멈출 줄 몰랐다.

그가 더 가까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키안은 그의 입술이 자신의 입가를 스치려는 순간, 재빨리 고갤 돌렸다. 그러곤 한 발짝 뒤로 물러서며 말했다.

“전하의 말씀처럼, 변하는 건 없습니다. 이제 되었습니까?”

다행히 세이란은 키안을 붙잡지 않았다. 대신 그의 눈빛은 태연해 보이는 얼굴과는 달리 붉어져 있는 키안의 귓불에 닿아 있었다. 지금은 그것 하나만으로 충분했다.

“저녁 식사 시간이 언제지?”

저택으로 돌아가기 위해 말고삐를 풀던 키안이 그를 돌아보았다.

“7시입니다.”

“그래? 그럼, 오늘 저녁은 레녹스 공작가에서 먹어야겠군. 괜찮겠지?”

**

성 캐서린 수도원 앞에 렌스터 공작 가문의 깃발이 달린 마차 한 대가 멈춰 섰다.

“렌스터 공작 영애를 모시러 왔습니다!”

마부의 목소리에 수도원의 성문을 지키는 문지기가 도르래를 돌렸다. 그러자 굳건하게 닫혀 있던 성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마차가 캐서린 수도원 안으로 들어와 멈춰 섰다. 마차에서 내린 마부가 베로니카 렌스터에게 고갤 숙였다.

“그동안 편안히 계셨습니까요, 아가씨?”

“지루해 죽을 뻔했어. 아버지께서 따로 하신 말씀은 없으셨고?”

“최대한 빨리 돌아오셔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마부의 말에 베로니카가 한숨을 내쉬었다. 마차에 탄 그녀는 자신의 짐을 들고 서 있던 하녀에게 말했다.

“젬마, 뭐해? 타지 않고.”

베로니카의 재촉에 젬마가 커다란 가방을 마부에게 건네곤, 이내 마차에 올랐다.

“불안해서 그렇습니다, 아가씨. 주인님께서 갑자기 성 캐서린 수도원으로 보냈을 때도 그랬지만, 또 이렇게 야밤에 돌아오게 하시다니 말입니다.”

젬마가 베로니카 대신 불만을 터뜨리자, 굳어 있던 베로니카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내가 화를 내야 하는데, 네가 대신 화를 내니 할 말이 없구나.”

베로니카의 지적에 젬마의 눈동자가 걱정으로 흐려졌다.

“소문엔 황태자 전하께서 돌아오셨다고 합니다. 사교 시즌 동안 황태자비를 맞이하시겠다고 공표도 하셨고요. 이 시기에 주인님께서 아가씨를 키엘체로 부르시다니, 이유가 너무도 뻔해서요.”

“넌 어떻게 된 게 키엘체에서 수천 킬로나 떨어져 있으면서, 그곳의 소문을 더 잘 알고 있는지 모르겠구나.”

“그야, 플로라 영애께서 제게 하루가 멀다 하고 서신을 보내오시잖아요. 아가씨께선 거들떠보시지도 않으셨지만 말입니다.”

젬마의 지적에 베로니카가 도톰한 입술을 삐죽였다. 그러곤 머리에 쓰고 있던 망토의 후드를 벗자, 벌꿀색의 아름다운 금발이 드러났다.

젬마는 주인의 아름다운 얼굴을 보며 다시 한 번 감탄했다. 유스타나 제국에서 가장 아름답다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었다. 어린 시절부터 함께 자라온 젬마는 아름다운 자신의 주인이 너무도 자랑스러웠다.

“그럼 레이디 플로라의 편지에 그분에 대한 이야기도 있었어?”

베로니카가 조금 전과는 달리 살짝 얼굴까지 붉히곤 젬마를 보았다. 그 모습에 젬마의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당연히 예쁜 공작님 얘기도 있었습니다. 세상에 그 예쁜 얼굴로 전쟁터에서 적국의 기사들을 수도 없이 죽였다고 합니다. 며칠 전 키엘체의 로체 거리에서 보았는데 여전히 아름답고 서늘한 눈동자를 하고 있다고 쓰여 있었습니다.”

젬마의 설명에 베로니카의 푸른색 눈동자가 그윽해졌다. 이야길 듣는 것만으로 행복한 듯 입가엔 미소까지 떠올랐다.

“키엘체로 돌아가면, 그분을 만날 수 있겠지? 무도회에서 말이야.”

베로니카가 기대감으로 눈을 빛냈다.

“당연히 참석하실 겁니다. 그분은 황태자 전하의 그림자시니까요.”

“그렇겠지?”

입가에 미소까지 띤 채 수줍게 웃고 있는 베로니카를 보며, 젬마는 걱정이 되기 시작했다.

‘주인님께서는 황태자비 자리를 원하시는데, 아가씨께선 전혀 생각이 없으시니. 걱정이야.’

덜컹덜컹, 소리와 함께 마차가 키엘체를 향해 출발했다. 성 캐서린 수도원의 웅장하고 굳건한 성체가 멀어질수록 마차 안의 분위기는 들뜨기 시작했다.

황제의 독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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