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51 화
얼음처럼 차가운 눈빛이었다. 짙은 녹음처럼 고요한 녹색 눈동자엔 그 어떤 감정도 떠올라 있지 않았다. 세이란이 내뿜는 그 지독한 냉기에 헬로이즈는 테란국을 떠나올 때보다 더한 두려움을 느꼈다.
하지만 여기서 물러설 수는 없었다. 헬로이즈는 두려움을 삼키며, 접견실 안을 천천히 둘러보았다. 다행히 접견실엔 황태자 외에도 자신을 마중 나왔던 법무대신인 리치문트 공작과 황실 기사단의 단장인 레녹스 공작도 함께였다.
‘저들 앞에서 내 목을 치지는 않을 테지.’
헬로이즈가 보랏빛 눈동자를 들어 은빛 머리카락에 기사단 복장을 한 레녹스 공작 쪽을 바라보았다.
처음 보았을 때도 그랬지만, 정말 빼어난 미모였다. 그런데 저런 아름다운 얼굴이 남자라니, 의아했다.
“패전국이 보내는 전리품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국왕의 인장이 찍힌 칙서를 가장한 청혼서라…… 그것도 국혼을 청하는 대상자가 직접 날 찾아오다니 번거롭게 거절을 따로 할 필요가 없으니, 기뻐해야 하는 건가?”
국왕의 인장이 찍힌 청혼서라고? 키안이 고갤 들었다. 그러자 세이란이 아니라, 테란국의 공주의 보랏빛 눈동자와 마주쳤다.
그 순간 헬로이즈의 입가에 묘한 미소 같은 게 떠올랐다 사라졌다. 사실 너무 짧은 순간이라, 키안은 자신이 그 미소를 본 것인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헬로이즈가 키안에게서 시선을 돌려 세이란을 보았다.
“폐하께선 정식 혼약이 아니어도 좋다고 하셨습니다.”
정말 어이가 없었다. 자신의 딸을 황제가 아니라, 아직 황태자비도 맞아들이지도 않은 자신의 비로 보낼 생각을 하다니. 그리고 그것에 동의하는 한 공주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렇다는 건, 그 정도로 테란국의 상황이 좋지 않다는 뜻이겠군.’
세이란은 테란국의 공주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자신을 만나겠다며, 국왕의 칙서인 청혼서를 들이밀다니. 무엇보다 키안이 이 사실을 알았다는 게 마음에 들지 않았다.
‘적당히 거절하고, 돌려보냈으면 될 일이었는데.’
헬로이즈 공주의 행동으로 일이 커져 버린 것이다.
“자존심이 없군. 한 나라의 공주가 혼약을 구걸하다니 말이야.”
세이란의 경멸 어린 표정에 헬로이즈의 보랏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당연히 멸시의 눈빛으로 자신을 볼 것이라 생각했었다. 하지만 유스타나 제국의 황태자는 그녀의 예상보다 훨씬 더 인정이라곤 없는 자였다.
소문대로 심장이 강철로 되어 있고, 뜨거워야 할 피 역시 차가운 얼음이란 말이 사실인 모양이었다.
“황태자 전하를 제 편으로 만들기 위해선 자존심 따윈 버려도 좋다고, 제가 아버지께 말씀드렸습니다.”
그렇게 다짐했다. 테란국을 떠나오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유스타나 제국의 황태자의 여인이 되기로.
“난 누구의 편도 될 생각 없다. 더군다나 자신의 욕심을 위해 내 옆자릴 욕심내는 여인의 편은 더더욱 아니지.”
“하지만 제가 전하께 드릴 수 있는 것들을 생각해 보십시오. 어차피 국혼이란 건, 목적을 위한 정략혼입니다. 특히 국가 간의 혼약은 더더욱 얻을 이익을 따지셔야 할 겁니다.”
세이란은 눈을 가늘게 뜨고 테란국의 공주인 헬로이즈를 보았다. 처음엔 첫 번째 공주를 지지하는 세력에 밀려 도망쳐 왔다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당연히 제게서 목숨을 구걸할 것이라고 여겼다. 그런데, 국혼이라니.
세이란은 고갤 들어 에드윈 옆에 서 있는 키안을 보았다. 자신이 테란국의 공주와 얘길 하는 동안 키안은 말없이 두 사람의 대화 내용을 경청하고 있었다.
‘하나도 모르겠군.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하늘빛 눈동자는 물론, 얼굴에 감정 한 조각 내비치지 않고 서 있는 키안을 보며, 초조해지는 건 오히려 세이란이었다.
‘설마, 이 상황을 오해하고 저 맹랑한 공주를 내 옆으로 밀어 넣는 짓은 하지 않겠지?’
그때 테란국의 둘째 공주인 헬로이즈가 세이란의 시선이 닿아 있는 쪽으로 고갤 돌렸다.
‘분명 황실 기사단의 단장일 뿐인데, 왜 저런 눈빛으로 바라보는 거지?’
헬로이즈는 눈을 가늘게 뜨고 두 사람을 바라보았다.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올 것 같지 않은 그가 유독 은빛 머리카락에 하늘빛 눈동자를 한 기사의 안색을 살피는 게 낯설 정도였다.
자신에겐 얼음처럼 차갑던 녹색 눈동자가 수많은 감정을 담고 그윽해져 있었다.
순간 날카로운 녹색 눈동자가 자신을 쏘아보는 게 느껴졌다.
‘윽, 들킨 건가? 내가 두 사람을 눈여겨보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야.’
헬로이즈는 재빨리 하늘빛 눈동자의 기사에게서 눈을 뗐다. 그러자 황태자인 세이란의 입가가 냉소로 비틀리더니, 싸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레녹스 공작에게 관심이 있는 모양이군.”
그의 지적에 헬로이즈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 모습에 세이란이 눈살을 찌푸렸다.
“이상하군. 테란국의 사람들은 다들 레녹스 공작에게 유독 관심을 보이니 말이야. 그 나라에선, 레녹스 공작이 옴므파탈인 모양이군.”
“죄송합니다. 공작님의 외모가 너무 아름다우셔서 저도 모르게 눈을 뗄 수가 없었습니다.”
헬로이즈의 대답에 키안이 고갤 들더니, 침착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렇게 봐주시니 감사합니다, 공주님.”
“아니요, 진심입니다. 제가 본 그 어떤 분보다 아름다우십니다. 레이디라고 착각을 할 정도로 말입니다.”
헬로이즈의 입가에 예의 화사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 미소를 본, 세이란은 눈살을 찌푸렸다.
‘거짓으로 웃고 있군.’
그렇다는 건, 어떤 이유에서인지 모르지만 눈앞에 서 있는 테란국의 공주는 연극을 하고 있다는 뜻이었다.
‘재미있군. 거짓을 숨기고 키엘체에 온 공주라.’
헬로이즈를 향해 세이란이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유스타나 제국의 은빛 늑대를 알아보지 못하다니. 그대는 소문을 듣지 못한 모양이군. 전쟁터에서 테란국의 기사들 사이에선 명성이 자자했는데 말이야.”
명성이 아니라, 악명을 떨쳤다는 말이 맞았다. 1년간 계속된 전쟁을 치르는 동안 은빛 늑대는 테란국의 기사들에게 두려움의 대상이었으니까.
“그랬나요? 저는 전쟁 쪽은 잘 몰라서.”
헬로이즈의 보랏빛 눈동자가 한순간 날카롭게 흔들렸다. 하지만 이내 고갤 숙여서인지, 그녀의 표정을 본 사람은 없었다. 세이란을 제외하곤.
접견실에 침묵이 흘렀다. 세이란의 서늘한 눈빛이 만들어낸 냉기에 키안마저도 숨을 죽였다.
‘전하의 태도가 이상해. 유독 테란국의 공주에게 잔혹하다고 해야 하나?’
키안은 그런 느낌을 받았다.
키안이 세이란의 차가운 시선을 받고 앉아 있는 헬로이즈를 유심히 살폈다.
무겁게 가라앉은 침묵에 숨이 막히는지, 연신 목을 가다듬는 게 보였다. 하지만 헬로이즈에게선 그 외엔 특별한 점을 찾을 수는 없었다.
‘내 착각인 건가? 그저 전하께선 예기치 못한 적국의 청혼에 화가 나신 것뿐인 건가?’
키안이 한숨을 내쉬며, 세이란을 보았다. 여전히 그는 오늘 처음 만나는 헬로이즈 공주를 향해 적의를 드러내고 있었다.
“전하.”
침묵을 견디다 못한 키안이 그를 불렀다. 그러자 팽팽하게 날 선 분위기가 깨어졌다.
“뭐지, 레녹스 공작?”
“공주님께선 오랜 여행으로 지쳤을 겁니다. 우선은 쉬게 하신 후 이 문제는 차후에 논의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그러고 보니 테란국에서 유스타나 제국의 수도인 키엘체까지 오는데 걸리는 시간은 넉넉잡아 한 달이었다.
그런데 보름도 채 되지 않아 키엘체에 도착했다는 건, 분명 잠자는 시간과 먹는 시간까지 아껴가며 말을 달려왔다는 뜻이었다.
어쩔 수 없이 세이란이 접견실 밖에 대기 중이던 시종장 아이크를 불렀다.
“아이크, 테란국에서 온 사신단에게 별궁을 내주도록 해.”
“그렇게 하겠습니다, 황태자 전하. 공주님, 저를 따라오십시오. 제가 별궁까지 모시겠습니다.”
아이크가 헬로이즈에게 고갤 숙였다. 하지만 헬로이즈는 아직 세이란의 대답을 듣지 못한 상태로 별궁으로 가는 게 내키지 않은 모습이었다.
“테란국의 사신단이 키엘체에 도착하려면 아직 일주일이란 시간이 남아 있습니다. 거기다 공식적인 체류 일정 역시 보름이니, 너무 조급해하실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키안의 말에 머뭇거리는 헬로이즈가 고갤 끄덕였다.
“그럼, 휴식을 취한 후 접견을 신청하겠습니다.”
헬로이즈가 세이란에게 허릴 굽혀 예를 표한 후 아이크를 따라 접견실을 나갔다.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긴 여행에 지친 모양이었다.
“헬로이즈 공주님께서 가져오신 게 테란국의 국왕의 청혼서가 맞는 겁니까?”
에드윈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러자 세이란이 손에 들려 있는 양피지를 에드윈에게 건넸다. 직접 확인하고 처리하라는 뜻이었다.
“보기 싫으니, 알아서 처리해 줬으면 좋겠군.”
양피지를 받아 든 에드윈이 흥미롭다는 표정으로 내용을 확인했다.
“일이 재미있게 되었습니다. 전하께서는 이번 사교 시즌 동안 황태자비를 맞으신다고 공표하신 상황인데, 타국의 국왕이 청혼서를 보내다니. 설마 저 테란국의 공주님께서도 황태자비 후보가 되겠다고 나서는 건 아닌지 걱정이군요.”
에드윈의 지적에 세이란은 못마땅한 얼굴을 했다. 그렇지 않아도 키안의 반응이 신경 쓰여 죽겠는데, 한술 더 떠 농담까지 건네다니. 눈치라곤 전혀 없는 자였다.
“전하, 저도 이만 나가보겠습니다. 기사단의 훈련이 아직 남아 있습니다.”
키안이 시간이 너무 지체되었다며, 물러가길 청했다. 세이란은 키안에게 뭔가 말하려다 말고 고갤 끄덕였다. 나중에 따로 얘길 하는 편이 낫겠다는 판단에서였다.
“나가 봐도 좋다. 어차피 테란국에서 보내온 칙서는 일방적인 문서일 뿐이니까. 신경 쓸 필요가 전혀 없다는 뜻이다.”
신경 쓸 것 없다고 말하고 있었지만, 세이란은 키안의 안색을 살폈다.
하지만 키안은 끝까지 아무런 내색도 하지 않은 채 접견실을 나갔다.
“쳇, 표정만으로 속을 알 수 없는 녀석이라니까.”
세이란의 혼잣말에 옆에 서 있던 에드윈이 접견실을 나가는 키안을 보며 말했다.
“테란국의 공주님께 첫눈에 반한 모양입니다. 피곤할 것이라고, 챙기기까지 하다니 말입니다. 사실 레녹스 공작답지 않은 행동이었습니다.”
에드윈의 말에 세이란의 입매가 씰룩였다. 그러곤 눈치 없이 쓸데없는 말을 덧붙이는 에드윈을 향해 불쾌한 듯 말했다.
“리치문트 공작, 뭔가 단단한 착각한 모양이군. 레녹스 공작의 눈은 저렇게 낮지 않다. 적어도 레녹스 공작의 마음을 사로잡으려면, 제국 최고쯤은 되어야 하거든.”
세이란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러곤 멍하니 서 있는 에드윈을 남겨둔 채, 접견실을 나갔다.
**
챙, 채챙!
날카로운 검이 사무엘 스텐호프의 옆구리를 무섭게 파고들었다. 순간 사무엘은 등줄기에 식은땀이 주르륵 흘러내리는 것을 느끼며, 차갑게 식은 하늘빛 눈동자를 응시했다.
“헉- 헉!”
자신의 입에선 연신 거친 숨이 터져 나왔지만, 키안의 호흡은 한 치의 흐트러짐도 없었다. 전에 한번 키안과 검술 대련을 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오늘처럼 날카롭고 공격적이진 않았었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건가?’
라고 생각한 순간, 키안의 검이 다시 사무엘의 팔을 스쳤다. 사락 소리와 함께 팔이 뜨거웠다.
“단장님, 스텐호프의 팔이!”
드레이크의 목소리에 차갑게 얼어붙어 있던 키안의 하늘빛 눈동자가 흔들렸다.
“괜찮나, 스텐호프?”
검을 내려놓으며, 걱정스러운 얼굴로 다가오는 키안을 보며, 사무엘은 심장이 쿵 내려앉았다.
“아, 네.”
키안이 그의 팔을 붙잡았다. 그제야 사무엘은 검을 든 자신의 팔에서 붉은 피가 뚝뚝 떨어지는 걸 보았다. 방심한 사이 살짝 스친 키안의 검에 팔이 베인 모양이었다.
“치료해야겠다. 피가 너무 많이 나고 있어.”
키안은 당혹스럽고 침통한 표정으로 사무엘의 상처를 내려다보았다.
찌이익, 찌직. 키안이 재빨리 자신의 옷을 찢어 상처 바로 윗부분을 묶었다. 지혈하기 위해서인 듯했다.
“아, 제가 잠깐 딴생각을. 죄송합니다.”
“네 잘못이 아니다. 나 역시 딴생각을 하고 있었거든.”
키안의 가라앉은 목소리에 사무엘의 심장이 다시 쿵하고 뛰었다. 이유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자신을 보며 안타까운 듯 입술을 깨문 키안을 보자, 온몸이 뜨거워졌다. 미친 모양이었다.
“이 정도 상처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리고 저 역시 방심한 건 사실입니다. 다음부턴, 절대 정신을 놓는 일은 없을 겁니다.”
사무엘은 재빨리 사고의 이유가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고 말했다. 키안은 그런 사무엘을 보며, 뭔가 더 말하려다, 옆에 서 있는 드레이크를 돌아보았다.
“스텐호프의 상처를 치료해야겠다. 의사를 불러와 주겠나?”
“곧 모셔오겠습니다.”
드레이크가 옆에 서 있는 아레오에게 의사를 데려오라고 명했다. 그러자 아레오가 재빨리 연병장을 빠져나갔다.
“스텐호프, 우선 사무실로 가는 게 좋겠다. 드레이크 경, 남은 훈련을 부탁한다.”
“걱정 마십시오, 단장님.”
키안이 고갤 끄덕여 보인 후, 사무엘 스텐호프와 함께 기사단의 사무실로 걸음을 옮겼다.
“미안하다, 스텐호프. 아무리 대련용 검이었다고 해도 조심했어야 했다.”
키안이 뒤따라 걸어오는 사무엘에게 사과했다. 그러자 사무엘은 평소와 다른 키안의 표정을 보며, 넌지시 물었다.
“무슨 일 있으셨습니까? 단장님께서 훈련 중에 다른 생각을 하셨다는 게 믿기지 않아서요. 혹시 집안에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지…….”
사무엘 스텐호프의 말에 키안은 씁쓸한 표정을 했다.
“별일 아니다. 잠시 생각할 일 좀 있었거든. 훈련하는 동안엔, 집중했어야 하는데. 내 책임이다, 스텐호프.”
키안의 사과에 사무엘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황실 기사단에 들어온 후, 단장님 밑에서 근무할 수 있어서 굉장히 기쁩니다. 기사단에 대한 자부심 또한 갖게 되었고요. 그러니 앞으론 제게 미안하다는 말씀은 하지 말아주십시오.”
키안이 걸음을 멈추곤 사무엘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그러자 검은색 눈동자가 신뢰를 가득 담고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었다.
“고맙다, 스텐호프. 어서 사무실로 가는 게 좋겠다. 피가 계속 나는군.”
“네, 단장님.”
키안이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사무엘 역시 키안의 옆에서 걸었다. 사실 상처는 피가 나는 것에 비해 심하지 않았다. 용병 시절엔 이보다 더한 상처를 입은 적도 많았다.
하지만 키안이 자신을 걱정하는 모습을 보자, 괜스레 심장이 두근거렸다. 싫지 않은 감정이었다.
“뭐지 그 피는? 다친 건가, 레녹스 공작?”
황제의 독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