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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의 독사과-46화 (46/139)

제 46 화

“단장님, 법무대신이신 리치문트 공작님께서 와계시는데, 가봐야 하지 않을까요?”

벌써, 30분 넘게 연병장의 입구에 서서 기사단이 훈련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는 에드윈을 보며, 키안이 미간을 찌푸렸다.

훈련하는 기사들 역시 에드윈의 방문에 조금씩 술렁거리기 시작했다.

“드레이크 경, 가서 공작님께 검술을 가르쳐 드린다고 해주겠어?”

“제가 말입니까?”

“사실 아침에 리치문트 공작님께서 오셔서, 너에게 검술 훈련을 받고 싶다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내가 바쁘다는 핑계로 거절했거든. 하지만 포기가 되지 않으시는 모양이야. 그러니 네가 직접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아서. 가르쳐 볼 생각이 있다면, 시간을 빼줄 생각이다. 하지만 거절해도 상관은 없다. 어차피 리치문트 공작님을 가르치는 건, 기사단의 일과는 전혀 관련이 없으니까.”

키안의 말에 드레이크가 흥미로운 듯 에드윈 쪽을 보았다.

“책만 읽으실 것 같은 분이 저에게 검술을 배울 생각을 하셨다니, 흥미가 생기는군요. 제가 한번 가르쳐 보고 싶습니다.”

“힘들 거야. 체력도 없고, 굉장히 까다로운 성격이거든.”

“괜찮습니다. 저 역시 만만찮은 성격이라. 제가 빡세게 가르쳐 보겠습니다.”

드레이크가 의욕이 생긴 듯 눈을 빛내자, 키안이 픽하고 웃었다.

“곧 도망칠지도 모르겠군.”

드레이크 역시 키안의 생각에 동의하듯 마주 웃어 보였다. 그러곤 연병장의 입구에 서 있는 에드윈을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잠시 대화를 나누던 두 사람은 합의점을 찾은 듯 고갤 끄덕였고, 이내 에드윈이 연병장을 떠났다.

키안은 에드윈의 뒷모습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사실 자신이 고민할 필요는 없었다. 어차피 에드윈과 벨라의 일이었으니까. 하지만 키안은 벨라가 상처받는 걸 원치 않았다. 개인적으로 에드윈 리치문트 공작을 좋아했지만, 벨라의 연인으론 아니었다.

“근성이 있으면, 버티겠지. 아니면, 빨리 포기하는 게 좋을 테고. 그것이 검술이든…….”

벨라에 대한 호기심이든. 서둘러 정리가 되길 바랐다.

“단장님.”

“무슨 일이지, 스텐호프?”

자신을 부르는 사무엘의 목소리에 키안이 고갤 들었다. 그러자 훈련을 마친 사무엘에 키안 앞에 서 있었다.

“내일 저녁에 블랙의 경기가 있다고 해서 알려 드리러 왔습니다.”

블랙이란 말에 키안의 입가가 굳어졌다. 하지만 다행히 사무엘은 키안의 변화를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한 달에 한 번 경매가 있다고 하지 않았었나?”

“그랬습니다. 하지만 이번엔 급히 시합이 잡힌 모양입니다. 아마, 황태자 전하께서 검술 시합을 연다는 소문이 돌면서 귀족들 사이에서 먼저 실력 있는 기사들을 빼내갈 생각으로 경매를 연 모양입니다.”

“그런 움직임이 있다는 말이지?”

“사실 제 형님이신 스텐호프 백작께서도 용병에 관심이 많으십니다. 최근 들어 헤링턴 백작님과 사이가 좋거든요.”

헤링턴 백작이라고? 그자라면 분명 귀족 회의에서 렌스터 공작의 곁에 있던 인물이었다.

‘그렇다는 건, 렌스터 공작가 역시 사병을 늘리는 것에 관심이 있다는 뜻인 건가?’

키안이 고갤 들자, 사무엘이 어떻게 할지 대답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번엔 참석하지 못할 것 같다. 알려줘서 고맙다, 스텐호프.”

사무엘이 아쉬운 표정이었다. 지난번처럼 자신과 함께 가고 싶었던 모양이다. 사무엘이 자리로 돌아가자, 키안이 낮게 읊조렸다.

“내일 저녁이란 말이지?”

용병 경매가 이뤄지는 건물 앞에 선 키안은 잠시 망설였다. 자신은 블랙을 만나러 온 것이 아니라, 용병 경매에 참석한 귀족들의 얼굴을 확인하기 위해서라고 되뇌고 또 되뇌는 중이었다.

‘긴장할 것 없어. 그와 마주쳐도 블랙은 내가 오두막에서 만났던 여인이란 걸 모를 테니까.’

당연했다. 키안 레녹스 공작이 여인이란 사실은 지금까지 철저하게 지켜져 온 비밀이었으니까. 그가 알 리 없었다. 키안은 귀족들의 눈에 띄지 않기 위해 서둘러 몸을 숨기며,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사무엘을 비롯해 다른 귀족들의 눈에 띈다면, 좋을 게 없다는 판단에서였다.

건물 안으로 들어간 키안은 주위를 살폈다. 다행히 시합이 시작된 후라 복도엔 아무도 없었다.

키안은 시합장 안으로 들어가는 대신 천천히 좁은 복도를 따라 움직였다.

“분명, 비밀 장소 같은 게 있을 거야.”

용병 경매가 이뤄지는 곳이니 당연히 은밀하게 시합을 지켜보는 비밀 장소가 있을 터였다. 그러다 키안은 블랙이란 자를 만났던 장소를 떠올렸다. 좁은 미로처럼 얽혀 있던 그곳은 분명 몇몇 사람들만 알고 있는 비밀 공간이 틀림없었다.

“괜찮을까?”

키안은 블랙이란 자를 다시 만나지나 않을까 걱정이 됐다. 레녹스 공작의 모습이든, 아니면 여인의 모습이든 간에 그를 다시 만나고 싶지 않았다.

그러고 보니, 블랙이란 자는 지금 시합을 치르고 있는지도 몰랐다. 그런 것이라면, 이렇게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아니, 그가 돌아오기 전에 서둘러야 했다.

“이쪽이었어.”

키안은 기억을 더듬어 블랙이란 자를 만났던 쪽으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통로를 따라 계속 안쪽으로 걸어가던, 키안 앞에 문이 하나 보였다.

“여기였던 건가?”

키안은 심호흡을 한 후 서서히 문손잡이를 돌렸다. 다행히 방 안에 아무도 없었다.

“휴우-”

키안은 숨을 고르며,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서둘러 유리창이 있는 쪽으로 걸어가자, 키안의 예상대로 용병들이 시합하는 시합장이 그대로 보였다.

“여기가 비밀 장소였어.”

키안은 천천히 시합장 안을 살폈다. 귀족들이 원형의 경기장 안에서 시합하고 있는 용병들을 지켜보고 있는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헤링턴 백작이야. 오늘은 스텐호프 백작과 함께 왔군.”

키안은 눈에 익은 귀족들의 얼굴을 살폈다. 예상외로 용병 경매에 참석한 귀족들은 꽤 있었다. 이 비밀 공간 외에도 다른 장소에서 시합을 지켜보는 귀족들이 있을 것 같았다.

그때 안쪽에서 인기척 소리가 들렸다. 긴장한 키안이 숨을 죽이며, 인기척이 나는 쪽으로 움직였다.

‘뭐지? 벽이 열려 있어.’

키안은 그곳 역시 비밀 장소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발소리를 죽이며 열린 벽 쪽으로 걸어갔다. 그러곤 조심스럽게 벽 안쪽의 상황을 확인했다.

쏴아, 쏴아!

물소리였다. 두꺼운 벽으로 인해 자세히 들리지 않았지만, 물소리가 분명했다. 아마 이곳은 시합을 끝낸 용병들이 땀으로 범벅된 몸을 씻는 공간인 모양이었다.

‘나가는 게 좋겠어.’

키안이 방을 빠져나가기 위해 걸음을 옮기려는 순간, 안쪽에서 씻고 있던 사내의 실루엣이 슬쩍 보였다.

‘잠깐 저분은…….’

그때, 툭 하고 바닥에 뭔가가 떨어졌다. 검은색 옷이었다. 키안은 자신도 모르게 주먹을 꼭 쥐었다. 본능적으로 입안에 바짝 마르는 느낌에 혀로 입술을 축였다.

그였다, 블랙.

키안은 놀라 숨을 죽였다.

‘제길, 하필 그라니.’

그가 눈치채기 전에 얼른 방을 나가야 했다. 하지만 이상하게 발이 묶인 채 꼼짝도 할 수 없었다.

그때 툭 하고, 검은색 천이 떨어졌다. 키안은 그것이 블랙의 얼굴을 감추고 있던 검은색의 가죽가면이란 사실을 알았다.

본능적으로 키안의 시선이 좁은 틈으로 향했다. 그러곤 땀으로 젖은 금발과 날카로운 사내의 옆모습을 홀린 듯 바라보았다.

“흡-”

맙소사! 놀란 키안이 두 손으로 입을 막았다. 다행히 씻을 준비를 하고 있던 블랙은 키안의 소리를 듣지 못한 모양이었다. 이내 블랙의 모습이 사라지더니, 물소리가 크게 들리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어. 블랙이…….’

하지만 눈동자 색이 다른 건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하는 거지?

그러다 문득, 황족인 구스타프 가문의 적장자에겐 알려지지 않는 힘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맙소사. 세이란 님께선 자신이 용병 블랙이란 걸 숨기기 위해 눈동자 색을 바꾼 것이었어.’

키안은 몸이 너무 떨려, 걸음을 옮길 수도 없었다. 하지만 나가야 했다. 블랙이, 아니, 세이란 님이 방을 나와 멍하니 서 있는 자신을 보기 전에 몸을 숨겨야 했다.

키안은 들어왔을 때처럼, 인기척을 숨긴 채 서둘러 방을 빠져나갔다.

잠시 후, 목욕을 끝낸 세이란이 욕실을 나왔다. 그러곤 바닥에 떨어뜨린 가면과 옷가지를 집어 들곤, 열린 벽을 날카로운 눈빛으로 바라보았다.

이내, 세이란의 입가에 의미심장한 미소가 떠올랐다.

“확실히 보고 간 것이겠지?”

세이란은 마른 수건으로 젖은 머리며, 몸을 닦기 시작했다.

‘내가 여자 때문에 이런 짓까지 하다니.’

스스로도 믿을 수 없었다. 하지만 세이란은 만약 같은 상황이 온다 해도, 똑같은 선택을 하리란 걸 알았다.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키안이 자신에게서 도망치지 못하게 묶어둘 방법이 필요했다.

‘그것이 지금은 몸이라, 아쉽군.’

사실 그는 키안에게 조만간 자신이 용병 블랙이란 사실을 말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키안이 먼저, 사무엘 스텐호프와 이곳에 방문하는 바람에 그의 계획을 조금 수정한 것이었다.

“쳇, 스텐호프가 도움이 될 줄은 몰랐군.”

사실 키안이 오지 않으면 어쩌나 걱정은 했었다. 그래서 세이란은 일부러 황태자가 검술 시합을 개최한다는 것 때문에 귀족들이 자신들의 용병을 최대한 많이 모으려고 한다는 소문까지 슬쩍 흘려보냈다.

충성심이 강한 키안이라면, 귀족들의 움직임을 알아내기 위해 다시 이곳을 찾을 게 분명하다는 판단에서였다.

“이제 죄책감 같은 건, 버렸으면 좋겠는데 말이야.”

**

손의 떨림이 멈추지 않았다. 용병 경매가 행해지는 건물을 나온 키안은 서둘러 저택으로 돌아왔다. 코트를 벗고, 방으로 돌아온 키안은 잠을 청해야 했다.

하지만 생각이 자꾸만 세이란에게 향해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말도 안 돼. 세이란 님이 블랙이란 자였다니.”

대체 어떻게 된 거지? 혹시 블랙이란 신분 역시 7년 동안 자신이 모르던 세이란의 모습 중 하나인 건가?

키안은 7년 동안 자신과 떨어져 있던 방학 동안 세이란이 뭘 하고 다녔는지 진심으로 궁금해졌다.

“하지만 다행이야.”

세이란이 용병이란 신분으로 경매에 참가한 블랙이란 자란 사실이 놀라웠지만, 그것보다 키안은 다른 의미에서 안도하고 있었다.

키안을 괴롭히던, 마음의 무게가 사라졌다. 하지만 또 하나의 의문이 생겼다.

“블랙인 건 알겠는데, 왜 록시의 푸른 방에 있었던 거지?”

세이란의 성격상, 여인들의 펫이 되는 건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그가 여인을 원한다면, 이런 방식이 아니더라도 취할 방법은 아주 많았으니까. 무엇보다 세이란이 딱히 여인을 원하는 기색을 느낀 적이 없었다.

‘내가 지금껏, 세이란 님에 대해 잘못 알고 있었던 걸까?’

키안이 침대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러곤 침대에 누워, 이불을 얼굴까지 끌어당겼다.

미친 게 분명했다. 하지만 심장이 뛰고 있었다. 블랙이 세이란이란 걸 안 순간부터 키안의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있었다.

아랫배가 아릿한 열기로 욱신거렸다. 세이란이 다리 안쪽에 남겨놓은 붉은 흔적을 떠올리자, 발끝까지 나른한 열기가 확 퍼졌다.

목욕하다 허벅지 안쪽에 새겨진 붉은 흔적을 보았을 때,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하지만 그 붉은 흔적이 세이란이 만든 것이란 생각이 들자, 온몸이 순식간에 나른한 열기로 가득 찼다.

“하아-”

더운 숨소리가 입술 새로 흘러나왔다. 다리 안쪽이 욱신욱신 아렸다. 수풀에 숨겨져 있는 밀부의 여린 살이 물기로 젖어들고 있었다.

키안은 본능적으로 허벅지를 비틀어 나른한 열기를 참아냈다. 당장에라도 손을 뻗어, 그곳을 어루만지고 싶었다. 갑자기 시작된 갈증에 몸을 떨었다.

신음이 새어 나오지 않도록 입술을 깨물고 있던 키안이 결국, 이불을 걷고 일어났다. 그러곤 서둘러 욕실로 향했다. 다행히 집사인 가브리엘에 목욕할 물을 받아둔 모양이었다.

“미친 게 분명해.”

그것도 아니라면, 자신의 몸이 음란한 것인지도 몰랐다. 키안은 옷을 벗고는 식어서 미지근해진 목욕통 안으로 들어갔다. 물속에 몸을 담그고 있었지만, 열기로 달아오른 몸을 식히기엔 역부족이었다.

키안은 눈을 질끈 감고는 몸속에 이는 열기가 지나가길 기다렸다. 세이란이 그랬던 것처럼, 자신의 손가락을 그곳에 밀어 넣고 욕심껏 허릴 비틀고 싶었다. 하지만 키안은 가까스로 충동을 참아냈다.

첨벙, 첨벙.

하지만 야릇하게 허리가 비틀며, 허벅지에 힘이 들어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열기를 참기 위해 몸을 움직일 때마다, 목욕통 안의 물이 찰싹찰싹 키안의 맨살을 간질였다.

"이 흔적이 사라지기 전, 다시 널 안을 것이다."

황제의 독사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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