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47 화
귓가를 울리던, 세이란의 목소리가 마치 들리는 듯했다. 그리고 허벅지 안쪽을 쓸던 그의 뜨거운 혀의 감촉이 생생히 되살아왔다.
“흣-”
참고 있던 억눌린 신음 소리가 키안의 젖은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키안은 입술을 깨물며 열기로 달아오른 달큰한 숨을 꾹꾹 눌러 삼켰다. 파르르 눈꺼풀이 떨리며, 입술을 깨문 잇새로 삼키지 못한 욕망이 새어 나왔다.
첨벙, 첨벙. 목욕통을 가득 채운 물이 흘러넘쳐, 바닥을 적셨다. 한동안 어두운 방 안에, 첨벙첨벙 열기가 담긴 물소리로 가득했다.
**
이른 아침부터 수도 키엘체의 번화가인 로체 거리가 사람들로 북적이기 시작했다.
사교 시즌이 시작되기 전, 유스타나 제국엔 일주일간 대대적인 거시가 열렸다. 대부분의 귀족들은 각국에서 몰려온 상단들이 내놓는 최고급 옷감과 장신구들을 직접 구입해, 솜씨 좋은 하녀들에게 드레스를 만들게 했다.
그래서인지 데뷔를 앞둔 레이디가 있는 귀족가에선 기를 쓰고, 로체거리 일대에서 일주일간 열리는 거시 동안에 가장 좋은 옷감과 장신구를 선점하기 위해 눈에 불을 켰다.
“올해는 더 북적이는 것 같습니다.”
키안은 아레오의 말에 고갤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자신 역시 세이란의 약혼녀 역할을 하려면 드레스가 필요했다.
‘벨라에게 부탁이라도 해야 하는 건가?’
지금까지 드레스가 필요할 때면, 벨라에게 빌려 대충 입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사교 시즌이 시작되면 벨라의 옷을 빌려 입을 수도 없었다.
무엇보다 자신의 키가 벨라보다 한 뼘은 더 커서 드레스 길이가 맞지 않았다.
“들리는 소문엔 로체 거리에 있는 유명 의상실엔 자리가 꽉 차서, 주문을 받지 못하는 모양입니다. 보석 세공사들 역시도 상황은 마찬가지고요.”
“그걸 어떻게 알지?”
키안의 물음에 아레오가 웃으며 대답했다.
“사실 저희 누님께서 이번 사교 시즌에 데뷔하시거든요. 그래서 알게 된 것입니다.”
“그랬군.”
“네. 저희 누님께선 솜씨가 좋으셔서, 드레스에 직접 장미꽃을 수놓으실 것이라고 하셨습니다.”
“솜씨가 좋으신 모양이구나.”
키안의 말에 아레오가 마치 자신이 칭찬이라도 받은 것처럼 얼굴을 붉혔다. 그러곤 잔뜩 기대하는 눈빛으로 다시 입을 열었다.
“올해는 단장님께서도 사교 파티에 참석하시겠죠?”
아레오의 질문에 키안이 고갤 가로저었다.
“나는 금원에 들어간 벌로 사교 파티엔 참석하지 못할 거야.”
아레오가 실망한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았다. 문득 왜지? 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깊이 생각하지 않기로 했다. 사실 키안은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다. 공식적으로 레녹스 공작이 사교 행사에 참석하지 않을 이유가 생긴 것이다.
“저기, 에버콘 공작님 아니십니까?”
키안이 고갤 들자, 로체 거리의 한 건물에서 제임스 에버콘과 데칸 후작이 나오는 게 보였다. 저 건물이 데칸 상단의 건물인 모양이었다.
그때 제임스 에버콘이 키안을 발견하곤 고갤 숙여 인사를 건네왔다.
키안 역시 마지못해 제임스 에버콘에게 예를 갖춘 다음, 옆에 서 있는 아레오에게 말했다.
“물건은 다 샀으니, 돌아가는 게 좋겠다.”
“가셔서 직접 인사는 안 하실 겁니까?”
아레오가 이상하다는 듯 키안을 보며 말했다. 그러자 키안이 제임스의 시선이 아레오에게 닿아 있는 것을 확인하곤 심각한 표정으로 말했다.
“아레오, 만약에 너 혼자 있을 때 에버콘 공작이 너에게 다가오면 무조건 도망쳐.”
“네?”
아레오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얼굴로 키안을 올려다보았다.
“내 말 명심해, 아레오. 뒤도 돌아보지 말고 그 자릴 떠. 알아듣겠어?”
평소와 달리 키안의 표정이 무섭도록 서늘해 아레오가 고갤 끄덕였다. 대체 무슨 일인지 묻고 싶었지만, 아레오는 키안의 차가운 표정에 입을 다물었다.
“명심하겠습니다, 단장님.”
아레오의 대답에 안심한 키안은 말을 달려, 셀서스 궁으로 향했다.
**
“젊은 레녹스 공작이군요. 그런데 공작님께선 저 예쁘장하게 생긴 레녹스 공작과 사이가 좋지 않으신 모양입니다. 지난번 귀족 회의 때도 싸늘한 표정이더니 말입니다.”
앤톤 데칸 후작이 멀어져 가는 키안을 보며 말했다. 그러자 제임스가 미간이 찌푸려지며, 불만스럽다는 듯 말했다.
“내가 갖고 싶은 것은 다, 그가 먼저 가졌거든.”
제임스가 말하는 그가, 황태자인 세이란이란 걸 금방 눈치챘다. 그러고 보니 제임스 에버콘 공작은 자신의 아버지처럼 황족에 대한 열등감이 있는 모양이었다.
‘쳇, 피는 못 속이는 모양이군.’
자신의 아버지 역시 현 황제인 윈슬러에게 묘한 경쟁의식이 있었다.
“그럼 빼앗아 오면 되는 것 아닙니까?”
앤톤 데칸의 말에 제임스가 뭘 모른다는 듯 그를 보았다.
“저들은 떼어놓을 순 없어. 로열 아카데미 시절부터 딱 들러붙어, 떨어진 적이 없었거든.”
“사내들의 믿음을 깨뜨리는 것엔 여인만 한 것이 없습니다.”
“그게 무슨 말이지?”
“배신 말입니다. 여인을 이용해 서로에 대한 신뢰를 깨뜨리게 만드는 거죠.”
앤톤 데칸의 말에 제임스의 입가가 냉소로 비틀렸다.
“그게 가능할지 모르겠군. 두 사람 다 여자엔 관심이 없는 것 같거든.”
“혹시 두 사람의 취향이 그쪽인 겁니까?”
앤톤 데칸이 놀란 표정으로 제임스를 보았다.
“아니, 전혀. 만약 그쪽이라면 내가 몰랐을 리 없지.”
제임스의 말에 앤톤 데칸이 미간을 찌푸렸다. 제임스의 표정엔 안타까움 마저 떠올라 있었다.
‘설마, 젊은 에버콘 공작이 그쪽 취향이었던 건가?’
앤톤 데칸은 어이가 없었다. 여자를 상대로 세우지도 못하는 물건을 가지고, 신붓감을 뽑겠다고 하다니.
그러고 보니, 전대 에버콘 공작 역시 성불구라는 소문이 있었다. 혹시 그자 역시 같은 취향 갖고 있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건 샤론 에버콘에게 직접 확인해 봐야겠군. 그렇지 않아도 내 침대에서 날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앤톤 데칸의 입가가 나른하게 비틀렸다. 만약 그게 사실이라면, 굉장히 기쁠 것 같았다.
“데칸 후작, 다음 모임은 일주일 후라고 했던가?”
“그렇습니다. 그때쯤이면 테란국에 갔던 상인들이 돌아올 겁니다.”
한마디로 데칸 상단의 정보원들이 키엘체로 다 모인다는 의미였다.
“그럼, 그때 보도록 하지.”
제임스가 자릴 뜨자, 앤톤 데칸은 옆에 있던 샘에게 명령했다.
“거시가 열리는 동안 루시타니아 상단보다 좋은 자릴 차지해야 할 것이다.”
“걱정 마십시오, 후작님. 이번 거시에서 가장 많은 물건을 파는 상단은 바로, 저희 데칸 상단이 될 테니까요.”
샘이 최고급 옷감을 가리키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앤톤 데칸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고갤 끄덕여 보였다.
“나는 약속이 있어 가봐야겠다. 문제가 생기면, 후작가로 전갈을 보내도록 해.”
앤톤 데칸은 말에 오르며, 회중시계의 시간을 확인했다.
“제길, 늦었군.”
**
“단장님, 이제 오십니까? 사무실로 가보십시오. 전하께서 벌써부터 기다리고 계십니다.”
셀서스 궁의 기사단 건물 안으로 들어가자, 드레이크가 재빨리 다가왔다.
“전하께서?”
“네.”
키안은 평소와 달리 긴장이 됐다. 어젯밤 그가 블랙이란 사실을 알아서인지, 손끝이 미묘하게 떨렸다.
“괜찮으십니까?”
키안이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지 않고, 머뭇거리며 서 있는 모습이 드레이크에겐 이상하게 비친 모양이었다.
“잠시 생각할 게 있어서. 아참, 리치문트 공작님께선 오셨고?”
“연병장에서 기초 체력 훈련 중이십니다.”
정말 의외였다. 요 며칠 동안 하루도 빠짐없이 새벽 훈련에 참석하다니. 분명 익숙하지 않아 밤마다 근육통에 몸살을 할 텐데도, 다음 날 새벽이 되면 에드윈은 기사단의 연병장에 어김없이 나타났다.
“잘 버티시는 모양이군.”
“약골인 줄 알았는데, 의외로 근육이 있었습니다. 책을 들어 올리는 게 운동이 되었던 모양입니다.”
드레이크의 말에 키안이 픽하고 웃었다. 에드윈이 두꺼운 책을 들어 올리며 근육을 키우는 모습이 상상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때 사무실의 문이 열리고 세이란이 밖으로 나왔다. 키안의 목소리가 들리자, 기다리지 못하고 나온 모양이었다.
“전하.”
키안이 고갤 숙이자, 세이란이 인사를 받는 둥 마는 둥 하며 다시 사무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키안 역시 세이란을 따라 사무실 안으로 들어갔다.
“차를 내오라고 할까요?”
“필요 없다. 드레이크 말론 로베르트의 대장간에 가서 단검을 주문했다고 하던데. 단검이라면, 황실 대장간을 이용하는 게 편할 텐데?”
“현재 황실 대장간에선 검과 창을 만드는 중이었습니다. 지난 1년간 전쟁터에서 소비된 무기와 갑옷을 비축하는 모양입니다.”
키안의 말에 세이란이 고갤 끄덕였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대장간에서 갑옷과 검을 만들 철이 필요하다는 보고를 받았었다.
“그랬군. 갔던 일은 잘됐고?”
“다행히 곧바로 작업을 할 수 있다고 했습니다. 그런데 무슨 일로?”
“로이스톤 자작가에서 그렇게 쌩한 얼굴로 가버렸는데, 당연한 것 아냐? 대체 왜 그랬던 거지?”
“네?”
“네가 그렇게 화를 내는 건 처음이라 놀랐다.”
“아, 그날은 죄송했습니다, 전하.”
키안이 재빨리 자신의 행동을 사과했다. 그러자 세이란이 눈을 가늘게 뜨곤 키안의 안색을 살폈다. 찬바람을 일으키던 때와는 달리, 지금은 한결 부드러워진 표정이었다.
“정말 괜찮은 거냐?”
“사람들이 많은 곳이라, 제가 예민해졌던 모양입니다. 다른 귀족들의 눈에라도 띄면, 추문에 휩싸이는 건 전하시니까요.”
“넌 상관없다는 말처럼 들리는군.”
세이란의 지적에 키안이 고갤 들었다.
“저에겐 바닥에 떨어질 평판 같은 건 없으니까요.”
키안의 말에 세이란이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고 보니 며칠 전 로이스톤 자작의 생일 파티에 참석했을 때, 몇몇 귀부인들이 키안의 등에 있는 흉터에 대해 입방을 찧었던 게 생각이 났다.
마음 같아선, 그 입을 찢어놓고 싶었지만, 키안이 신경을 쓸 것 같아 애써 모르는 척했었다. 아마 그 얘길 하는 모양이었다.
“키안, 남의 이목 같은 건 신경 쓸 필요 없다.”
“신경 쓰지 않은 지 꽤 되었습니다.”
“대답만 잘하는군. 네 표정은 신경이 쓰여 죽겠다는 얼굴이면서. 말만 해. 내가 그 입을 찢어버릴 수도 있으니까.”
세이란이 마땅찮은 듯 키안을 쏘아보았다.
“그게 아니라…….”
“내 앞에서까지 거짓말을 할 필요 없다, 키안. 그건, 네 잘못이 아니니까.”
그는 참 이상했다. 아니, 오랜 시간 함께 지내왔기 때문이지 자신의 감정을 너무 쉽게 읽어냈다. 지금도 자신이 듣고 싶어 하는 답을 너무도 쉽게 해주었다. 그래서 기뻤고, 또한 심장이 아렸다.
“감사합니다, 전하.”
세이란이 한숨을 내쉬며 키안에게 한 발짝 다가섰다. 그러곤 손을 뻗어 어깨를 토닥였다.
서툴기 짝이 없는 그의 위로에 키안의 마음이 온기로 따뜻해졌다. 세이란이 어색한지 키안의 어깨에서 손을 떼곤, 화제를 돌렸다.
“로베르트 대장간에 갔으면, 로체 거리도 지나왔겠군.”
“그렇지 않아도 각국의 상단들이 거리에 좌판을 열고 있는 걸 보았습니다.”
“그럴 줄 알았지. 사실 아침 일찍부터 온 이유는 오늘 약속 때문이다.”
“약속이라니……?”
“설마 잊은 거냐? 내가 오늘 저녁 시간을 비워두라고 했던 것 같은데?”
세이란의 말에 키안이 그제야 황제궁에서 했던 말을 떠올렸다.
“그럼, 시장 구경을 가자고 시간을 비워두라고 하신 겁니까?”
“맞아. 너도 한 번도 가본 적 없을 것 아냐.”
세이란이 기대가 된다는 표정으로 말했다. 그러고 보니, 전하께서 사람들이 북적이는 곳을 좋아하셨던가?
키안의 생각을 읽은 듯 세이란이 입을 열었다.
“좋아하지 않았다. 하지만 너랑은 한 번 가보는 것도 좋을 것 같아서. 베레나 거리에서처럼 말이다.”
세이란의 말에 키안은 바레나 거리에서 편안한 얼굴로 제국민들과 어울리던 그를 떠올랐다. 굉장히 좋아 보였었다.
“함께 갈 거지?”
“화이트가 23번지, 10시입니다. 거기서 기다리겠습니다.”
황제의 독사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